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한음 이덕형선생 묘지명 - 백사 이항복 지음

야촌(1) 2011. 7. 7. 13:19

한원부원군 이공 덕형 묘지명(漢原府院君李公墓

 

효충분의병기익사분충병의결기형난공신(效忠奮義炳幾翼社奮忠秉義決幾亨難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춘추관홍문관예문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春秋館弘文館藝文館觀象監事世子師)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이공(李公)의 묘지명(墓誌銘)

 

백사 이항복 지음

 

만력(萬曆) 계축년 10월에 명보(明甫)가 용진(龍津 : 오늘날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송촌리)의 강가에서 작고하였는데, 부음이 전해지자 상(上)이 몹시 슬퍼하면서 명하여 관작을 복구시켰다.

 

그러자 어진 사대부들이 모두 말하기를,  “나라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하였고, 심지어 이서(吏胥), 군민(軍民), 상려(商旅), 노유(老幼)들까지도 외롭고 아득하여 의지할 곳이 없게 여기면서 각각 화재(貨財)를 내어 수의(襚衣)를 받들고 문에 찾아오는 자가 서로 줄을 이었다.

 

이때 나는 명보와 함께 죄를 얻어 노원(蘆原)에 숨어 지내면서 대렴(大殮)에 미쳐 달려가니, 주인이 애절하게 곡하고 뛰고 하면서 절을 하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어떤 객이 말하기를, “근세에 율곡(栗谷)이 작고했을 적에는 삼학(三學)의 생도들과 금군(禁軍)들이 집에 모여서 곡(哭)을 하였고, 서애(西崖)가 작고했을 적에는 시인(市人)들이 또한 집에서 곡을 하였으며, 지금 공(公)은 이름이 사패(司敗)에 있을 적에는 삼사(三司)가 교대로 상소하여 변호했는데 죽은 날에는 또 이러하니, 또한 무슨 공로가 있기에 상하(上下)로부터 이렇게 사모함을 받는단 말인가.”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이르기를,‘살아 있을 적에는 그의 뜻을 빼앗을 수 없고, 죽은 뒤에는 그의 명성을 빼앗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것을 이른 말이다. 또 그가 조정에 선 지 34년 동안에 그가 수립한 것과 시행한 것으로 원근(遠近)에 입혀진 것이 마치 일월이 하늘에 걸려 있는 것과 같아서 지우(智愚)ㆍ현불초(賢不肖)를 막론하고 모두가 그것이 청명함을 알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잃어버리고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모두 탄식하여 몹시 슬퍼하는 것은 떳떳한 인정인 것이다.

 

그가 일찍이 일본의 사신을 접반했을 적에는 일본이 그 덕에 감복하였고, 일찍이 천조(天朝)의 군(軍)을 따라올 적에는 천조가 그 재능을 높게 여겼다. 그래서 우리 사신이 연경(燕京)에 조회갈 적마다 반드시 그의 기거(起居)를 묻고, 그의 출처(出處)로써 나라의 성쇠를 점쳤으니, 그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만배나 더 슬퍼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유독 한 나라뿐이겠는가. 해와 달이 비치는 곳, 서리와 이슬이 떨어지는 곳이면 어디나 그렇지 않은 데가 없는 것이다. 덕을 입힌 것이 이토록 멀리 미쳤는데, 같은 나라 사람의 경우는 한 세상에 나서 한 조정에 벼슬을 하면서도 그를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시기를 하고, 시기를 한 것으로도 부족해서 기필코 그를 죽이려고 하여, 심지어는 성명(聖明)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일월이 옆에서 환히 비추며, 귀신이 밝게 포열해 있고 어리석거나 슬기로운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는데도, 감히 하늘을 배반하고 하늘의 밝음을 엄폐시키어 그를 죽여야 한다고 함부로 말하였으니, 그 사람의 마음 속으로도 참으로 그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하니, 그 객이 아무 말도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그로부터 수일 뒤에 그의 고자(孤子) 여벽(如璧)이 초췌한 모습으로 참최(斬衰)를 입고 장사를 미처 지내기 전에 나를 찾아와서 곡(哭)하고 상장(喪杖)을 내려 놓고 절을 한 다음에 가장(家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일찍이 자식에게 이르기를,‘노부(老夫)의 심사(心事)는 친구 이모(李某)가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불행히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와 종유한 모든 분들 가운데 문학이 있는 분으로는 오직 대부(大夫)만이 계시므로, 감히 묘지를 부탁드립니다.”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옛날에 사마후(司馬侯)가 죽자, 숙향(叔向)이 그의 아들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네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는 내가 함께 임금을 섬길 사람이 없게 되었다. 너의 아버지가 일을 시작해 놓으면 내가 그것을 마무리짓고, 내가 일을 시작해 놓으면 너의 아버지가 그것을 마무리지음으로써 진국(晉國)이 이를 힘입었었으니, 내가 지금에 와서 또한 슬프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너의 아버지에 대해서 나이로 따지면 조금 위이지만, 덕으로 말하자면 내가 동떨어지는데, 태평성대의 문창부(文昌府)에는 기러기처럼 연해서 올라갔고,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는 서로 교대하여 중병(中兵)의 자리에 있었으며, 만년에 무능한 재상으로 있을 적에는 형제처럼 서로 막역하여 끝까지 함께 마치었으니, 평생 동안 벼슬한 자취가 대략 서로 선후(先後)하였다.

 

나를 알아준 사람은 군(君)이었고, 군을 사모한 사람은 나였는데, 젊어서는 삼대〔麻〕에 의지한 이익이 있었고, 지금은 기마〔驥〕꼬리에 붙는 희망이 있으니, 감히 즐겨 기록하지 않겠느냐. ”하고, 인하여 울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명보의 휘는 모(某)이고 한음(漢陰)은 그의 호이다. 이씨(李氏)는 광주(廣州)에서 나와 망족(望族)이 되었다. 고려의 말기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이르러 항직(抗直)하기로 유명하여 신돈(辛旽)이 장차 그를 죽이려 하자 아버지를 등에 업고 도망쳐 숨어 버림으로써 세상에 큰 명성을 남긴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름은 집(集)이고 호는 둔촌(遁村)이다.

 

그의 이세(二世)ㆍ삼세(三世)인 휘 인손(仁孫) 및 극균(克均)에 이르러서는 부자(父子)가 잇달아 재상이 됨으로써 이씨가 마침내 크게 되었다. 그로부터 또 이세인 수충(守忠)에 이르러 수충이 진경(振慶)을 낳고 진경이 휘 민성(民聖)을 낳았는데, 민성이 현령(縣令) 유예선[柳禮善-文化柳氏로 영의정 유전(柳琠)의 동생]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신유년에 명보를 낳았다(외동 아들임).

 

명보는 막 나서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어, 침착하고 의지가 강하며 순박하고 근신하여 함부로 유희(遊戲)를 하지 않았다.

11세에는 말을 내기만 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12세에는 문학이 대성(大成)하였다.

 

14세에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지나는 길에 공을 방문하여 자신이 어른이고 고귀하고를 따지지 않고 공과 수십 편의 시(詩)를 창수(唱酬)해 보고는 말하기를, “군(君)은 나의 스승이다.”고 하였다.

