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궁,정려,서원

명재 윤증 고택(明齋尹拯古宅)

야촌(1) 2009. 4. 6. 13:06

■ 논산 명재 윤증선생고택(論山 明齋 尹拯先生 古宅)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90호

[명   칭] 윤증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
[분   류] 유적건조물/가옥
[수량 및 면적] 2동
[지정일] 1984년 12월 24일
[소재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윤완식
[연락처] 041~735!1215

 
윤증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은 조선조 숙종때의 학자인 윤증(1629∼1714)이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후대에 수리가 있었겠지만, 그 세부 기법은 19세기 중엽의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노성산성이 있는 이 산의 산자락에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사랑채가 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형의 중문간 채가 자리 잡고 있다.
중문간 채는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어서, 중문간 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뒤쪽 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 구조를 보이고 있다. 모든 건축부재의 마감이 치밀하면서 구조가 간결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조선의 양반 주택으로 중요하다.

 


  

 

 

 

 

 ↑안 채 

 

 

 

 

 

 ↑사랑채 

 

 

 

 

 

 

●명재(明齋) 윤증(尹拯)
 
[생년] 1629(인조 7)
[졸년] 1714(숙종 40)
[경력] 조선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파평(坡平)
[호(號)] 명재(明齋) ·유봉(酉峯)
[관직] 대사헌. 우의정.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 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일체 나가지 않았다.
[시호(諡號)] 문성(文成)
[주요저서] 《명재유고(明齋遺稿)》

 

 

↑명재(明齋) 윤증(尹拯) 화상(畵像)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유봉(酉峯). 시호 문성(文成). 조부는 팔송 황(煌)이고, 우계 성혼
(成渾)의 사위였다. 아버지 미촌 윤선거(尹宣擧)는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일찍이 송시열(宋時烈) ·윤휴(尹) ·이유태(李惟泰)등 당대의 명유들과 함께 교유하였다.
 
그는 부사(父師)를 시작으로 유계(兪棨)와 송준길(宋浚吉), 송시열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는 당대의 정통유학을 수학하면서 박세당(朴世堂) ·박세채 ·민이승(閔以升)등과 교유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특히 송시열의 문하에서는 많은 문인들 중 유독 뛰어나 고제(高弟)로 지목되었고, 서인계 정통으로서는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체득하였다.
 
비록 등과(登科)는 하지 않았지만,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발탁을 시작으로 공조좌랑 ·세자시강원진강(世子侍講院進講). 1682년(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로 피력하였고, 또는 정치당국자나 학인과의 왕복서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러한 그의 정치적 성행이 노소분당과 그를 이은 당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전횡을 견제하였다.
 
그의 사상적 배경은 16세기 이래로 변화해온 조선사회 이해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송시열과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것은 밖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숭명의리(송시열)와 대청실리외교문제(윤증)의 대립이었고, 양난 이후의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역사적 명제를 제기시켰다.
 
그는 많은 문제(門弟) 중에서도 특히 정제두(鄭齊斗)와 각별한 관계를 가졌다. 두 사람 사이의 학문 사상적 교류는《명재유고(明齋遺稿)》와 《하곡집(霞谷集)》의 왕복서한에서 실증되고 있다. 그것은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 만으로는 변모하는 정국을 바로잡을 정치철학으로 미흡하다는 것이었고, 왕학적(王學的) 학문과 실학적(實學的) 경륜을 담은 정치철학이 내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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