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용헌공 이원 신도비명(容軒公李原神道碑銘)-고성이씨

야촌(1) 2011. 6. 26. 19:47

세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용헌(容軒) 이원[李原, 1368 (공민왕 17) - 1430 (세종 12)]은 행촌(杏村) 이암(李嵒 : 1297(충렬왕 23)~1364 (공민왕 13)의 손자이고, 이강(李岡 : 1297 (충렬왕 23) - 1364 (공민왕 13) 의 아들이다. 신도비명을 지은 서거정은 이강의 사위인 양촌 권근의 외손자로, 이원에게는 누나의 외손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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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헌 이공신도비명(容軒 李公神道碑銘)

 

유명조선국 추충익대동덕좌명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수문전대제학 영집현전 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겸 판이조사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순성명량좌리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성균관사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이 글을 짓고,

 

고손자 숭정대부 판돈녕부사 겸 지경연 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명규(名珪)가 글씨를 쓰고,

 

고손자 가선대부 행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 택(澤)이 전서를 쓴다.

 

철성(鐵城) 이씨(李氏)는 고려 때의 훌륭한 가문이다. 진(瑨)이 있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덕을 베풀어 후손에게 남겨주었다. 감찰대부 존비(尊庇)를 낳았으니 문명으로 높이 드러났다.

 

이분이 철성군(鐵城君) 우(瑀)를 낳았으니 일을 맡음에 재간과 능력이 있어서 회양(淮陽)과 김해(金海), 전주(全州), 진주(晉州)의 수령을 역임하여 이르는 곳마다 사랑을 베풀었다.

 

이분이 문하시중 암(嵓)을 낳았는데 충정왕을 섬겨서 좌정승이 되었다가 곧 몸을 받들어 물러나기를 구하였고 공민왕때에 다시 정승이 되었다. 기해년(1359, 고려 공민왕 8)에 모거경(毛居敬)이 서관을 침범하자 도원수가 되어 적을 제압하고 승리의 공을 세우니 장신과 상신의 재주를 겸비하여 공훈과 명성이 세상을 뒤덮었다.

 

시문 또한 질박하고 고상하였으며 진· 행· 초서의 삼법(三法)이 모두 절묘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분이 강(岡)을 낳으니 아버지의 풍도가 있어 사람들이 모두 공보(公輔)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일찍 별세하였고 관직은 밀직부사에 이르렀다.

 

신축년(1361, 고려 공민왕 10) 홍건적의 난리에 공민왕이 다급히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공은 경상도안렴사가 되어 받들어 모시는 의례와 호위가 매우 성대하고 대접하는 것이 풍족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찬탄하며 그 훌륭함을 칭송하였고 왕도 그 재능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공이 별세하였을 때 왕이 탄식하며 “하늘이 어찌하여 나의 강(岡)을 빨리도 빼앗아 가는가?”라고 말하였다. 그 전의 제도에 추밀의 직에는 시호를 내리지 않았으나 특별히 문경(文敬)이라고 시호를 내렸다.

 

부인 곽씨(郭氏)는 판개성(判開城) 연준(延俊)의 따님이니 홍무 무신년(1368, 고려 공민왕 17) 정월 을해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이름은 원(原), 자는 차산(次山)이고 호는 용헌(容軒)이다.

 

처음 공이 태어나 4개월 만에 문경공이 별세하니 곽부인은 항상 마음에 슬퍼하며 울면서 “하늘이 만일 이씨에게 복을 내린다면 이 아이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공은 강보에 있을 때부터 성인처럼 매우 의젓하였고 조금 자라서는 학문에 힘써서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의 누이인 권문충공(權文忠公 : 양촌 권근)의 부인 이씨는 공이 어려서 아버지 잃은 것을 가엾이 여겨 자식처럼 보살펴주었고, 문충공 역시 자식처럼 가르치고 깨우쳐 주었다. 학문이 날로 진보하고 문장은 글 짓는 사람의 기상이 있었으며 매양 함께 논의할 때는 기상이 뛰어나 남보다 빼어나니 문충공이 놀라며 말하기를 “우리 장인은 돌아가신 것이 아니로구나.”라고 하였다.

 

공은 15세에 임술년(1382, 고려 우왕 8)의 진사시험에 합격하였고, 을축년(1385, 고려 우왕 11)에 포은(圃隱) 정문충공(鄭文忠公 : 정몽주)이 과거를 주관하였는데 공이 합격하자 포은은 “문경공의 재주와 덕을 크게 쓰지 못하였는데 지금 자식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보답은 진실로 믿을 만 하구나!”라고 말하였다.