 

20세에 등제(登第)하여 괴원(槐院)에 뽑혀 들어가니, 선종(宣宗)이 장차 《훈의강목(訓義綱目)》을 강(講)하게 하려고 명하여 재신(才臣)을 뽑아서 내장(內藏)의 어질(御帙)을 특별히 하사하고 이를 강독(講讀)하게 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도록 하므로, 율곡(栗谷)이 5인을 천거하여 올렸는데, 나와 명보가 그 천서(薦書)에 함께 올랐으므로 한때에 이 일을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갑신년에는 황(黃)ㆍ왕(王) 두 조사(詔使)가 한강(漢江)에서 노닐면서 말하기를, “듣건대 조선에 이모(李某)란 사람이 있다 하니, 한 번 만나 보고 싶다.”하였으나, 명보가 예(禮)에 사적으로 만나보는 일이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러자 왕공(王公)이 절구(絶句) 한 수를 써서 주었는데, 그 소서(小序)의 대략에, “그대의 풍도와 기상이 범류(凡類)에 월등히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으나, 내가 서로 만나 보지 못하므로, 이것을 써서 주어 신교(神交)로 삼는 바이다.”고 하였다.

 

고사(故事)에 옥당 참하(玉堂參下)와 서당 사가(書堂賜暇)를 한때의 제일 가는 청선(淸選)으로 여겨 등영(登瀛)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때 선종이 명하여 《강목》을 내리고 나서 이어 옥당과 서당의 선발을 재촉하였는바, 율곡이 이때 문형(文衡)을 맡고 있으면서 실로 이 일을 주관하였었다.

 

계미년 이후로는 조론(朝論)이 엇갈리어 가부(可否)를 이루지 못하였는데, 명보는 후배로서 명성이 자자하였고, 나 또한 조그마한 명성으로 명보와 함께 응선(應選)의 인망이 있었다.

 

그러자 한 재상이 밤중에 율곡을 찾아가서 사람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양이(兩李)는 과연 인망은 있으나 그들의 의향을 알 수 없으니, 함부로 천거하여 시사(時事)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고 하자, 율곡이 말하기를, “두 사람의 명성이 한창 성한데, 어찌 어진 이들을 엄폐시킬 수 있겠는가.

 

또 사람을 천거하는 데는 인재를 얻는 것을 귀히 여기는 법인데, 어찌 의향을 논할 것이 있겠는가.”하니, 그 사람이 한밤중까지 쟁론을 벌였으나 자기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 명년 봄에 상이 서총대(瑞葱臺)에 행행하였는데, 이때 명보가 응제(應製)하여 수석(首席)을 차지하였다.

 

이후로는 싸웠다 하면 전군(全軍)의 으뜸이 되어 감히 그 예봉을 겨룰 자가 없었다. 일찍이 정시(庭試)를 보이도록 명하여 시험 볼 날짜가 아직 남아 있었는데, 함께 선발되어 고제(高第)를 겨루는 자가 먼저 정원(政院)에 묻기를, “명일 이모가 반드시 시험에 응할 것인데, 또 고제를 차지할까?”하였다.

 

명보가 그 말을 듣고는 병을 핑계로 응시하지 않으니, 논(論)하는 이가 말하기를,

“싸울 적마다 이기고 공격할 때마다 취하기란 본디 어려운 일이거니와, 적(敵)이 약한데도 나의 예봉을 감추고 뒤로 물러서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고 하였다. 부수찬(副修撰)에 승진되고 이어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부교리(副校理),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였다.

 

무자년에는 일본의 사신 현소(玄蘇)ㆍ평의지(平義智)가 오자, 명보로 하여금 그들을 영접하게 하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특별히 승진시켰다. 이때 두 사신은 명보의 의표(儀表)를 바라보고는 벌써 놀라는 표정으로 공경하는 태도를 지었고, 주연(酒宴)을 베풀기에 미쳐서는 그들이 명보에게 보답의 사신으로 일본에 와 주기를 힘써 청하였다.

 

이때 명보가‘일본이 근래에 입구(入寇)하여 우리 변민(邊民)에게 노략질을 하고 있으니, 어쩌면 그리도 신의가 없는가.’라는 내용으로 그들을 책망했는데, 일본이 그 사실을 듣고는 즉시 우리 인민 백여 명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선종이 명보를 가상하게 여기어 직제학(直提學)에 뛰어올려 임명하고 인하여 은대(銀帶)를 하사하였다.

 

경인년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승진되고 이어 우승지, 대사간(大司諫), 부제학(副提學), 대사성(大司成),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신묘년에는 예조 참판(禮曹參判) 겸 대제학(大提學)에 뛰어올려 임명되었는데, 당시의 나이가 31세였다.

 

본국의 관직은 문형을 중시하여 아무리 홍재 석유(鴻才碩儒)라 할지라도 이력(履歷)이 오래되고 품질(品秩)이 높지 않으면 그 자리에 가기가 어려웠는데, 명보는 인망과 실제가 모두 높았으므로, 조정 안의 노사(老師)들이 모두 팔짱만 끼고서 오르기를 사양하여, 우이(牛耳)를 잡는 데 있어 감히 그 손을 끌어당길 이가 없었다.

 

그래서 상이 가선(嘉善)으로 특별히 승진시킨 것은 또한 먼저 그 바탕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조정에서 회천(會薦)할 때에 미쳐 여러 사람의 천거에 딴마음이 없었는데, 명보에게 유독 권점(圈點) 하나가 적었으므로 온 좌중이 경악하여,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동원(東園) 김 상공 귀영(金相公貴榮)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한 짓이오” 하니, 사람들이 모두 아연실색하였다. 그런데 김 상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나이는 젊고 지위는 낮은 사람이 행실은 제로(諸老)보다 앞섰으나, 재덕(才德)이 노숙해지기를 조금 더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혹자는 그렇지 않다고 의아하게 여기기도 하였으나, 명보는 그 사실을 듣고 흔연히 깊이 복종하니, 한때의 사론(士論)이 두 사람을 다 훌륭하게 여겨 아울러 칭찬하였다. 임진년에는 일본이 대거 쳐들어와서 이모(李某)를 만나서 강화(講和)할 것을 요청한다고 선언(宣言)하였다.

 

그러자 선종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의논을 하였으나, 조정에서 어찌할 방도를 몰랐다. 이때 나는 도승지로 빈청(賓廳)에 있었는데, 명보가 문 밖에 서서 서로 만나기를 요청하므로, 내가 나가서 만났더니, 명보가 내 손을 끌어잡고 말하기를, “지금 적(賊)이 나를 만나기를 요구하니, 내가 가기를 청하고 싶네.

 

적들이 깊이 쳐들어왔는데, 어떻게 어려움을 사피(辭避)하겠는가.”하였다. 그리고는 입대(入對)하여 가기를 청하고 단기(單騎)로 달려 용인(龍仁)에 이르러 보니 적들이 이미 어수선하게 여기저기 퍼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되돌아와 한강에 당도하니, 대가(大駕)는 이미 서쪽으로 행행하였다.

 

그래서 뒤따라 평양(平壤)에 당도하니, 적들이 대동강(大同江)에 핍박해 오므로, 또 나와 만나기를 청하여 서로 만나서 논의한 결과, 명보가 또 적진에 가기를 요청하여 단가(單舸)로 강중(江中)에서 적들과 만났다.

 

이날 그 모임을 목격한 군신(群臣)ㆍ제장(諸將)들은 두려워서 용색(容色)을 변하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명보는 적을 보고 대의(大義)로써 책망할 적에 사기(辭氣)가 오히려 장렬하였다. 그리하여 뒤에 현소(玄蘇)가 자주 사람들에게 명보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황급한 중에서도 사어(辭語)가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으니, 참으로 미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처음에 명보가 행재소(行在所)에 뒤따라와서 밤에 대동강을 건너 곧바로 나의 처소로 와서 수일 동안 함께 묵었다.

이때 나는 병조 판서로 있었는데, 서로 이불을 연해 덮고 밤에 담화를 나누면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천조(天朝)에 구원병을 요청하고자 하나, 조정의 의논이 극구 반대하므로, 지금까지 걱정스럽고 답답하기만 하네.”하니, 명보가 즉시 넓적다리를 치면서 말하기를, “그것이 바로 나의 뜻이네. 명일에 우리 두 사람이 극력 쟁론하면 그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네.”하고, 인하여 서로 계획을 정하였다.

