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황제헌원(皇帝軒轅) - 중화민족의 시조로 추존.

야촌(1) 2006. 1. 4. 16:00

■ 황제헌원(皇帝軒轅) - 중화민족의 시조로 추존.

 

▲황제헌원(皇帝軒轅)

 

황제(皇帝)는 중국의 전국시대 이후로 문헌에 등장하는 제왕(帝王)중 첫 번째 제왕으로 삼황(三皇)에 이어 세상(중국)을 다스렸다고 한다. 황제 헌원씨(皇帝軒轅氏)라고도 한다.「황제(皇帝)」의 명칭은 제위시 황용(黃龍)이 나타나 토덕(土德)의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오행설에 황색은 흙에 해당된다] 도교(道敎)의 시조로도 추앙 받고 있으며, 죽어서 신(神)이 되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한 대의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는 소전(少典)의 아들로, 성은 공손(公孫), 희(姬)라고도 하며,이름은 헌원(軒轅)이고, 치우[蚩尤: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가 동(銅)으로 된 머리와 철로 된 이마에 긴 뿔을 가졌고, 성질은 사나웠다고 한다.

 

한 대의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는 소전(少典)의 아들로, 성은 공손(公孫), 희(姬)라고도 하며,이름은 헌원(軒轅)이고, 치우[蚩尤: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가 동(銅)으로 된 머리와 철로 된 이마에 긴 뿔을 가졌고, 성질은 사나웠다고 한다.

 

황제(黃帝)와 탁록(涿鹿)에서 싸웠으나 패하여 포살(捕殺)되었다고 한다. 중국 전국 시대, 제(齊)나라에서 군신(軍神)으로서 숭배되었다]를 물리치고, 신농[神農>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삼황(三皇)의 하나.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으며, 팔괘(八卦)를 겹쳐 육십사괘(六十四卦)로 점을 보는 방법을 만들고, 오현금(五絃琴)을 만드는 등 농업, 의약, 음악, 점술, 경제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에 이어 오늘날 중국의 하북성인 탁록(啄鹿>상곡(上谷)에 도읍하여 제왕이 되었다고 한다.

 

황제헌원씨(皇帝軒轅氏)의 왕후는 서릉씨(西陵氏)이다[서릉씨는 최초로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선잠단[先蠶壇: 1400(정조 2)년에 건립하여 선잠제(先蠶祭의식을 행하던 단(). 양잠의 창시자인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지내던 단으로지금의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었다]

 

아뭍은 황제시대는 신화와 전설시대이고 문자가 없으므로 성이 없었으며, 모계 씨족사회였다. 따라서 당시 인물들의 실존성과 부계혈통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은 최초 모계 부족을 나타내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갑골문이 등장한 은나라 후반기에 등장한다.

 

「황제(皇帝)」의 성이 공손(公孫), 또》는 희(姬)라고 하는 것은 주나라 왕족이 헌원씨(軒轅氏)의 자손이라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근거하고 있으나 당시에는 성이 없었으므로 희서의 황제인지 고증할 수 없다. 한나라시대 이후 중국의 여러 성본 들이 황제의 후손으로 주장하여 황제의 성씨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황제의 출자는 진나라시대 생겨났다. 진시황제가 왕보다 높은 칭호를 원했고, 이사는 삼황오제를 합쳐 황제라는 명칭을 만들어 시황제에게 바쳤다. 진나라시대 황제는 헌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고, 신화속 인물 삼황오제를 모두포괄하여 만들어진 촌칭 이었다.

 

헌원이라는 이름은 한 대의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 《사기(史記)》에 처음 등장하였다. 이 후 대부분의 왕조가 헌원의 후예로 기록하였다. 황제와 헌원이 하나의 개념으로 본격적으로 합쳐진 것은 당나라 왕조가 황제라 칭하고 헌원의 후손으로 공표한 이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