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의정부우찬성 옥성부원군 장공[만] 묘지명 병서

야촌(1) 2011. 9. 28. 17:10

의정부 우찬성 옥성부원군 장공 묘지명 [병서]

議政府 右贊成 玉城府院君 張公 墓誌銘 [幷序] 

 

성균관대사성 지제교 이식 찬(成均館大司成 知製敎 李植 撰) 

 

숭정(崇禎) 기사년(1629, 인조 7) 겨울에 진무(振武)의 원훈(元勳)인 옥성부원군 장공이 한성(漢城) 반송방(盤松坊 > 현 서울시 중구 순화동 지역) 저택에 병들어 눕자, 상이 태의(太醫)를 보내 진찰하게 하고 내복약을 계속 대주게 했으며, 날마다 액정(掖庭)의 감사(監史)를 파견하여 병세를 자세히 물어 보게 하였다.

 

그러다가 11월 모일(某日)에 결국 공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상이 애도(哀悼)하며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7일 동안 소찬(素饌)을 하였다. 그리고 중관(中官)을 보내 조문(弔問)하고 예관(禮官)에게 제사를 지내 주도록 하였으며, 염습(殮襲)에서부터 장례(葬禮)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물을 유사(有司)가 마련해 주도록 하였다.

 

이듬해 2월 갑인 일에 풍덕군(豐德郡) 기촌(岐村) 선산(先山)의 언덕 좌측에 안장(安葬)하였다. 그리고 나서 7년이 지난 뒤인 을해년에 특별히 영의정(領議政)을 추증(追贈)하고 충정(忠定)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공의 사위인 우참찬(右參贊) 최 공 명길(崔公 鳴吉)이 문하(門下)의 제공(諸公)과 상의하기를, “공의 사적(事迹)은 나라의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광중(壙中)의 기록은 의당 질박하고 솔직하면서 할 말만 하는 사람에게 맡겨 공의 겸손한 덕성에 걸맞게 해야 할 것이다.” 하고는, 옛날 공의 종사관(從事官)이었던 나에게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대략적인 내용을 서술하고 묘지명을 짓게 하였다. 

 

내가 나름대로 살펴보건대, 국가가 임진년의 변란을 겪고 난 뒤로 남쪽으로는 왜구(倭寇)에 대비하고 서쪽과 북쪽으로는 오랑캐를 방어하게 되었으므로,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자나 깨나 어질고 능력있는 신하들을 생각하고 있었고, 조정에 있는 문무(文武)의 신하들 역시 서로 다투어 각고면려(刻苦勉勵)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공이 일개 서생(書生)으로 외진 고을에서 떨쳐 일어나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게 되고 나서는, 외방으로 나아가 한 방면(方面)의 중한 위임을 받고 수고스럽게 출입하면서 오직 조정의 명에 따라 동분서주(東奔西走)하게 되었는데, 공이 이르는 곳마다 군대를 정예화(精銳化)시키고 재곡(財穀)을 풍부하게 비축하여 강역(彊埸)에 아무런 탈이 없게끔 하였다.

 

그러다가 성상이 반정(反正)한 초기에 이르러 내부의 걱정거리가 아직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외부의 도적이 또 바야흐로 으르렁거리자, 즉시 공을 일으켜 원수(元帥)로 삼고는 서쪽 변방으로 출진(出鎭)하게 하였다.

 

그런데 큰 변란이 심복(心腹) 가운데에서 느닷없이 발생하고 말았으니, 당시는 그야말로 국가가 보전되느냐 망하느냐 하는 지극히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공은 자기의 휘하(麾下) 병력이 수천 명에도 차지 않는 상황에서 흩어져 무너진 군사들을 끌어 모아 이십 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극악무도한 역괴(逆魁)의 머리를 베어 버림으로써 중외(中外)가 다시 안정을 찾게끔 하였다.

 

이 진무(振武)의 공이야말로 정사(靖社)의 그것과 함께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것으로서, 단(壇)을 쌓고 다 같이 맹세를 하며 나라와 더불어 모두 복을 받기에 합당한 것이었으니, 중흥(中興)의 업적이 이에 이르러 크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시대 상황이 어려웠던 까닭에 성패 이둔(成敗利鈍)이 없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선묘(宣廟)께서 정치를 개혁하신 이래로 광해군(光海君) 말년에 이르기까지 명신(名臣)과 숙장(宿將)들이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난 상태에서, 유독 공만이 우뚝 서서 나라의 간성(干城)으로 조야(朝野)의 막중한 기대를 한 몸에 지닌 채 처음부터 끝까지 애영(哀榮)의 은혜를 듬뿍 받게 되었다. 

 

따라서 서사(書史)에서 일컫고 있는바 ‘옛날에 큰 공훈을 세우고 덕을 온전히 보전한 신하들’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다시 더 잘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니, 나 같은 사람이 또 어떻게 이를 글로 꾸며 낼 수가 있겠는가.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諱)는 만(晚)이요 자(字)는 호고(好古)로, 인동(仁同) 사람이다. 증조의 휘는 철견(哲堅)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증직받았고, 왕고(王考)의 휘는 계문(季文)으로, 관직이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었으며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을 증직 받았다. 

