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말 대구의 교통요충지, 계산동
조선 말기 계산동(桂山洞)은 약전골목이 된 대구읍성의 남쪽 성곽 옆에 옛날 대구의 신천을 끼고 형성된 동네를 말한다. 계산동의 ‘계산(桂山)’은 계수나무가 있는 산을 의미하는데 계산은 현재의 동산병원이 들어선 동산을 말하는 것 같다.
동산은 동산(東山)과 동산(銅山) 두 가지를 쓰고 있는데 1905년 대구지도에는 동산(東山)이라 표기하고 있다.
동산 바로 밑에 옛날 대구 신천이 흘렀으며 그 신천 뚝방을 따라 형성된 동네를 계산동이라 칭하고 있다.
계산동과 대구읍성 남쪽 성곽사이에는 전정리(前田里)라는 지명이 길을 따라 보인다.
이곳은 현재 약전골목 남쪽의 좁은 골목이 된 길인데, 한자말을 풀어서 우리말로 발음하면 앞 밭골, 앞 밖 걸로 불렸으며 영남대로, 경부가도(京釜街道), 성밖 골목으로 불리고 있다. 한마디로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 과거보러 가는 길을 의미한다.
또한 앞밭걸과 계산동 사이에 상전곡(桑田谷)이라는 지명을 볼 수 있다.
우리말로 뽕나무밭 동네라고 부르면 될 것이다.
밭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뽕나무 골목이라 불리게 된 것이며 유래는 임진왜란에 도와주러 온 명나라 풍수지리가 두사충이 자신의 집터였던 현재의 경상감영 터를 반환하고 뽕나무골목에 3천4백호를 받은 것이다. 이곳에 뽕나무를 심고 비단과 관련된 업을 한 듯하다.
계산동은 대구읍성의 서문과 남문사이에 형성된 길로 자연부락과 시장 통이 일찍부터 형성된 지역이다.
대구읍성의 북문과 동문 쪽에는 논과 밭이었으니 일본이 경부선을 설치할 때, 북문 쪽 논과 밭을 가로질러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영남대로를 경부선이 관통하게 만들었다면 당시 유림들과 백성들의 반대에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문 쪽으로 철도가 난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면서 이 방면의 땅을 많이 사두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이곳은 대구부 서상면지역으로 1914년에 명치정(明治町)으로 하였다가 1947년에 계산동으로 고치게 된다.
■ 민족운동가의 산실, 계산동
서성로 주변과 남성로 주변은 양반들과 부자들이 많이 살 수밖에 없는 교통과 시장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성로와 계산동은 근대민족운동가와 예술가들이 많이 탄생한 곳이 되었다.
계산동2가 88번지에는 민족운동가 서상돈(徐相敦,1851~1913), 84번지에는 민족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 108번지에는 민족운동가 한솔 이효상(李孝祥, 1906~1989), 90번지에는 독립운동가 이상정(李相定, 1897∼1947), 92번지에는 서예가 회산 박기돈(晦山 朴基敦, 1873~
1948) 선생이 살았다.
그리고 , 82번지에는 영남대학의 전신인 청구대학 설립자 야청 최해청(也靑 崔海淸, 1905∼
1977), 87번지에는 경향지 ‘집단’의 편집인이자 평론가 남만희(南萬熙, 1911~미상), 77번지에 ‘서인심’ 소유의 문인화의 대가 죽농 서동균(竹農 徐東均,1902∼1978)의 화실, 104번지에는 친일파이자 서상돈(徐相燉)의 장남인 서병조(徐丙朝, 1882~1952), 78번지의 금잔디 작곡자 김진균(金晋均,1925∼1986) 선생이 살았다,
또한 110번지는 대구가두극장(街頭劇場) 창립멤버인 이원식의 백부인 이호진(李浩珍,1884, 10.27~
1963,11,29/대구시 한의사회 초대회장)이 운영하던 영천한의원이 있었고 목조 반양옥인 영천한의원이 건립되기 전 화가 이인성(李仁星,1912~1950)과 서양화가 서병기(徐丙騏,1909~1993), 청정 이여성(李如星,1901~미상/독립운동가. 정치가, 화가) 등 영과회(零科會) 창립회원인 주정환(朱正煥)이 살았다.
주소는 정확치 않지만 상화고택 뒤편에 1924년 태어난 시인 신동집(申瞳集,1924~2003)의 집도 있었다. 그의 동생은 월북했다고 한다.
169번지의 명나라장수 두사충(杜師忠)의 집터,
169번지 한켠을 빌어 살은 민족예술가 빙어 현진건(玄鎭健,1900~1943), 남성로 약령서문의 앞이며 지금은 도로에 편입된 남성로 157번지에 음악가 박태준(朴泰俊,1900~1986), 박태원(朴泰元,1897~1921), 구 서신로에 편입된 수동 62번지의 이인성(李仁星)을 발굴해낸 서양화가 서동진, 이외에 주소지는 확인되지 않은 월북화가 이쾌대(李快大,1913~1965), 그의 맏형 월북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여성(李如星/칠곡출신)이 살았다.
주소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계산동 1가 계산성당 건너편에 3.1운동 학생시위를 주도한 문학가 목우 백기만(牧牛 白基萬,1902~1966), 한국영화의 토대를 닦았던 김유영(金幽影,1908 ~1940)과 여성 소설가 최정희(崔貞熙,1906~1990)는 백기만의 과자점 앞 골목집에서 신혼을 보냈다고 한다.
계산동 앞에 달구벌대로라는 큰 도로가 나기 전에 길 건너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살았다.
계산동 길 건너편 알리안츠빌딩에는 이인성의 양화연구소(洋畵硏究所)가 있었던 남산병원이 있었으며 병원 뒤 남산동 407번지에는 한국최초의 성악가 김문보(金文輔,1900~미상)가 살았다. 이외에 문학평론가이자 카프파였던 이갑기(李甲基)가 살았다. 미즈산부인과 대각선 건너편은 북랜드 근처 ‘근원수필’저자이자 미술사가였던 김용준(金瑢俊,1904∼1967)의 고택이었다.
◇두사충과 뽕나무골목
◇과거보러 가는 길, 영남대로
◇골짜기에서 읍내로 온 성당, 계산성당
◇대구최초의 성당, 십자형성당十字型 聖堂
◇영남최초의 근대건축물, 고딕양식 성당
◇철거된 근대건축물, 계산성당 사제관
◇가톨릭 근대교육의 시작, 해성재
◇이인성나무 - 감나무
◇Four Season of Kyesan Cathederal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고택
◇일본인이 본 서상돈
◇서상돈의 장남, 서병조고택
◇상화고택(尙火古宅)
◇석류, 감나무, 장독대가 이쁜 집, 상화고택
◇계산동 집에서 남긴 시
◇상화의 여성편력
◇상화고택, 시민의 품으로
◇소설가, 현진건고택
◇독립운동가이자 대구 최초의 서양화가, 이상정고택
◇이상정의 아내 권기옥
◇계산동에 살았던 이쾌대, 이여성
◇대구상공회의소 초대회장이자 서예가, 박기돈고택
◇교육자이자 정치가, 이효상고택
◇영남대학의 전신 청구대학 설립자, 최해청고택
◇'금잔디’작곡사 음악가 김진균
◇이문열 소설 ‘금시조’ 모델, 죽농 서동균 화실
◇24세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음악가, 박태원 생가 터
◇박태원의 동생이자‘오빠생각’작곡가, 박태준
◇구 영천한의원
◇달구벌대로 교통의 축, 계산오거리
◇계산동 앞을 흐르던 대구천
◇계산오거리의 사라진 랜드마크, 고려예식장
◇고려예식장 우종식, 우종묵 저택
◇매일신문
◇매일신문 테러사건
◇한일호텔 김용덕사장 저택, 쌈지뜰식당
◇구 일심관 요정(사가이)
◇피난민이 개척한 냉면집, 대동면옥
◇복어의 자존심, 거창복어식당
◇구 전경환 사돈댁, 대청마루 식당
◇성 밖 골목의 명물, 원조할매칼국수
◇화교잡화점 성립행 왕수강王修網 사장
◇대구에 정착한 화교인들의 경제활동
◇두사충과 뽕나무골목
◇두사충 집터?계산2가 169
◇뽕나무밭 계산2가 일대
◇모명재(慕明齋) 만촌동 716번지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중국의 山西省) 사람으로 임진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우리나라를 도우기 위해왔다. 그가 맡은 일은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라는,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참모로서 항상 군진을 펴는데 조언해야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 조선군과도 긴밀한 협의를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당시 벽오 이시발(碧梧 李時發)과 친했는데 임진란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陳璘) 도독과 함께 우리나라로 다시 왔다.
이후 정유재란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압록강까지 매부 진린을 배웅한 후 자기는 조선에 귀화했다.
이에 조정은 두사충이 터를 잡은 현재의 대구시내 경상감영 터를 하사하고 살도록 했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두사충은 그 땅을 내어놓고 계산동 169번지에 집을 짓고 주변에 뽕나무를 심으며 업을 이어나가게 된다. 이때부터 계산동일대는 두 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두 씨들은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그는 고향을 두고 온 그리움으로 후에 최정산(대덕산) 밑에 고국인 명나라를 기리는 제단을 세워 매일초하루가 되면 고국방향으로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이후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였다고 한다.
그는 살아생전 묻힐 곳도 미리 잡아두었다. 지금 2군사령부가 들어선 형제봉에 묘 터를 아들에게 일러주고 담티고개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그의 사후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까지 가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기슭에 쓰게 되었고 두사충이 잡아둔 묘 터에는 나중에 고산서원이 들어섰다.
