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소동파(蘇東坡) - 중국 송때의 시인

야촌(1) 2005. 6. 20. 00:28

■소동파(蘇東坡, 1036.~1101) - 중국 송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

 

중국 송(宋)나라의 시인·산문작가·예술가이다.

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 동파는 그의 호로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따온 별칭이다. 아버지 소순(洵),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그는 북송 인종(仁宗) 때 메이산[眉山: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되었다.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은 두 형제를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의 시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고 격찬을 받았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나란히 급제했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060년 복상(服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과 함께 급제했다. 이어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에 있음)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수도에 남게 된 동생과 헤어져 임지로 떠났다. 봉상부는 서주(西周) 이래의 여러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공자묘의 석고(石鼓:고대문자를 새긴 10개의 북 모양의 돌)와 카이위안 사[開元寺] 동탑(東塔)에 남아 있는 당대 왕유(王維)·오도현(吳道玄)의 불화(佛畵) 등을 접한 감회를〈봉상팔관 鳳翔八觀〉에서 읊었다.

 

봉상부에서의 임기가 끝나 상경한 1065년에 부인 왕씨(王氏)와 사별하고 그녀의 생전 모습을 〈망처왕씨묘지명 亡妻王氏墓地銘〉에 담았다. 이듬해 아버지 소순마저 죽자 아버지의 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상을 치렀다. 

 

탈상(脫喪)하고 상경한 1068년은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로, 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중앙정부의 물자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한 균륜법(均輪法), 농촌에 저리자금을 융통하여 빈농을 보호하려는 청묘법(靑苗法) 등 이른바 신법(新法)을 시행하던 시기였다.

 

신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감관고원(監官告院)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다가 지방 근무를 청하여 저장 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근무했고, 이어 밀주(密州: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음)·쉬저우[徐州]·후저우[湖州] 등지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신법으로 인해 고생하는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써 묘사하고는 했다. 후저우 지사(知事)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다. 이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 烏臺詩案〉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黃州: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縣])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좌천되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황주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그의 시는 자유분방한 심정과 재능의 표현을 통해 경쾌한 리듬 속에 절묘한 비유와 유머를 담고 있다. 그의 시는 모든 사람에 대한 폭넓은 애정을 깔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고 인간의 선의(善意)를 신봉했다.

 

그는 사(詞)에서도 기존의 완약(婉約) 대신에 호방한 사풍을 창시했다. '적벽회고(赤壁懷古)’라는 부제가 붙은 《염노교(念奴嬌)》·《수룡음(水龍吟)》등은 영물시(詠物詩)의 극치라 일컬어진다. 한편 산문(散文)에서는 당송8대가 중 소씨 부자, 즉 3소가 포함되었다.

 

동파는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청년기의 생각을 평생토록 일관했다.〈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등의 비문,《유후론(留侯論)》·《범증론(范增論)》등의 사론(史論)을 비롯해 많은 산문을 남겨 지금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소동파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정통적인 서법과 당대 안진경(顔眞卿) 일파의 혁신적 서법을 겸비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글씨 자체보다도 살아 있는 정신과 기백의 표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동파집(東坡集)》40권과 《동파후집(東坡後集)》20권은 남송 대의 판본이 여러 종류 남아 있다.

 

이 두 책에 《주의(奏議)》·《내제집(內制集)》·《외제집(外制集)》·《응소집(應詔集)》·《속집(續集)》을 합친《동파칠집(東坡七集)》은 100권이 넘으며,《동파전집(東坡全集)》이라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