 

그리고는 날이 샐 무렵에 입조(入朝)하여 명보가 그 편의한 점을 말하자, 대신이 처음에 난색을 지으므로 명보가 항언(抗言)하여 굳게 쟁론하니, 조정의 의논이 이에 결정되었다. 이때 적세(賊勢)가 날로 핍박해 오므로, 선종은 또 평양을 출발하여 정주(定州)에 도착해서는 신하들을 인견하고 계책을 물었다.

 

그래서 내가 명보와 함께 서로 다투어 천조에 들어가서 상서(上書)하여 구원을 요청할 것을 청하였으나, 한밤중에 이르도록 상은 오히려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부제학 심충겸(沈忠謙)이 진언하기를, “신은 듣건대, 천하(天下)는 형세일 뿐이라고 합니다.

 

지금 형세가 만일 구원할 만하다면 두 신하가 가지 않더라도 구원병이 의당 나오게 될 것이고, 형세상 구원할 수가 없다면 비록 두 신하가 함께 가더라도 보탬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신하가 본국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진실로 신복(信服)하는 처지이지만, 중조(中朝)에 있어서는 일개 배신(陪臣)에 불과한데, 중조에서 그 현부(賢否)를 어떻게 알아서 이 두 신하를 위하여 이미 결정된 의논을 돌리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이모(李某)는 지금 병조 판서의 직에 있으니 더욱 멀리 떠나서는 안 되고, 부득이하다면 덕형(德馨)은 보낼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정히 이와 같다.”하고, 마침내 명보를 보내기로 하였다.

 

그 다음날 명보가 출발하려고 할 적에 내가 남문(南門)까지 전송을 하였는데, 명보가 말하기를, “쾌마(快馬)가 없어 이틀 길을 하루에 빨리 달려갈 수 없는 것이 한스럽네.”하므로, 내가 즉시 내가 타던 말을 풀어 주면서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그대는 의당 나를 중획(重獲)에서 찾아야 하고 서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네.”하니, 명보가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나는 의당 노룡산(盧龍山)에 뼈를 버리고 말지, 재차 압록강을 건너오지 않을 것이네.”라고 하여, 우리 두 사람이 눈물을 뿌리면서 작별하였다.

 

명보가 천조에 이르러서는 여섯 번이나 상서하여 울면서 호소하니, 순안어사(巡按御史) 학걸(郝杰)이 명보의 비분강개한 사어(辭語)를 보고는 가엾게 여겨 용색(容色)을 고치고, 미처 상주(上奏)하기 전에 편의에 따라 조승훈(祖承訓) 등 세 장수를 파견하여 먼저 적봉(賊鋒)을 시험해 보게 하였는데, 모두 패하여 퇴각하자, 마침내 5만의 대군(大軍)을 징발하여 보냈으니 이를 10만이라 호칭하였다.

 

다음해 봄에 의주(義州)에 이르러 명보가 도헌(都憲)으로 대병(大兵)을 빈접(儐接)하였다. 이때 삼경(三京)이 폐허가 되고 팔로(八路)가 패하여 무너졌는데, 명보가 군중(軍中)에 있던 때에는 여러 장수들에게 응대하고 군량(軍粮)을 힘써 조달하면서 항상 막부(幕府)의 주책(籌策)에 참여하여 제독(提督)이 누차 자기의 의견을 굽힘으로써, 마침내 평양에서 승첩을 거두고 송경(松京)과 한양(漢陽)을 수복하였다. 그래서 선종이 명보를 가상하게 여기어 작질을 더해서 형조 판서로 삼았다.

 

4월에 천병(天兵)이 한양에 들어왔다. 이때 구도(舊都)가 막 병란(兵亂)에 깎이어 전사한 시체는 길에 가득하고 굶어 죽은 송장은 구렁에 그득 찼는데, 명보가 사민(士民)들을 진휼하여 살리고 인하여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였으며, 서적(書籍)들을 거두어 모으면서 사 가거나 유실되는 것에 대비하였다. 천병이 돌아간 뒤에는 상께 청하여 집에 돌아가 아버지를 뵈었다.

 

이해 겨울에는 천자(天子)의 명으로 세자(世子)가 병조와 호조의 관원을 감독 인솔하여 전라도ㆍ경상도의 사이에 주둔하면서 군사(軍事)를 책응(策應)하게 되어, 내가 분조(分曹)의 병조 판서로 따라가게 되자, 명보가 본조의 병조 판서를 대신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숙천(肅川)에 있을 적에 군사를 모집하여 훈련시켜서 장전(帳殿)을 호위하게 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명보가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마음을 합해 규획하여 그 일을 크게 벌여서 진(陣)을 설치하고 무기를 제조하는 데 있어 모두 중조(中朝)의 양식을 따라서 하고, 인하여 둔전(屯田)을 설치해서 군수(軍需)를 보조하니, 공사(公私) 에 다 힘입은 것이 있었다.

 

갑오년에는 내상(內喪)을 당하였는데, 그해 겨울에 선종이 국사가 한창 어려워서 이모(李某)가 아니면 능히 해낼 수 없다 하여, 상을 마치기도 전에 복상(服喪)하려는 인정을 빼앗고 기용하려 하자, 명보가 아홉 번이나 상소하여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적이 물러가지 않은 것을 염려하지 않고 경(卿)이 나오지 않는 것을 걱정한다.”하고, 사지(辭旨)를 준절히 하여 소명(召命)에 따라 나오도록 재촉하니, 마지못해 억지로 입조(入朝)하여 이조를 거쳐 병조 판서에 전임되었다.

 

이때 호서(湖西)의 반적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선동하다가 패하여 참수되었는데, 그 잔당을 체포하여 조사한 결과, 적이 명보의 공훈과 명망이 성대함을 의식하여, 대질(對質)하는 즈음에 명보를 빙자해서 말을 하였다.

 

그러자 명보가 40일에 이르도록 석고대명(席藁待命)하였으나, 선종이 끝내 고집하여 윤허하지 않으므로, 마지못하여 일어나서 일을 보다가, 또 열 번이나 상소를 하고서야 비로소 체직이 윤허되었다. 병신년에는 다시 병조 판서가 되었다가 이윽고 이조로 전임되고, 내가 또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정유년에는 적이 재차 준동하자, 천자가 네 사람의 대장(大將)을 파견하여 10만의 군대를 보냈는데, 어사(御史) 양호(楊鎬)가 군대를 감독하였다. 양공(楊公)은 나이가 젊고 기(氣)가 예민하여 천하의 선비를 가벼이 보고 걸핏하면 기세로써 압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악하였다.

 

그래서 선종이 명보가 지난번 이 제독(李提督)의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상하(上下)의 인심을 얻었던 관계로 명보에게 명하여 가서 그를 빈접하게 하였다. 그런데 양공이 명보를 한 번 보고는 바로 감복하였다. 명보가 인하여 말하기를, “지금 적이 이미 기전(畿甸)에 핍박해 오고 있으니, 만일 한번 한강을 건너기만 하면 한강 서쪽은 다시 어찌할 방도가 없게 된다.

 

지금 바로 달려가면 아직은 구할 수가 있다.”고 하니, 양공이 마침내 단기(單騎)로 서울에 들어가서 더욱 급하게 전쟁을 독책하여 직산(稷山)에서 적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경도(京都)가 재차 편안하게 되었으니, 이는 명보의 힘이었다.

 

그 후 양공이 남쪽으로 정벌하여 울산(蔚山)에서 청정(淸正)을 포위할 적에도 명보가 또한 대군(大軍)을 따라 막부(幕府)에 있었는데, 이때 마침 큰눈이 내려서 인마(人馬)가 얼고 굶주리게 되자, 천병(天兵)이 군영(軍營)으로 물러와 묵고 있었다.