두사충의 묘 터는 후에 국정원과 2군사령부가 들어온 군사적 요충지가 되고 두사충의 무덤은 어린사슴이 어머니를 돌아다보는 고모(顧母)형국을 가진 국정원 뒤편 형제봉언저리에 잡혔다. 이 봉우리는 비슬산 범물동 용지봉을 거처 내려온 산맥이다. 지난 1912년 그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묘지 옆에 모명재란 재실을 지어 그를 기리고 있다.
그가 숨을 거둔 곳은 현재 계산동 169번지 ㄱ자 한옥(200여평, 몸채 4칸, 사랑채 3칸)이었다고 하며 고택은 6.25직후 다른 사람에게 팔려버렸고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서서 흔적을 알 수 없다.
■ 과거보러 가는 길, 영남대로
계산동과 대구읍성 남쪽성곽사이에는 전정리(前田里)라는 지명이 길을 따라 보인다.
이곳은 현재 약전골목남쪽의 좁은 골목이 된 길인데 한자말을 풀어서 우리말로 발음하면 앞 밭골, 앞 밖 걸로 불렸으며 영남대로, 경부가도(京釜街道), 성 밖 골목으로 불리고 있다.
한마디로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 과거보러 가는 길을 의미한다. <대구천주교회사>의 기록에 따르면 ‘앞 밖 걸’엔 천주교 신자였던 상인이 많았다고 하며 대구보부상단의 중심인물은 최철학(崔哲學)이란 인물이 1870년대부터 대구지방 보부상단의 ‘도회장’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이곳을 대구를 지나는 교통요지며 서문시장과 남문시장이 만나는 길목이라 일찍부터 자유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성내에는 볼 수없는 망건, 탕건, 갓방들이 늘어서 있었고 여관을 비롯한 숙박시설, 음식점들도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성밖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신선한 농산물을 내다 팔았고 일대의 상인들은 크게 번성했다.
나중에는 대구의 상권을 장악하게 된며 어른들도 많았지만 12-3세 어린소년들이 큰 지게에 미나리 등속을 지고 와서 파는 경우도 많았다.
1825년(순조 25) 대구부가 작성한 부내 34개 면의 총 가구 수는 1만 3천 4백13가구이고, 인구수는 6만 1천 4백77명으로 나타난다. 인구가 집중된 동상, 서상, 해북촌, 화현내 4개면은 모두 시장을 끼고 있다.
동별로 남문내가 188가구로 1,059명이 가장 많고 서문내 216가구에 944명으로 다음을 차지한다.
이 두 동은 남문 밖의 자유시장인 앞 밖 걸과 경북도내 제1의 시장이었던 서시를 끼고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상행위를 중심으로 업을 이어가는 집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25년의 보고서지만 1900년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구한말이 되면 더욱더 집들이 촘촘히 들어서게 되고 전정리는 골목형태를 띠게 된다.
대구읍성이 1908년 완전히 해체되고 나서는 성벽양쪽으로 집들이 들어차면서 전형적인 현재의 골목형태를 가지게 된다.
남성로의 남쪽에 형성되어 있었던 성 밖 골목은 대구약령시가 객사에서 남성로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성 밖 골목은 서문시장과 독립하게 되며 약령시가의 보조기능을 하는 상점들과 업체들이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약령시가 주위에는 의생(醫生)과 한약종상(韓藥種商)은 물론 한약재를 수집하여 판매하는 중간상인(매약청부업자, 매약행상)과 객주(客主), 거간(居間), 여각(旅閣) 등과 관련되는 한의약업인들이 증가하게 된다.
전국에서 운집한 많은 사람들은 약을 팔고 사는 과정상 약령시장 인근에서 여러 날을 보내야 했으므로 당시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대로였던 ‘성 밖 도로’(영남대로 혹은 경부가도)변의 객주 집과 여관, 식당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객주 집과 여각 등은 멀리서 온 한약 상들의 물건을 위탁판매하거나 숙식을 제공함은 물론 환전이나 금전대부 등의 금융기능과 창고업무까지 대행하는 등 약령시장를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유치환(柳致環)의 부친도 약령시의 뒤 골목 어느 주막집에서 허기를 때우면서 옛날 약령시를 드나들던 부친의 행적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성 밖 골목도 제환, 제탕, 제분, 식당, 상점 등이 들어서며 화려했던 대구약령시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옛날의 ‘앞 밭골’보다 성 밖 골목이 되면서 훨씬 넓이가 줄어들었고 차가 지나다닐 수 없는 전형적인 골목길이 되었다.
■ 골짜기에서 읍내로 온 성당, 계산성당
◇위치 : 계산2가71
◇문의 : 053-254-2300
대구도심에서 가장아름답고 역사적인 공간을 묻는다면 대구시민들은 단연 계산성당을 말할 것이다.
또한 계산성당 일대가 4,100㎡는 도심지에서 유일하게 문화재 보존지구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한국의 전통건축물이 아닌 프랑스 가톨릭선교사들이 세운성당이 대구도심의 중심이미지가 된 것에 대해서 안타까운 부분도 있다. 대구읍성과 4대문이 있었다면 대구는 조선시대와 근대문화를 고스란히 담지한 아름다운 곳이 되었을 것이다.
계산성당은 프랑스 가톨릭선교사가 대구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게 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은 천주교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대부분 피난을 쉽게 갈 수 있고 읍과 멀리 떨어진 골짜기를 선택해 모여 살았다. 1885년 12월 대구의 초대신부로 불란서의 김보록 바오로(Achille Paul Robert)가 부임한다.
그는 읍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나무 골에서 은신 전교하다 1886년 한불조약 후에 신앙의 자유가 넓게 허용되었으므로 1888년 겨울 김보록 신부는 신나무 골에서 대구읍내의 교회진출을 위해서 대구와 가까운 죽전 새방 골(서구 상리동)로 옮겨 3년간 은신전교하면서 낮에는 바깥출입을 삼가고 밤이면 상복으로 변장하고 각급신도들을 찾아 전도하였다 한다.
당시 인교동 정규옥(鄭圭鈺) 승지(承旨) 댁에서 7년 동안 전교하면서 성당 부지를 물색하다 1897년 3월 현재의 계산동성당 자리와 그 서편에 있는 동산 두 곳을 물색했다. 김보록 신부는 동산전부를 150냥에 매입하려고 결정하였으나 노인층 신자들은 높지 않은 현재의 계산성당 자리가 좋다고 하여 타지역과 다르게 시내에서도 제일 저지대인 평지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성모성당(당시 이름)을 짓고 후에 천주교가 ‘천주’를 모시지 않고 ‘성모 마리아’를 모신다는 신앙적 오해가 생겨 후에 계산성당으로 고쳤다고 한다. 계산성당은 목조1번, 벽돌1번 이렇게 2번 짓고 2번 증축하게 되어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계산성당 자리에는 원래 근대적 교육기관인 해성재(海星齋, 후에 성립학교-효성초등의 전신)가 있었고 그 우편에 최초성당이 있었던 것이다. 해성재로 시작한 가톨릭 교육사업은 현재 대건, 효성, 대구가톨릭대학 등 많은 근현대교육기관을 만들어 내게 된다.
계산성당에는 옛날 샘이 있어서 남산동을 비롯 주변에서 물을 길으러 왔다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여사가 결혼을 한곳이며 1994년 교황 요한바오로2세가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성당 남편에는 이인성의 화폭에 담겨진 감나무가 ‘이인성나무’로 지정받아 보호받고 있다.
우측편의 옛날 효성초등학교는 송현동으로 옮겨가 현재 계산문화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대구최초의 성당, 십자형성당(十字型聖堂)
대구최초 외국인이 지은 건물로 1899년 한옥형 목조2층을 십자형태로 지으며 성모성당이라 하였고 왼편에 교육공안 해성재를 짓고 신부거처도 마련하였다. 사제관인 신부거처는 2층으로 지었으며, 채색을 잘하는 스님5명을 고용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화려하게 단청(丹靑)하였다고 한다.
재미난 일은 성당과 사제관을 단청한 스님들 중 2명이 천주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서울에 세워진 약현(중림동)성당, 종현(명동 1898)성당, 인천 답동(1896)성당 등은 모두 서양식 건물인데 반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세워진 대구성당은 순수한 한식으로 지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1년만인 1900년 2월 4일 지진 때문에 성당에 불이난다. 당시 김보록 신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2월 4일 오후 8시에 대구에서 매우 강력한 지진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 제대위에 세워둔 촛대가 지진의 진동으로 넘어져 양탄자 등에 불이 옮겨 붙은 것이다. 화재가 발행하고 1주일이 지나 호소문을 발표, 1902년 11월 성모성당을 다시 건립하게 된다.
■ 영남최초의 근대건축물, 고딕양식 성당
1902년 11월 25일 서상돈(徐相敦), 김종학, 정규옥 등의 후원으로 성모성당을 다시건립하게 된다.
로베르 신부의 요청으로 중국 북경건축기술자 26명(벽돌공 9명, 석동 14명, 목수 3명)과 요리사 2명이 현 계산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왔다.
이들은 서울에서 명동성당을 건립한 기술자였다. 이에 로베르 신부는 서상돈·김종학·정규옥 등의 후원으로 1903년 낙성식을 거행했다. 우리나라에서 건립된 고딕양식의 성당으로는 서울, 평양에 이어 세 번 째였고 영남지방에서는 최초의 것이었다.
성당의 평면은 라틴십자형으로 두개의 종탑부는 8각으로 높은 탑을 세우고 박공부분에는 아름다운 장미창을 두었다. 두 개의 종은 서상돈 아우구스띠노와 정규옥의 부인 김젤마나가 기증했으므로 종의 명칭도 이름을 따서 아우구스띠노와 젤마나로 명명되었다.
내부 제단 뒤로는 5각형의 평면을 이룬 반원 아치 아케이드가 5각형의 뒤부분과 연결되어 있어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제단 뒤 위쪽 중앙에는 루르드 성모동굴을 입체적으로 구성하였다. 12종도(宗徒)가 채화된 유리창은 1902년 10월 13일 프랑스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서 왔고, 지붕의 함석은 홍콩에서 수입했다고 한다.