 

무진년(1388)에 사복시승에 임명되고 여러 번 옮겨 공조·예조의 좌랑, 병조정랑을 거쳐 전라도를 안렴 하였다. 임신년(1392, 태조 1)에 태조대왕께서 개국하자 그 어진 것을 소중히 여겨 번거롭고 일이 많은 직무를 두루 거치게 하셨다.

 

세 번 사헌부에 들어가 지평(持平), 시사(侍史), 중승(中丞)이 되었는데 강직하고 방정함을 지키니 사헌부 내가 엄숙하였다. 예조의랑, 세자우문학, 병조의랑, 세자우필선을 역임하고 정축년(1397, 태조 6)에 양근군수로 나가서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다.

 

다시 전교가 되어 문한을 담당하고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자자하였다. 공정왕(恭靖王 : 정종)이 발탁하여 우부승지가 되었는데 뜻을 진술하고 상주하는 것이 상세하고 분명하며 출납이 합당하였으니 좌승지에 승진하였다.

 

태종대왕이 즉위하자 계속 승정원에 근무시키며 돌봐주고 관심을 기울여주시는 것이 더욱 두터웠다. 좌명공신으로 결정하여 철권(鐵券 : 공신에게 내려주는 쇠로 만든 훈공을 적은 패)을 하사하시고 사헌부대사헌에 임명하였으며 철성군(鐵城君)으로 봉하고 집현전제학이 되었다.

 

임오년(1402, 태종 2)에 외직에 나아가 경기관찰사가 되었는데 상벌이 엄격하고 분명하니 사납고 교활한 토호나 아전들이 두려워하여 위축되었다. 영락 계미년(1403, 태종 3) 여름에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 : 명나라 태종, 영락제)가 고명(誥命)을 내리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 왔다.

 

겨울에 외직으로 평양부윤이 되었다. 평양부는 옛부터 일이 매우 많고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 일컬어졌지만 공이 어루만져 안정시키니 정사가 잘 다스려졌다. 이때 마침 대동관(大同館)을 수리해야 하는데 공은 백성을 성가시게 하는 것을 걱정하여 관리와 아전들을 이끌고 직접 재목과 기와를 나르자 백성들이 기꺼이 그 일에 달려와 며칠 안 되어 일을 완성하게 되었다.

 

다음해에 부윤으로서 서북면도순문찰리사를 겸직하였다. 병술년(1406, 태종 6)에 예문관제학에 임명되고 중군총제참지의정부사로 옮겼다가 또 대사헌과 보문각제학에 임명되었고 판한성부사로 옮겼다. 무자년(1408)에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계사년(1413)에 동북면도순문찰리사가 되었다.

 

을미년(1415)에 추충익대좌명공신의 칭호를 다시 하사받았고 예조판서가 되었다가 곧 대사헌으로 옮겼으니 이때에 이르러 세 번 대사헌이 된 것이다. 조정에 서서 얼굴빛을 바로 하여 악을 물리치고 선을 권장하며 강직하게 옳은 말을 하니 법을 다루는 신하의 체통이 있었다.

 

판한성부사와 보문각대제학으로 옮기고 잇달아 이조와 병조의 판서, 의정부참찬이 되었고 찬성사로 승진하였다. 무술년(1418)에 세종이 즉위하자 발탁되어 우의정, 수문전대제학 철성부원군 세자부가 되었고 판병조사를 겸하였으며 동덕(同德)의 두 글자를 공신칭호에 더하였다.

 

기해년(1419, 세종 1)에 문황제(文皇帝)가 고명과 관복을 내리니 공은 표문을 받들고 사은사로 북경에 갔다. 공의 용모는 체구가 크고 훤칠하여 뭇사람 중에 우뚝 하였는데 황제가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누런 수염의 재상은 훗날 반드시 다시 오라.”라고 하였다.

 

신축년(1421)에 좌의정에 승진하고 판이조사를 겸임하였으며 진사시를 주관하였는데 안숭선(安崇善)등 33명을 뽑으니 당시 훌륭한 선비를 얻었다고 일컬었다. 을사년(1425)에 선종장황제(宣宗章皇帝 : 명나라 선종, 선덕제)가 등극하자 진하사로 북경에 갔다.

 

공은 참지정사로 묘당에 출입한 지 20여년간에 9년간 수상으로 있으며 정치는 관대하게 하려 힘쓰고 혁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대체를 지켰다. 세종대왕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처음 정사를 할 때 성심으로 인도하고 간언을 하니 도움되는 것이 매우 많아 조정에서 그 풍도를 우러러 기대하였다.

