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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촉석루기(晋州矗石樓記)

야촌(1) 2009. 7. 22. 20:31

■ 진주 촉석루기(晋州矗石樓記) 

 

누관(樓觀)을 경영하는 것은 정치하는 자의 여사(餘事)이긴 하나 그 흥하고 폐하는 것으로써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를 짐작할 수 있다. 세도는 오르내림이 있는 까닭에 인심의 슬픔과 즐거움이 한결같지 아니하고, 누관이 흥하고 폐하는 것도 그에 따르게 된다.

 

그렇다면 누관 하나가 폐하고 흥하는 것으로써 한 고을의 인심을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인심으로써 한때의 세도를 알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여사로만 돌리고 작게 여길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오래되었는데, 지금 우리 고을 촉석루를 보고 더욱 믿어진다. 

 

누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석벽 위에 있는데, 나는 옛날 소년 시절에 여러 번 올라가 보았다. 누의 규모는 우람하고 넓어 내려다보면 까마득하고, 그 밑으로는 긴 강이 흐르며 여러 봉우리는 밖으로 벌여서 있다. 여염의 상마(桑麻)와 누대의 화목(花木)이 그 사이로 은은히 비치며, 푸른 바위, 붉은 벼랑, 긴 개울, 비옥한 땅이 그 곁에 이어져 있다. 

 

인기(人氣)는 맑고 풍속은 후하며 노인들은 편안하고 젊은 자는 순종하며, 농사짓는 농부나 누에치는 아낙네는 제 임무에 부지런하고, 효성스러운 자식과 사랑스러운 손자는 제 힘을 다하여 봉양하고, 방아타령은 마을을 연하고 뱃노래는 어촌을 누비며,온갖 새는 무성한 숲속에서 우짖고 고기떼는 그물에 걸릴 위험이 없으니, 한 구역의 물건들이 모두 제 자리를 얻은 것을 볼 수 있다.

 

더구나 화사한 꽃, 시원한 그늘, 맑은 바람, 밝은 달이 때 맞추어 이르고, 소장영허(消長盈虛)와 회명음청(晦明陰晴)의 변화가 서로 바뀌어 끊이지 않으니 즐거움이 또한 무궁하다. 그 누의 명칭에 대해서는 담암(淡庵) 백선생(白先生)의 기문이 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강 가운데 돌이 삐죽삐죽 나온 것이 있어서 누를 짓고 이름을 촉석(矗石)이라 했다.

 

김공의 손으로 시작되고 안상헌(安常軒)이 다시 지었는데 모두 장원급제한 이들이다. 그래서 겸하여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누에 대한 시(詩)의 걸작으로는 면재(勉齋) 정 선생의 배율(排律) 육운(六韻)과 상헌(常軒) 안 선생의 장구(長句) 4운(韻)이 있고, 또한 운은(耘隱) 설(偰) 선생의 육절구(六絶句)가 있으며, 그 운(韻)을 화답하여 속작(續作)한 이는 이를테면 급암(及庵) 민 선생, 우곡(愚谷) 정(鄭) 선생, 이재(彛齋) 허 선생이 있는데 모두 가작이니, 선배의 풍류와 문채를 이것으로 인하여 상상할 수 있다.

 

불행히도 전조의 말엽에 온갖 제도가 황폐하고 변방의 경비 역시 해이하여 바다 도적이 깊이 들어오고 백성은 도탄(塗炭)에 빠지니, 누도 또한 불타버리고 말았다. 하늘이 우리 나라를 열어 성신(聖神)이 서로 계승하여 치교(治敎)가 밝아지고 은혜가 국내에 젖고 위엄이 해외에 떨치니, 전일에 침략하던 자들이 문을 두드리고 항복을 빌며 줄지어 보물을 바치고, 바닷가의 토지도 날로 개척되어 인구가 다시 주밀하게 되니, 홀아비와 홀어미들은 웃음을 짓고 노인들은 술을 권하며 서로 치하하여 말하기를, “요즈음 같은 태평세상을 눈으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한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에는 오히려 내 다스림이 흡족하지 못하다 여기시고, 매양 교서(敎書)를 내리어 민력(民力)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시니, 수령도 농상(農桑)이나 학교에 관계되는 일을 제외하고는 한 가지 역사도 감히 자의로 일으키지 못하게 되었다.