계산성당은 1911년 6월 주교좌 성당이 되고 신도가 늘어나 증축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김종학과 한윤화가 총 경비 2만여원의 거액을 자진 분담하여 종각지붕을 배로 높이고, 성당뒤편을 물려서 남북으로 남개를 달아 증축공사를 시작하여 1918년 12월 24일 준공하였다.
성당의 증축기술자들을 찾기 위해 1913년 당시 대구교구장이었던 드망즈 주교의 주선으로 중국 산둥성 출신건축기술자 강의관(姜義寬), 타항록, 모문금(慕文錦) 등과 함께 대구로 왔다.
이들은 가톨릭교의 성모당과 신학대학, 수녀원을 비롯 개신교의 동산병원, 학교건물을 지으며 수려한 적벽돌 건축시대를 열었다. 1981년 10월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고 1992년 성당건립이후 2번째로 대보수 공사를 하였다.
지붕은 함석을 해체하고 동판으로, 바닥은 목재대신 대리석으로, 그리고 창호, 스테인드글라스, 전기공사가 이루어졌다.
■ 철거된 근대건축물, 계산성당 사제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71번지 현재의 성당 입구우편에 있었던 연면적 112.32㎡ 지상 1층의 건물로 계산성당의 제2대주임신부인 베르모렐(Vermorel) 신부가 1929년 7월말 사제관으로 건축, 1975년 7월부터는 대구대교구평의회에서 사용해오다 1995년 관리상의 문제로 철거하였다.
북향으로 배치된 죠지안(Georgian)풍의 붉은 벽돌조 2층 건물로 모임지붕에 골함석을 이었으며 평면은 직사각형으로 정면중앙의 주 출입구를 따라 복도와 계단을 두고 이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각 실을 배치하였다.
외관은 화강석 다듬돌위에 붉은 벽돌을 쌓아 벽체를 구성하였는데 정면아케이드 복도부의 필라스터(Pilaster)와 아치 및 층간 코니스(Cornice), 모서리기둥 등은 흑색 벽돌, 나머지 벽면은 붉은 벽돌로 쌓았다. 창문은 튜더(Tudor)풍의 아치를 달았으며 처마와 층 사이에는 흑색벽돌로 코니스(Cornice)를 돌려 수평성을 강조하였다.
● 건축용어설명
◇필러스터(Pilaster) : 중세기 건축의 바깥벽에 사용한 장식적인 기둥.
◇코니스(Cornice) : 서양식 건축벽면에 수평의 띠 모양으로 돌출한 부분
◇튜더식(Tudor style) : 1485년부터 1558년까지 일어난 영국 고딕건축 양식의 하나.
■ 가톨릭 근대교육의 시작, 해성재(海星齋)
1899년 현재의 계산성당 자리에 성당의 교육관용도로 부속 건물로 짓게 된다.
이곳이 해성재(海星齋)로 훈장을 두고 한문을 가르치면서 초등학생들을 교육했기 때문에 성당서당으로 더 잘 알려졌다.
1901년에는 성당이 화재로 전소되었지만 해성재는 남아 후에 성립학교(聖立學校)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립학교는 지금의 계산성당 문화원자리에 있다가 1993년 3월 1일 달서구 송현동으로 옮겨간 효성초등학교의 전신이다.
민족지사인 안중근의사가 당시 이곳에 들러 강연을 하기도 했었다.
해성재는 날로 학생 수가 늘어나 1908년 김보록 신부는 서당을 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해 지역유지 신자들과 논의하여 성립학교로 개편하였다.
개교당시의 성립학교는 남자학교였는데 1910년 3월 1일부터는 여자과정을 개설, 야간부로 운영하였다.
이후 성립학교는 심각한 경영난을 겪어 남자부가 1914년 폐교되고 여자부는 1913년부터 신부의 개인경영체제로 전환되어 비로소 성립여학교의 출발을 보게 되었다.
이어 1916년 ‘바다의 별’을 상징하는 의미의 해성학교(海星學校)로 개칭되었고 1920년에는 해성여자야학강습회까지 개설하였다. 1924년에는 해성학교여자부가 효성여학교(曉星女學校)로 개칭되었고 이듬해인 1925년부터는 효성여자보통학교로 승격되어 지금의 효성초등학교와 효성여중고, 대건중고, 대구카톨릭대학교 등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 이인성(李仁星) 나무 - 감나무
◇위치 : 계산성당 마당
이인성나무는 1930년대 중반에 대구가 낳은 천재적인 화가 이인성(李仁星)이 그린 ‘계산동성당’의 그림 속에 나오는 감나무를 시가 지정 보호한 것이다.
그림을 그린위치는 계산성당 입구오른편에 가톨릭학교재단의 전신이 된 ‘혜성학교’ 방면에서 구도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인성이 주로 활동했던 곳을 염두에 둔다면 계산오거리의 남산병원3층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인성이 열었던 아틀리에 ‘양화연구소’가 장인어른이 운영했던 남산병원 3층에 있었고 작업실에서 늘 보였던 장면이 계산성당의 측면입구일 것이다. 화가는 늘 보는 장면을 화폭에 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작품에 등장한 감나무는 현재 살아 있지만 가지가 부실한 상태라 보통이상으로 감이 많이 열린다고 한다.
이인성은 이 그림 외에도 1920-30년대 일제시대의 대구모습을 많이 화폭에 담았다.
계산성당을 담은 그림이 2편, 계성학교1편, 도심풍경4-5편, 팔공산1편 등 근대 대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작품들을 남겼다.
■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고택
◇위치 : 계산동88번지
◇문의 : 053 –252- 5005
1891년 서상돈(徐相燉/민족운동가) 41세의 나이에 중구 계산동에 새로 지은 집이다.
그의 집은 무수히 많은 나그네들과 식객(食客)들이 묶어갈 수 있는 안식처였다.
그는 대구지역 가톨릭 근대 신앙운동의 선구자이자 큰 후원자였으며 그의 집이 계산성당과 붙어있어 성당 터도 서상돈의 땅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집은 2007년 9월 완공예정인 주상복합빌딩 ‘신성미소시티’의 공사부지로 매입되어 공사완공 후에 북편 왼쪽에 이상화고택과 함께 작은 소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2004년 헐린 집의 원자재들은 복원할 때 활용될 예정. 전체적인 터는 조금 옮겨진 상태로 본채와 별채, 사랑채는 복원될 예정이다. 서상돈 고택 바로 앞은 옛 고려예식장 부지중 일부인 104번지는 그의 차남 서병조(徐丙朝,1882~1952)의 집이었다.
상화시인의 고택과는 집 한 채를 사이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대구상공회의소 소장을 지낸 이 씨 일가의 집이였고 미소시티에 매입되기 직전 소유자는 이소장의 아들로 추정된다. 북성로에서 상업을 한다고 했다.
계산동에 사는 정영숙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집의 거주자는 이승만대통령과 친척사이라고 했다.
이승만대통령이 이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골목에 지프차(Jeep)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쓰는 통에 이웃주민들이 긴장했었다고 한다.
2007년 국채보상운동100주년 맞이하여 고택개관과 함께 대대적인 기념사업들이 치러질 예정이다.
정영숙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 집에 살았던 할머니의 손자가 서인수(효가대) 철학교수였는데 구약성경의 최고권위자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씨 집안이 서상돈 고택을 매입하기 전에 살았던 분이 서인수씨의 친할머니였다면 서상돈씨와 관련이 있던 분으로 추정된다.
서상돈 선생의 고택으로 안채, 사랑채, 아래채, 곡간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남향의 안채 좌우측에 아래채와 곡간채, 그 앞쪽에 대문채와 연결된 사랑채를 배치하여 ㅁ형을 이루고 있었다.
대문과 안채, 사랑채 사이에는 붉은벽돌로 쌓은 아치형의 중문을 설치하였는데 조적법, 구성기법 등이 당시 중국인들이 건립한 종교계통의 건물과 유사하다.
◇안채 : 정면4칸, 측면2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부엌가 안방, 우측에는 건너 방을 배치하였는데 안방과 건넌방 앞에는 대청과 연결된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의 각 칸에는 미서 기문을 달았고 하부고막이는 타일로 마감하였다.
◇사랑채 :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는 대청과 연결된 뒷마루를 설치하였는데 툇마루부의 구성은 안채와 같다.
◇아래채 : 시멘트 블록조 1층의 슬라브 건물로 근년에 건축된 것으로 짐작된다.
◇곡간채 : 정면3칸, 측면1칸 규모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배치하였다.
◇대문간채 : 사주 문으로 각 부재의 치목, 장식수법이 간결하여 근대적 변화를 살필 수 있다.
이 주택은 인물유적 뿐만 아니라 전통주택의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다.
■ 일본인이 본 서상돈
<대구물어> 저자 카와이 아사오(河井朝雄)가 서상돈 집에 초대되어 갔을 때, 에피소드 이다.
서병조(徐丙朝)씨의 선고(先考)인 서상돈 옹은 독실하고 덕이 높은 사람으로 생전에 많은 음덕을 베풀었다.
그 당시 풍습으로 출입 시에 5,6명의 하인배를 거느리고 흰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의젓하게 길을 걷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서상돈 옹을 서시찰(徐視察)이라 경칭(敬稱)하며 마주하는 사람마다 최고의 예의를 갖추었다.
서옹은 자주 내 상점에서 일용품을 사가고했다. 한번은 서옹에 초대되어 대접을 받았는데 술과 같이 나온 국이 맛있었다.
