都僉議舍人洪崖公(諱 侃)墓誌銘.
*익재 이제현의 사돈(門下侍郞 李瑞種의 丈人)
홍양호(洪良浩:1724~1802) 撰
洪崖先生諱侃。字平甫。一字雲夫。姓洪氏。豐山人。始祖國學直學諱之慶之長子。宋度宗咸淳二年高麗元宗七年丙寅。與文士閔漬同榜賜第。歷官朝奉大夫秘書尹致仕,都僉議舍人,知制誥。間出爲原州牧。又以言貶東萊縣令。卒于官。卽忠烈王三十年甲辰也。後雪谷鄭誧以司議大夫。謫蔚州。嘗至東萊。有詩曰。當日洪平甫。波瀾起筆端。高才不遇世。晩歲此爲官。憔悴身仍病。吟哦興未闌。壁間無一字。豈爲和詩難。蓋傷先生之不遇也。先生娶三嘉吳氏。司憲糾正崇之女。一男侑。密直使三館大提學。女適中郞將成君阜。密直三子。長曰溟官弘文館。仲曰演寶文閣大提學。季曰浚藝文館大提學。一女歸宗簿副令 李瑞種。卽鷄林府院君益齋李齊賢子也。成三子。準得尙書,有得政丞,允得密直副使。寶文生郞將龜。見麗政亂。棄歸高陽。已而我朝受命。歷五世至大司憲履祥。以名德重一世。其後官益盛族益大。先生世居安東之豐山縣。人至今指其遺墟。而獨墓地無傳。英宗丙寅。後孫重默等。尋始祖墓於申城浦午山岡下。有誌刻。其背曰。子某趾。在越河辰坐。於是涉川而東。得先生墓於烽火山聖造洞。改封而豎石。始邑人壓葬於其上。毁塋而立碣。忽大雷震擊斷其半。未幾事發。罪其人而去其塚。後壬午。樵童獲片石於巖隙。前刻曰都僉議舍人,知制誥豐山洪某辰坐遺誌。配吳氏。在越河酉坐。妣金氏。在子侑墳尾亥坐。後刻曰弟樞密使備。在考位下同坐。長孫弘文館溟。在水谷。仲孫演妻。尹得和女。在越河庚坐。噫。隱之者。惟恐不深。而久乃自露。夫豈偶然哉。謹識塋域顯晦之由。先系子姓之槩。燔磁爲誌。並瘞舊誌于墓前。惟夫人墓。在越河者。似指申城。而始祖同岡。蓋有酉坐古壙焉。未及改封。愼之也。先生詩有盛名。益齋稗說曰。洪平甫每出一篇。人無賢愚。皆喜傳之。皇明詔使朱之蕃。見海東詩選。謂人曰。孤雲詩似粗弱。李仁老,洪某詩最好。佔齋金宗直選靑丘風雅。載公詩數十首而評之曰。孤鴈行。懶婦引二篇。是公自况云。遺集佚不傳。大憲子霶爲嶺南觀察使。蒐輯爲一卷。刊行于世。崇禎癸酉。觀察從弟豐寧君靌。奉使如京師。携入中國。禮部主事孔聞漂。見而大賞。爲序其首而歸之。<끝>
출전>耳溪集卷三十二/洪良浩:1724~1802)의 시문집
↑홍간(洪侃(厓)선생 부부 합장 묘/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신성1동 탑마을 봉화산 성조동 진좌
↑묘비
●홍간(洪侃(厓),
[생졸년] ?∼1304(충렬왕 30)
[세 계] 풍산(豊山) 洪氏 2世
[이 력] 고려의 시인, 자는 평보(平甫). 운부(雲夫), 호는 홍애(洪厓)로 고려 원종(충경왕) 7년 병인(1266년) 문과
급제하여 도(都) 첨의사인(僉議舍人)과 지제고(知制誥)에 이렀다.
홍간(洪侃(厓), 선생의 묘는 실묘 하였으나 1746년 묘소를 찾아 구 표석 곁에 표석을 다시 세웠다.
경상북도 안동시의 여덟 명당중 하나라고 전하여진다. 배위 삼가오씨(三嘉吳氏)와 합폄(合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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