 

고(考)는 휘가 기정(麒禎)으로, 관직이 면천 군수(沔川郡守)였으며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추증 받았고, 비(妣)는 배천 조씨(白川趙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가정(嘉靖) 병인년(1566, 명종 21)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 출산할 때 의정공(議政公)의 꿈속에 북두성(北斗星)이 내려와 조 부인(趙夫人)의 침소를 비췄는데, 이 꿈을 꾸고 나서 깨어 살펴보니 공이 이미 태어났다고 한다.

 

9세 때에 마마에 걸려 기식(氣息)이 끊긴 적이 있었다. 이때 집 사람의 꿈에 한 장부(丈夫)가 공을 붙들어 일으키자, 옆에 있던 늙은이가 만류하면서 “이 아이는 장차 귀인(貴人)이 되어 세상에 큰 공을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공이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일단 장성하고 나서는 총명하고 걸출한 면모를 보이면서 문업(文業)을 일찍 성취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 22)에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두 시험에 모두 입격(入格)하였고, 신묘년에 별시(別試)에 급제하였는데, 권지 학유(權知學諭)에 임명되자 물론(物論)이 공을 위해 억울하게 여겼다. 

 

계사년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바뀌어 선임되고, 얼마 뒤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천거되었는데, 이때 의정공의 상(喪)을 당하였다. 삼년상(三年喪)을 마치고 나서 관례에 따라 주부(主簿)로 승진했다가 형조와 예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였으며,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서 체직되어 전적(典籍)이 되었다.

 

그 뒤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를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사서(司書)를 겸하였는데, 언사(言事) 때문에 권귀(權貴)의 미움을 받아 체직되었으며, 직강(直講)을 거쳐 봉산군수(鳳山郡守)로 나가게 되었다.

 

당시에 왜구(倭寇)가 우리 경내(境內)를 침범하였으므로 중국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와 토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로(一路)의 접대하는 일이 대단히 군색하기만 했던 상황이라서 수령들이 매를 맞고 끌려 다니는 일까지 벌어지곤 하였으므로 수령들이 외진마을로 피해 들어가 숨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러나 공만은 관사(官舍)를 떠나지 않고 부족함이 없이 접대하며 그들의 요구에 부응해 주었으므로, 중국 장수들이 모두 머리를 숙이고 감사의 뜻을 표하며 떠나가 고을 전체가 조용한 가운데 안정을 유지하게끔 되었다.

 

이 일을 상이 듣고서 가상하게 여긴 나머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직질(職秩)을 올려 주는 동시에 동부승지로 발탁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고, 좌승지로 있다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으며, 다시 조정에 들어와 도승지가 된 뒤 호조참판(戶曹參判)을 거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어버이 봉양을 위해 해서(海西) 지방으로 나갔다. 그때 마침 간사한 사람이 유현(儒賢)을 무함한 나머지 조정의 논의가 변경될 위기에 처하자, 공이 장차 입조(入朝)하여 바로잡아 보려고 하였는데, 대신(大臣)이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할 것이라며 만류하였으므로 마침내 병을 핑계 대고 체직되기에 이르렀다.

 

공은 이때부터 조정에 대해서 불안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주청사(奏請使)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와서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임명되었으며,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조정에 들어와 병조참판(兵曹參判)이 되었다.

 

정미년(1607, 선조 40)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나가, 임기가 만료되고서도 다시 1년을 유임하였다. 돌아올 즈음에 마침 관서(關西) 지방의 곤수(梱帥) 자리가 비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공만 유독 고생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백사(白沙) 이 상공(李相公)이 그 임무를 특별히 중히 여긴 나머지 사람을 시켜 공의 의중을 한번 떠보게 하였는데, 공이 흔연히 그곳에 가겠다고 청하였으므로, 마침내 공을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삼게 되었다.

 

공은 그곳에 부임하자마자 군제(軍制)를 개정하고 별대(別隊)의 아병(牙兵)을 설치하였는데, 공이 시설한 것을 보면 모두가 후세에 영원히 준수할 만한 모범적인 것들이었다.  여연(閭延) 등 4개 고을을 백 년 동안이나 돌보지 않아 폐허가 되고 말았는데, 그 경계를 오랑캐가 침범하여 점유하고 있었다.

 

이에 공이 “조종(祖宗)의 강토를 내버려 두어 오랑캐에게 내주다니, 이것은 물어 볼 것도 없이 변방을 지키는 신하의 책임이다.” 하고는, 사람을 시켜 두루 살펴보게 하면서 공첩(公牒)을 내주며 말하기를, “혹시라도 다른 걱정거리가 생기면 이것을 꺼내어 보여 주어라.” 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과연 오랑캐에게 붙잡혀 그들의 소굴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그때 공첩을 꺼내어 그들의 추장(酋長)에게 보여 주자, 추장이 “이 사람은 관인(官人)이니 죽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여연으로 말하면 본래 조선의 땅이니 우리가 여기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 잘못이다.” 하고는 즉시 철수하였다.

 

조 부인의 상을 당하여 거상(居喪)을 마친 뒤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 병진년(1616, 광해군 8)에 해주(海州)의 무옥(誣獄)이 일어나면서 목사(牧使) 최기(崔沂)가 수죄(首罪)에 걸려 추핵(追劾)을 당하게 되었는데, 친지나 벗들이 아무도 감히 돌봐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이 그를 길에서 맞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를 서로 상의하였다.