그러나 연한고기를 씹고 나면 너 뜰 머 뜰 한 것이 입속에 남아서 찌꺼기인양 했는데 그것이 털인 것 같았다. 고개를 꺄우뚱하고 있으려니 옹이 웃으면서 ‘이것은 소의 배속 태일세, 약이 될 테니 안심하고 먹게’하는데 놀랐다. 어쩐지 입속에 털이 남더라니. 더 이상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구물어>
■ 서상돈의 장남, 서병조 고택
◇위치 : 계산동 2가 104번지
서병조의 집터는 1931년부터 소유했으며 부친 서상돈에게 물려받은 재산으로 일제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다. 2만석꾼이라 불렸던 이장우(李章雨)에는 못 미쳤지만 5천석이상으로 보여 졌다. 서상돈이 운영해오던 대구잠업전습소를 경영하면서 경제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대구잠업전습소는 1907년 일본 통감부가 보조하던 식민지산업경영기구라 할 수 있다.
전습소는 후에 대구임업사무소로 개칭되었다. 부친이 1906년 설립한 대구농공은행이 경상농공은행으로 1908년 통합 뒤 취제역(이사)을 맡기도 했다.
1922년 서병조는 서상일, 김의균, 장직상, 김재환, 이선호, 윤홍렬, 이상악 등과 대구의 대표적인 지주 및 자본가 그룹인 대구구락부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13년 발족해 경남은행에 통합된 대구은행의 취제역(이사)을 1927년부터 맡기도 했으며 대구상공회의소 및 상공경제회 등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일족인 서창규, 서병원, 서병주, 서상현 등과 함께 구 금호호텔 뒤에 조양무진(朝陽無盡)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1940년 서병조씨 바로 왼쪽에 살던 당시 교남학교 교장 한솔 이효상의 간곡한 설득으로 재정위기에 빠진 학교를 인수해 대붕교육재단으로 출범시키며 폐교위기를 벗어나 현재의 대륜학교가 되었다. 서병조(徐丙朝/일본식 이름 : 大峯丙朝)는 이렇게 당대 재력가였으며 부친의 대를 이어 대구가톨릭의 거대후원자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중추원에 1921에서 1925년간 참의로 재직한 연유로 2002년 국회의원29명으로 구성된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반민족행위자 708명 중에 1명으로 거론되었다. 그의 집은 자세한 기록은 남지 않았으나 집이 운치가 있어 6·25직후 지역요인들과 미군장교들의 가든파티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동산호텔에 있던 대구부호 장실상의 99칸 저택에서도 가든파티를 즐겼다고 한다.
후에 고려예식장 사장이었던 우상택씨가 매입해 예식장 건축과정에서 나온 홍송과 돌, 목재 등을 버리기 아까워 현재 달서구 월곡공원 옆 단양 우씨 재실인 ‘낙동서원’ 부속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 이상화고택(李相和古宅)
◇위치 : 계산2가 84번지
◇문의 : 053 –421-7572(거리문화시민연대)
◇상화고택 일지
◇1901년 : 상화탄생
◇1939-43년 : 계산동2동 84번지 상화거주
◇1943 : 상화서거
◇1948년 3월 : 우리나라최초의 시비 상화시비 건립
◇1967-2004년 6월 : 이금주씨 직전까지 거주
◇1983년 8월 : 이윤수시인이 상화시인이 살았던 집이라고 최초증언
◇1980년대후반 : 재일교포가 상화고택 매입의사있었으나 흐지부지
◇1995년 8월15일 : 상화동상제막식 - 대구두류공원
◇1997년 8월 : 대구시 이상화고택 보존계획수립
◇1999년 8월: 대구시 1억9천5백만원으로 매수협의 / 실패
◇2002년 1월: 상화고택 마당에 소방도로 개설공문을 중구청이 발송
◇2002년 2월 : 상화고택보존국민운동본부 발족
◇2003년 5월 22일 : 상화묘비 제막식 - 죽순문학회
◇2003년?6월 9일 : 군인공제회 상화고택 기부체납 의향서제출
◇2003년 6월 26일 : 군인공제회 교통영향평가 조건부(고택보존) 통과
◇2003년 9월 : 대구시문화재위원회 문화재심의
◇2003년 9월 : 기부채납공정서작성
◇2003년 10월 : 문화예술과 문화재심의 통과
◇2003년 11월 : 미소시티 건축심의 통과
◇2004년 6월 4일 : 미소시티 상화고택매입
◇2005년 4월 : 미소시티 상화고택주차장부지 매입
◇2005년 8월-12월 : 임시개관을 위한 새단장
◇2005년 10월 : 미소시티 상화고택을 대구시에 기부
◇2005년 9월 29일 : 민족시인이상화고택보존 운동본부 해체
◇2006년 현재 : 주차장부지를 매입 & 임시개관 상태
◇석류, 감나무, 장독대가 이쁜 집, 이상화고택
이상화시인은 말년에 가난해 1939년부터 43년 서거하기 전까지 상화의 백부인 소남 이일우(小南 李一雨,1869~1936)선생의 며느리 이득명(李命得)씨의 소유의 집 1채를 얻어 살았다.
이득명은 계산동 2가 84번지에 이사 오기 전 서성정 1정목 44번지(서성로1가 44번지)에 살았으며 이곳은 상화 백부의 집이며 현재 상화의 질녀가 사는 곳이니 계산동의 이 집이 상화의 사촌형님 집이었다는 것이 유력하다.
●고택 왼편의 83번지는 이재철씨가 살았다.
이재철은 현재 대신동 서남빌딩 주인이며 상화시인의 당질이며 본채 왼쪽편의 담장에 이재철집(83번지, 후에 보국직물 정사장이 매입)과 상화고택을 통하는 문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했다.
이재철 모친이 경북여고 출신인데 동기동창들이 상화고택에와서 이재철씨의 아버지가 유언으로 ‘상화고택을 사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이재철 모친은 사는 걸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60년대로 추정)모친의 용돈이 한달에 600만원 정도 되는 거부였다 한다.
이 집의 상량문에는 을축년(1925)이라 적혀있고 지은사람은 1970년대 경북대학교 ‘황교수’란 분이 오셔서 자신의 아버님이 지으셨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6.25 요리 집으로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한 미망인이 운영했으며 육군사령부 백선엽(白善燁,1920~)장군의 부하가 전쟁 통에 사망하자 그녀의 아내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백두진장군의 보호 아래 별자리가 아니면 술 먹을 수 없었다고 하고 집 앞에 백차(당시 지프형 순찰차)가 즐비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1967년 이금주씨가 소유하기 전까지 우동식씨가 소유했으며 정원을 이쁘게 가꾸었다고 한다.
이금주씨가 이 집이 상화고택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0년 서울KBS에서 방송차 찾아와서 이금주씨는 고택임을 확인했다. 이후 이윤수(李潤守,1914~1997) 시인이 찾아와 설명해주었고 해서 이후부터 집을 크게 고치지 않고 그럭저럭 보존하며 살았다고 한다.
대문을 열면 바로 동네사람들이 얻어 마시는 우물이 있었고 80년대 우물을 메우면서 물 안에 팔뚝만한 물고기가 있었다고 하며 90년대 말까지 우물펌프가 있어서 물을 길어서 사용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우물펌프 배관만 남아있다.
이금주씨 이전에 살았던 우동식씨의 아내가 꽃에 관심이 많았다.
장미울타리는 멋지게 만들어 장미넝쿨을 살렸다고 한다. 백장미, 붉은 장미, 분홍장미 3종류가 심겨져 있었다고 한며 석류나무가 상화와 함께 찍혀있는 나무다.
원래 본채 가운데 석류가 본 그루이며 오른편의 석류는 본 그루가 죽을 것 같아 이금주씨의 동생이 우측으로 옮겨 심었다. 고택 본채 뒤 담장 너머 계산문화관 뒤뜰에 있는 석류나무는 성당 사무국장에게 이금주씨가 선물해서 옮겨 심은 나무다.
이사 올 당시 감나무는 3그루가 우물 뒤, 화장실 옆, 뒤 창고 담장 쪽에 있었으며 현재 우물 뒤의 나무만 살아있다.
이외에 본채 정면의 정원에 작약3그루가 있었으며 화장실 쪽에는 한옥1채가 있었는데 불이 나서 철거했다 한다.
중앙에 장독대가 적벽 돌로 건립했는데 눈에 담아 둘 만하게 이쁘다.
● 계산동 집에서 남긴 詩
상화의 대표적인 시로 ‘나의 침실로’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두시가 있다.
두시 모두 대구의 지역을 매개로 한 시다. ‘나의 침실로’에서 침실은 가톨릭성지인 남산동 성모당을 말하는 것이고, ‘뺏앗긴 들’은 그 당시 ‘수성현(지금 수성구)’의 벌판을 말한다.
대구지역에 거주하면서 대구를 매개로 한 시들이 많다. 당시 교남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이 집에서 시조 ‘기미년’과 수필 ‘나의 어머니’, 시 '서러운 해조‘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당시 남산동의 교남학교(대륜학교 전신)에 무보수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으며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는 지론아래 운동경기종목에 권투를 첨가시켜 오늘날 대구<태백구락부>의 모태를 이루어 놓았다.
● 이상화의 여성편력
이상화는 18세 충청도 출신 서순애(徐順愛) 여사를 아내로 맞이했다.
서순애여사와 장남 용희, 차남 충희(忠熙), 막내 태희를 가졌다.
혼례를 치르자마자 부인을 냉대했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독립운동가였던 손필연(孫畢蓮), 도쿄의 신전구(神田區) 유학생회관에서 유보화, 송옥경, 예기 김백희와도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상화의 여성편력에 대해서는 대부분 쉬쉬하는 경향이지만 이제는 ‘있는 것 그대로의 상화’가 필요한 시대다. 상화의 큰아버지 이일우는 상화에게 ‘고놈, 매삽고 차운 놈’이라 했다고 한다.
