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동명왕릉 비(高勾麗 東明王陵 碑)
동명왕릉비동명왕은 고구려의 시조이다.
애초에 동부여의 왕 금와가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는 “나는 하백의 딸인데 이곳으로 쫓겨나 살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그를 기이하게 여기고 그를 집에다가 거주하게 하였는데 해가 비추었으므로 몸을 끌어다 피했는데도 해가 따라와 비추니 그로 인해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을 따뜻한 곳에 두니 남자 애가 알을 깨고 나왔다.
기골이 뛰어나고 영특하였으니 대개 천제의 아들이 해를 타고 내려 왔다고 한다.
7살에 스스로 신이한 지혜로 활을 만들었고 활을 쏘면 반드시 명중하였다.
장성하게 되어 동부여왕의 여러 아들들이 마음속으로 그의 능력을 해치고자 하여 그것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어머니가 그러한 음모가 있음을 알고 그로 하여금 떠나게 하였다.
마침내 오이 · 마리 · 협보와 함께 엄표진에 이르니, 다리도 없고 쫓아오는 자들이 장차 이를 지경이었다.
이때 물고기와 자라들이 전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서 그들은 드디어 건너서 보술수에 이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우마의· 납의 · 조의 세 사람을 만나서 그들에게 성을 주었다.
함께 졸본에 이르러 비류수 가에 거주하였다. 그곳의 왕이 딸을 주어 그를 사위로 삼았다.
그런데 왕이 아들이 없어서 왕위를 물려주었으니 그의 성은 고이고 국호를 고구려로 하니 그에게 돌아와 붙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 때였고 한나라 원제 건소 2년이며 신라 시조 22년이다. 이부를 병합하고 말갈을 물리치고 드디어 송양 행인 북옥저 등 여러 나라들을 복속시켰다.
이때 황룡이 나타나고 축복의 구름이 신작에서 나와 궁정에 모이는 것을 보았다.
14년에 왕모께서 동부여에서 돌아가시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19년에 왕자 유리가 동부여로부터 오니 드디어 그를 세워 후계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향년 40세였다.
동명성왕이라고 불렀다.
아들 유리왕에게 전하였고 보장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28세였고 705년이었다.
백제왕 온조도 왕의 아들이니 그 이어져 내려간 것이 31세 678년이다.
아아 왕이 하늘에 복록을 받으시고 후인들에게 열어주신 것이 아름답고 면면하도다.
세상 사람이 전하기를 기린마를 타고 하늘에 조회한 것은 아닌가 하는데, 지금 평양에 기린굴, 조천석이 있는데 대개 전해지는 것이 이것이 아닐까 한다.
묘는 중화부 용산에 있었으니 방인들이 그것을 일러 진주 묘라고 한다.
아아 우리 열성조께서 덕을 높이고 공을 보답하려 옛적을 돌아보며, 법도를 다하여 숭령전을 평양에 세우고 단군과 동명왕을 제사하여 지금가지 실추시키지 않았다.
우리 성상 28년 신묘에 이것을 봉하여 능으로 만드시고, 올해 봄에 영백인 신에게 명하시어 연도를 살피고 당부를 건축하고 상을 갖추어 놓고 매년 한식날의 나천을 드리도록 하셨다. 이에 비서을 세워 그곳에 아름다운 전례를 싣노라.
명에 이르기를,아 빛나는 동명이시여 날로 드러나 자태를 뽐내시는구나. 집을 여시고 땅을 개척하시니 명을 받아 때에 응하시는 도다.구름을 타고 부리며 옥으로 만든 채찍을 쓰시니 기린굴에 말의 흔적이라.
높고 높은 용산이여 송백에 작위가 있구나.천년동안 새로울 수 있었으니 높디 높은 곧은 비석이여.임금의 생각은 먼 장래를 도모하시니 깊이 감통되어 밝히 제사지내는구나.신을 뭉쳐 전액을 쓰니 차가운 때에 향기가 그윽하다.
하늘에 조회하려 오르락 내리락 하늘에 올라 도우심이 끝이 없으시도다.
자헌대부 용양위대호군 겸 예문제학 신 이돈하가 교시를 받들어 찬술하였고, 자헌대부 평안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도순찰사 관향사 평양부윤 친군서영외사 규장각검교직제학 시강원검교 보덕광무국 회판지의금부사 신 민병석은 교시를 받들어 글씨를 썼다.
숭정기원후 다섯 번째 임진년(1869) 7월 일에 비석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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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中和 高勾麗東明王陵碑東明王陵碑(表面)
(裏 面) 東明王高勾麗始祖也先是東扶餘王金蛙見一女子於優渤水曰我河伯女謫居于此王異之使處之室爲日所照引身避之日隨而炤 因有孕産一卵置之煗處一男子剖殼而出骨表英奇盖天帝之子乘日而降云七歲自以神智造弓矢射必命中及長東扶餘王諸子心害其能欲圖之母知其謀而敎之行」乃與烏伊摩離陜父俱至渰淲津無梁追者且至俄而魚鱉畢浮作橋遂得渡至普述水遇麻衣衲衣藻衣者三人錫之姓與至卒本居沸流水上其王以女妻之王無子因嗣位姓高國號高句麗歸附者衆時年二十二漢元帝建昭二年新羅始祖二十二䄵也幷二府斥靺鞨遂服松讓荇人北沃沮諸國時黃龍」見慶雲出神爵集于宮庭十四䄵王母終于東扶餘遣使奠方物十九年王子類利自東扶餘來歸遂立爲嗣秋九月王殂壽四十號東明聖王傳子琉璃王至寶藏王凡二十八世七百五䄵百濟王溫祚亦王之子傳三十一世六百七十八年於乎王之受祿于天啓佑後人者休且綿矣世傳王騎麟馬朝天今平壤有麒麟窟朝天石盖傳疑也墓在中和府龍山邦人稱之曰眞珠墓惟我列聖朝崇德報功溸古咸秩建崇靈殿于平壤祀檀君東明王迄今罔墮我聖上二十八年辛卯有封陵之 命今年春令伯臣審埏道修堂斧具象設以每歲寒食裸薦爰樹貞珉載譛懿典銘曰於赫東明日表挺姿啓宇拓土受命膺時雲馭玉鞕麟窟馬跡嵽嵲龍山有欝松柏千載克新屹屹貞珉宸思遠軫幽感明禋凝神篆籒冷節馨香朝天陟降隲佑旡疆。
資憲大夫龍驤衛大護軍兼藝文提學 臣 李敦夏奉 敎撰。
資憲大夫平安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管餉」使平壤府尹 親軍西營外使奎章閣檢校直提學 侍講院檢校輔德礦務局會辦 知義禁府事 臣 閔丙奭奉 敎書崇。
禎紀元後五壬辰七月 日竪。
옮긴이 : 野村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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