 

그리하여 결국은 이 때문에 공이 죄를 얻어 삭직(削職)을 당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시간이 오래 지나서야 다시 복관(復官)되어 서용(敍用)이 되었으며, 직질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오르면서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기미년에 심하(深河)에 출정한 군대가 궤멸되면서 여러 장수들이 포로로 붙잡히자, 서쪽 변방이 크게 진동하며 적병이 장차 쳐들어올 것이라고 걱정들을 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즉시 공을 체찰부사(體察副使)로 삼아 출발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수레 한채를 몰아 치달려가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며 불러 모으는 한편, 절도사의 군영을 창성(昌城)으로 옮겨 적의 침입로(侵入路)를 막고 군대를 증강하며 군량을 잇달아 수송해 오자 변방의 정세가 크게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직질이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오르면서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당시로 말하면 요행을 바라는 자들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는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공만은 점차적으로 공도(公道)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해 나갔으므로, 이 때문에 권세를 지니고 호기를 부리는 자들에게 질시를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 역시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목욕(沐浴)의 휴가를 청한 뒤 평산(平山) 초정(椒井)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내려가면서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당시의 정사(政事)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러자 광해(光海)가 이것을 보고는 크게 노여워하였으므로, 공이 즉시 병을 핑계 대고는 통진(通津)의 농촌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계해년(1623, 인조 1)이 되어서야 비로소 팔도 병마도원수(八道兵馬都元帥)로 일어나 명을 받들게 되었는데, 이때 상이 몸소 수레바퀴를 밀어주는 예(禮)를 행하고 손수 보검(寶劍)을 잡고서 탑전을 내려와 공에게 수여하는 동시에 장사(將士)들에게 큰 상을 내린 뒤 길을 떠나보내었다.

 

그런데 공은 평양(平壤)에 막부(幕府)를 개설하고 총지휘만 하였을 따름이요, 사실은 역적 이괄(李适)이 영변(寧邊)에 진소(鎭所)를 차리고서 아병(牙兵)과 항왜(降倭)와 양남(兩南)의 수졸(戍卒)만 수천 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는 일국(一國)의 정예 군사를 총망라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괄이 남몰래 폐조(廢朝)의 잔당(殘黨)과 결탁하고 안팎으로 서로 호응하는 등 반역의 음모를 점차로 드러내더니, 갑자년 1월에 그의 아들이 체포된 사건을 계기로 사자(使者)를 죽이고는 군사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명련(韓明璉) 부자(父子)와 합세하여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짓쳐들어오니, 나라 안의 분위기가 크게 흉흉해졌다. 이때 마침 공이 오래도록 병이 들어 일을 살펴보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이괄이 마음속으로 공을 가벼이 여기고 있었으며, 공의 막하(幕下)에도 적당(賊黨)과 내통하고 있는 자들이 많아 이괄로부터 계속 명을 받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이괄이 또 첩서(諜書)를 보내 대중을 위협하자, 사람들이 각자 위태롭게 여기는 등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이 자신의 속마음을 펼쳐 보여 주고 신의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하면서 평일과 다름없이 조용히 대하자, 대중의 의구심이 풀어지며 다들 기뻐하였다.

 

그때에 적의 첩자(諜者)가 나졸(邏卒)에게 붙잡혔는데, 공이 그를 침소(寢所) 안으로 끌어들인 뒤 이불을 걷어올리고 자신의 몸을 보여 주면서 “나를 벨 수 있다면 나를 베어라.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나를 위해 힘을 발휘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실토(實吐)하였으므로, 공이 즉시 격문(檄文)을 그에게 주어 적중(賊中)에 돌아가서 유시(諭示)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그날 바로 이윤서(李胤緖) 등 4장(將)의 흩어졌던 군사들이 공에게 와 귀의하면서부터 적의 형세가 비로소 외로워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공이 병을 무릅쓰고 성 위에 올라가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적은 이미 내응(內應)이 있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고, 또 공을 두렵게 여겨 감히 공에게 접근하지 못한 채, 살그머니 사잇길로 빠져나가 곧장 경성을 향해 나아갔다.

 

공이 이 사실을 정탐(偵探)해 알아내고는 군사를 내보내 선봉(先鋒)을 추격하였는데, 황주(黃州)에서 전투를 벌여 불리해지자 군사를 거두었다가 다시 추격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적병이 하루 정도의 길을 앞서 나간 때였다.

 

이에 조정에서 제장(諸將)을 파견하여 적의 앞길을 차단하려고 하였으나 모두 적병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흩어져 달아나 무너지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거가(車駕)가 급히 피난을 하는 가운데 적병이 빈 틈을 타고 서울로 들어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날 바로 공이 군대를 다그쳐 적병의 뒤를 따라 곧바로 진격해 온 뒤에, 날이 샐 무렵 적을 맞아 대전(大戰)을 벌였는데, 그 결과 이괄이 연전 연패(連戰連敗)를 하고는 결국 부하의 손에 목이 잘리는 신세가 되었다.

