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맹자(孟子). 순자(荀子)

야촌(1) 2005. 5. 2. 18:12

■ 맹자(孟子 BC 372~289/84세)

 

이름은 맹가(孟軻)이다. 자(字)는 자흥(子輿) 또는 자차(子車)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에 있었던 추(趨)에서 출생하였다. 공자(孔子)의 유교사상을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어릴 때 현모(賢母)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유명한 고사이다. 제후(諸侯)가 유능(有能)한 인재들을 찾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배출(輩出)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서 맹자(孟子)도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遊說)하고 돌아다녔으나, 자기의 주장이 채택(採擇)되지 않자 고향에 은거(隱居)하였다.

 

제후(諸侯)가 찾는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외교적 책모(策謀)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道德政治)인 왕도(王道)였으며, 따라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理想的)인 주장(主張)이라고 생각되었다. 만년에는 제자(弟子)교육에 전념(專念)하였고, 저술(著述)엔 《맹자(孟子)》가 있다.

 

《孟子》에는 독자를 숨 막히게 끌고 가는 세찬 문장력(文章力)이 발휘(發揮)되어 있어 의기(意氣)가 소침(銷沈)했을 때 펼쳐 읽으면 모르는 사이에 생기가 복받쳐 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고, 의욕(意慾)을 되찾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가 하면 변설(辯舌)의 사이에 기상천외(奇想天外)의 비유(譬喩)가 교묘(巧妙)하게 운용되어 있어 독자를 매혹(魅惑)하면서 절실(切實)한 이해를 갖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중국 춘추 시대 말기부터 전국 시대에 걸친 여러 학자 및 여러 학파를 통틀어 이르는 말. 음양가(陰陽家)인 추연(鄒衍), 유가(儒家)인 공자와 맹자와 순자, 묵가(墨家)인 묵자, 법가(法家)인 한비자, 명가(名家)인 공손룡, 도가(道家)인 노자와 장자, 병가(兵家)인 손자, 종횡가(縱橫家)인 소진과 장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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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자[荀子,BC 300경 趙나라]~230경, 초(楚)나라 란능(蘭陵)

 

중국 고대의 3대 유학자(儒學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다.
순자(荀子)의 이름은 순황(荀況). 자(字)는 순경(荀卿). 공맹사상(孔孟思想)을 가다듬고 체계화(體系化)했으며, 사상적(思想的)인 엄격(嚴格)성을 통해 이해하기 쉽고 응집력(凝集力) 있는 유학사상의 방향(方向)을 제시(提示)했다.
 
순자(荀子)의 가장 유명한 말은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다. 선(善)한 것은 수양(修養)에 의한 것일 뿐이다"이다(性惡說).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수양철학(修養哲學)이다. 

만일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둔다면 이기적(利己的)이고 무질서(無秩序)하며, 반사회적(反社會的) 본질적(本能的) 행위(衝動)들로 가득 찰 것이라고 주장(主張)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禮-예법, 의식적인 관행, 사회적 행동 등에 관한 규범, 전통적인 관습)와 '악'(樂:순자는 플라톤처럼 음악에 심오(深奧)한 도덕적(道德的) 의미(意味)가 있다고 보았음)이다.

 

인간 본성(本性)에 관한 순자의 견해(見解)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善)하다는 맹자의 낙관적(樂觀的)인 견해와 근본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물론 두 사람 모두 모든 인간이 잠재적(潛在的)으로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능력(能力)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는 의견의 일치(一致)를 보인다.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의 이러한 차이는 도덕론(道德論)의 차이(差異)일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차이이기도 했다. 인간은 선(善)함을 하늘로부터 부여(賦與)받았기 때문에 인간 본성의 善함은 불기피(不可避)한 것이다.

 

반면에 순자(荀子)에게 하늘은 어떠한 도덕적 원리도 포함(包含)되지 않은, 단순(單純)한 우주(宇宙)의 기능적(技能的) 운행을 가리킬 따름이다.

그는 하늘의 운행은 거의 기계적(機械的)이며, 도덕(道德)의 기준(基準)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천리(天理)의 산물(産物)이 아니라 오직 인간이 만든 문화(文化)· 문명(文明)의 산물(産物)일 뿐이라고 파악(把握)했다.

 

만일 인간이 날 때부터 '惡'하다면(순자에게는 '敎化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함), 어떻게 인간에 의해 높은 文明의 창출(創出)이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提起)될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 다투는 혼란(混亂)한 상태(狀態)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성인(聖人)이 지(知)를 사용하여 사람들 간의 상호침해(相互侵害)를 막고 모든 사람들이 만족(滿足)할 수 있도록 사회적 구별(區別)과 사회행동의 규칙(規則)을 만들었다.