 

이때 양공이 명보가 군중에 있으면서 용감하여 과단성이 있고 기(氣)가 더욱 엄숙해짐을 보고는, 매우 뛰어난 인물로 여기어 말하기를, “이모(李某)는 비록 중조(中朝)에 있더라도 재상 자리에 앉아 있을 만한데, 아직까지 백관(百官)의 위치에 있는 것은 또한 이상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선종은 그 말을 들은 즉시 명보를 우의정에 임명하였으니, 이때 명보의 나이 38세였다.

이윽고 좌의정에 승진되고, 내가 그 뒤를 밟아 우의정이 되었다.

 

그 후 제독 유정(劉綎)이 길을 나누어 남쪽으로 내려갈 때에 미쳐서는, 선종이 유 제독을 전송하는 자리에서 유 제독이 ‘모름지기 문무(文武)를 겸비한 재능 있는 신하로서 본국의 제일인자인 사람을 얻어야만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계속해서 말하자, 선종이 나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뜻을 둔 데가 있는가?”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반드시 이모를 가리킨 말일 것입니다.”

하니, 인하여 명보에게 종정(從征)하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유 제독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공(李公)을 얻었으니, 내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하였다. 순천(順天)에 이르자, 적추(賊酋) 행장(行長)의 형세는 더욱 군박하게 되었는데, 유 제독이 행장에게 간첩을 보내 은밀히 사정을 일러 주고 그를 놓아 주어 도망가도록 하였다.

 

그러자 명보가 그 상황을 알아차리고 먼저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으로 하여금 수군 제독(水軍提督) 진린(陳璘)에게 고해서 함께 적을 공격하게 한 결과, 과연 함께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항구(港口)에서 적들을 기다렸다가 적을 양쪽에서 협공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신축년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로 1년여 동안 남쪽에 있다가, 임인년에 들어와서 영의정이 되었다. 계묘년에는 흰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는 변이 있자, 선종이 2품 이상의 관원들에게 명하여 득실(得失)을 말하게 하였는데, 명보가 일을 말한 것이 상의 뜻에 거슬리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체직되었다.

 

이때 명하여 호성(扈聖)ㆍ선무(宣武) 등의 공신을 책록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일을 인하여 난리 초기에 명보가 구원병 요청한 일을 가리켜 진술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모는 왜노(倭奴)가 그득 찬 때를 당하여 일엽편주를 타고 가서 적추(賊酋)를 만났으니, 망신 순국(忘身殉國)하는 사람이 아니면 해낼 수 없었다.”하고, 명하여 두 공훈에 다 책록하게 하였다.

 

명보가 그 명을 듣고는 차자(箚子)를 올려 매우 강력하게 사양하였다. 그런데 그것을 감정(勘定)하는 날에 명보를 시기하는 대신(大臣)이 있어 명보의 사양한 차자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니, 한로(漢老)가 공훈을 사양한 것은 타당한 일이다.”하고, 매우 강력하게 고집하므로, 좌우에서 서로 쟁론을 벌였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무신년에는 선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임서인(臨庶人)의 옥사(獄事)를 만나서, 상이 진(珒)의 처리에 대한 타당점을 물으므로, 내가 의당 사은(私恩)을 온전히 하여 죽음에는 이르지 않게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의논을 드렸더니, 그 의논을 본 조신(朝臣)들이 허둥지둥하며 서로 돌아보았고, 명보는 말하기를,“나 또한 그 말과 같은 생각이다.”고 하였다.

 

낭관(郞官)이 나에게 와서 이상의 사실을 고하므로, 나는 놀라며 말하기를, “상상(上相 영의정을 이름)이 말단(末段)의 말을 살피지 못한 듯하니, 시험삼아 가서 다시 여쭈어 보라.”고 했더니, 명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다만 내가 연명(聯名)만 했을 뿐이다.”하고, 기뻐하며 동요하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또한 상소하여 이 의논을 진술하였고, 이 완평(李完平 완평부원군 이익(李翼)을 이름)은 차자를 인하여 이 의논을 대략 언급하였다. 그러자 한때의 논자(論者)들이 시끄럽게 힘주어 공격하면서 역적을 비호한다고 하여, 사태가 불측하게 되었는데, 상은 양쪽을 다 옳게 여기면서 아울러 쟁론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조의(朝議)가 마침내 집법(執法)과 전은(全恩)의 두 가지로 나누어졌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심화되었다.

그해 여름에는 중조(中朝)에서 엄(嚴)ㆍ만(萬) 두 차관(差官)을 보내어 본국의 일을 조사 신문하였고, 또 고부사신(告訃使臣)은 경사(京師)에 있으면서, 중조에서 즉시 봉왕(封王)을 윤허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치계(馳啓)해 오므로, 상하(上下)가 모두 걱정되고 황급하였다.

 

그래서 상이 또 명보를 보내어 진주(陳奏)하게 하였다. 그러자 명보는 ‘엄ㆍ만 두 차관이 곧 본국을 출발할 것이니, 만일에 불행하게도 그들이 먼저 본국을 무고해 버린다면 우리 사신이 계속 가서 아무리 뛰어난 말솜씨로 설득을 시키려 하더라도 그 말이 먹혀들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가 먼저 경사에 가서 그 실상을 갖추 진주하는 것이 최선의 방도이다.’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27일 만에 경사에 당도하였다.

 

그리하여 5개월 동안 경사에 머물면서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오니, 상이 크게 기뻐하여 특명으로 그 아버지 아무에게는 당상(堂上)으로 뛰어올려 판결사(判決事)를 제수하고, 또 그 아들에게는 6품의 관직을 임명하고 인하여 토전(土田)과 노비(奴婢)를 배수(倍數)로 하사하였다.

 

기유년 가을에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임자년 봄에는 해서(海西)의 역옥(逆獄)이 일어났고, 계축년에 이르러서는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계속하여 일어나서 일이 궁금(宮禁)에 관련되어 임자년보다 더욱 위태로웠다.

 

당시에 상은 해마다, 날마다 털끝만한 것 이상까지 친국(親鞫)을 하여 일찍이 유사(有司)에게 맡겨서 공평하게 신문하도록 한 적이 없었고, 또 참설(讒說)이 해독을 끼침으로써 일이 대단히 중난하여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때 명보는 수상(首相)이었고 나는 좌상(左相)으로서 날마다 국정(鞫庭)에 모시고 참여하였는데, 명보는 정도를 지켜 평번(平反)을 하면서 강직하여 아종(阿從)하지 않았다. 이때에 삼사(三司)에서는 서로 상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라고 청하고, 또 삼공(三公)에게는 반드시 백관을 거느리고 정쟁(庭爭)을 하게 하고자 하였다.

 

하루는 상이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양사(兩司)의 장관(長官)이 전상(殿上)에서 소리 높여 말하기를, “정의(廷議)가, 대신(大臣)이 즉시 복합(伏閤)하지 않는 것을 허물로 삼으니,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그래서 내가 밖으로 나왔더니, 명보 또한 따라서 물러나와 묻기를, “정의가 이러하니 화가 장차 대신에게 먼저 미칠 터인데, 자네는 어떻게 하려는가?”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나의 뜻은 무신년의 의논에 있을 뿐이네.  하니, 명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죽을 것인가?”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내란(內亂)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내가 하필 영창대군을 위해서 죽는단 말인가.”하였다.