 

공이 궁궐을 깨끗이 청소하고 어가(御駕)를 맞으면서 길 옆에 엎드려 대죄(待罪)하자 상이 어가를 멈추고 위유(慰諭)하였고, 도성에 돌아와서는 원훈(元勳)에 책봉하는 동시에 자계(資階)를 치올려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 좌찬성(左贊成)에 임명하는 한편, 원수(元帥)의 호(號)를 파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승진시킨 뒤 송도(松都)에 막부를 열게 하고 아울러 유수(留守)를 겸하게 하였다. 얼마 뒤에 공이 병으로 체직되어 풍덕(豐德)의 별장으로 돌아가서 그만 물러나게 해 줄 것을 간절히 청하였으나, 상이 하교하여 준열하게 꾸짖자 공이 황공한 심정으로 다시 입조(入朝)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 4)에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예전처럼 도체찰사를 겸하였다. 이때 군제(軍制)가 크게 훼손되었으므로 조정에서 호패법(號牌法) 시행을 의논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공이 일찍이 상에게 아뢰기를, “호패법이 시행되기를 기다렸다가 국가에 삼군(三軍)을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사족(士族)을 기(騎)로 삼고 양정(良丁)을 정갑(正甲)으로 삼고 천정(賤丁)을 삼수(三手)로 삼으면, 백성들을 동요시키지 않으면서도 군사의 숫자를 증액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그리하여 이때에 이르러 공이 바야흐로 그 일을 거행하려고 하였는데, 그 일을 미처 마무리 짓기도 전에 정묘년(1627, 인조 5) 봄에 이르러 그만 오랑캐가 대거 침입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는, 이 오랑캐가 상국(上國)에 대들어 난리를 일으키고 있는 만큼 필시 동쪽을 침범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고는, 서쪽 변방의 방어를 위해 증강한 제장(諸將)의 군사들을 우선 철수시켜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모진(毛鎭)에 항상 대비토록 하게하고, 이 오랑캐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는데, 공이 일찍이 이 문제를 두고 쟁론(爭論)을 벌였으나 공의 뜻대로 되지를 않았었다.

 

그러다가 이에 이르러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나자 하도(下道)의 군사들을 불러 모을 사이도 없이 공이 홀로 화수(火手) 수백 인과 함께 그날 즉시 응원(應援)하기 위해 달려갔는데, 평산(平山)에 도착했을 즈음에 적은 이미 3진(鎭)을 함락시킨 상태였다.

 

그리고 여러 성(城)들 역시 싸워 보지도 못하고서 저절로 무너지고 말았으므로, 조정에서 마침내 오랑캐의 요구를 들어 주면서 조약을 맺고 말았다. 그런 뒤에 즉시 양사(兩司)가 적을 제대로 물리치지 못했다고 공을 논핵(論劾)하기 시작하면서 몇 개월 동안이나 그치지를 않자, 상이 어쩔 수 없이 처음에는 중도부처(中道付處)하라는 명을 내려 부여현(扶餘縣)에 있게 했다가, 겨울에 사면하여 방환(放還)토록 하면서 직첩(職牒)을 복원시켜 주도록 명하였다.

 

공이야말로 공(功)이 높은 반면 아무 죄도 없다는 사실을 상이 알았기 때문에 공에 대한 대우가 더욱 두터워지기만 하였고, 장사(將士)들 역시 공이 다시 장수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공은 그동안 피로가 누적된 결과 병을 얻고 말았는데, 갑자년에는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치달리는 바람에 왼쪽 눈의 시력(視力)까지 잃게 되었으며, 이번에 재차 거친 들판에서 지내는 동안에 병환이 더욱 심각해지게 되었으므로, 모든 일을 사양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는 몸소 붓을 잡고 기사년(1629, 인조 7)의 춘첩(春帖)을 쓰기를,

 

내 나이 벌써 예순 하고 네 살 / 吾年六十四

포의로서 그 영광 이미 극에 달했도다 / 布衣榮已極

 

첫 번째 소원은 전원에 물러나는 것 / 上願退田園

그 다음 소원은 이제 그만 죽는 것 / 次願歸冥漠

 

이 밖에는 달리 원하는 것 없나니 / 此外無所求

나의 속마음 신명이 알아주리. / 神明照心曲

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공은 내행(內行)이 매우 엄격하였으므로, 백사공(白沙公)이 이웃 동네에 살면서 매번 공의 효성(孝誠)을 찬탄하곤 하였다. 평소에 가희(歌姬)와 무녀(舞女)가 눈앞에 가득한 생활 속에서 마치 세상일을 모두 잊어버린듯하다 가도, 막상 관직에 나아가 정사에 임할 때에는 엄숙하게 규제하였으며, 규모(規模) 역시 평소에 정해 둔 바가 있어 조리(條理)가 정밀하기만 하였다.

