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정인지 선생 묘지명(鄭麟趾 先生 墓誌銘)

야촌(1) 2011. 8. 26. 12:43

삼탄집(三灘集) 卷之十四/이승소(李承召)  삼탄집 제14권 / 묘지(墓誌) 

 

하동부원군 정 문성공의 묘지명(河東府院君鄭文成公墓誌銘) 

 

이승소(李承召) 撰 

 

조선의 명신인 하동부원군 시(諡) 문성공(文成公)께서 향년 83세로 병으로 집에서 졸하였는데, 실로 성화(成化) 14년 무술(1478, 성종 9) 11월 25일이었다. 부음을 아뢰자 상께서 애도하기를 좌우의 손을 잃어버린 것과 같이하여 3일 동안 조회를 철폐하였으며, 부증(賻贈)을 규례보다 더 내리게 하였다.

 

다음해 춘3월 기미일에 충주(忠州) 불정촌(佛頂村)에 있는 인좌 신향(寅坐申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었다.

공의 휘는 인지(麟趾)이고, 자는 백저(伯雎)이며, 하동정씨(河東鄭氏)이다.

 

고려 충선왕조(忠宣王朝) 때 휘 지연(芝衍)이란 분이 있어 벼슬길에 나가 중대광(重大匡)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까지 이르렀다. 찬성공이 흥위위 대호군(興威衛大護軍) 휘 익(翊)을 낳았다. 대호군이 종부시 영(宗簿寺令) 휘 을귀(乙貴)를 낳았다.

 

종부시 영이 석성 현감(石城縣監) 휘 흥인(興仁)을 낳았는데, 이분이 공의 고(考)가 된다. 공의 공훈으로 인하여 대호군은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종부시 영은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현감은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흥덕진씨(興德陳氏)로, 친어군 낭장(親御軍郞將) 진천의(陳千義)의 따님이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홍무(洪武) 29년 병자(1396, 태조 5) 2월 무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아주 아름답고 뛰어났으므로 현감공이 몹시 사랑하여 친히 사서(四書)를 가르쳤는데, 눈으로 한번 스치기만 하면 곧 외웠으며 글을 잘 지었다.

 

16세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이로부터 온 힘을 다해 학문을 닦아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이에 드디어 대유(大儒)가 되어 식견이 있는 자들이 모두 공보(公輔)감으로 기대하였다. 영락(永樂) 갑오년(1414, 태종 14)에 문과(文科)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제수되었다가 여러 차례 옮겨져서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얼마 뒤에 병조정랑으로 승진하였으며, 이조와 예조의 정랑을 거쳐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전임되고 조봉대부(朝奉大夫)로 품계가 올라갔으며, 직전(直殿)에 제수되어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겸임하였는데, 왕의 명으로 짓는 문사(文詞)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는바, 대개 중한 선발이었던 것이다.

 

선덕(宣德) 정미년(1427, 세종 9)에 제과(制科)에서 수석으로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다음해 겨울에 상께서 경악(經幄)의 시종신(侍從臣)으로는 공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여 특별히 기복출사(起復出仕)시켜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과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에 제수하였다.

 

이로부터 비록 다른 관직에 제수되더라도 항상 집현전의 직을 겸임하였다.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동지총제(同知摠制)에 제수되었다가 예문관 제학, 인수부 윤(仁壽府尹), 이조참판으로 옮겨졌다.

 

이때 현감공께서 부여(扶餘)에 있었는데 연로하였으므로 공은 돌아가서 봉양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상께서 허락하지 않고는 이어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하여 영예로운 봉양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을묘년(1435) 가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상복을 벗고서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판서로 승진하였다. 경신년(1440, 세종 22)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어 경사(京師)에 가서 정조(正朝)를 하례하였다.

 

돌아와서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었다가 의정부 우참찬으로 전임되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임하였다.

이조와 예조와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성균관 대사성을 겸임하였는데, 대개 문형(文衡)을 맡은 것이다.

 

총제(摠制)에 제수된 이후로 집현전과 춘추관과 세자 빈객의 자리를 모두 겸임하였다. 경태(景泰) 경오년(1450, 문종 즉위년)에 문종께서 즉위하고서는 공을 의정부 좌참찬에 제수하였다.

 

임신년(1452)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올라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대신들이 공의 꿋꿋하고 곧음을 꺼려해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옮겨져 판예조(判禮曹)를 겸임하였다. 계유년(1453, 단종 1) 겨울에 세조께서 내란(內難)을 평정할 때 공이 곁에서 도운 공을 책훈(策勳)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에 초배(超拜)하고 수충위사협찬정난 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의 호를 하사하고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하였다.