 

공도 또한 지나치게 융성하여 교만하게 되는 것을 경계로 삼아 은퇴하기를 바란 것이 여러 해였다. 이보다 앞서 공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애매한 잘못으로 공을 모함하니 태종이 직접 누명을 풀어주었다. 태종이 승하한 뒤 공을 미워하는 사람이 전날의 감정을 가지고 사헌부를 사주하여 공을 죽이고자 하였다.

 

세종은 공이 다른 것이 없는 것을 알았지만 사헌부 신하의 청을 어기기 어려워 여산군(礪山郡)에 귀양 보냈으니 바로 병오년(1426, 세종 7) 봄이었다. 세종은 옛 공훈을 생각하여 돌보아 주심이 줄어들지 않았고 매양 큰일을 논의할 때면 반드시 “철성이 있었으면 반드시 처리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얼마 안 되어 소환하여 다시 정승을 삼으려고 하였으나 공을 미워하는 자가 또 저지하였다. 기유년(1429)여름에 병으로 별세하니 향년 62세요, 세조대왕이 다시 직첩과 공신녹권을 하사하였다.

 

공은 기상이 너그럽고 도량이 컸으며 성품이 충직한데다가 바른 학문으로 그 것을 도왔기 때문에 그 논의 속에 나타나는 것과 사업에 조치하는 것이 성대하게 볼 만하였다. 평생 남과 이야기 할 때 거짓되게 꾸민 적이 없었으며 또 남과 다르다고 뽐내지 않았다. 큰일을 대하여 결정함에 확고하게 동요하지 않아서 산악처럼 우뚝하였다.

 

이조를 10여년 관장함에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발하며 사적으로 결정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의 원망이 없었으니 진실로 태평재상이었다. 애석하구나! 한번 좌절을 만나 세종대왕의 유신의 정치를 도와 이루지 못하였으나 또한 천명이로다.

 

공은 양천군부인(陽川郡夫人) 허씨(許氏)에게 장가갔으니 전리판서 금(錦)의 따님이다. 1남 2녀를 낳으니 대(臺)는 중추원부사이며 장녀는 주부 유방선(柳方善)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부정 유급(柳汲)에게 출가하였다.

 

후취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봉상대부 군부총랑 정지(丁智)의 따님이니 변한국대부인(弁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6남 4녀를 낳았다. 곡(谷)은 대호군, 질(垤)은 한성소윤, 비(埤)는 동지중추원사, 장(塲)은 상호군인데 질과 비, 장은 모두 무과에 합격하여 당시 명망이 있었다.

 

증(增)은 영산현감이고 지(墀)는 행대호군 승문원참교이니 정축년(1457, 세조 3) 문과에 급제하였다.

장녀는 첨지 윤삼산(尹三山)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구례현감 이굉식(李宏植)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좌의정 권람(權擥)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선공부정 황종형(黃從兄)에게 출가하였다.

 

대는 목사 권상(權詳)의 딸을 맞아 4남 3녀를 낳으니 첨지 월(越), 부정 신(晨), 첨지 억(嶷), 주부 경(庚)이고 장녀는 함양군(咸陽君) 희(䛥)에게, 다음은 현감 정자숙(鄭自淑)에게, 다음은 첨정 이집(李諿)에게 출가하였다.

 

곡은 사예 이양명(李陽明)의 딸을 맞이하여 2녀를 낳았으니, 장녀는 부윤 강희안(姜希顏)에게 출가했는데 후사가 없고, 차녀는 생원 남전(南恮)에게 출가하였다. 질은 장령 정지당(鄭之唐)의 딸을 맞아 2남 6녀를 낳았는데, 준(準)은 현감이며 칙(則)은 의정부사인이니 임오년(1462, 세조 8)에 급제하였으며. 장녀는 현감 조정로(趙廷老)에게, 다음은 군수 박후(朴堠)에게, 다음은 현감 허형(許蘅)에게, 다음은 부사 이시보(李時珤)에게, 다음은 지중추원사 김순(金淳)에게, 다음은 참봉 경상(慶祥)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비는 현감 윤환(尹煥)의 딸을 맞아 1남 1녀를 낳으니 의(儀)는 선략장군이고, 딸은 생원 정순언(鄭純彥)에게 출가하였으며, 뒤에 수의교위(修義校尉) 오천(吳泉)의 딸을 맞아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위(偉)이고, 두 딸은 어리다.

