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항우와 유방의 인물비교.

야촌(1) 2006. 1. 3. 10:42

■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의 인물비교.

 

▲한태조 고황제 유방(漢太祖 高皇帝 劉邦, 기원전 247년~기원전 195년)은 전한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02년~기원전 195년)이다.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토벌하고 전한을 세웠다.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후 왕실의 안정을 위해 개국공신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그리고 항우는 의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자기 친족이 아니면 인정 해주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유방은 항우의 반대되는 인물로 오히려 자기 가족들을 등한시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럼으로 주변에는 항시 능력 있는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한신(韓信, ?~BC196), 장량(張良 ? ~ 기원전 189년), 소하(蕭何, BC? ~ 193 ), 진평(陳平, 미상~BC 178) 등등......^^

 

하지만 항우는 적들에게도 지나치게 가혹했다. 항복한 진나라 병사 20만을 한꺼번에 땅에 생매장 한것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이다. 이역시 유방은 항우와 정반대인 것이다.

 

이와 같은 확연한 두 사람의 차이점 때문에 초반에 유리한 상황의 항우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천하는 유방이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항우 같은 인물에게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책사 장량(張良) 같은 인물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다. 

 

 

▲항우(項羽, 기원전 232년~기원전 202년)는 중국 진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초한전쟁 때, 초나라의 군주였다. 유방에게 패배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강동 지역에서는 항량이 거병했다. 항량은 진에 의해 멸망했던 초나라 대장군 항연의 아들로 그의 곁에는 조카 항우가 있었다. 타고난 무인이었던 항우는 24살 때부터 항량을 따라 진나라와의 전쟁에 참전해 공을 쌓아갔다.

 

항량의 휘하에는 유방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강소성 패현의 빈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난 유방은 본래 무위도식하던 백수건달로 나이가 들어 말단 관리를 지내기도 했지만, 근본은 동네 깡패였다. 명문 무인가의 항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흙수저였던 셈이다.

 

초나라 부활을 기치로 든 항량은 곳곳에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며 승리를 이어갔지만, 기원전 208년 9월 진나라 명장 장한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숙부라는 배경이 없어지자 항우는 초회왕의 견제를 받아 북방의 전쟁터로 내몰렸다.

 

원래 초회왕은 한낱 양치기였지만, 항량이 초나라 왕실의 피가 흐르던 그를 발굴해 왕으로 추대했다. 항우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초회왕은 항우가 전쟁터에서 죽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항우는 북방전쟁에서 연전연승하면서 일약 반진(反秦) 세력의 리더로 떠올랐다.

 

■ 초한 대전의 승패를 좌우한 항우와 유방의 결정적 차이점

 

흙 수저 유방과 금수저 항우의 싸움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흙 수저 유방의 승리로 결판났다.
유방은 주색을 즐기고 항우에 비하면 인물도 못생겼고 용맹도 한참 처진다.

 

그는 어떻게 최종 승자가 되었을까?
일단, 이 둘 두 사람에게는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다름 아닌 경청의 자세....

 

모든 면에서 유방은 항우에 한참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결정적으로 남의 말을 잘 듣고 그 사람의 의견에 옳은 점을 잘 수용한 반면 항우는 자신의 능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신하들의 말을 자주 무시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유방에게는 책사로 소하와 장량 무장으로는 한신과 번쾌가 있었다면 항우에게는 범증과 종리매라는 뛰어난 책사와 무장이 있었으며 항우 자신이 워낙 뛰어난 책략가이면서 장수였기에 신하들 간의 우열이 만든 결과라기 보다 항우의 성격이 결국시작은 미약했던 유방에게 지고 만 것이다.


또한 항우와 유방이 그의 여인에게 취한 행동 또한 달랐다.
항우와 우희가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였다면 유방과 여치의 관계는 단순한 정략적 관계였다.


결정적으로 여치가 항우에게 사로잡혔을 때 유방은 여치를 구하려 하지 않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통일 이후 여치를 중국 역사상 최고의 악녀로 만들게 된다.


반면 우희를 향한 항우의 사랑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패왕별희"라는 경극으로 지금까지 사랑받을 정도로 대단하였다고 하니 한 사람은 지고지순한 순정파인 반면 유방은 성공을 위해 사랑하는 여인까지 버린 야심가라 할 수 있다.

 

유방의 군대가 사면에서 항우의 군대를 포위하고 구슬픈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며 항복을 종용하게 되고 그렇게 항우와 우희는 이별을 하게 된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바로 "사면초가"다.

 

 즉, 항우와 유방의 싸움에서 결정적 차이는 경청의 자세와 옳고 그름을 빠르게 판단하여 냉철하게 현실에 반영하는 자세이며 바로 지도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