■ 현진건고택(玄鎭健古宅.1900-1943)
◇위치 : 계산동 169번지
◇두사충 고택 후에 수동으로 이사
빙어 현진건(憑虛 玄鎭健: 1900~1943)은 구한말에 득세한 개화파집안으로 대구우체국장이었던 현경운(鎭擎運)의 4남으로 계산동에서 태어나 후에 수동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11세 때에 모친을 잃고 13세 때에 동경의 상성중학에 입학했으며 16세에 결혼을 했다.
이상화 시인과 같은 해에 태어나고 같은 해에 사망했다. 데뷔작으로는 가난한 지식인 부부의 자전적인 소설 ‘빈처’로 염상섭과 사실주의 소설을 개척했으며 ‘빈처’ ‘운수좋은날’ ‘B사감과 러브레터’ 등으로 김동인과 더불어 단편소설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상화, 홍사용,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창간 동인이었다.
우리들에게 소설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22년부터 1937년까지 대구지역 신문사기자였다. 동명사, 매일신보를 거쳐 동아일보사에 근무 중 1932년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던 그의 형 현정건(玄鼎健)의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현진건이 근무했던 동아일보기자들은 월급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사장 송진우(宋鎭禹) 2백 50원, 사회부장 현진건은 80-85원이었으며 사원들은 대졸이었을 경우 최고70원, 상여금은 1년에 한번 10%를 받았다 한다.
1935년 사회부장으로 근무 중 손기정선수의 일장기 말살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1년간 복역하고 신문사를 떠났다.
이후 소설 창작에 전념했다고 한다.
현진건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96년 대구문인협회주관으로 문학비가 대구시 달서구 성당동 154번지 두류공원 내에 건립되었고 현진건이 동산병원이 있는 동산에서 거닐며 작품구상을 했다고 해 가운데 길을 ‘현진건로’라고 붙였다. 이 길은 계성, 신명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하러 가던 길이라 3.1운동길로 불리기도 한다.
■ 이상정장군고택(李相定將軍古宅)
◇위치 : 계산2가 90번지
◇문의 : 영양숯불갈비를 운영하는 통장(053-256-1706)
현재 백상길씨가 소유하고 있는 이 집은 한옥은 골기와로 품위가 있다.
1920년경 지어졌으며 계산성당 동쪽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상정(李相定,1897.6.10~1947.10.27)은 이상화 시인의 맏형으로 1921~1923년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해오다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였다.
이 고택은 안채, 아래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4칸, 측면2칸의 ㄱ자형 팔작 기와집으로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에 이어 부엌, 온돌방을 두고 우측에 건너 방을 배치하였는데 대청과 연결되는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대청과 마루의 각 칸에는 미서 기문을 달았다. 이 집은 전통주택의 근대적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다. 이상정은 이시우(李時雨)의 아들로서 상화(相和), 상백(相佰), 상오(相旿)의 형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일우(一雨)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큰아버지가 경영하던 그 당시 신문학과 민족정기의 요람이었던 강의원(講義院)에서 공부한 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성성중학교(육군유년학교)을 마치고 미술학교, 상업학교를 거쳐 국학원(國學院=國學大)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 1919년 귀국하여 약 3년간 오산(五山), 경신(儆新), 계성(啓聖), 신명(信明) 등의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으며 조국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껴 1923년 중국 둥베이(東北三省)로 망명, 한때 펑위샹(玉祥)의 서북국민부대에서 활약하다가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하였다. 이 시기에 윤봉길(尹奉吉,1908~1932)에게 폭약을 구해주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장개석국민정부의 초청으로 중경육군참모학교의 교관을 지내고, 1938년 김구(金九,1876~1949), 김규식(金奎植,1880~1950)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1939년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의원에 선임되고 태평양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육군중장으로 승진되어 일본군 북지나 방면 최고사령관 및 그 장병들의 무장해제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연합군 동경진주의 중국군사령부의 막료로 임명되었으나, 소망인 일본군 타도가 실현되었으므로 모든 지위를 사퇴하고 상해로부터 급히 와서 도와달라는 교민들의 요청으로 그곳에 가서 중국인들의 한국인 박해로부터 교민보호에 진력하던 중 1947년 10월 어머니의 사망소식에 귀국하였으나 두 달 뒤에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시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계성학교 학생들이 운구했다고 한다.
■ 이상정의 아내 권기옥(權基玉)
한국인 최초의 여자비행사로 알려진 그녀는 평양출신으로 독립운동가 이상정(李相定)의 부인이다. 권기옥(權基玉 1901-1988)은 평양에서 태어났고 10대 소녀시절 비밀결사대인 송죽회(松竹會)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래 3.1만세운동 참가와 임시정부독립운동자금 모금, 권총 운송 등의 역할을 맡았다 체포돼 6개월간 복역했다.
이후 선생은 평안남도 도청폭파사건에 가담하고, 동지규합을 목적으로 ‘양청년회 여자전도대'를 조직했다 일경의 재 구속 영장이 발부된 사실을 알고 1920년 중국 상해로 탈출했다.
선생은 상해에서 미국선교사가 운영하는 홍보여자중학교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1923년에는 중국변방의 운남육군항공학교(雲南陸軍航空學敎) 1기생으로 입학해 1925년 졸업함으로써 한국최초의 여류비행사가 돼 중국공군에 입대했다.
이상정과의 만남은 중국대륙에서 이뤄진 듯하다.
선생은 군복무 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경으로 이동해 국민정부육군참모학교교관으로 활동했으며, 1943년에는 중경 임시정부직할의 한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해 사교부장으로 활동하며 여성들의 독립사상 고취에 진력했다.
1948년 8월 귀국한 선생은 국방위원회전문위원과 한국연감 발행인, 한중문화협회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1988년 타계했다. 남장한 공군여장부로 중국대륙을 누볐고 기개와 강한의지로 개화기 우리나라에 큰 행적을 남긴 여성이었으나 의외로 소박하여 화초 가꾸기와 여행이 그녀의 취미였다.
■ 계산동에 살았던 이쾌대, 이여성
◇위치 : 주소지 미확인
월북화가 이쾌대(李快大,1912~1953)는 대구 계산동에서 태어났으며 천재화가 이인성에 가려 해방정국 이후 우리가 상실해버린 화가 중에 한명이다 그의 동생 이여성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쾌대는 1988년 10월, 납북·월북미술가들에 대한 해금조치로 남한에 알려졌으며 1991년 10월 8일, ‘월북화가 이쾌대전’이 열리면서 한국 미술계의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주요작품으로《작품/1938》.《부인도/1943》.《걸인/1948》.《추과(秋果)1949》등이 있다. 8·15 광복 후에는 조선조형예술동맹 및 조선미술동맹에 간부로 가담, 진보적 미술인들의 조직을 이끌었고 1947년을 전후하여 평양에 가서 공산당 미술가들에게 혁명을 주제로 한 그림들만 그리도록 강요하는 것을 보고 실망, 좌익노선의 조선미술동맹에서 이탈하여 정치성 배제의 조선미술문화협회를 조직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 측 종군화가로 전선에 참가하던 중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 휴전직후 남북포로교환 때에 북한을 택해 갔다.
■ 대구상공회의소 초대회장이자 서예가, 박기돈고택(朴基敦古宅)
◇위치 : 계산2가 92번지
서예가 회산 박기돈(朴基敦:1873∼1947)은 한말 정3품 통정대부를 지냈고 대구최초의 전시회인 ‘대구미술전람회(1923, 교남YMCA)’에서 이상정, 이쾌대의 동생 이여성, 석재 서병오, 이상화의 형 이상정과 함께 참여한 서화가였다.
경제계에서 발을 들여 대구상공회의소 전신이며 1915년 발족한 대구상업회의소의 초대소장을 역임한 서예의 대가였다. 통도사의 극락암 삼소굴(三笑窟)에 석재 서병오가 편액을 썼으며 박기돈의 글씨로 경봉스님의 오도송이 있다고 한다.
청도 운문사 육화당 정면기둥에는 5글자씩 6폭의 글씨가 주련(柱聯)이 걸려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쓴 것이라서 얼른보아도 눈에 띄는 행초서체인데, 그 필치가 활달하며 획의 강약을 잘 구사한 회산(晦山/박기돈의 호)의 명필이다. 운문사의 육화당(六和堂)은 스님들의 수행 공간 안에 있다.
이외에 팔공산 파계사의 진동루(鎭洞樓)에 걸려 있는 편액가운데 초서체로 ‘팔공산파계사(八公山把溪寺)라고 씌여 있는 것도 그의 작품이다.
◇청도 운문사 육화당 박기돈의 글씨 내용
流水迷松徑(유수미송경)/ 흐르는 물은 소나무 길 따라 꼬불꼬불하고
疎簾看雲捲(소렴간운권)/ 성긴 대나무발 사이로 뭉게구름 바라보네.
水月性常明(수월성상명)/ 물과 달은 그 성품이 항상 밝으며
烟霞心與潔(연하심여결)/ 연기와 노을은 그 마음이 깨끗하다네.
閒雲到竹房(한운도죽방)/ 한가로운 구름은 대로 엮은 방에 이르고
深戶映花關(심호영화관)/ 깊숙한 지게문에는 꽃이 빗장처럼 비치네.
■ 교육자이자 정치가, 이효상고택
◇위치 : 계산동2가 108(현재 미소시티 부지)
그의 집은 근래 정산부인과, 미즈산부인과를 거쳐 현재 미소소티 공사부지에 편입되었다.
옛날 한나라당 대구지구당사 있던 건물자리다. 이효상(李孝祥 : 1906~1989)은 시인, 교육자, 정치인으로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호는 한솔이다.