 

장은 도사 이규(李糾)의 딸을 맞아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곤(崑)과 헌(巚)이고, 딸은 남형(南衡)에게 출가하였다. 증(增)은 관찰사 이희(李暿)의 딸을 맞아 4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현감 평(泙), 진사 굉(浤)과 명(洺), 소(沼)이고 장녀는 조동호(趙銅虎)에게 출가했으며 차녀는 어리다.

 

지(墀)는 정보(鄭保)의 딸을 맞아 4남을 낳았는데 육(陸)은 장례원판결사이니 갑신년(1464)에 장원급제하였고 진사 수(陲)와 습(隰)과 맥(陌)이다. 유방선(柳方善)은 2남 5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윤유(允庾)이고 차남은 전교교리 윤겸(允謙)이며 장녀는 방준(房峻)에게, 그 다음은 김영견(金永堅)에게, 다음은 최영조(崔榮祖)에게 ,다음은 군수 김원신(金元信)에게, 다음은 허식(許埴)에게 출가하였다.

 

유급은 2남을 낳았으니 순창군수 종경(從京)과 종성부사 종화(從華)이다.

윤삼산(尹三山)은 6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상호군 오(塢), 보공장군 당(塘), 양주목사 호(壕), 현감 해(垓), 상호군 탄(坦), 직장 파(坡)이고 장녀는 첨지 박전(朴旃)에게, 그 다음은 서림정(西林正) 제(怟)에게, 다음은 청원정(靑原正) 림(霖)에게 출가하였다.

 

이굉식은 5남 1녀를 낳았으니 현감 맹희(孟禧), 어모장군 중희(仲禧), 찰방 계희(季禧), 부정 영희(永禧), 익희(益禧)이고 딸은 주부 김예동(金禮童)에게 출가했다. 권람은 2남 7녀를 낳았으니 길창군(吉昌君) 걸(傑)과 진사 건(健)이고 장녀는 청원군(淸原君) 한세구(韓世龜)에게, 그 다음은 경력 박사화(朴士華)에게, 다음은 감찰 신억년(申億年)에게, 다음은 주부 김수형(金壽亨)에게, 다음은 좌랑 신수근(愼守勤)에게, 다음은 참봉 민사건(閔師騫)에게, 다음은 신말평(申末平)에게 각각 출가했다.

 

황종형은 3남을 낳으니 생원 관(瓘)과 찬(瓚), 근(瑾)이다.

월은 2남을 낳으니 상호군 적손(嫡孫)과 사손(嗣孫)이고 신은 1남을 두니 금(嶔)이고 억은 3남을 두었으니 필(珌), 완(琬), 탁(琢)이고 경은 5남을 두었으니 정(精), 준(遵), 질(質),은 모두 생원이며 예문검열 박(博)과 진사 규(逵)이다.

 

준을 1남을 두니 영(英)이고 칙은 5남을 두었으니 줄(茁), 분(蕡), 채(菜), 옹(蓊), 요(蕘)이다.

의는 1남을 두니 풍(豐)이다. 평은 5남을 낳았는데 윤(胤), 주(冑), 전(腆), 육(育), 려(膂)이고 명은 6남을 두었으니 요(月+翟), 승(勝), 반(胖), 주(腠), 고(股), 굉(肱)이다. 육은 4남을 두었으니 이(峓), 험(嶮), 업(嶪), 교(嶠)이고 수는 1남이니 순(峋)이고 맥은 2남을 낳으니 린(嶙)과 구(嶇)이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이 거의 천명에 이른다.

 

공이 별세한 3일 후에 최부인 역시 별세하여 광주읍 서쪽의 율촌(栗村) 북향언덕에 장사지냈으니 같은 묘역에 봉분을 따로 하였다. 그 후에 여러 후손들이 계속하여 세상을 떠나니 40년이 넘도록 비석이 아직 세워지지 못하였다.

 

이제 참교공이 개탄하고 비석을 세우고자 나에게 명(銘)을 하라고 하였다. 나의 외조모 이씨는 즉 철성공의 누이이니 친척의 위치에 있으면서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 삼가 명을 한다. 명하노니,

 

당당한 철성공이여 빛나는 훈공과 업적이로다.

정승의 관부는 깊고 넓으며 기린각은 우뚝하구나.

 

오래도록 총리의 자리에 있으며 모든 정사를 총괄한 공적이 있으니

사람들은 그 덕을 본보가로 삼았고 나라에는 주석이 되었구나.

 

조물주는 왜 인간을 희롱하는가?