 

그러자 명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하려는가?”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자네가 수상으로서 의당 이 의논을 단정하여 그를 대궐 밖으로 내쳐서 안치시키도록 한다면 나는 의당 머리를 숙이고 따를 것이네, 그러나 만일 삼사의 의논대로 반드시 전인(甸人)에게 맡겨서 목매달아 죽인다면 부득불 이론을 제기할 수밖에 없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일세.”하니, 명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바로 나의 뜻이네.”하였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 백관이 복합했을 적에 명보가 대궐 밖으로 내쳐서 안치시킬 일로 말하였더니, 그로부터 수일 뒤에 한 권력 잡은 신하가 말하기를, “조정의 의논은 사형에 처하려고 하는데, 대신의 계사(啓辭)에는 내쳐서 안치시키기만을 청하였으니, 백관의 종사(宗社)를 위하는 뜻이 아니다.” 하면서 매우 침범하는 말을 하였다.

 

그러자 명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미 여러 사람의 뜻을 알았다.”하고, 계(啓)를 초(草)함에 미쳐서는 앞서의 의논을 굳게 지켜 변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다음날에는 그 사람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고 말하기를, “구차하게 대신과 행동을 같이할 수 없다.”하였으므로, 명보가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오지 않을 것인가. 사람마다 각기 견해가 있는 것이니, 자기의 뜻대로 하도록 맡겨 둘 뿐이다.”하였다.

 

옥사(獄事)는 날로 급해가는데, 외간에서 혹자가 장차 모후(母后)를 폐하려고 한다는 말을 전해왔다.

바로 정조(鄭造), 윤인(尹訒)이 대관(臺官)으로 피혐(避嫌)하여 으뜸으로 이 논의를 일으킨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명보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을 곳을 얻었네. 지금 조정 사람들이 굳게 고집하여 상을 기만하고 또한 아랫사람을 협박하는 데에 세 가지 설(說)이 있네.

 

첫째는‘의리가 분명하지 않다.[義理不明]’고 하는데, 나 또한 의리가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는 바이고,

 

둘째는‘역적 토벌이 엄격하지 않다.[討逆不嚴]’고 하는데, 나 또한 역적 토벌이 엄격하지 않다고 말하는 바이며,

 

셋째는‘역당을 비호한다[庇護逆黨]’고 하는데, 나 또한 역당을 비호한다고 말하는 바인데, 다만 위주하여 말하는 것이 서로 다를 뿐이네.

 

그 이른바 역적이란 것에 대해서는 그 역상(逆狀)이 된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엄격하게 토벌하지 못하고 언의(讞議)할 때에 이르러서도 말이 또는 분명하지 못하니, 진실로 역적인데도 유사(有司)가 이렇게 하는 것으로 보면 의리가 과연 분명하지 못한 것이네.

 

그리고 지금 신하로서 임금의 어머니를 폐하는 것은 참으로 역신(逆臣)의 행위이니, 참으로 역신의 정상을 알았으면 모든 관직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토벌을 어찌 감히 엄하게 하지 않겠으며, 역당을 어찌 감히 비호할 수 있겠는가.

 

지난날에 영창대군을 위해서 죽었다면 용맹을 상하는 일이었고, 오늘날에는 모후(母后)를 위해서 죽지 않으면 의리를 상하는 것이니, 어찌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정조ㆍ윤인에게 가리어져서 천하에 누(累)를 입도록 할 수 있겠는가.”하니, 명보가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먼저‘성효(誠孝)를 다하여 자전(慈殿)을 위안시키라’는 뜻으로 반복하여 진계(陳啓)하고 면려시켜서 상이 깨닫기를 기다리고, 인하여 대관(臺官)의 부도(不道)한 정상을 말하여 힘을 다해서 남김없이 격파하는 것이 좋겠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안 되네. 우리들의 계사(啓辭)가 절반도 못 가서 천위(天威)가 진노할 것이고, 혹 대간(臺諫)의 저격을 받더라도 형편상 말을 다하기 어려울 것이네. 대관이 이미 《춘추(春秋)》를 속여 인용하여 상의 총명을 현혹시키고 있는데, 이 일을 반드시 대신에게 물을 것이네.

 

그런데 내가 《춘추》를 대략 익히었으니, 의당 경의(經義)를 인용 증거대어 조목조목 공파(攻破)해야 하기에 지금 이미 그 자료를 머리 속에 갖추어 놓았네. 그리고 혹 헌의(獻議)를 인해서나, 혹은 차자를 올려서라도 인하여 영창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뜻을 언급하는 것이 좋겠네.”하니, 명보가 말하기를, “시험삼아 초(草)를 갖추어 나에게 보여 주게.“ 하였다.

 

그런데 그 이튿날 대궐에 나가니, 명보가 내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이 일을 어찌 수일이나 기다릴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은 마치 타는 것 같으니, 오늘 들어가 아뢰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므로, 내가 안 된다고 말하고, 인하여 초(草)한 것을 보여 주니, 명보가 기뻐하면서 매우 좋다고 말하였다.

 

그로부터 2일 뒤에 양사가 먼저 나를 탄핵하므로, 나는 동강(東江)에서 사죄(竢罪)하고 있었다. 내가 서울을 떠남으로부터 명보는 더욱 갈팡질팡하여 의뢰할 곳이 없었고, 국사(國事)를 돌아보고 성덕(聖德)에 누가 될까 걱정한 나머지, 매양 사제(私第)에 돌아가기만 하면 지붕을 쳐다보고 울먹였으며, 매양 밥도 물리쳐 먹지 않고 오직 냉주(冷酒)만 가져오게 하여 마음을 위로할 뿐이었다.

 

그 후 김제남(金悌男)이 국구(國舅)로서 사사(賜死)되고, 한창 고부(告訃)의 타당 여부를 의논할 적에는 명보가 《춘추》의‘자식은 어머니를 원수로 삼거나 인연을 끊을 수 없다.’는 등의 말을 인용하여 의논을 하니, 시의(時議)가 크게 경악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상은 또 정청(庭請)을 윤허하여 영창대군을 내쳐서 안치시켰는데, 논하는 자는 또 그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으니, 그는 우리들의 처음 의논이 본디 이것으로 그친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또는 명보의 우뚝한 의지를 굽히기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서, 화복(禍福)으로 명보를 동요시킬 수 있다고 여기어, 명보에게 먼저 그 의논을 제창하도록 재촉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명보가 차자를 올려 자신의 뜻을 보여 주자, 이에 물의(物議)가 흉흉해져서 지난번에 침범하던 자가 이것을 인하여 명보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한두 신진(新進)이 그의 뜻을 미리 영합하여 옥당(玉堂)에서 팔을 뽐내며 안률(按律)해야 한다는 의논을 제창하니, 삼사(三司)가 같은 말로 강한 정쟁(庭爭)을 벌인 것이 달포가 넘도록 그치지 않았는데, 상은 삭직(削職)만을 명하였다.

 

그래서 8월에 명보가 물러나 용진(龍津)으로 돌아왔고 이때 나이 53세였는데, 병을 얻은 것이 날로 악화되어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지금 내가 대단히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다. 모후를 폐하자는 의논이 일어났을 적에 명보는 급격히 공격하려고 했으나, 내가 시기를 기다리고자 하여 끝내 나의 의논을 따랐었다.

 

그런데 내가 먼저 패하여 물러나자, 명보가 고립되어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작고하여 후세의 지사(志士)들로 하여금 천고에 눈물을 떨어뜨리게 하였으니, 내가 명보를 그르친 것이 많도다. 그 배(配)는 고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딸인데, 3남 1녀를 두었다.

 

큰아들 여규(如圭)는 음보(蔭補)로 군수가 되었고, 다음 여벽(如璧)은 현감이고, 다음 여황(如璜)은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가 되었으며, 딸은 생원 정기숭(鄭基崇)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는 4남 3녀를 낳았다.

 

여규의 2남은 상건(象乾)ㆍ상곤(象坤)이고, 1녀는 이기조(李基祚)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 2인은 어리다.

여황의 2녀는 어리다. 이듬해인 갑인년 정원 3일에 양근산(楊根山) 부인(夫人)의 묘에 합장할 것이다.