 

숨겨진 것까지도 분명하게 살필 줄 알았기 때문에 위엄을 세워도 포학한 데에 이르지 않았으며, 공도(公道)에 입각하여 대중을 다스렸기 때문에 은혜를 베풀어도 방종(放縱)함에 이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이 명령을 한번 내리면 사람들이 편하게 생각하였고, 어떤 일을 처리할 때에도 백성들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군대를 지휘함에 있어서도, 함부로 사람을 죽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사정(私情)을 봐주어 군법(軍法)을 문란케 한 일 역시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사졸들이 공을 두려워하면서도 친애하는 감정을 느꼈던 것이었다. 공은 오래도록 병권(兵權)을 장악했던 관계로 문하(門下)에 무사(武士)가 매우 많았는데, 그들의 인품이 비록 각각 달랐어도 어디까지나 한 결 같이 성신(誠信)으로 대하면서, 가난한 자를 구휼(救恤)해 주고 급한 사정을 돌보아 주는 등 마치 친척처럼 그들을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일이 성공하면 그 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어 주고, 일이 실패하면 그 책임을 자신이 감당하였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공의 부하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출정(出征)한다는 소식을 듣기만 하면 격문(檄文)이 도착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곧바로 원근(遠近)에서 공이 있는 곳으로 치달려왔던 것이었다.

 

남이흥(南以興)과 정충신(鄭忠信)이 처음에는 서로 화목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충의(忠義)에 입각하여 권면하자 두 장수가 감격한 나머지 마침내 형제처럼 지내기로 굳게 다짐하였다.

 

공이 막부에 함께 데리고 있던 문무(文武)의 관원들을 보면, 혹 유자(儒者)의 소질을 지니고 있는 자들을 발탁하기도 하고 죄적(罪籍)에 들어 있는 자들을 거두어들이기도 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공을 세워 이름을 드날리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밖에 외방의 장수라든가 재력(材力)과 용맹이 있는 자들 가운데, 공이 장려해 준 결과 뜻을 성취한 자들이 또한 가장 많았다. 공은 체구(體軀)가 장대한데다가 말 타고 활 쏘는 솜씨가 절륜(絶倫)하였으며, 식견이 원대하고 책략(策略)에 능하였음은 물론, 적의 형세를 요량하고 정세를 판단하는 면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중년(中年) 이후에는 성망(聲望)이 날로 융성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공 자신은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 하는 뜻이 전혀 없었다. 공이 아경(亞卿)이 되었을 때에 집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제는 이 정도로 끝마쳐야 하겠다.”라고 하였고, 정경(正卿)이 되었을 때에도 그렇게 말하였는데, 급기야 숭품(崇品)에 이르게 되자 항상 몸을 움츠리면서 “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는가. 오직 빨리 물러나야만 큰 재앙을 받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조강(祖江) 상류에 집을 짓고 스스로 이호 주인(梨湖主人)이라고 부르면서, 휴가를 얻을 때마다 이곳에 와 거주하며 항상 사부(謝傅)의 동산(東山)의 뜻을 이루어 보려고 하였는데, 어려운 시대 상황 때문에 결국은 그 소원대로 되지 못하고 말았다.

 

공은 조정에 있은 지 40년 동안에 입으로 선악(善惡)을 논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온화한 모습으로 대중 가운데 처하였다. 공은 당초 격탁 양청(激濁揚淸)하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공이 마음속에서까지 흑백(黑白)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에 공이 취했던 출처(出處)와 거취(去就)에 대한 큰 범주를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사(邪)를 억누르고 정(正)과 함께 하여 자신의 몸을 고결하게 보존하는 쪽으로 향하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공이 장수가 되어서도 대개는 이러한 도리를 적용했다고 말해진다.공은 두 번 장가들었으나 모두 후사(後嗣)를 두지 못하였다.

 

전 부인(前夫人) 임씨(任氏)는 군수 정로(廷老)의 따님으로 딸 하나를 낳고서 공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이 딸이 바로 우참찬 최공 명길의 부인이다. 후부인(後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는 모(某)의 따님이다.

 

공은 부실(副室)에게서 5남 3녀를 두었다. 공의 뒤를 이은 장자의 이름은 귀한(歸漢)이고, 다음은 사한(師漢)으로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직 벼슬하지 못하였고, 다음은 명한(鳴漢)이고, 다음은 성한(成漢)과 창한(昌漢)인데 모두 어리다. 사위의 이름은 오방식(吳邦式)과 유시번(柳時蕃)이며, 막내딸은 어리다. 손자와 손녀가 약간명 있는데, 모두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아, 걸출한 인걸이시여 / 猗歟人傑

우리 왕국에 태어났도다. / 生此王國

 

문에 능치 못하고서 어떻게 경륜하며 / 非文孰經

무를 모르고서야 어찌 신칙하리요 / 非武曷飭

 

아, 빛나는 우리 선조대왕께서 / 於皇宣廟

현재(賢才) 갈구(渴求)하시다가 이제야 얻었나니 / 渴賢斯得

 

하읍에 내려 보내 뜻을 분발하게 하고 / 爰奮下邑

남쪽과 북쪽 변방 울타리 되게 하셨어라 / 屛翰南北

 

파리한 백성 살려내고 폐정(敝政) 바로잡으며 / 蘇羸補敝

정예 군사 만들고 재곡(財穀)을 증식시켰나니 / 士厲財殖

 

어렵게 여기고 두려워할 게 뭐있으리 / 不戁不竦

우리 강역 지켜내면 그만인 것을 / 我疆我域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드러난 곧은 절조 / 履艱而貞

겸손한 마음가짐 또 말할 게 없었어라 / 亦旣撝抑

 

