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연명[陶淵明, 365~427, 東晉 말기부터 南朝의 宋때의 詩人
▲도연명(陶淵明) 초상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淵明)은 자이다.
도연명(陶淵明)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官僚生活)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隱遁生活)에 들어간 시기(時期)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彭澤) 현령(縣令)이 된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退官)했다. 퇴관의 결정적(決定的)인 동기(動機)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해 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整齊)하고 맞이 하십시오" 하고 진언(進言하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 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辭任)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宋書〉隱逸傳》
또 한편으로 이때의 사퇴 동기에 관해서 도연명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취임(就任)해서 어느 정도 되자 집에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럭저럭 벼가 익거든 빠져나가려고 생각하던 차에 누이의 부음(訃音)이 들려오자 조금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 이때 나온 작품이 유명한 《구거래사(歸去來辭)》·《귀전원거오수(歸田園居五首)이다.
도연명(陶淵明)은 중국 역사상 거의 유일(唯一)한 본격적(本格的)인 은일시인(隱逸詩人, 20여년 은둔생활함)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매우 높다. 그의 친구였던 안연지(顔延之)의 《도징사뢰(陶徵士誄)》는 그의 고결한 인품을 칭찬한 것이었다.
도연명의 인품과 시문은 이미 육조시대에도 높은 평가(評價)를 받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양(梁)나라 강엄(江淹:444~505)이 한(漢)부터 진송(晉宋)까지의 시인 30명의 시를 모방해서 지은 《잡체시(雜體詩)》30수.《文選: 양조시대의 시문총집으로서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문집》 권31에서는 도연명을 조식(曹植)· 육기(陸機) 등의 유명한 시인과 나란히 열거(列擧)하고 있다.
도연명의 작품으로 가장 특색(特色)있고 후세까지도 중시되고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5언시이다. 우선 5언 이라는 형태는 육조시대(六朝時代: 229-589)를 통해 시인들이 특히 애호(愛好)한 보편적(普遍的)인 형식(形式)이었고 그의 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시가 특히 주목(注目)되고 애송(愛誦)되는 까닭은 고요하고 자연스러운 읊조림과 멀리 세속의 티끌을 넘어서서 맑고 깊은 운치(韻致)를 칭송(稱頌)하는 시의 경지(境地) 때문이다
◇육조시대(六朝時代)
중국 삼국시대의 오(吳: 229-280) · 동진(東晉: 317-420) 및 남조(南朝)의 송(宋: 420-479) · 제(齊: 479-502) · 양(梁: 502-557) · 진(陳: 557-589)을 합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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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안[謝安, 320(동진 태흥 3) - 385(태원 10)]
▲사안(謝安) 초상
자(字)는 안석(安石), 동진(東晋)의 정치가로 진군(陳郡) 양하[陽夏: 지금의 허난성(河南省)에 속함] 사람이다. 그는 오랫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속세를 등 진채 회계(會稽: 저장성) 동산(東山)에서 조용히 지내며, 왕희지(王羲之: 307~365)· 지둔(支遁: 314-366)등과 교유하면서 풍류를 즐기다가 백성들이 학식(學識)과 명망이 높은 그가 나와서 세상을 구해주기를 갈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안석(安石)이 나오지 않으면 백성들은 어떠 하란 말인가?" 하였다.
드디어 나이 40이 넘은 중년에 나라를 구할 결심을 하여 중앙정계에 투신하여. 관리가 된 그는 처음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의 휘하에서 활약하다가 이부상서의 요직으로 진급하였고, 제위(帝位)를 찬탈하려는 환온의 야망을 저지하였다.
그 후 환온(桓溫)이 울화병으로 죽게 되자, 사안은 수상으로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기원 383년 전진(前奏)의 부견(符堅)이 백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정토대도독이 되어 형의 아들 사현(謝玄)과 함께 8만의 군사로 격퇴하고, 진(晉)나라를 크게 발전 시켰는데. 그 공에 의하여 태보(太保)로 승진, 도독십오주 군사(軍事)가 되었다.
이는 중국역대 전사에서도 첫 번째로 꼽히는 비수지전(淝水之戰)이다. 사후에 태부(太傅)로 추증되고, 문정(文靖)이라 시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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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謝安<八月五日帖>.收入 ▲致謝万的親手書信
<宝晋斋法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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