 

을해년(1455, 세조 1) 여름에 세조께서 즉위하고는 영의정부사로 올려 제수하였으며,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더 하사해 주었다. 성화 무자년(1468) 가을에 예종께서 왕위를 이어 받아 즉위하였는데, 무신(武臣)인 남이(南怡)의 역모(逆謀)를 복주(伏誅)하자, 상께서 그 공훈에 보답하여 정난익대공신(定難翊戴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기축년(1469, 예종 1) 겨울에 금상(今上)께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은 다음에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의 호를 하사하였다. 공의 전 부인 조씨(趙氏)는 동지돈녕(同知敦寧) 조후(趙侯)의 따님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으며 자식이 없다.

 

후 부인 이씨(李氏)는 검교 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이휴(李携)의 따님으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으며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 광조(光祖)는 행 대호군(行大護軍)인데, 공보다 22년 먼저 죽었다. 차남 현조(顯祖)는 수충보사정난익대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이고, 의빈부 의빈(儀賓府儀賓)이며,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에 봉해졌고, 과거에 급제하였다.

 

삼남 숭조(崇祖)는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이며, 하남군(河南君)에 봉해졌다. 사남 경조(敬祖)는 행 호군이며,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오남 상조(尙祖)는 행 부호군이다. 장녀는 행 사용(行司勇) 권금성(權金成)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행 군기시 판관(行軍器寺判官) 김유악(金由岳)에게 시집갔다. 광조는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耼)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다. 딸은 전력부위(展力副尉) 권자균(權自均)에게 시집가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현조는 의숙공주(懿淑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바로 세조의 따님이며 자식은 두지 못하였다. 숭조는 처음에 내섬시 판관(內贍寺判官) 박후(朴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다. 딸은 회원군(會原君) 이정(李崢)에게 시집갔다.

 

다시 직산현감(稷山縣監) 조충로(趙忠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승충(承忠)은 행 사정(行司正)으로, 덕원군(德原君) 이서(李曙)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차남 승효(承孝)는 사맹(司猛)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경조는 처음에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며, 다시 경기관찰사 이계손(李繼孫)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상조는 제용부정(濟用副正) 안온천(安溫泉)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권금성은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김유악은 1녀를 두었는데, 연성군(蓮城君) 이지(李?)에게 시집갔다.

공은 불세출의 재주를 가지고 힘써 행하여 그 덕을 배양하였으며, 학문을 널리 익혀 그 지혜를 더하였다.

 

두텁게 쌓아서 쓰임에 베풀었으므로 그 문장은 태평시대를 꾸미기에 충분하였고, 그 사업은 큰 다스림을 경륜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도 오히려 글을 읽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특히 역(易)에 정통하여 스스로 호를 학역재(學易齋)라고 하였다.

 

오랫동안 문병(文柄)을 잡고 있었으며, 서책을 찬하고 역사서를 찬할 때는 공이 모두 총재관(總裁官)을 맡았다.

여러 차례 시관(試官)을 맡았으므로 이름난 공경(公卿)과 재주있는 대부(大夫)들이 공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태종께서 재상감의 재주를 가진 사람을 세종에게 남겨 주었으며, 세종께서는 불기군자(不器君子)라고 칭하면서 뭇 신하들과는 달리 큰 총애를 쏟았다. 세조께 알아줌을 입어 중흥하는 업적을 빛나게 열었으며, 금상(今上)을 잘 보도하여 능히 중화(重華)의 덕을 이루게 하였는데, 제도를 정하거나 글을 지을 때는 반드시 공을 기다려서 찬정(纂定)하였으며, 큰 정사나 큰 의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공에게 나아가 물어서 결정하였다.

 

여섯 조정을 내리 섬기면서 신하로서는 맨 끝자리에까지 올랐으며, 오복(五福)을 모두 누리고 한 시대의 사표(師表)가 되어 조가(朝家)에서는 서귀(筮龜)와 같이 믿었고, 사림(士林)에서는 산두(山斗)와 같이 우러렀으며, 백성들은 공의 출처(出處)를 보고서 휴척(休戚)을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었던 이래로 오직 공 한사람뿐이었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예성이라 그 고을의 남쪽 지역에 / 蘂城之南

점을 쳐서 길한 묘의 자리 잡았네 / 載卜吉鄕

 

산과 시내 빼어나고 아름다운데 / 山川秀麗

그 가운데 공의 몸이 묻혀있다네 / 繄公之藏

 

신령함 크게 쌓여 상서 발하니 / 畜靈發祥

영원토록 길이 더욱 창성하리라 / 永世彌昌

 

[각주]

[주01] 불기군자(不器君子) :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君子不器〕” 하였는데, 이는 군자는 특

            정한 용도를 가진 그릇처럼 특정한 기능만을 갖춘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論語 爲政》

 

[주02] 오복(五福) : 《서경》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나오는 다섯 가지 복으로, 오래 사는 것〔壽〕, 부유함

            [富], 안락함[寧], 미덕을 닦는 것〔攸好德〕, 늙어서 죽는 것〔考終命〕이다.