성스러운 손자가 용처럼 날아올라 / 聖孫龍興

선조대왕 할아버지 본받으려 노력하며 / 宣祖是式

 

공에게 부월(斧鉞)을 건네주고서 / 授之齊斧

우리의 어려움을 해소하게 하였도다. / 紓我旰昃

 

역적이 변방에서 제멋대로 날뛰면서 / 逆竪跳邊

안으로 잔당(殘黨)과 결탁을 하였나니 / 內連蟊賊

 

그 형세 지극히 곤란한 점 있었으나 / 勢有至難

공이 계책 세우자 극복 못할 게 없었다네. / 謀無不克

 

흉악한 괴수 순식간에 찢어 죽이고 / 亟磔獷兇

저들 불안해하는 마음 다독거려줌으로써 / 綏彼反側

 

종묘사직 영원히 편안케 하고 / 宗祧永寧

중외 모두 안정을 되찾게 한 뒤 / 京邑翼翼

 

희생 잡아 피 마시며 단서철권(丹書鐵券) 부여받고 / 喢牲銘券

상공의 높은 지위 일약 뛰어올랐어라 / 上公齊陟

 

시운(時運)이 우리에게 불리했을 따름이지 / 時屬利鈍

호란(胡亂)을 못 막은 게 어찌 공의 탓 이리요. / 非公之忒

 

양사(兩司)가 혹 지나치게 탄핵을 하였어도 / 師言或濫

밝은 임금 그 말 듣고 미혹됨이 없었어라 / 天聽詎惑

 

공이 두 번 절하고 땅에 머리 조아리며 / 公拜稽首

이젠 조금 쉴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자 / 臣汔可息

 

임금님이 이르기를 아름답도다. / 王曰休哉

오직 경이 나의 힘이 되어 주었다 하시고 / 惟卿予力

 

귀한 궁중 약제(藥劑) 내어 주시며 / 錫之神劑

부귀영화 누리면서 지내도록 하였는데 / 圭瓚玉食

 

어찌하여 백 년을 못다 채우고 / 胡不百年

곧장 대종으로 길 떠나가셨는가. / 岱宗之卽

 

아아, 우리 위대한 공이시여 / 嗟嗟宗公

명망과 그 덕행 길이 향유하시리니 / 享終名德

 

예전에 겪어 오신 험하고 어려운 길 / 自昔攸難

이제 와선 사람들의 법도가 되었도다. / 於今爲則

 

공의 행적 새겨 넣은 나의 묘지명 / 刻示玄堂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전하리라 / 穹壤偕極

 

[주01] 진무(振武) : 인조(仁祖) 2년(1624)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내린 공신(功臣)의 훈호(勳

            號)이다. 장만(張晚) 등 3인에게는 1등, 이수일(李守一) 등 9인에게는 2등, 신경원(申景瑗) 등 30인에게는

            3등이 주어졌다.

 

[주02] 정사(靖社) : 광해군(光海君) 15년(1623)에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 김류(金瑬) 등 50인에게

             내린 훈호(勳號)이다.

 

[주03] 애영(哀榮)의 은혜 : ‘생영사애(生榮死哀)’의 준말로, 생전이나 사후 모두 영예스럽게 되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살아서도 영광이요, 죽어서도 애도를 받는다.[其生也榮 其死也哀]”라는

            말이 있다.

 

[주04] 백사(白沙) : 이항복(李恒福)의 호이다.

 

[주05] 여연(閭延) : 평안도 구성도호부(龜城都護府)에 속한 고을 이름이다.

 

[주06] 심하(深河)에 …… 군대 : 명나라가 요동을 침범한 후금(後金)을 토벌할 때 원병을 요청하자, 강홍립(姜弘

            立)이 1만 3천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던 전역(戰役)을 말하는데, 뒤에 패전하는 등 전세가 불리해지자 휘

            하의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였다.

 

[주07] 수레바퀴를 …… 예(禮) : 옛날 제왕이 장수를 출정시킬 때에 베풀었던 융숭한 예우이다.

 

[주08] 모진(毛鎭) :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우리나라 철산(鐵山) 가도(椵島)에 설치했던 군영(軍營)을 가

            리킨다. 우리 조정에 무리한 요구를 강청하며 외교상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다가 결국은 명 나라 경략(經略)

           원숭환(袁崇煥)에게 피살되었다.

 

[주09] 사부(謝傅)의 …… 뜻 : 세상을 피해 숨어 살려는 마음을 말한다. 진(晉) 나라의 태부(太傅) 사안(謝安)이 젊

            은 나이에 관직을 사양하고 회계(會稽) 땅 동산(東山)에 은거했던 ‘동산 고와(東山高臥)’의 고사가 전한다.