 

고을의 부로(父老) 전판사(前判事) 강순(姜順)과 전사간(前司諫) 최복린(崔卜麟) 등이 여러 노인들과 같이 의논하기를, “용두사(龍頭寺)는 읍을 창설하던 초기부터 땅을 살피던 곳으로, 촉석루를 설치하여 한 지방의 승경이 되었다.

 

옛사람이 그로써 사신과 빈객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여 화기(和氣)를 불렀고 그 혜택이 고을 백성에게 미쳤던 것인데, 폐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나 능히 중수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우리 고장 사람의 공동 책임이다.” 하였다.

 

이에 각각 재물을 거출하여 용두사에서 전향(典香)하고 있는 중 단영(端永)이란 자를 시켜서 그 일을 담당하게 하는 동시에, 내가 이 일들을 임금께 아뢰니 금단하지 말라는 분부가 내리게 되었다.

 

임진년 12월에 판목사(判牧事) 권충(權衷)공이 부임하여 판관 박시혈(朴施絜)과 같이 여러 어른들의 말을 채택해서 이듬해 봄 2월에 강의 제방을 수축하는데, 백성을 나누어 대오(隊伍)를 만들고 한 대오가 각기 한 무더기씩 쌓게 하여 논밭과 마을에 대한 여러 해의 근심을 제거하게 하니 열흘이 못 가서 끝을 냈다.

 

나아가서 자급(自給)을 못하는 자를 도와주고, 놀고 먹는 자 수십 명을 소집하여 부지런히 서두르게 하여 9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았는데, 단정한 집이 새로 나타나니 뛰어난 경치는 예와 같았다. 지금 판목사 유담(柳淡)공과 판관 양시권(梁施權)이 후임으로 와서 단청을 하고 또 관람과 아울러 농사에 물 대줄 것을 계획하여 수차(水車)를 만들고 둑을 쌓아서 백성의 이익을 일으켜 주었다.

 

어른들은 그 모든 것을 갖추어 나에게 청하기를, “강의 제방을 쌓고 촉석루를 짓게 한 것은 모두 그대의 지시였고, 누대가 이루어진 날 이제 특별 유시를 받았으니, 한 고을의 영예가 지극하다.

 

여러 군자의 백성을 위한 염려도 또한 근실하다 이를 만하니, 기문을 만들어서 영원한 세대에 보여주도록 하지 않으려는가.”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이는 모두 어른들의 지원으로 된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으리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인심과 세도로써 기쁨을 삼고 또 어른들의 뜻에 느낀 바 있어 전후에 듣고 본 것을 삼가 적는 바이다.

 

또 다시 생각건대, 이 누에 오르는 자는 개울 가의 풀이 싹트는 것을 보고 천지의 물(物)을 생(生)하는 마음을 알아서 어질지 못한 참혹한 것으로써 털끝만큼이라도 백성을 해롭게 하지 말 것을 생각하며, 밭 곡식이 바야흐로 자라나는 것을 보고 천지의 물을 가꾸는 마음을 생각하여 급하지 않은 일로써 백성의 농사 때를 조금이라도 빼앗지 말 것을 생각하며, 과수원의 과일이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천지의 물을 성숙하게 하는 마음을 깨달아 불의의 욕심으로써 백성의 이익을 조금도 침해하지 말 것을 생각하고, 마당에 노적이 쌓인 것을 보고 천지의 물을 기르는 마음을 알아서 법이 아닌 부세로써 백성의 재물을 털끝만큼도 약탈하지 말 것을 생각하며, 이 마음을 미루어 감히 자기만을 즐겁게 하지 말고 반드시 백성과 함께 하면, 사람마다 세도의 화평함과 인심의 즐거움이 실로 임금의 깊고 두터우신 덕에서 근원된 것임을 알고, 모두 화봉인(華封人)의 축복을 본받고자 할 것이니,

 

웃어른들의 끊임없는 정성으로써 부흥(復興)을 보게 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랴.나는 다행히 퇴직할 날이 가까웠으니, 생각으로는 필마로 고향에 돌아가서 여러 어른들과 매양 좋은 철 기쁜 날에 누에 올라 술 마시고 시 지으며, 그 즐거운 바를 함께 즐기면서 남은 세월을 마치고자 하니, 웃어른들이여 기다려 주기를 바라노라.

