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궁,정려,서원

정업원(淨業院)

야촌(1) 2009. 9. 1. 18:36

■ 前代 임금 후궁들의 처소「정업원(淨業院)」

 

왕조시대의 후궁들은, 모시던 임금이 죽으면 정업원(淨業院)에 거처했다. 

정업원은 고려 때부터 있었는데 언제 개경에서 서울로 옮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 태종 8년, 공민왕의 후궁이었던 이제현(李齊賢)의 딸 혜화궁주(惠和宮主)가 비구니로서 정업원에 거주하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정업원은 왕실불교의 한 상징이라는 이유로 여러 차례 유학자들로부터 혁파 대상이 되었다.
정업원은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궁성 동북쪽에 있었는데, 세종 때, 혁파되었다가 불신자였던 세조에 의해 복립되었으며, 연산군 때 다시 혁파되었다가 명종 때 후궁들의 별처로 삼는다는 명목으로 다시 복립되었다.

선조는 여러 차례의 혁파 건의를 거부하고 존속시켰는데,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특별 상궁 김개시(金介屎)가 인조 반정 소식을 듣고 민가에 숨었다가 살해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정업원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내명부 품계

 

[內命婦 品階)와 명칭(名稱)]


후궁(後宮) -정1품-----嬪(빈)
                      종1품-----貴人(귀인)
                      정2품-----昭儀(소의)
                      종2품-----淑儀(숙의)
                      정3품-----昭容(소용)
                      종3품-----淑容(숙용)
                      정4품-----昭媛(소원)
                     종4품-----淑媛(숙원)

 


궁녀(宮女)- 정5품-----尙宮(상궁), 尙儀(상의)
                      종5품-----尙服(상복), 尙食(상식)
                      정6품-----尙寢(상침), 尙功(상공)
                      종6품-----尙正(상정), 尙記(상기)
                      정7품-----典賓(전빈), 典衣(전의), 典膳(전선)
                      종7품-----典設(전설), 典製(전제), 典言(전언)
                      정8품-----典贊(전찬), 典飾(전식), 典藥(전약)
                      종8품-----典燈(전등), 典彩(전채), 典正(전정)
                      정9품-----奏宮(주궁), 奏商(주상), 奏角(주각)
                     종9품-----奏變徵(주변치), 奏徵(주치), 奏羽(주우), 奏變宮(주변궁)

 

궁주(宮主)

조선 초기,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에게 내리는 봉작(封爵)을 이르던 말. 

비빈(妃嬪)이나 왕녀(王女)에 한하여 주었으며,왕녀의 봉작은 공주(公主)와 옹주(翁主)로 구분하였다.

 

<경국대전> 권1 吏典에 따름

 

 

▲정업원터 비각

 

 

 

 

 

▲정업원터 비

 

정업원 구기(淨業院 舊基)


숭인동 산3번지에 있는 청룡사 정문 바로 옆에 있는 정업원구기는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는데 정업원 구기라는 글씨는 영조의 친필이다. 숙종24년(1698)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도 함께 복위되고 능호(陵號)도 사릉(思陵)이라고 추봉(追封)하였다.


영조47년(1771)에 단종비 송씨가 살아있을 때 동망봉 아래 집을 짓고 살았으며 정업원주지로 있었다는 사실이 서로 뒤엉켜 동망봉 아래가 정업원으로 와전된 것을 영조가 그대로 믿고 단종비를 추모하는 뜻에서 ‘단종비 송씨소어지구기(端宗妃宋氏所御之舊基)’라 써야 할 비명(碑銘)을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로 잘못 썼던 것이다.


영조의 친필로 쓰여진 이 비(碑)의 앞면은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뒷면은 황조정덕십년신사육월초사일 후이백오십일년신묘9월 초육일입 전후개친서(皇朝正德十年辛巳六月初四日 後二百五十一年辛卯九月初六日立 前後皆親書)의 33자가 새겨져있다.

 

이 비(碑)의 받침과 덮개는 화강암이며 비신(碑身)은 오석(烏石)이다.

비신(碑身)의 높이는 124cm이고 폭은 56cm이며 두께는 29cm인데 방형대석(方形臺石)과 옥개형(屋蓋形) 개석(蓋石)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또 정면과 측면이 모두 1칸 무익공(無翼工)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비각(碑閣)을 세워 비(碑)를 보호하게 하였으며 전봉후암어천만년세신묘구월육일


일흠제서(前峯後巖於千萬年歲辛卯九月六日欽涕書)를 새긴 현판을 비각 정면에 달았다.

맨 끝의 글인 흠제서(欽涕書)는 영조가 눈물을 머금고 친히 글씨를 썼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