 

명보는 타고난 자질이 매우 고상하고 정신이 빼어나고 밝았는데, 겸손함과 신중함을 스스로 지키어 재능을 드러내지 않았고, 평소에 마치 무능한 것처럼 너무 신중하여 재능의 만분의 2, 3도 쓰지 않았으나, 오히려 천하의 명사(名士)가 되었다.

 

그러니 만일 어진 임금을 만나서 간직하고 있는 재능을 남김없이 내놓았더라면 그 공덕(功德)이 사람에게 미치는 것과 사람들이 명보를 우러러 사모하는 것이 의당 어떠하였겠는가. 그리고 선조를 받드는 정성과 어버이를 섬기는 효성과 종족 간에 화목하고 이웃을 구휼한 어짊에 이르러서는 명보에게 경중(輕重)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갖추 기록하지 않는다.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명보가 어진 이를 추천하고 재능 있는 이에게 양보하는 것은 자피(子皮)와 같고, 빈객(賓客)과 응대(應對)를 잘하기로는 숙향(叔向)과 같고,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 없기로는 송경(宋璟)과 같고, 선비를 높이고 선(善)을 좋아하기로는유정(留正)과 같고, 사당(私黨)을 만들지 않는 것은 사마광(司馬光)과 같다.

 

이것을 모두 겸하여 실행하였으므로, 위로 진(晉)ㆍ정(鄭)의 사이에서 났으면 명대부(名大夫)가 되었을 것이고, 아래로 당(唐)ㆍ송(宋)의 즈음에 났더라면 현재상(賢宰相)이 되기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모는 마음이 커서 일을 당하여 동요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런데 과연 이것 때문에 시인(時人)들에게 거슬리었고, 또한 이것 때문에 후세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니, 일은 비록 숨길 수 있으나, 말은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곡(哭)을 그치고 일을 기록하노라니, 슬픔을 글로 다 형용할 수 없으나 비속함을 잊고 몰래 말하고 숨겨 써서 묘에 묻는 바이다.

 

 

[각주]

 

[주01] 이름이 …… 적 : 사패(司敗)는 사구(司寇)와 같은 뜻으로, 춘추 시대에 형죄(刑罪)를 관장하던 관명(官名)

             이니, 즉 사법(司法) 기관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바로 이덕형(李德馨)이 당시에 죄에 걸려 처벌을 받았으므

            로 이른 말이다.

 

[주02] 삼대〔麻〕에 …… 있었고 : 선인(善人)과 사귐으로써 자신도 선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대대례(大戴

             禮)》증자제언(曾子制言)에 “쑥대가 삼밭 속에 나서 자라면 붙들어 바로잡지 않아도 저절로 곧아진다.

            [蓬生麻中不扶自直]”한데서 온 말이다.

 

[주03] 기마〔驥〕…… 있으니 : 파리가 기마 꼬리에 붙으면 천 리를 갈 수 있듯이, 명망 높은 사람과 가까이함으로

            써 자신도 입신 양명(立身揚名)하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주04] 등영(登瀛) : 등영주(登瀛州)의 준말인데, 영주는 신선(神仙)이 산다는 해중(海中)에 있는 삼신산(三神山)

             의 하나로, 여기에 오르면 영광스럽다 하여 영예로운 지위에 오름을 비유한 말이다.

 

[주05] 우이(牛耳)를 …… 있어 : 여기서는 문단(文壇)의 우두머리가 된 것을 의미한다. 춘추 시대 제후(諸侯)들이

            회맹(會盟)할 적에 맹주(盟主)가 소의 귀〔牛耳〕를 잡아 베어 피를 취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06] 중획(重獲) : 획은 적에게 피살(被殺)된 것을 말하므로, 중획은 곧 적에게 피살된 시체들이 쌓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

 

[주07] 장전(帳殿) : 장막(帳幕)으로 둘러싼 궁전이란 뜻으로, 즉 행궁(行宮)을 의미한다.

 

[주08] 한로(漢老) : 호가 한음(漢陰)인 이덕형(李德馨)을 높여 일컬은 말이다.

 

[주09] 임서인(臨庶人) : 선조(宣祖)의 서자(庶子)인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을 가리킨다.

 

[주10] 평번(平反) : 원죄(冤罪)를 다시 조사하여 무죄(無罪)로 만들거나 감형(減刑)하는 것을 말한다.

 

[주11] 무신년의 의논 : 앞서 무신년에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광해군(光海君)이 이항복(李

             恒福)에임해군에 대한 처리 문제를 묻자, 이항복이 ‘의당 사은(私恩)을 온전히 하여 죽음에는 이르지 않

             게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의논드렸던 것을 이른 말이다.

 

[주12] 전인(甸人)에게 …… 죽인다면 : 전인은 교야(郊野)를 맡은 관원인데, 옛날에 공족(公族)이 죽을 죄를 지었

             을 경우는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시조(市朝)에서 처형하지 않고 전인에게 맡겨서 목매달아 죽이게 했

            던 데서 온이다. 《禮記文王世子》

 

[주13] 자피(子皮) : 춘추 시대 정(鄭) 나라 상경(上卿)이었던 한호(罕虎)의 자인데, 그는 국정(國政)을 잘 다스려

            명성이 았고, 일찍이 자산(子産)의 어짊을 알아보고 그에게 정사를 맡겨 주었었다.

 

[주14] 숙향(叔向) : 춘추 시대 진(晉) 나라 대부(大夫) 양설힐(羊舌肸)의 자인데, 그는 외국(外國)에 사신 가서나,

            외국의 빈객을 접대할 적에 응대(應對)를 잘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주15] 송경(宋璟) : 당 현종(唐玄宗) 때의 현상(賢相)으로, 요숭(姚崇)과 함께 개원(開元) 연간의 훌륭한 치적을

            이룩했었

[주16] 유정(留正) : 남송(南宋) 때의 현상(賢相)으로서 그는 특히 재능 있는 인재를 많이 등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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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效忠奮義炳幾翼社奮忠秉義决幾亨難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春秋館,弘文館,藝文館,觀象監事,世子師,漢原府院君李公墓誌。----- 白沙 李恒復 撰

 