          《晉書謝安傳》

 

[주10] 곧장 …… 떠나가셨는가, : 세상을 하직한 것을 말한다. 옛날에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대종 즉 태산(泰山)

             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이 있었다. 역주 :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譯) | 1997출전 : 택당집(澤堂集)/李植 著 >택당선생 별지 제6권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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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의정부우찬성 옥성부원군 장공[만] 묘지명 병서

(議政府右贊成 玉城府院君 張公[晩] 墓誌銘 幷序) 

 

 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知製敎 李植。撰。

 

 崇禎己巳冬。振武元勳玉城府院君張公。寢疾于漢京盤松里之第。上委太醫診視。內藥繼供。日遣掖庭監史。審問。越十一月十五日甲申。公竟不起。上悲悼輟朝。爲之素饌七日。中官致弔。禮官致祭。自襲至葬。皆有司庀具。明年二月甲寅。永窆于豐德郡歧村先壠之左。後七年乙亥。特贈領議政。謚曰忠定。女婿右參贊崔公鳴吉。與門下諸公謀。以爲公之事迹。有國乘在。曠中之記。宜託質直而寡辭者。以稱公之謙德。乃以狀授故從事李植。叙其大略而銘之。植竊惟國家自經龍蛇之變。南備倭。西北防胡。宣祖大王寤寐賢能。在廷文武。爭自淬礪。于時公以一書生。奮庸偏郡。自結主知。進當方面之寄。出入勤勞。東西惟命。所至。兵精財阜。疆埸無釁。逮聖上反正之始。內虞未弭。外寇方狺。卽起公爲元帥。出鎭西關。而大變遽生肘腋。存亡之勢。蓋岌岌矣。然公提麾下兵。不滿數千。鳩集渙散。不再旬而大憝就梟。中外乂安。此振武之功。所以與靖社相先後。合壇齊盟。與國咸休。中興之業。於是爲大。雖以時勢之難。不無利鈍。然自宣廟改紀以來。迄光海之季。名臣宿將。凋謝殆盡。而獨公屹然爲國干城。朝野倚望之重。始終哀榮之恩。雖書史所稱古昔大勳全德之臣。殆無以復加矣。植又焉用文之。謹按公諱晩。字好古。仁同人。曾祖諱哲堅。贈吏曹判書。王考諱季文。議政府舍人。贈議政府左贊成。考諱麒禎。沔川郡守。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議政府領議政。妣白川趙氏。贈貞敬夫人。公生于嘉靖丙寅十月十四日辛丑。産時。議政公夢斗星下照趙夫人寢所。覺而候之。公已誕矣。九歲遘痘疾氣絶。家人夢一丈夫杖公。傍有老叟止之曰。此貴人。當立大功於世。而已公甦。旣長。聰明俊偉。詞業夙成。己丑。中生進兩試。辛卯。別試及第。權知學諭。物論稱屈。癸巳。更選承文正字。俄薦爲藝文館檢閱。丁議政公憂。服闋。例陞主簿。遷刑,禮二曹佐郞。司諫院正言。遞爲典籍。歷侍講院司書。陞司憲府持平。兼司書。以言事忤權貴遞。由直講。出守鳳山。時倭寇在境。天兵南討。一路厨傳大窘。守令至見捶曳。多避匿村僻。而公不離郡舍。需接無匱。天將皆遜謝而去。闔境晏謐。上聞而嘉之。進秩通政。擢同副承旨。明年。特陞嘉善。以左承旨。出觀察忠淸道。入爲都承旨。歷戶曹參判。拜司諫院大司諫。明年。省覲海西。會姦人搆誣儒賢。朝論變更。公將入朝捄正。大臣有以爲無益而止之者。遂引疾遞。自是。不安於朝。以奏請使朝燕。還拜刑曹參判。出觀察全羅道。入爲兵曹參判。丁未。出觀察咸鏡道。秩滿。復留一年。比還。適西閫缺。朝廷不欲獨勞公。白沙李相公。特重其任。使人探公。公欣然請行。遂爲平安兵馬節度使。至則改定軍制。置別隊牙兵。其所施設。皆可久遠遵守。閭延四邑。中廢百年。奴夷侵占其界。公以爲祖宗疆土。棄與外夷。不何問。此邊臣責也。使人徇之。且給公牒曰。卽有他虞。以此示之。去果遇虜。縛以歸。乃出牒示其酋。酋曰。此官人。不可殺。閭延。本鮮地。我人居之非也。卽撤去。丁趙夫人憂。服闋。出觀察慶尙道。丙辰。海州誣獄起。牧使崔沂。以首罪被追。親舊莫敢視。公邀諸途次。議定置辭。以此得罪。削職黜外。久之叙復。進秩資憲。拜刑曹判書。己未。深河師覆。諸帥被俘。西邊大震。謂賊兵且至。卽以公爲體察副使。