아버지는 이수조(李壽祚)이고 어머니는 김태(金泰)였다. 전통적인 학자 가문의 후예로 태어나 가문도 몰락해 궁핍한 생활속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유학교육을 받아 많은 성취를 보이다가 1912년 부모의 영향 하에 카톨릭에 입교하였고 같은 해에 해성학교에 입학하여 근대적인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 현재의 경북중고등학교에 최연소자로 입학하였고 식민지교육의 부당성에 항거하며 동맹휴교를 주도하다 투옥 당하였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찌[山口]고등학교를 거쳐 1926년 동경제국대학독문과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에 순교자의 후예인 한덕희(韓德喜)와 혼인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민족교육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1930년 대구의 교남학교(대륜중고등학교)를 재건한 후 초대교장이 된다. 이때 그의 뜻을 따른 많은 교사들이 독립투쟁을 위한 교육을 전개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로 이상화(李相和)를 들 수 있다.
1951년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고 1960년 4월에는 4.19를 즈음하여 경북대교수단을 이끌고 민주화 투쟁의 대열을 주도하였고, 이를 계기로 정치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1970년 7개 국회의장이 되었다. 은퇴 후 대구 남구지역으로 돌아와 조용히 은거하면서 문학?종교 등을 통해 사회적 활동을 전개하다가 1989년 별세하였다.
● 한솔이 교사로 재직했던 교남학교 <1986년 1월 13일자 매일신문>
‘홍우일선생이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사상가였고 애국자요. 독립운동가였다.
학생들(교남학교 지망생들)이 많이 몰려와 매일 상투자루가 한광주리씩 나왔다(상투를 튼 어른들도 학교에 입학하면 상투를 잘라야 했다).(중략) 내가 가기 전 교남학교는 얼마나 가난했던지 중국집에 우동을 시키면 안가지고 올 정도였다. 내가 간 뒤 극도의 곤란상태는 가셨으나 우리집 이부자리를 기숙사에 보내야 될 정도였다.”
■ 영남대학의 전신 청구대학 설립자, 최해청고택(崔海淸古宅)
◇위치 : 계산2가 82-1번지
◇문의 : 053-421-7572(거리문화시민연대)
이상화고택과 맞붙어있는 83번지는 영남대학의 전신이었던 청구대학 설립자 야청(也靑) 최해청(崔海淸,1905~1977)선생 자리였다.
1977년 이후 포정동에서 한일식당을 운영하는 김사장의 소유가 되었다가 이상화고택과 주차장부지로 군인공제회가 매입하고 다시 대구시에 공시지가로 판매했다.
최해청선생의 아들 최찬식씨의 증언에 의하면 47평 남짓한 집에 작은 우물이 있고 위채 아래채 2개의 집채가 있었다. 야청은 차남으로 부친은 일화 최현달(一和 崔鉉達)이다. 최해청선생 집안은 48년에 완전동1번지로 이사를 갔다.
시인 백기만(白基萬)씨는 대구항일정신의 양 거두로 소남 이일우와 일화 최현달을 꼽았다.
일화공(一和公)은 청도군수로 있다가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군수 직을 내던졌다.
최치원의 후손이었던 그는 44세 때인 경술년국치(1910 한일합방)의 비보를 전해 듣고 매천 황현선생과 향산 이만도선생과 같은 길을 가겠다고 단식을 시작했으며 다섯째 날 80노모와 친구들의 만류에 못 이겨 멈추었지만 24일째 향산은 순국했다.
심산 김창숙이 일화공의 일대기를 썼으며 대한민국 초대부통령 이시영선생이 묘비명에 백세사(百世師)라 하였다. 일화공의 대를 이어 최해청도 대구고보시절 소년혁진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시작, 전교생과 함께 궐기하여 악질일본인교사를 축출한 적도 있다.
결국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하다 1926년 조선 아나키스트동맹인 ‘진우연맹’에 가입했다. 외삼촌이었던 서상일(徐相日,1886~1962)선생이 만든 경북상공주식회사에 다니다가 ‘경북신문사’를 창설했다.
1947년 대구시보사(大邱時報社) 사장 장인환과 의기투합, 독립운동국 주최로 3주간의 대중학술강좌를 열어 가난한 학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결과 청구대학의 전신인 ‘대구문화과전문학원’이 문을 열게 된다.
1949년 경북포화조합이사들이 제산을 기부하면서 1950년 현재의 밀리오레 자리에 청구대학을 설립하게 된다. 청구대학은 1967년경에 최해청선생이 배제된 체 박정희대통령에게 강재 상납되면서 구 대구대학과 통합되어 영남대학이 된다.
영남대학은 1980년대까지 딸 박근혜씨가 이사장으로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친족들이 요직을 차지하면서 사유화되었다.
■ ‘금잔디’작곡사 음악가 김진균
◇위치 : 계산동2가 79-1(현재 주차장)
‘금잔디’ ‘노래의 날개’를 작곡한 한국 예술가곡과 음악학의 선구자 김진균(金晉均, 1925~1986)은 <음악과민족 12호>에 김진균의 딸의 기고문에 의하면 1925년 11월 8일 대구계산동에서 독실한 가톨릭신자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성당과 담을 두고 있는 계산성당의 해성국민학교를 거쳐 대륜중학교를 해방되던 해에 졸업하고 1947년 경북대사범대학의 전신인 대구사범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1946년 작곡한 첫 가곡 '노래의 날개'는 지금의 학제로 말하자면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지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951년에 대구사범대학(현 경북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에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빈음악대학 작곡과에서 수학한 후 1964년에 ‘한국민요의 비교음악학적 고찰’이라는 논문으로 동 대학 철학부 음악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5년에서 1981년까지 계명대학 교수, 1981년부터 1986년까지 경북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음악협회 경북지부장, 전국음악과 교수협의회 회장, 한국음악학회부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가곡집으로 ‘산 너머 저 하늘이’(1986), ‘김진균 가곡집’(1970), ‘김진균 가곡선 ‘초혼’(1974)이 있으며, 역서로 ‘음악미학’(1974), ‘서양음악사’(1978), 음반으로 <또 한 송이 나의 모란>이 있다. 참고로 대륜학교 교가를 김진균이 작곡했다.
■ 이문열 소설 ‘금시조’ 모델, 죽농 서동균 화실
◇위치 : 계산2가 77번지(영천한의원 옆집)
서동균(徐東均,1902-1978)은 서화가로 호는 죽농(竹農)으로 집에서 한문과 글씨를 배웠다. 사군자의 대가인 서동균은 1902년 2월 17일 중구 향촌동에서 서기석(徐基奭)의 독자로 태어났다. 계산2가 77번지는 가톨릭관련 성물과 서적을 판매하는 계산서원 바로 옆이다.
‘서인심’ 소유의 문인화의 대가 죽농 서동균의 화실이 있었던 곳이다. 죽농선생 문화비는 달성공원에 1983년 6월 건립되었다. 3·1운동 때에는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죽농 서동균선생은 석재 서병오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화공부에 정진하며 평생 대나무 그림만 그리겠다는 뜻으로 ‘죽농(竹農)’이란 아호를 썼으며 당시의 이승만대통령이 비서를 보내 그림을 요구하자 직접오라며 단호히 거절한 일화를 남겼다.
특히 말년에는 초, 중년에 남발한 자신의 타작들을 대부분 찾아내어 모두 불살라 없앤 후 타계하신 분으로 이문열 소설 ‘금시조’의 모델이 되신 분이기도 하다. 서동균은 이황의 학맥을 이은 유학자 스승 석담의 제자역인 고죽으로 나온다.
‘금시조’에서의 고죽은(죽농에 비유) 생계조차 제대로 꾸려나가지 못하면서 도를 강조하는 스승의 초라한 모습에 반발한다. 제자는 두 번이나 스승(석재에 비유)을 떠나고 스승은 운명의 순간 제자의 재능과 실력을 인정함으로써 둘은 화해한다.
고죽이 죽음을 앞두고 그의 작품을 다시 거두어들여 분류한 뒤 모두 불태우는 가운데 금시조의 환영을 본다. 일생동안 그를 끌고 간 미적 충동의 총결산인 자신의 작품들을 자기 손으로 불태운 고죽의 행위야말로 가장 예술지상주의자 다운 행위라 할 수 있다.
■ 24세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음악가, 박태원 생가 터
◇위치 : 남성로 157(약령서문 서편 도로)
폐병으로 일본에서 유학중 귀국하여 1921년 24세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음악가, 박태원은 유명한 작곡가 박태준의 형이며 대구지역에서 최초의 혼성합창단을 시도한 음악가였다.
1897년 6월 27일 포목상을 하던 아버지 박순조와 어머니 오환이 사이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남성로 끝자락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이 남성정교회(제일교회)의 세례교인이었으므로 자연스레 교회를 다니게 된다.
동생 박태준과 함께 교회는 남성정교회, 활동은 교남YMCA, 학교는 미션스쿨(계성학교)를 다니면서 개신교를 통해 서양음악적 세례를 물씬 받은 듯 하다. 특히 성악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박태원은 가사번역과 작곡 및 작사, 독창 등의 활동을 하면서 서구음악을 한국에 도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창작곡중에는 ‘이별가’를 비롯하여 ‘내사랑’ 등 몇 곡이 작곡되고 애창되었지만 번역곡이 유명하다.
한국인들에게 널리 불려졌던 포스트 작곡의 ‘클레멘타인’과 ‘켄터키 옛집’을 비롯하여 ‘어찌 하려나 내 사랑아’(what shall you do, my love)라는 곡의 가사를 그가 번역하였다.
번역된 가사가 곡의 악센트·장단 등과 잘 조화되는 점은 번역의 역사가 짧은 당시로서는 놀랄만한 솜씨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박태원은 작곡, 편곡 이외에 독창회도 열었다.
1920년 5월 25일 연희전문학교 학생기독청년회 주최로 서울YMCA에서 열렸는데 당시 인기성악가 윤심덕의 인기이상의 호평을 받았다고 하며 가장 획기적인 활동은 1917년 있었던 제일교회에서의 혼성합창 발표회이다.
