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묘비는 1602년 김방경의 외손인 이시발이 비문을 쓴것이며, 뒷쪽에는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시조 김효로
(金孝盧)의 묘이다
묘는 1300년 9월(고려 충렬왕 26)에 조성된 후 약 100년동안 실전되어 찾지 못하였는데, 이때 <광산김씨 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안동 예안파> 입향조 김효로(金孝盧)의 묘를 썼으며, 서기 1594년봄 김효로의 묘 앞에 증손인 근시재 김해(1593년 사망)의 묘를 조성하던 중 『고려충렬공 김방경지묘』라는 지석(誌石)이 출토되어 안동김씨 문중에 이 사실을 알렸고 김해의 묘는 다른곳에 썼다고 한다. 이 묘는 국내에 몇 안되는 고려 중기 묘소이다.
오른쪽 묘비는 1602년 김방경의 외손이 되는 당시 경상도관찰사 이시발(李時發)이 비문을 쓴 것이다.
현재도 광산김씨에서는 입향조 김효로(金孝盧)에 제를 지낼때는 김방경(金方慶)의 묘에 먼저 예를 올린다고 하며, 양 집안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광산김문(光山金門)의 김효로(金孝盧)는 안동김문(安東金門)의 고려 시중 김방경(金方慶)의 7대 외손이기 때문이다. 즉 김효로(金孝盧)의 5대조인 장영공(章榮公) 휘(諱) 진(稹)께서 시중공(侍中公 金方慶)의 외손자이다.
↑고려국 상락군 김방경장군 묘(高麗國 上洛君 金方慶將軍 墓)
경상북도 안동군 녹전면 죽송동 능촌에 있는 김방경(경순왕의 9대손)묘 전경이다. 안동김씨 제학공파보에 따르면 묘는 200년간 실전되어 오다가 1594년(선조 27)에 발견되었는데 이 때 고려 충렬왕이 세운 신도비(神道碑)와 후손 예생(禮生)이 세운 묘갈은 모두 부서진 상태였으며, 1602년(선조 35)에 다시 봉분을 하고 비석을 세웠다. 봉분은 하단에 호석이 둘러져 있으며, 그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다.
좌우로 묘비 2기가 세워져 있는데 봉분을 바라보았을 때 좌측에 있는 큰 비석이 2006년 새로 만든 비석이고, 우측의 비석이 1602년에 세워진 옛 비석이다.
비문은 당시 경상도관찰사인 이시발(李時發, 1569(선조 2)∼1626(인조 4)이 찬하고, 조우인(曺友仁: 1561∼1625)이 글씨를 썼다. 현재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나, 비문의 탁본첩이 일본 쿄오토 대학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봉분 좌우로 문인석 또한 배치되어 있다. 2009년에는 묘역에서 1300년(충렬왕 26) 9월에 고려국(高麗國) 전 정헌대부 밀직사좌승지 판비서시사 문한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前 正獻大夫 密直司左承旨 判秘書寺事 文翰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 이진(李瑱, 1244년(고종 31)∼1321년(충숙왕 8)이 짓고. 제작된 묘지석이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의하여 발굴되기도 하였다.
[참고사항]
대덕 4년 경자년(충렬왕 26, 1300년) 9월 일에 상락공의 묘지를 이진(李瑱)이 쓰고, 이진(李瑱)의 12대손 경상도관찰사 이시발이 경상도 감사로 재직시 1602년에 위의 우측에 있는 묘비문을 지었다.
↑고려 상락공 묘지석
↑高麗 上洛公 金方慶將軍 畵像( 2008년 화가 윤필구 화가 작품)
[생졸년] 1212(강종 1)∼1300(충렬왕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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