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근현대 인물

현정은 회장의(현대그룹) 할아버지 현준호 중추원 주임참의

야촌(1) 2007. 10. 22. 14:05

■ 현준호(玄俊鎬) 중추원 주임참의의 친일행각(현대그룹 현정은회장의 조부)

 

▲현준호 중추원 주임 참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출신, 자는 치도(致道), 호는 학파(鶴坡)로 영암 지역의 대표적인 부호이다.
1930년대 부터 중추원 주임참의 역임.

1941년 황국정신의 앙양, 강력한 실천력의 발휘, 시국인식의 철저와 대책결의, 근로보국의 강행 등의 강령을 채택한 친일단체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후일 조선임전보국단으로 발전)라는 친일 관변단체 상무위원으로 참여.

중추원에서 윤치호 등 고문 66명과 18명의 참의가 모여서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기 위하여 강연반을 결성하여 조선청년학도를 전장에 제물로 바치는데 앞장섬.


◈현기봉(玄基奉,1855~1924) 중추원 주임참의의 친일 행각
  (현대그룹 현정은회장의 증조부)

현준호의 아버지임. 중추원 주임 참의. 1919년 각지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나주, 무안, 제주 등 전남 6개군을 순회하면서 주민들에게 만세를 부르지 말도록 종용.

 

현준호(玄俊鎬 : 1889 ~ 1950)

   ◇실력 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금융자본가

   ◇1925년 호남은행 대표취체역, 1930년 중추원 주임 참의

   ◇1938년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

   ◇실력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1923년경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운동 등 이른바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던 많은 이들이 내세웠던 것은 조선민족은 아직 독립할 만한 실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아직은 독립운동에 앞서서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실력양성의 가장 중요한 부문으로 교육과 산업의 진흥, 특히 그 가운데서도 민족자본의 육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들운동은 불과 1년도 못 가 그 열기가 시들어 버렸다. 그것은 조선민족의 성의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조선 민족이 독자적으로 실력을 기른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물산장려운동 등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이들 실력양성론자들은 일제와 타협하면서 정치적으로 자치운동을 추진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점차 자주독립의 지향과는 거리가 멀어져 갔다. 그리고 1930년대에 들어서는 일제지배하에서 자본주의적인 근대화를 우선 추진한다는 방향으로 전환하였으며, 1930년대 말 이후에는 마침내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친일적인 길을 걸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실력양성론자에서 친일파로 전락한 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이들로 꼽히는 것은 물론 경성방직및 동아일보 그룹이다. 이 그룹은 또 전국적으로 같은 지향성을 갖는 이들과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호남 현지에서 이들과 노선을 같이 하고 있던 대표적인 인물을 꼽는다면 물론 현준호일 것이다.

 

현준호는 한말 송진우, 김성수, 김병로 등과 담양 창평의 영학숙에서 같이 공부하였으며, 1910년대에는 동경에 유학하여 메이지대학에 다니면서 역시 같은 시기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현상윤, 최두선, 김병로, 백관수, 신익희, 김준연 등과 교유를 나눈 바 있었다. 이들 가운데 현준호는 특히 호남다화회(湖南茶話會) 등을 통해 김성수, 송진우 등과 깊은 관계를 가졌고, 이후 이들은 같은 인생행로를 걸어갔다.

 

◈부친 현기봉의 두드러진 친일 성향

 

현준호는 1889년 전남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에서 현기봉(玄基奉)의 아들로 태어났다.

현씨 집안은 현준호의 증조부대에 천안에서 영암으로 옮겨왔는데 어떤 경위로 가세가 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현준호의 조부대에 이미 3천석의 대지주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현기봉은 영암군의 향교장의(鄕校掌議), 영암군 향약소 도약장(鄕約所 都約長)을 지내는 등, 재부와 사회적 지위를 겸하여 영암 지역에서 유지로 꼽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05년 일본의 @조선보호국화# 이후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의병들의 부호에 대한 자금지원 요구가 잇따르자 이를 피해 일본경찰력의 보호를 받을수 있는 목포로 이사를 했다.

 

이후 그는 무안부 민단장(務安府 民團長)을 시작으로 영암군 사립구림학교장, 무안군 잠업전습소장(蠶業傳習所長),목포신흥철공주식회사 사장, 광주 농공은행 취체역(農工銀行 取締役), 목포부 참사(木浦府 參事), 명치신궁봉독회(明治神宮奉讀會) 조선지부 위원, 목포부 무안군연합 물산품평회 협찬회부회장, 조선식산은행 상담역, 제국군인후원회 특별회원, 목포사립유치학 교장, 경성해동물산주식회사 사장, 목포창고주식회사 사장, 전라남도 참사(參事, 1919년), 전남 도평의회원(1920), 전라남도 산업조사위원(1921), 중추원 주임 참의(中樞院奏任 參議, 1924) 등을 차례로 지내는 등 경제계와 관변에서 폭넓은 활동을 보였다.