대구지역 최초의 혼성합창단으로 기록되며 박태원이 사망한 2년 후인 1923년에 시인 이상화는 <백조>3호에 ‘이중의 사망’이라는 애도의 시를 발표하였다.
■ ‘오빠생각’작곡가, 박태준
◇위치 : 남성로 157(약령서문 서편 도로)
박태원의 동생으로 형이 못다 한 꿈을 이루는 듯 박태원(朴泰俊,1900~1986)은 우리들에게 친숙한 노래 ‘오빠생각’ ‘동무생각 : 사우(思友)’ ‘집 생각’등 수많은 곡을 작곡했고 해방한달 후 한국오라토이로합창단을 지휘하여 헨델의 ‘메시아’전곡을 공연했다. 이곡은 당시 한국초연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제1세대 서양 음악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박태원과 박태준도 교회에 다니면서부터 찬송가와 오르간 등을 접하며 서양음악을 배우게 되며 1925년에 계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합창과 악대활동을 하였으며 동요작품을 많이 작곡하였다. 당시 ‘오빠생각’ ‘새 나라의 어린이’ ‘제헌절노래’ ‘누나야’ 등을 작곡했다.
1938년 대구성가협회라는 대구최초의 일반합창단을 조직하여 대구공회당에서 발표회를 열었다.
1961년 예술원상, 1962년 문화훈장대통령상, 1970년에는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수상했으며 1986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계성학교 제자로 성악가 고 이점희(李點熙,1915-1991) 효성여대교수를 들 수 있다.
박태준은 생애 150여곡을 작곡했는데 동요 곡을 비롯하여 가곡류·교가 등 모두 성악곡을 작곡했으며 우리나라 합창운동의 선구자로 종교음악에 지대한 공헌을 쌓았다.
2004년 대구세계합창페스티벌을 열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와 같은 근대 합창운동의 성과라 할 수 있다.
■ 구 영천한의원
◇위치 : 계산동 2가 221, 80번지
최근까지 고려수퍼와 왼편에 30년 된 작은 자전거점이 있었던 곳이다.
이 곳은 대구지역 한의사회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한 이호진의 영천한의원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는 미즈산부인과의 부지가 팔려 우편에서 이쪽으로 재 건립되었다.
한의사는 초기 의생(醫生)으로 불렸으며 약전골목에서 복양당한의원을 경영하던 김관제는 서상일등과 교류하면서 항일시인 이육사의 경제적 후원을 담당하는 등 독립자금을 지원하기 도 했다. 영천한의원 옆 77번지가 서예가 서동균의 화실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목조 반 양옥이었던 영천한의원이 건립되기 전에는 서동진이 창립한 영과회 창립회원 주정환이 살았으며 이호진은 신극좌이후 1930년 창립된 대구가두극장의 창립멤버인 이원식의 백부라고 한다.
대구가두극장은 연출부 이일, 무대장치 이상춘 등 조선프로레타리아 연극운동을 펼치다 일제시대 사상탄압정책으로 해체되었다. 이원식은 이상화, 이인성과도 친교가 있었으며 이인성이 오픈한 ‘아루스다방’에 자주 들렀다고 한다.
1951년 국민의료법 통회이후 의생이 아닌 한의사 면허국가시험이 생기게 된다.
이호진은 부회장 허진, 박재석과 함께 1회 공식 한의사로 경상북도한의사회 창립회장을 맡았다.
당시 영천한의원 2층에 한의사회 사무소가 있었다.
■ 계산오거리의 사라진 랜드마크, 고려예식장(高麗禮式場)
고려예식장은 계산동의 명소로 1967년 정경운씨의 설계로 우종식, 우종묵형제가 운영한 6개의 웨딩홀과 단독식당을 겸비한 대구예식문화의 명소였다.
2006년 6월 문을 닫았고 주차장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군인공제회와 신성건설이 추진하는 주상복합 미소시티가 2007년 들어설 예정이다. 일제시대는 요리집을 비롯해 교회, 성당에서도 곧잘 예식을 했지만 해방이후 전용예식장이 생겨나게 되고 대구최초의 예식장은 1952년 ‘대구예식장’으로 교동5-2번지에 있었다.
지금은 대현주차장으로 쓰여진다. 서성로네거리에 동원예식장도 유명했으며 우종식 형제의 사촌이었던 우병근씨가 개업(64-87년)했다. 고려예식장의 예식건물이었던 104번지는 원래 서상돈씨의 차남 서병조씨의 고택이었다.
서병조고택인 이후 일본인의 소유로 있다가 1942년 우씨 일가가 소유하게 된다.
고려예식장을 지으려 집을 뜯을 때 나온 기와와 홍송, 돌, 목재 등을 달서구 월곡역사박물관과 함께 있는 단양우씨 재실격인 낙동서원을 지을 때 사용하게 된다.
이만섭 국회의장, 이효상국회의장 등 유명 인사들이 주례를 섰으며 초대사장 우종식은 지난 1977년 65세로 타계했고, 폐업직전 고인의 동생 종묵씨가 명예회장을 하다 그 아들 상택씨가 폐업직전까지 사장으로 있었다. 우종식사장의 집은 예식장 서쪽 건너편 171번지에 고래 등 같은 집채가 남아 식당으로 장수삼계탕 집으로 쓰이고 있다.
■ 고려예식장 우종식, 우종묵 저택
◇위치 : 계산동2가 171
◇현재 : 현재 장수삼계탕 256 8282
고려예식장 창업자 우종식의 저택으로 골목 안에 고래 등 만 한 집채가 그대로 남아있으며 마당에 석등2개 등 볼만한 나무들이 심겨져있다. 석등 받침대 돌은 읍성돌로 추정되며 팥색 색깔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최근까지 고려예식장을 경영한 우상택씨 소유라고 한다.
2002년 1월부터 ‘옛날집’이라는 한정식 집으로 사용 되다가 최근 장수삼계탕 집으로 바뀌었다.
■ 매일신문
◇위치 : 계산동 2가 71번지
◇문의 : 053- 255- 5001
해방 직후 매일신문사의 전신인 남선경제신문을 1946년 3월 우병진 대표가 창간했으며 당시 서문로에 영남일보가 먼저 창간을 했다. 1950년 ‘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개칭하고 가톨릭계 신문이 된다.
1958년 중앙로의 국민은행자리에 옮기면서 1960년 ‘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고 1981년 현재 매일신문으로 신사옥을 지어 계산동의 계산 성당 옆으로 옮겼다.
계산 성당문화지구에 우뚝서있는 빌딩 건물로 계산 성당미관의 1/3을 해치고 있어 옮겨간다면 근대건축물 계산 성당이 더욱더 제 모습을 찾을 것이다.
■ 매일신문 테러사건
‘9.14 대구매일신문 테러사건’이며 1955년 9월 13일 당시 주필이던 최석채 주필이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문제의 사설 때문에 발생했다. 9월 10일 임병직 대사가 대구를 방문할 당시 당국이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해 환영행사를 벌인 처사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사설이 나간 다음날 오후 4시 25분. 국민회 경북도본부차장 김민과 자유당경북도당 감찰부장 홍영섭 등이 이끄는 괴한 20여명이 백주에 신문사를 습격했다.
이들은 문선활자케이스를 뒤엎고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는 등 각종시설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당시 경북경찰국사찰과장 신상수는 ‘백주(白晝)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궤변으로 난동자들을 두둔해 한동안 이 말이 ‘시대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경찰은 최 주필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17일 전격 구속되었고 12월 6일 무죄가 선고됐다.
이어 1956년 5월 8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내림으로써 언론의 승리로 사건이 종결됐다.
■ 한일호텔 김용덕사장 저택
◇쌈지뜰 위치 : 계산2가 156번지
◇문의 : 053- 254- 0623(현재 쌈지뜰 식당)
한일호텔 김덕용씨의 저택으로 현재 그의 막내아들 김요섭씨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대로를 벗어나 약전골목과 달구벌대로 사이의 조용한 골목에 위치한 이 집은 2000년 12월 개업했다.
담장 허물기를 한 집이며 정원이 아름답다. 자연의 정취와 함께 실내외에서 여유를 즐기며 신선한 야채와 각종생선요리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매년 분기별로 주위 계산동, 남성로, 성내2동의 60세 이상 노인들에게 국밥을 조용히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아구찜, 가오리찜, 꽃게 찜이 먹을 만하다.
■ 구 일심관(사가이)
◇위치 : 계산1가 26-3
◇문의 : 053 254 9292
일심관(一心館)은 대구약전골목이 끝나는 약령서문 길 건너편 끝에 위치한다.
동명은 계산동1가다. 현재 사가이라는 일식집으로 영업 중이다.
일심관은 중구 상서동 춘앵각과 함께 대구 요정계의 쌍두마차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곳이었다. 90년대 중반 풍림식당으로 잠시 상호를 바꾸었다가 1997년 6월20일 IMF를 넘지 못 하고 건물 일부는 현재 일식당 사가이 본점 측에 팔렸다.
여주인 홍일심씨의 이름을 따서 ‘일심관’이 되었으며 일심관은 1960년대 후반 금호호텔 근처에 있던 영남별장자리에서 첫 출발을 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청수원 처럼 조금 품격 있는 밥집으로 출발했다가 1970년대 초 현재의장소로 이전하면서 고급요정으로 급성장했다. 이곳도 만경관 옆의 춘앵각 처럼 거물들이 많이 거쳐 갔다.
최규하 대통령, 내무부장관시절의 노태우대통령, 신민당국회의원 시절의 김영삼 대통령, 영관급시절의 전두환 대통령은 물론 이상희 내무부장관, 김현옥 서울시장, 지역의 시장·도지사들도 스쳐갔다. 대다수 요정들은 종로근처에 포진했지만 일심관만은 계산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심관이 종로 요정들보다 고위공직자한테 선호됐던 것은 종로에 가면 자칫 상관과 만날 확률이 높아 굳이 한적한 일심관을 선호하는 인사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심관과 지근거리에 있었던 계산성당의 일부 신자들은 계산동에 고급요정이 있다는 걸 무척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한 신자는 일심관을 다른 동네로 내몰기 위해 청와대에 진정서를 보낸 적도 있었다한다.