 

예(禮)는 인간의 도덕(道德). 양식(良識)· 습속(習俗)을 규제(規制)하는 의식적(意識的)인 규범(規範)이다. 순자는 이러한 '禮'가 있은 후 비로소 유가에서 말하는 도(道)가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때에 그는 봉건제(封建制)의 몰락(沒落)과 함께 나타난 상업(商業), 사회적 유동성(流動性), 기술(技術)에 유리(有利)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정확(正確)히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전환(轉換)이 한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예로부터 내려온 사회적·종교적인 제도를 버리도록 만든다는 사실도 이해했다.

 

또한 제도(制度)와 연결된 의례(依例)의 실천(實踐)인 '禮'는 결코 세속(世俗)화하여 사라져버릴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 같은 주장을 통해 그는 유가(儒家)의 대표적 철학자(哲學者)가 되었고, 종교적 측면이 점차 감소하던 '禮'에 윤리적(倫理的)· 심미적(審美的)인 철학기반(哲學基盤)을 제공(提供)했다.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이상적(理想的) 인간으로서의 성인(聖人)이란 한결 같이 삶의 과정(過程)에서 인간다움의 도리를 철저(徹底)하게 실천하는 현세간적 인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기에 현실적 삶을 바라보는 유가(儒家)의 시각(視覺)은 인생을 고해(苦海)로 바라보는 불타(佛陀)나, 원죄(原罪)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기독교(基督敎)나, 육신을 영혼의 감옥(監獄)으로 생각하는 플라톤이나, “삶은 종기(腫氣)와 같은 것이며, 죽음이란 이 종기를 짜서 없애는 것”이라고 하는 장자(莊子)와는 그 각도를 달리한다.

 

또 다른 유명한 논설은 천론(天論)이다. 여기에서 순자는 미신(迷信)과 초자연적(超自然的)인 것에 대한 믿음을 논박(論駁)했다. 천론(天論)의 주요주제 가운데 하나는, 일식(日蝕)· 월식(月蝕) 등은 드물게 일어나는 불규칙(不規則)한 자연현상(自然現象)일 뿐 불길(不吉)한 징조(徵兆)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초자연적(超自然的)인 힘을 부정한 그는 이어 일반 백성의 종교적(宗敎的)인 의식(儀式)· 미신에 대해서도 세련된 해석을 했다. 기우제(祈雨祭)와 같은 미신적인 의식은 단지 '인간의 감정(感情)을 좋게 해줄 뿐'이라는 해석을 내리고, 그러한 의식들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정상적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출구(出口)가 되기 때문에 유익(有益)한 것이지만, 지식인(知識人)은 그것을 감정의 꾸밈 정도로 여길 뿐 귀신(鬼神)의 일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유가사상 속에서 과학적(科學的) 사고(思考)와 일치(一致)하는 합리주의(合理主義)의 흐름을 처음으로 열었다. 사실상 그는 권위주의(權威主義)자로서, 유가(儒家)와 전제주의(專制主義)적인 법가(法家)를 잇는 논리적 고리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2명의 법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법가의 논리가(理論家)인 한비자(韓非子, BC 280경~233)와 정치가 이사(李斯, BC 280경~208)가 그들로서 이들은 이후 유교사가들의 증오심(憎惡心)을 샀다. 두 사람이 역사적으로 받은 비난(非難)은 그들의 스승에 대한 평가(評價)에도 악영향(惡影響)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주 인용되는 순자(荀子)의 성악편(性惡篇) 때문에 순자(荀子)의 글은 다른 대부분의 주장에 앞서 도덕적(道德的) 거부(拒否)감을 샀다.

 

순자(荀子)가 죽은 후 몇 세기 동안 그의 영향력(影響力)은 맹자보다 컸다. 10세기에 성리학(性理學)이 일어나면서 그의 영향력이 약해졌지만, 12세기까지는 여전히 지속(持續)되었다. 그러나 12세기에 맹자(孟子)가 유교(儒敎)의 4서(四書)에 포함되고 孟子가 유교의 2번째 성인으로 추앙(推仰)됨으로써 그는 이단(異端)으로 몰렸다.

 

그러나 그의 글 속에 가득 차 있는 합리주의(合理主義), 종교(宗敎)에 대한 회의(懷疑), 사회 속의 인간에 대한 관심(觀心), 정치적(政治的)· 문화적(文化的) 감각력(感覺力), 고대의 전통(傳統)과 관습(慣習)에 대한 선호(選好) 등은 2,000년 이상 중국 지식인들의 사고(思考)에 영향(影響)을 미쳤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누구도 그만큼 철저(徹底)하지 못했으며, 유가(儒家)의 도덕적 이상에 대한 열정적인 옹호(擁護)는 철학적(哲學的) 이념(理念)과 역사적(歷史的) 현실(現實) 사이의 거리를 줄이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寄與)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