↑묵계서원(默溪書院)
↑만휴정(晩休亭)
■ 묵계서원(默溪書院)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705. 735-1
◇문화재지정일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9호
이 서원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년(세종 13)~1517년(중종12)」과 응계(凝溪) 옥고「玉沽, 1382(우왕 8)~1436(세종 18)」를 봉향하는 서원으로, 1687년(숙종 13)에 창건되었다.
김계행(金係行)의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김득우(金得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혁(金革)이고, 아버지는 비안현감(比安縣監) 김삼근(金三近)이며, 어머니는 김전(金腆)의 딸이다.
1447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익혔다. 그 뒤 성주·충주의 향학교수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어 직언을 잘하였다.
이어서 고령현감(高靈縣監)이 되어 선정을 펴고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부수찬이 되었으며, 그 뒤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1498년(연산군 4) 대사간에 올라 권간(權奸)을 극론하였으나 훈구파에 의해 제지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풍산사제(豊山笥堤) 위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하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니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 불리었다. 김종직 등과 교유한 것으로 말미암아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큰 화는 면하였다.
1706년(숙종 32) 지방유생들이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에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묵계서원(默溪書院)은 1869년(고종 6)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후에 강당과 문루인 읍 청루와 진 덕문, 동재(東齋) 건물 등을 복원하였다.
서원 옆에는 후대에 세운 김계행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6칸을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방을 들 인 중당협실 형(中堂夾室型)이다. 서원 왼쪽에는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자형 주사(廚舍)가 있다.
서원 중 다른 건물은 모두 후대에 복원한 것이나 주사는 서원이 훼철될 때 헐리지 않고 남은 것이다. 고건물답게 부재를 다룬 수법에 격조가 있어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종택은 서원에서 멀지 않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정침과 사랑채인 보백당,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ㅁ자형의 팔작지붕 집으로, 보존 상태가 좋다. 보백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우물마루를 깐 4칸 대청과 2칸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이며, 대청의 왼쪽 측면과 뒷벽에는 판벽에 문얼굴을 내어 미세기 창을 달았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집으로, 앞쪽에는 삼문이 있고 낮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묵계 새마을교를 건너 하리 골짜기 길을 따라 500m쯤 가면 김계행이 만년을 보내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 만휴정이 있다. 김주현(金胄顯)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6,000평과 대지 1,000평, 임야 5정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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