 

1910~1920년대의 시점은 일제가 조선인 유지계급들에게 특별히 친일을 강요한 시점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관변에서 상당한 활약을 한것은 당시의 시점에서 그의 친일적 성향이 두드러지는 것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 그가 참여한 부 참사, 도 참사, 도 평의원, 중추원 참의 등이 특별한 권력을 부여하는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이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자리가 경제적인 부를 축적해 나가는데 배경으로 작용할수 있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기봉의 친일적 성향을 잘 보여 주는 것은 1919년 각지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나주, 무안, 제주 등 전남 6개군을 순회하면서 주민들에게 만세를 부르지 말도록 종용 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종용이 있었다고 해서 이 지역의 주민들이 만세를 안부를리 만무했지만 어쨌든 만세를 부르지 말라고 종용하고 다닐 정도였다면 당시로서는 드물게 보는 친일적 행각이었다고 할것이다. 현기봉은 1924년 사망했다.

 

◈현준호의 은행경영과 친일의 길

 

현준호는 앞서 본 것처럼 1906년 창평 영학숙(昌平 英學塾)에서 잠시 공부한뒤 서울로가 휘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2년에는 도쿄로 가메이지대학 법과에서 공부하였다.

 

1917년 귀국한 그는 1918년 부터는 @조선인은행# 설립을 꿈꾸고 이를 준비하던 중 3|1 운동을 만나게 된다. 그는 2월경 그의 옛 동료들인 송진우, 현상윤 등이 3|1 운동을 준비하고 있는 줄 알았으나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3|1 운동의 여파가 지나간 4월 부친 현기봉의 해동물산주식회사 창립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7월에는 마침내 호남은행의 설립을 발기했다. 호남은행이 창립된 것은 1920년 8월이었으며, 현준호는 여기서 전무취체역을 맡았다.

이후 호남은행은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목포, 순천 등지에 지점을 내는 등 운영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섰다.

 

그리고 1925년에 그는 마침내 호남은행 대표취체역을 맡았다.

한편 현준호는 1923년 서울에서 시작된 민립대학기성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는 경성에 중앙부, 각 지방에 지방부를 두어 모금운동을 폈는데, 지방부의 경우 대부분 그 지방의 유지, 부호들로써 위원회를 구성하여, 그의 부친 현기봉도 광주군 지방부의 집행위원장을 맡았으며, 현준호는 5백 명분의 입회금을 냈던 것이다.

 

이같이 이른바 민족자본의 육성과 민립대학의 육성 등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자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 1920년대 초의 현준호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개량주의적인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그는 이러한 운동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또 부친이 사망한 뒤인 1920년대 중반 이후 급속도로 일제에 밀착되어 간다.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전남 도평의회원이 되었으며, 1930년에는 중추원 주임 참의가 되었다.

이같은 그의 총독부 권력에의 접근은 호남은행의 경영에도 큰 도움이 되었던 듯하다.

 

1930년대 들어 각 지방의 조선인 은행들이 합병되어 갈 때, 대표 취체역 현준호가 이끄는 호남은행은 1933년 오히려 동래은행을 합병하여 그 기반을 더 튼튼히 다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현준호는 1933년 중추원 참의에 재임명되었으며, 1936년에도 재 임명되었다.

 

그는 1933년 춘동간척사업을 완공하고, 이어서 서호면 성재리와 군서면 양장리간의 1.2km의 갯펄을 막는 서호간척사업을 계획했다. 이곳을 막으면 총 9백 정보의 농토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39년 마침내 간척사업의 허가를 총독부로 부터 받아냈는데, 이 간척사업의 허가에도 그의 중추원 참의직은 훌륭한 배경 구실을 하였을 것이다.

 

◈내선일체의「소신」

 

현준호의 친일활동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중일전쟁 이후 본격화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7월 15일 미나미 조선총독은 시국의 중요성과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지도적 지위를 대중들에게 선전할 것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학무국은 1, 2차의 전선(全鮮)순회 시국강연반을 결성하였다.

 

1937년 8월 6일부터 약 1주일 동안 행해진 시국강연의 연사 가운데 현준호는 전남지역 연사의 한 사람으로 들어가 있었다. 또 1938년 1월경부터 총독부는 장기전에 대처할 대내|외 중요 정책의 입안 심의를 위해 전시 최고심의기관의 설치를 검토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1938년 8월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가 설치되었다.

 

이 대책위는 $조선총독의 감독에 속하고 그 자문에 응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시국대책에 관한 중요 사항을 조사|심의함&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회장은 정무총감이 맡고 위원 및 임시위원은 학식과 경험이 있는 자 및 각 기관의 고등관 중에서 총독의 주청으로 내각이 임명한다고 되어 있었다.

 

당시 임명된 위원은 총 97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조선인은 현준호를 포함해서 11명이었다.