萬曆癸丑冬十月。明甫卒于龍津江上。訃聞。上爲之震悼。命復其爵。於是大夫之賢者。士之良者。皆曰國其如何。甚至於吏胥軍民商旅老幼。踽踽茫茫無所恃。各出貨財。奉裞於門者踵相接。時余與明甫同獲罪。屛居蘆原。馳及大斂。主人絶踊而拜之。旣事還。客有言者曰。近世栗谷之卒。三學生徒禁旅會哭于第。西崖之卒。市人亦哭于第。今公名在司敗。三司交章。死之日又如是。亦何施而得斯於上下也。余曰。聖人云。生則不可奪志。死則不可奪名。其是謂矣。且其立朝三十有四年。其所立與所施所被於遠近者。如日月之麗于天。無愚智賢不肖。擧知其爲淸明。則一朝亡焉失之。不可復見已。則咨嗟痛悼。人情之常也。嘗儐日本之聘。日本服其德。嘗從天朝之軍。天朝高其才。我使朝京。必問其起居。以其出處。占國之汚隆。此其人聞之其傷而惜之必萬倍矣。然則何獨於一邦。將日月所照。霜露所墜。無所往而不然。德之所被。如是之遠。而一邦之人。則並世而生。同朝而立。不唯不悅。從而忌之。忌之不足。必欲殺之。至於聖明上臨。日月傍照。鬼神昭布。愚智具瞻。而乃敢反天蔽明。肆言可誅。是其心以爲眞。可誅耶否耶。客嘿而哂之。居數日。其孤如璧。纍然服斬。越紼而來。哭捨杖拜。獻狀曰。吾父嘗有言於子曰。老夫心事。有友李某知之。今父不幸死。凡與父游而有文者。唯大夫在。敢以幽堂之辭爲托。余曰。吾聞昔司馬侯死。叔向撫其子曰。自此其父死。吾蔑與比而事君矣。此其父始之。我終之。我始之。此其父終之。晉國賴之。吾於今。不亦悲哉。且余於若父。計年則差先一飯。語德則常後三級。平世文昌。鴈序而進。當國板蕩。迭居中兵。衰年伴食。塤箎莫逆。終與相竟。平生䆠迹。略相先後。知我者君。慕君者我。少得倚麻之益。今有附驥之望。敢不樂爲之志。因泣而叙之曰。明甫諱某。漢陰其號也。李出廣州爲望族。至麗季當恭愍朝。有以抗直聞。辛旽將殺之。負父逃隱。有大名於世者。曰集。號遁村。二世三世。至諱仁孫及克均。仍父子爲相。李氏遂大。又二世而至守忠。守忠生振慶。振慶生諱民聖。娶縣令柳禮善女。以嘉靖辛酉。生明甫。生有異質。沉毅淳謹。不妄遊戱。十一。吐辭驚人。十二。大成。十四。楊蓬萊士彦過訪。屛所挾。爲唱酬數十篇曰君我師也。二十。登第。選入槐院。宣宗將講訓義綱目。命選才臣。特賜內藏御帙。使之講讀。以備顧問。栗谷薦進五人。余與明甫同登薦書。一時榮之。甲申。黃,王詔使遊漢江曰。聞朝鮮有李某者。願一見之。明甫辭以禮無私覿。王公書贈一絶。有小序。略云。聞君風度氣象。遠超凡類。余未獲相接。書此以贈。爲神交焉。故事。以玉堂參下書堂賜暇。爲一時第一淸選。至比登瀛。時宣宗旣命賜綱目。繼催玉堂書堂之選。栗谷方典文衡。實主是事。當癸未之後。朝論携貳。可否不濟。明甫以後輩。聲名藉甚。余亦謏聞。俱有應選之望。有一宰相。夜訪栗谷屛人曰。兩李。果有人望。未知意向。不可輕薦致壞時事。栗谷曰。二人聲譽方盛。何可蔽賢。且薦人貴得才。何論意向。其人至夜分爭之不能得。明年春。上幸瑞䓗㙜。明甫應製居首。自是戰輒冠軍。無敢爭鋒。嘗命庭試。入彀有日。同選爭道者。先問政院。明日李某必當就試。又占高第耶。明甫聞之。稱疾不試。論者謂戰必勝攻必取。固難也。敵弱而韜鋒退舍。尤難也。陞副修撰。歷司諫院正言,副校理,吏曹佐郞。戊子。日本使玄蘇,平義智來聘。使明甫迎儐。特陞吏曹正郞。二使望其儀表。已洒然起敬。及步爵。力請報聘。明甫數以日本頃歲入寇。虜我邊民。何無信耶。日本聞之。卽還我人百餘名。宣宗嘉之。超拜直提學。仍賜銀帶。庚寅。陞同副承旨。歷右承旨,大司諫,副提學,大司成,吏曹參議。辛卯。超拜禮曹參判。兼大提學。時年三十一。本國官職。以文衡爲重。雖鴻才碩儒。非履歷旣久。品秩崇重。鮮能居之。明甫望實俱隆。朝中老師。皆袖手讓登。牛耳之執。無敢援其手者。上之特陞嘉善。亦所以先爲之地耳。及朝廷會薦。僉擧無他。明甫獨少一圈。滿座愕然曰。此何耶。東園金相公貴榮笑曰。老夫所爲。人皆失色。金徐曰。年少位卑。行先諸老。稍待才老德熟。如何。人或訝其不然。而明甫聞之。欣然深服。一時士論。兩美而並稱焉。壬辰。日本大擧入寇。宣言請見李某講和。宣宗會群臣議。朝廷不知所爲。時余以都承旨。在賓廳。明甫立門外。請與相見。余出見。則引余手曰。今賊求見我。我欲請往。寇深矣。若之何。辭難。及入對請往。單騎馳至龍仁。則賊已散漫。不可入。還到漢江。則大駕已西幸矣。追及於平壤。賊進逼浿江。又請見。明甫又請往。單舸會于江中。是日羣臣諸將。見其會者。無不悚然變色易容者。明甫見賊。責以大義。辭氣猶烈。後玄蘇亟稱於人曰。倉卒辭語。無異平日。信不可及也。初明甫追及行在。夜渡浿江。直抵余所。同宿數日。時余忝中兵。連衾夜話。謂之曰。我欲乞援天朝。廷議掉臂。㦖塞到今。明甫卽拊髀曰。吾意也。明日吾兩人力爭。事可成矣。因與定計。遅明入朝。明甫言其便。大臣初難之。明甫抗言固爭。庙議乃定。賊勢日逼。宣宗又發平壤。行到定州。引羣臣問計。余與明甫。爭請入天朝。上書求救。至夜分。上猶沉吟不決。副提學沈忠謙進曰。臣聞天下。勢而已。今勢若可救。微二臣往。兵自當出。勢不可救。雖二臣並往。無益也。二臣在國。人固信服。在中朝。則不過一介陪臣。中朝何知其賢否。而肯爲此二臣者。回已定之議也。况李某方在本兵。尤不可遠離。無已則德馨可遣。上曰。吾意政如是。於是遂遣明甫。翌日將發。余送之南門。明甫曰。恨無快馬兼程疾馳。余卽解所乘馬與之曰。兵不出。君當索我於重獲。無相見也。明甫曰。兵不出。吾當棄骨於盧龍。再不渡鴨水也。二人洒涕而別。及至。六上書泣愬。郝廵按杰。見明甫辭語慷慨。愍然爲之改容。未及上奏。便宜遣祖承訓等三將。先嘗賊鋒。皆敗退。遂大發兵五萬。衆號十萬。明年春。到義州。明甫以都憲。儐接大兵。時三京丘墟。八路潰敗。明甫在軍日。應對諸將。督辦粮餉。常參幕籌。提督累黜己見。遂克平壤。復松京。收漢陽。宣宗嘉之。增秩爲刑曹判書。四月。天兵入漢陽。時舊都新刳於兵。遺骸滿路。餓殍塡壑。明甫賑活士民。仍使處業。收聚書籍。以備購遺。師旋。乞歸覲其父。冬。天子命世子督率兵,戶曹官。駐全,慶間。策應軍事。余以兵判分曺從行。明甫代判本兵。先是。上在肅川。令募兵敎鍊。扈衛帳殿。至是。明甫與柳西成龍。協心規畫。張大其事。置陳製器。皆倣中朝。仍設屯田。以助軍需。公私有賴焉。甲午。丁內憂。其年冬。宣宗以爲國事方艱。非李某不能爲。未沒喪而奪情。明甫九上章辭不起。上曰。予不以賊不退爲慮。以卿不出爲憂。辭旨切峻。促令赴召。黽勉入朝。由吏曹移判兵曹。湖西賊。