■ 피난민이 개척한 냉면집, 대동면옥
◇위치 : 계산동1가 13
◇문의 : 053-255-4450
강산면옥, 부산 안 면옥과 함께 대구를 대표하는 냉면전문점으로 부산 안 면옥을 부산창선동에서 열었던 안목천씨의 동생 안차천씨가 동산파출소 부근에서 개점했던 곳이다.
현재 대구에 있는 부산안면옥은 1960년 말 부산본점의 지점이었지만 본점이 문을 닫고 대구가 본점이 되었으며 대동면옥은 안차천씨가 1960년대 초 현재의 대구총포사 사이골목으로 이전했다.
56평의 일본적산가옥에서 크게 성공을 한다. 현재는 안차천씨에 이어 주인이 여러 번 바뀌면서 풍파를 겪는다. 2대 백모사장 시절 손님들을 많이 잃었고 이두영씨가 평북운상에서 냉면집주방장으로 있던 이창섭씨에게 기술을 전수받아 3대 사장이 되었고 현재는 4대주인 이옥자씨가 이어가고 있다.
대동 면옥은 온 육수로 유명하다. 온 육수는 주방장취향마다 조리법이 조금씩 다르다.
예전 이북사람들은 냉면 삶은 물에 국 간장을 조금 가미해 온 육수를 만들어 마셨다.
대동 면옥은 냉면 삶은 물과 고기 삶은 물을 섞는 반면 부산 안 면옥은 사골, 잡뼈 등을 약 24시간 삶은 물에 간장, 무, 생강, 파뿌리, 마늘 등 갖은 양념류를 넣어 빚는다. 같은 집안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육수와 음식 맛이 많이 다르다.
■ 복어의 자존심, 거창복어식당
◇위치 : 계산동1가 80
◇문의 : 053- 252- 0147
복어요리라고 하면 울산에 ‘청수 복집’ 부산에 ‘금수복국’ 대구에는 바로 ‘거창식당’이 있다.
30년 동안 변함없는 맛을 보여주는 이 곳은 취재를 거부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냉동 복어보다 생복어가 2배의 가격이지만 더 맛있다고 한다.
부산 금수복국은 ‘간장에 절여내 양념 섞어 만든 파 양념’이라고 밝혔지만 거창식당 국물의 비결은 알 도리가 없다. 칼칼한 복어국물에 톡 쏘는 김치 국물이 서로 잘 어울린다. 참 복탕(냉동, 9,000원), 복 국물로 만든 해초면, 복 지리탕 등이 있고 이 계산동 1가 이 골목에는 사가이, 대청마루, 대동면옥, 진주집, 금와식당, 강구식당 등 음식 맛이 수준급들이다.
■ 전경환씨 사돈댁, 구 대청마루 식당
◇위치 : 계산1가 55-1
◇문의 : 053- 255- 4556(대청마루)
현재 대청마루 식당으로 사용되는 이 집은 넓은 정원과 큰 집채가 볼만하다.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의 사돈댁이었다고 한다. 일심관 동편에 작은 골목사이에 있다.
일심관 맞은편에도 재개봉관으로 유명했던 동아극장 사장의 집이 있었다.
전씨가 사돈댁을 방문할 때면 근처 길목에서 관할 경찰서 정보형사들과 앞산정보부요원들이 행인들을 통제했고 주민들도 바깥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없어 불편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 성 밖 골목의 명물, 원조할 매 칼국수
◇위치 : 계산동2가 149-1
약전골목의 남쪽, 성 밖 골목에 자리 잡은 이 집은 간판이 없었던 칼국수 집으로 더 유명했으며 사람들에게 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점심때 30분을 기다려도 먹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간판을 달고 싶어도 귀찮고 달 시간도 없어요’라고 하던 집이 최근 주변에 칼국수집이 늘어나면서 ‘원조할매칼국수’라는 간판을 달며 ‘원조’의 주장에 합류하게 된다.
이 집 맛은 군위군 군위읍 출신인 김순자씨 한 테서 나오며 7년 전 대구로 나와 고향에서 해먹던 방식의 칼국수를 선보였다. 면발보다는 육수 맛에 신경을 쓰며 ‘'빵게’로 국물로 육수를 만들어 낸다.
금방 담은 겉절이 배추와 대파 뿌리가 둥둥 떠있는 양념장이 칼국수의 매력이며 점심시간 12:00시 정각이 되기 전에 가서 미리기다려도 ‘땡’해야지 국수를 주기 때문에 그날 그날의 운에 따라 칼국수 한 그릇 받게 된다.
■ 화교잡화점 성립 행 왕수강(王修網) 사장
<사진> 인터뷰사진
◇위치 : 계산동1가 13
중국 산동성이 고향이다. 1945년 해방 후 ’1947년 한국에 넘어온 화교1세대다.
16세 때 전라도 영광에 살다가 21살 되던 1950년 8월 대구로 피난 차 넘어왔다.
23세에 결혼했고 딸4, 아들2을 낳았다. 1956년 25살 때 성립행(成立行) 창업. 장사를 배우려고 포목, 잡화점에서 일을 배웠다. 대신동 동산병원 건너편 대신동 115번지에서 3-4년 장사하다가 돈을 벌어 1969년도에 수긍록(隋?祿)이라는 분이 건물을 지어주셨다.
수긍록은 종로에 화교성당을 지었던 건축가다.
그 당시 노가다 일임이 400원, 기술자는 800원 하던 시잘 2-3개월 정도 공사를 했다.
개업할 당시에 간판이 있었는데 태풍이 불어서 떨어져 없어지고 다시 달지 않았다.
장남인 아들은 가업을 잇고 있으며 장손자가 20살(2006년) 대학에 갔다.
2년 정도 화교소학교에 다니다가 3학년부터 한국초등학교에 다녔다.
며느리는 약14년 전에 한국국적으로 귀화를 했다. 손자들은 한국국적을 가지게 된다.
2째 아들은 대만에서 의사를 하고 있고 2째 딸은 충남 서천군 장항에서 살고 3째 딸도 대만 갔다. 삼촌은 서울에 정착하셨는데 서소문근처에서 잡화점을 운영했다. 경산에서 땅을 살 때 한국사람 이름으로 하다가 사기를 당했다. 평당2000원하던 땅을 1800평 2명이 공동명의로 70년대 초에 구입했다.
그 당시에 화교가 땅을 구입하려면 법무부장관의 명의로 3급 과장급 이상의 공무원이 보증을 써야만 가능했다. 처음엔 부인이름으로 샀지만 관리가 힘들어서 한국사람 3명과의 공동명의로 바꾸었다가 경산에 국도 놓는다고 도청에서 보상처리를 1억800정도 해준 것 같은데 사기를 당했다.
이병철씨 밑에서 배운 박윤갑(朴允甲)이라는 사람은 상공회의소 소장을 했는데 경상제분을 운영했다.
1960년대 삼분파동 경상제분을 통해 배급을 받았다. 화교들이 경영하는 농장이 30여호 있었는데 동촌, 침산, 자갈마당 근방 등에서 농사를 했었고 ‘양씨할아버지(화교협회 매입시 20원을 기부한 양심제 씨로 추정)’가 마지막으로 채소농사를 하면서 장사를 했다.
■ 대구에 정착한 화교인들의 경제활동
일제시대 대구지역화교의 직업별분포를 보면, 60%이상이 상업이며, 농업, 광공업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이런 추세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약80% 이상을 차지한 것을 보면, 상업이 주요한 생업으로 볼 수 있다.
1930년 당시의 화교상점업주를 업종별로 나눠보면, 물품판매업주 352명, 중국음식점주66명, 노점 및 행상106명, 여관업주3명, 이발사1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 가운데 물품판매업주(物品販賣業主)가 352명으로 상대적으로 많은데, 그 가운데 포목상(布木商=직물피복판매업자) 217명이었다.
당시 대구지역 전체포목상은 815명으로 그 가운데 한국인이550명으로 전체의67.5%로 가장 많고, 화교는217명(26.6%)으로 그 다음이며, 일본인은47명(5.8%)으로 상대적으로 적었다.
1920년대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화교포목상의 상호명(주인명)은 덕순영(德順永), 장옥당(張玉堂), 의성공(義成公),손중선(孫中選), 복취동(福聚東),손경정(孫鏡亭), 경성정(鏡盛亭),장인항(張仁巷), 조혼생(趙昆生), 함성장(合盛長),왕우삼(王友三), 덕태창(德泰昌),공점홍(孔漸鴻), 화성호(華盛號),곡야방(曲也芳)이다. 이들 포목상은 모두 년 매출이 10만원 이상의 큰 도매상들이었다고 한다.
이들 포목상은 1931년 화교배척사건, 1934년 화교입경세(華僑入境稅), 국경출입시 세금부과실시,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등의 잇따른 전쟁과 정치적사건으로 인해 쇠퇴해 이들 포목상은 1940년대 완전히 사라졌다. 앞에 소개된 성립행과 같은 잡화상(雜貨商)은 포목상의 비해 경영규모가 적었지만 다수 존재했다.
특히 화교사회의 리더였던 연보주(連寶珠)의 연성영(連盛永)은 1928년부터 1968년 그가 죽기 직전까지 현 중부경찰서 맞은편에 자리하여 오래 동안 영업, 대구화교의 대표적인 잡화 상점이었다. 현재 영업중인 성립행(成立行,주인 王修網)은 1956년 설립되어 약 50년간 밀가루 등 중화요리점 재료를 판매하면서 화교 잡화상의 명맥을 잇고 있다. <끝>
출처>[대구신택리지2006]에서 직접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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