 

헌릉 13년(1413) 癸巳 秋 9월 진산(晉山) 하륜(河崙) 지음

 

자료 : 동문선 제81권ⓒ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역)>>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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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矗石樓記

 

樓觀之經營。爲治者之餘事耳。然其廢興可以見人心世道矣。世道有升降。而人心之哀樂不同。樓觀之廢興隨之。夫以一樓之廢興。而一鄕之人心可知矣。一鄕之人心。而一時之世道可知矣。則亦豈可以餘事而小之哉。余爲此說者久矣。今於余鄕之矗石樓。益信之矣。樓在龍頭寺南石崖之上。余昔少年。登望者屢矣。樓之制。宏敞軒豁。俯臨渺茫。長江流其下。衆峯列于外。閭閻桑麻。臺榭花木。隱映乎其間。翠巖丹崖。長洲沃壤。相接于其側。人氣以淸。俗習以厚。老者安。少者趨。農夫蠶婦。服其勤。孝子慈婦竭其力。舂歌連巷而俯仰。漁歌緣崖而長短。禽鳥鳴翔。能自知於茂林。魚鼈游泳。亦無危於數罟。物於一區而得其所者。俱可觀矣。至若繁英綠陰。淸風皓月。以時而至。消長盈虛之化。晦明陰晴之變。相代而不息。樂亦無窮矣。且其名樓之義。則有淡庵白先生之記。其略曰。江之中。有石矗矗者。搆樓曰矗石。始手於金公。而再成於安常軒。皆壯元也。因是有兼名焉。題詠之美。則有勉齋鄭先生之排律六韻。常軒安先生之長句四韻。亦有耕隱偰先生之六絶句。和韻而繼之者。有若及庵閔先生,愚谷鄭先生,彝齋許先生。皆佳作。前輩之風流文彩。因可想見矣。不幸前朝之季。百度凌夷。邊備亦弛。海寇深八。民墜塗炭。樓亦煨燼矣。天啓國朝。聖神相承。治敎以明。恩濡境中。威振海外。向之爲寇者叩關乞降。絡繹而獻琛。濱海之地。日以闢。人煙再密。鰥寡舍哺。斑白之老。酌酒而相慶曰。不圖今日眼見昇平。然上心猶以爲吾治未足。每降敎旨。禁用民力。守令於事涉農桑學校之外。不敢擅興一役。鄕之父老前判事姜順,前司諫崔福麟等。與諸父老議曰。龍頭寺邑初相地之所置矗石。爲一方之勝景。昔之人所以奉娛使臣賓客之心。以迎和氣而惠及鄕民者也。廢之久。不能重新。是吾鄕人之所共爲責也。乃各出財。使鄕之僧奠香龍頭寺者端永。幹其事。余以此聞于上。得蒙下旨勿禁。歲壬辰冬十二月。判牧事權公衷。至。與判官朴施絜。採諸父老之言。越明年春二月。修築江防。分民作隊。隊各一堆。以除田里積年之患。不十日而畢。乃於是助其不給。召集遊手者數十輩。俾勤其力。至秋九月而告成。危樓聿新。勝觀如舊。今判牧事柳公淡,判官梁施權。繼至而赭堊之。且因登覽。謀所以灌漑者。造水車。築堤堰。以興民利。父老具其始末。請於余曰。江防之築。矗石之營。皆子之指畫而成。況蒙特旨。榮耀一鄕者至矣。數君子之爲民慮。亦可謂勤矣。盍爲記以示不泯。余曰。此皆由於父老之志。顧余何有焉。然旣以人心世道爲喜。且於父老之意。有感焉。謹書前後之見聞者云。且夫竊惟登是樓者。見汀艸之始生。念天地生物之心。思不以一毫不仁之慘而害民生。見田苗之方長。念天地長物之心。思不以一毫不急之務而奪民時。望園木之始實。念天地成物之心。思不以一毫非義之欲而侵民利。見場圃之方積。念天地育物之心。思不以一毫非法之歛而掠民財。推是心而擴充之。不敢獨樂於己。而必欲與民同之。則人皆知世道之和。人心之樂。實源於上德之深厚。而皆願效於華封人之祝矣。則父老之眷眷焉用意而興復者。夫豈偶然哉。余幸致仕之日已近。思欲匹馬還鄕。與諸父老。每於良辰勝日。觴詠於樓上。同樂其所樂。以終餘年。父老其待之。

 

[자료출전]

*東文選卷之八十一

 

↑하륜의 촉석루 기ㅣ사진ⓒ서산부석다원>220

 

   하륜(河崙)은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조선 초 이방원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였고 왕권 강화의 기틀을

   다지는데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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