夢鶴煽亂敗斬。逮捕餘黨。賊以明甫勳名盛大。置對之際。藉以爲言。明甫席藁待命。至四十日。宣宗執不許。不得已起視事。又十上章。始得許遆。丙申。還判兵曹。俄遷吏曹。余又代之。丁酉賊再動。天子遣四大將。發兵十萬。御史楊鎬監軍。楊公年少氣銳。輕視天下士。動以氣勢壓倒。人皆洶駭。宣宗以明甫前在李提督軍中。能得上下心。命往儐之。楊公一見傾倒。明甫仍言曰。今賊已逼畿甸。若一渡漢。則江以西。無復著手處。及今馳往。猶可及救。楊公遂單騎入京。責戰益急。嘬鋒稷山。京都再安。明甫之力也。及楊公南征。圍淸正於蔚山。明甫亦隨大軍。在幕府。會天大雨雪。人馬凍飢。天兵左次。時楊公見明甫在軍曁曁。氣益厲肅。深加器異曰。李某雖在中朝。當端委廟堂。尙屈百僚。不亦異哉。宣宗聞卽登庸。時年三十八。俄陞左議政。余躡其後。及劉提督綎分道而南。宣宗祖送。劉縷縷言。須得才能臣文武備具。爲本國第一人。事乃可成。宣宗顧余曰。意有在耶。余對曰。必李某也。因命從征。劉喜曰。得李公。吾濟矣。至順天。賊酋行長。勢益窘蹙。劉行間密喩。縱使遁逃。明甫鉤得其狀。先令統制使李舜臣。轉告水軍提督陳璘。同伏要港。挾擊大敗。辛丑。以都體察使。居南歲餘。壬寅。入爲領議政。癸卯。白虹貫日。宣宗命二品以上。言得失。明甫言事忤旨。遆領西樞。時命策扈聖宣武等勳。余因事指陳明甫亂初請兵事。上曰。李某當倭奴充斥之日。以扁舟往見賊酋。非忘身殉國者。不能也。命使幷錄。明甫聞命。箚辭甚力。勘定之日。大臣有忌之者。指其辭箚曰。此皆實錄。漢老辭勳宜矣。持之甚力。左右爭之。不能得。戊申。宣廟禮陟。今上改玉。遭臨庶人獄。上問處珒之宜。余議以爲宜全私恩。俾不至死。朝臣見者錯愕相顧。明甫曰。我亦同辭。郞官來告。余驚曰。恐上相未察末段語。試往更稟。明甫笑曰。第聯我名。怡然不動。未幾。鄭寒岡逑以都憲。亦䟽陳是議。李完平因箚略及之。於是一時論者。紛然力攻。謂之護逆。事將不測。上兩可而幷止之。朝議遂分。有執法全恩之異。至于今逾甚。其年夏。中朝遣嚴,萬兩差官。査問本國事。又告訃使臣在京。馳啓中朝。不卽許封。上下㦖急。上又遣明甫陳奏。明甫以爲嚴,萬將發。萬一不幸先誣本國。則使臣繼至。雖工言不入。不如先至京師。備陳實狀。遂星夜兼程。二十七日。至京師。留五月幹事而廻。上大悅。命其父某超陞堂上。除判决事。又官其子六品。仍賜土田臧獲倍。己酉秋。復拜領議政。壬子春。海西逆獄起。至癸丑。應犀之獄繼起。事連宮禁。比壬子尤危。上連年逐日。親鞫絲毫以上。未嘗委有司淑問。又讒說惎撓。事有至難不忍言者。明甫爲首相。余以左僚。日侍鞫庭。明甫守正平反。棘棘不阿。時三司交章請誅永昌。且欲三公宜率百僚庭爭。一日。上入更衣。兩司長官。於殿上揚言曰。廷議以大臣不卽伏閤爲咎。不敢不告。余出外。明甫亦隨以退。問曰。廷議如是。禍將先及於大臣。子將如何。余曰。吾之意。在戊申之議矣。明甫曰。然則死乎。余曰。禮云內亂不與焉。我何必爲永昌死也。明甫曰。然則何居。余曰子以首相。當斷此論。若令出置闕外。則我當屈首從之。若如三司之議。必磬于甸人。則不得不立異。死生。命也。明甫笑曰。吾意也。明日百官伏閤。明甫以出置爲辭。居數日。有柄臣言曰。朝議欲置辟。而大臣啓辭。只請出置。非百僚所以爲宗社意也。辭極侵軼。明甫笑曰。已領僉意。及草啓。持前議不變。翌日。其人稱疾不來曰。不可與大臣苟同。明甫聞之笑曰。不來耶。人各有見。任自爲之。獄事日急。外間或傳將廢母后。鄭造,尹訒。以㙜官避嫌。首發是論。余謂明甫曰。吾得死所矣。今時人所持以罔上。亦所以䝱下者。有三說焉。一曰義理不明。吾亦曰義理不明。二曰討逆不嚴。吾亦曰討逆不嚴。三曰庇護逆黨。吾亦曰庇護逆黨。但所由言者異耳。其所謂逆者。未見其爲逆狀。故不敢嚴討。至於讞議。辭亦依違。苟逆焉而有司如是。則義理果不明矣。今臣而廢君之母。眞逆臣也。眞知逆狀。則凡在官者。討何敢不嚴。黨何敢有護也。前日爲永昌死則傷勇。今日爲母后不死則傷義。憗使吾君爲造與訒之蔽也。而負累於天下耶。明甫曰。吾二人同進。先以克盡誠孝。慰安慈殿之意。反覆陳啓磨礪。以待上悟。因言㙜官不道之狀。悉力擊破之無遺。其可也。余曰。不可。吾等啓辭未半。天威震怒。或㙜諫狙擊。勢難畢說。㙜官旣誣引春秋。眩惑上聡。此事必詢大臣。我粗習春秋。當引經據義。段段攻破。今已具腹藁。或因獻議。或進一箚。因及永昌不可加誅之意。可也。明甫曰。試具草示我。翌日詣闕。明甫附耳謂余曰。此事何能忍待數日。我心如焚。今日入啓如何。余曰。不可。因以具草示之。明甫喜曰。甚善。越二日。兩司先劾余。余竢罪東江。自余去國。明甫益倀倀無所聊。睠顧國事。憂累聖德。每歸私第。仰屋飮泣。輒却食不進。唯索冷酒。熙然而已。金悌男以國舅賜死。方議告訃當否。明甫引春秋子無讐母絶母等語爲議。時議大愕。未幾。上又允庭請。出置永昌。論者又欲置法。不知吾儕始議。本只此而止。又不知明甫嶽立難撓。謂可以禍福動。至促先倡。明甫乃進一箚以示之意。於是物議洶洶。前所侵軼者欲因此去之。一二新進。承望旨意。攘臂玉堂。倡爲按律之議。三司同辭。庭爭之强。逾月不已。上只命削職。八月。退歸龍津。時年五十三。得疾日惡。遂不起。今所大恨者。廢后之議起。明甫欲急攻。余欲待時。卒從余議。余先敗退。明甫孤立。未盡所言。泯泯而歿。使後志士。殞淚千古。余之誤明甫多矣。其配曰。故領議政李山海女。生三男一女。長如圭。蔭補郡守。次如璧。縣監。次如璜。文科侍講院說書。女生貟鄭基崇。側室生四男三女。如圭有二男。象乾,象坤。一女李基祚。餘二人幼。如璜有二女幼。明年甲寅正月三日。合葬於楊根山夫人之墓。明甫天分甚高。精神秀朗。謙謹自持。不色於藝。平居粥粥若無能。萬不施其二三。而猶爲天下之聞人。若使遭遇。叩其囊底而盡出之。則其功德之及人而人之慕尙。宜如何也。至於奉先之誠。事親之孝。睦族恤鄰之仁。非明甫所以輕重者。不具載。余嘗謂明甫。推賢讓能。似子皮。應對賓客。似叔向。知無不爲。似宋璟。尊儒樂善。似留正。不立私黨。似司馬光。率是以行。上以出於晉鄭之間。不失爲名大夫。下以出於唐宋之際。不愧爲賢宰相。又謂李某心大。能臨事不動。果以是獲戾于時。亦以是揚名於後。事雖可諱。言不可沒。輟哭記事。哀不能文。忘其質俚。竊言而隱書以埋之。

[주-D001] 崖 : 厓

[주-D002] 敦 : 數

 

백사집 > 白沙先生集卷之三 / 墓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