 

[주03] 서귀(筮龜) : 길흉을 판단하기 위하여 점을 칠 때 사용하는 시초(蓍草)와 거북 껍데기를 말하는데, 전하여 조

            정의 원로대신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04] 산두(山斗) : 태산(泰山)과 북두(北斗)로, 우러러볼 만한 존귀하고 현성(賢聖)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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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河東府院君鄭文成公墓誌銘 

                            

 이승소(李承召) 撰

 

有朝鮮名臣河東府院君文成公。享年八十有三。以疾卒于第。寔成化十四年戊戌十有一月二十五日也。訃聞。上震悼如失左右手。輟朝三日。賻贈有加。越明年春三月己未。葬于忠州佛頂村寅坐申向之原。公諱麟趾。字伯睢。河東鄭氏。高麗忠宣王朝。有諱芝衍者。仕至重大匡僉議贊成事。贊成生興威衛大護軍諱翊。護軍生宗簿令諱乙貴。令生石城縣監諱興仁。於公爲考。以公勳。贈大護軍正憲兵曺判書。贈宗簿令崇祿議政府左贊成。贈縣監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河城府院君。妣興德陳氏。親御軍郞將千義之女。贈貞敬夫人。以洪武二十九年丙子十有二月戊戌。生公。甚穎異。縣監奇愛之。親授四書。過目輒成誦。善屬文。年十六。中生員試。由是肆力問學。於書無所不讀。遂成大儒。有識者咸以公輔期之。永樂甲午。擢文科第一人。授禮賓主簿。累遷至兵曺佐郞。俄陞爲正郞。歷吏禮曺。轉集賢應敎。階加朝奉。拜直殿兼藝文應敎。凡應奉文詞。皆出其手。蓋重選也。宣德丁未。登制科第一人。授集賢直提學。秋丁母憂。翌年冬。上以經幄侍從之臣無如公者。特起爲集賢副提學,經筵侍講官。自是雖拜他官。常兼集賢殿。進階嘉善。授同知摠制。轉藝文提學,仁壽府尹,吏曺參判。時縣監居于扶餘年老。公乞歸養。上不許。乃授忠淸道觀察使。俾遂榮養。乙卯秋。丁父憂。服闋。拜刑曺參判。未幾。陞判書。庚申。以知中樞院事。如京師賀正。拜藝文大提學。轉議政府右參贊。兼判兵曺事。歷吏禮工曺判書。兼成均大司成。蓋典文衡也。自摠制以後。皆兼集賢殿,春秋館,世子賓客。景泰庚午。文宗踐祚。拜公爲議政府左參贊。壬申。陞崇政兵曺判書。大臣忌公亢直。移判中樞院事。兼判禮曺。癸酉冬。世祖平內難。以公有贊策功。超拜大匡輔國崇祿議政府左議政。賜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號。封河東府院君。乙亥夏。世祖。卽位。陞授領議政府事。加賜同德佐翼功臣號。成化戊子秋。睿宗嗣位。武臣南怡謀逆伏誅。上疇庸賜定難翊戴功臣號。己丑冬。今上入承大統。賜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號。公先配趙氏。同知敦寧侯之女。先卒無子後配李氏。檢校判漢城府事之女。封貞敬夫人。生五男二女。男長曰光祖。行大護軍。先公二十二年沒。次曰顯祖。輸忠保社定難翊載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儀賓府儀賓。河城府院君。登第。次曰崇祖。純誠佐理功臣河南君。次曰敬祖。行護軍。中生員試。次曰尙祖。行副護軍。女長適行司勇權金成。次適行軍器寺判官金由岳。光祖娶延昌尉安孟耼之女。生一女。適展力副尉權自均。生二男一女。皆幼。顯祖尙懿淑公主。卽世祖之女。無子。崇祖初娶內贍寺判官朴堠之女。生一女。適會原君崢。後娶稷山縣監趙忠老之女。生四男一女。男長曰承忠。行司正。娶德原君曙之女。次曰承孝。司猛。餘皆幼。敬祖初娶桂陽君璔之女。生二子皆幼。後娶京畿觀察使李繼孫之女。尙祖娶濟用副正安溫泉之女。生一女幼。權金成生二女。皆幼。金由岳生一女。適蓮城君。公以不世出之才。力行以培其德。博學以益其智。積之厚而施諸用。故其文章足以賁餙大平。其事業足以經綸大造。然猶讀書不輟。尤邃於易。自號曰學易齋。久秉文柄。凡撰書修史。公皆總裁。屢掌試圍。名公卿才大夫多出其門。太宗以宰相之才。囑之世宗。世宗稱爲不器君子。眷注異於群臣。知遇世祖。光啓中興之業。輔導今上。克就重華之德。制度文爲。必待公纂定。大政大議。必就公咨決。歷事六朝。位極人臣。備享五福。師表一世。朝家信之如筮龜。士林仰之如山斗。生民視公出處。以爲休戚。自吾東方有國以來一人而已。銘曰。蘂城之南。載卜吉鄕。山川秀麗。繄公之藏。畜靈發祥。永世彌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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