單車馳往。收召散亡。移節度營于昌城。以塞賊衝。添兵繼餉。邊情大定。進秩崇政。還拜兵曹判書。時倖門成市。而公獨以公道把持。由此權豪側目。公知不可有爲。乞暇沐浴平山椒井。盡室而行。仍上萬言疏。譏切時政。光海見之大怒。卽謝病。歸通津農舍。癸亥。始以八道兵馬都元帥起受命。上親行推轂禮于西郊。手寶劒。下榻授公。仍大賚將士以遣之。公開府平壤。節制而已。賊适鎭寧邊。所將牙兵降倭。兩南戍卒。萬數千。極一國精銳。陰結廢朝遺孽。表裏和應。反形漸露。甲子正月。因其子被逮。殺使者擧兵。與明璉父子合軍。而東國內大洶。會公久病。不視事。适意輕公。公幕屬多辭連賊黨。追命相繼。适又以牒書恐動。由此人各自危。事且不測。公開誠布信。從容若平日。衆乃讙然。賊諜爲邏卒所獲。公引入卧內。披襟示之曰。能刺刺我。不然。盍爲我用。其人感泣吐實。卽以檄文付之。還諭賊衆。是日。李胤緖等四將散軍。來歸。賊勢始孤。公力疾登城。以待賊至。賊旣恃有內應。且畏公不敢迫。潛從間路。直趨京城。公偵之。出兵追擊。先鋒戰于黃州不利。收兵再追。賊已先一日程。朝廷遣諸將。截賊前路。皆望風奔潰。車駕出幸。賊乘虗入京。是日。公促兵踵進。夜據鞍峴。平明遌賊大戰。适等連敗。爲其下所斬。公淸宮迎駕。伏路左待罪。上住駕慰諭。還都。冊勳。超階封玉城府院君。尋拜右贊成。罷元帥號。進都體察使。開府松都兼留守。未幾。以疾遞歸豐德別墅。懇求退休。上下敎峻責。公惶恐入朝。丙寅。拜兵曹判書。兼都體察使如舊。時兵制大毁。朝廷議行號牌法。公嘗白于上曰。竢牌法行。國家宜置三軍。以士族爲騎。良丁仍正甲。賤丁爲三手。庶幾民不撓。而兵額廣矣。上俯首肯之。公方提擧其事。未完。而丁卯春。胡寇大至。先是。朝廷以此胡搆亂上國。計必不東。姑撤添戍。西關諸將。常防毛鎭作梗。不以胡爲慮。公嘗爭論不得。至是變出倉卒。不及召下道兵。獨與火手數百人。卽日赴援。比至平山。賊已陷三鎭。諸城不戰自潰。朝廷遂聽虜納欵。兩司卽論公不能却敵。累月不止。上不得已始下中道之命。處之扶餘縣。冬遇赦放還。命復職牒。上知公功高無罪。故遇之加厚。將士亦冀其復爲帥。公積勞成疾。甲子之變。輿疾驅馳。左眼失明。再經暴露。疾益甚。杜門謝事。手書己巳春帖曰。吾年六十四。布衣榮已極。上願退田園。次願歸冥漠。此外無所求。神明照心曲。果以是冬卒。公內行甚飭。白沙公家在隣坊。每歎其誠孝。平居聲妓滿前。若遺外事務者然。及當官莅政。斬斬有制。規模素定。條理精密。明以察隱。故威不至虐。公以馭衆。故惠不至縱。是以令出而人稱便。事辦而民不知。其行軍。未嘗妄殺一人。亦不以私撓軍法。故士卒畏而愛之。久掌兵柄。門下武士甚衆。雖其人品各異。而待之一以誠信。賙貧拯急。視同親戚。事成則推功於人。事敗則身任其咎。故人人樂爲之用。聞公出征。則不待符檄。遠近爭赴。南以興,鄭忠信。始不相協。公勉以忠義。二將感激。遂約爲兄弟。幕中文武。或拔自儒素。或收諸罪籍。皆以功名顯。其他將閫材勇。公所奬勵成就者最多。公軀幹魁梧。射御絶倫。識慮深遠。長於策略。料敵揣情。人莫能及。中年以後。聲望日隆。而絶意進取。爲亞卿。謂家人曰。吾其以此終乎。爲正卿亦云。及躋崇品。常蹙然曰。吾何以至此乎。惟早退。可無大戾。築室祖江上流。自號梨湖主人。每休暇。輒就居之。常有謝,傅東山之志。竟以時艱不果。立朝四十年。口無臧否。和易處衆。初不以亢厲爲高。人或疑其不置黑白于中。旣而夷考其出處去就之大分。則無非抑邪與正。歸潔其身。其爲將。蓋亦用此道云。公再娶皆無嗣。前夫人任氏。郡守廷老之女。生一女。卽參贊夫人。先公二年卒。後夫人全義李氏。主簿克彬之女。副室有五男三女。長子爲後者。曰歸漢。次師漢。武科未仕。次鳴漢。次成漢,昌漢幼。女婿吳邦式,柳時蕃。季女幼。孫男女若干皆幼。銘曰。猗歟人傑。生此王國。非文孰經。非武曷飭。於皇宣廟。渴賢斯得。爰奮下邑。屛翰南北。蘇羸補敝。士厲財殖。不戁不竦。我彊我域。履艱而貞。亦旣撝抑。聖孫龍興。宣祖是式。授之齊斧。紓我旰昃。逆竪跳邊。內連蟊賊。勢有至難。謀無不克。亟磔獷兇。綏彼反側。宗祧永寧。京邑翼翼。喢牲銘券。上公齊陟。時屬利鈍。非公之忒。師言或濫。天聽詎惑。公拜稽首。臣訖可息。王曰休哉。惟卿予力。錫之神劑。圭瓚玉食。胡不百年。岱宗之卽。嗟嗟宗功。享終名德。自昔攸難。於今爲則。刻示玄堂。穹壤偕極。

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知製敎 李植。撰。

 

자료 :  : 택당집(澤堂集)/李植 著 >별지 제6권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