당시 현준호와 함께 임명된 조선인 시국대책조사위원은 김연수*(경성방직 사장), 박영철*(중추원 참의), 박충양(중추원 참의), 박흥식(화신 사장), 윤덕영*(남작, 중추원 고문), 이기찬(참의), 이승우*(참의), 최린*(참의),한규복(참의), 한상룡*(참의, 조선생명보험 사장), 등이었다.

 

현준호가 이들 친일파 거물들과 시국대책조사위원에 임명 되었다는 것은 그에 대한 총독부측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이 위원회는 1938년 9월 6일부터 첫 회의를 열고 총독의 자문 사항에 대하여 심의하였는데, 이 때 현준호는 산업 경제관계를 담당한 제2분과회의 전임위원으로, 문화|사회관계를 담당한 제1분과회의 겸임위원으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현준호는 어떤 발언을 하였을까. 현재 남아 있는 {조선총독부 시국대책 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그는 제1분과회에서 다루고 있던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문제에 대하여 $제1분과회에서 내선일체의 강화|철저에 관한 건은 본 중대 시국에 가장 중요하다.

 

이미 병합 이래 28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선일체의 철저를 기하지 못하여 금일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라면서, 내선일체를 이룰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소신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먼저 내선일체를 이루는 데는 무엇보다도 @정신의 통일#과 그 내용을 속히 강화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교육, 실업방면에서 일본인과 조선인간의 차별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조선의 교육기관을 정비할 것과, 실업에서도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대등한 기회를 줄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또 조선에 와서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은 그 돈을 일본으로 가져갈 것이 아니라 조선에 재투자하여 조선인들로부터 반감을 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부산과 시모노세키간을 오가는 선편에서 조선인들에게 도항증명서를 발급받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역시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이므로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결론적으로 일본인은 형(兄)의 위치에서 조선인에 대하여 관대하고 포용력 있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여기서 조선민족에 대한 차별 대우를 철폐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현준호의 발언은 그가 상당히 민족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친일파들은 일반적으로 명실상부한 내선일체의 실시, 즉 조선인을 식민지백성으로 대우하지 말고 명실상부한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대우해 달라고 주장하고 있었고, 앞의 현준호의 발언도 그와 같은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이다.

 

◈전남지역 대표인사로서 친일단체에 적극 참여,

 

현준호는 시국대책위원회 제2분과 회의에서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우는 데는 무엇보다도 국민의 식량문제를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1920년대 시모오카(下岡) 정무총감은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고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했던 것이라고 칭송하고, 중단된 산미증식계획을 다시 부활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본 제국의 1년 동안의 인구증가가 1백만 내지 120만에 달하므로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이와 관련하여 적어도 1년에 1만 정보 이상의 간척지 또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1반보당 3석의 수확을 친다면 1만 정보에서 1년에 약 30만 석을 얻을 수 있다면서, 10년 혹은 20년의 원대한 계획을 세워 10년에 3백만 석, 20년에 6백만 석을 증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발언과 1930년대에 착수한 그의 간척지 개간사업은 어떠한 관련이 있었을까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한편 현준호는 1941년에는 윤치호*계열에서 준비하던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라는 친일 관변단체에 상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황국정신의 앙양, 강력한 실천력의 발휘, 시국인식의 철저와 대책결의, 근로보국의 강행 등의 강령을 채택한 친일단체로서 최린, 김동환* 등이 만든 임전대책협의회와 합동하여 조선임 전보국단이 된 단체였다.

 

일제는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실시한 이래 조선청년학도를 전장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에 따라 1943년 10월에는 학도병강제모집제도가 공포되었고, 1944년 4월에는 마침내 징병제도가 실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학병모집이 공포되자 일제는 친일파들을 앞세워 학도병 동원에 열을 올렸다. 당시 현준호가 속해 있던 중추원에서도 윤치호 등 고문 66명과 18명의 참의가 모여서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기 위하여 강연반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현준호는 전남지역 시국 강연반에 소속되었다.

 

1945년 8월 15일은 현준호에게도 찾아왔다.

그는 해방 이후 특별한 정치활동을 보이지 않은 가운데 광주의 호남동에서 바둑으로 소일했다.

마침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친일파들을 다루기 위한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전남에도 반민특위 사무실이 설치되었다. 1949년 5월 7일 현준호는 출두지시를 받고 반민특위에 출두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중추원 참의 등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맡게 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또 호남은행도 일본인들을 한사람도 쓰지 않아 끝내 동일은행에 합병 당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해방될 때까지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세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전남특위는 현준호를 불구속 처리했다. 1950년 6.25가 일어 났을 때 광주에 있던 현준호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들에게 붙들렸고 9월 28일 후퇴하는 인민군들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집필자 : 박찬승(목포대 사학과 교수)

 

[참고문헌]

◇阿部 薰, {朝鮮功勞者銘鑑}, 民衆時論社, 1935.

◇朝鮮總督府, {조선총독부 時國對策調査會 會議錄}, 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