어찌하여 운수는 기박하며 어찌하여 형통함이 막혔는가?

 

정승에서 주애(朱崖 : 한 무제가 설치한 군으로 바다가운데에 있다. 귀양가는 곳)로 가니, 소인배들이 충신을 모해(당 진자앙의 시 ‘파리가 한 점 티를 만들어 끝내 흰 구슬이 억울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한 것인데, 공은 원망하지 않고 공은 태연하게 자처하였다.

 

왕께서 공을 생각하니 공은 얼마 안 되어 돌아오고

공이 돌아와 다시 정승이 될 것인데, 하늘이 어찌하여 급히 빼앗아 가는가?

 

비록 그렇다고 해도 남아있는 것은 영원하리니

태산이 숫돌처럼 닳고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져도 공은 죽지 않은 것이로다.

 

훌륭한 자식이 자라서 입신하고 후손이 번창하리라

광주언덕 높이 솟고 광수(廣水) 흘러가는 곳,

 

비석 세워 오래도록 전하니 공의 산소로다.

 

가정 39년(1560, 명종 15) 월

 

容軒先生文集卷之四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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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容軒李公神道碑

 

有明朝鮮國推忠翊戴同德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修文殿大提學領集賢殿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兼判吏曹事鐵城府院君

 

純誠明亮佐理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藝文館大提學知經筵成均館事達城君徐居正撰

高孫崇政大夫判敦寧府事兼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名珪書

高孫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澤篆

 

鐵城之李。高麗大族。有諱瑨。登第不仕。種德遺後。生監察大夫諱尊庇。以文名顯隆。生鐵城君諱瑀。以幹能歷淮,金,全,晉數州。所至多遺愛。生門下侍中諱嵒。事忠定王爲左政丞。尋奉身乞退。恭愍朝復相。己亥。毛賊犯西關。爲都元帥。有制勝功。才兼將相。勳名蓋世。爲詩亦簡古。眞,草,行三法。皆妙絶。卒諡曰文貞。生諱岡。有父風。人皆以公輔期之。早歿。官至密直副使。辛丑紅寇之變。恭愍倉卒南巡。公爲慶尙道按廉使。奉迎儀衛甚盛。供頓充斥。人皆嘖嘖稱美。王甚器重。及卒。王歎曰。天何奪我岡之速也。舊例。樞密無諡。特諡曰文敬。夫人郭氏。判開城延俊之女。洪武戊申正月某甲生公。公諱原。字次山。號容軒。初公生四月而文敬卒。郭夫人常抱悲泣曰。天若祚李。其在此孤乎。公在襁褓。嶷然如成人。稍長。力學不倦。公姊權文忠公夫人李氏。憐公早孤。撫如己出。文忠亦敎誨如子。學日就。爲文有作者氣。每與論議。發越不群。文忠驚曰。吾舅氏不亡也。公年十五。中壬戌進士科。乙丑。圃隱鄭文忠公主試席。公擢第。圃隱曰。以文敬之才之德。不大厥施。今有兒如此。天之報施。信有徵哉。戊辰。拜司僕寺丞。累轉工禮二曹佐郞,兵曹正郞。壬申。太祖開國。器其賢。歷試繁劇。三入臺。爲持平爲侍史爲中丞。剛正自持。臺中凜然。出守楊根郡。有惠政。再爲典校任文翰。所至藉甚有名聲。恭靖王擢爲右副丞旨。敷奏詳明。出納惟允。陞爲左。太宗立。仍置喉舌。眷注益篤。錄佐命勳。賜鐵券。拜司憲府大司憲。封鐵城君。出爲京畿觀察使。黜陟嚴明。豪猾畏縮。永樂癸未夏。太宗文皇帝賜誥命。如京謝恩。冬。出尹平壤府。府古稱繁劇難治。公撫綏得宜。政大理。時方繕修大同館。公恐擾民。率僚吏親輸材瓦。民樂趨事。不日告成。明年。以府尹兼西北面都巡問察理使。丙戌。拜藝文提學。轉中軍摠制參知議政府事。又拜大司憲。遷判漢城府事。戊子。爲慶尙道觀察使。癸巳。爲東北面都巡問察理使。乙未。改賜推忠翊戴佐命功臣之號。進禮曹判書。尋移大司憲。至是凡三爲憲長。正色立朝。激濁揚淸。謇諤有憲臣體。改判漢城府事。累轉吏兵二曹判書,議政府參贊。陞贊成事。戊戌。世宗立。擢爲右議政。加賜功臣同德二字。己亥。文皇帝賜誥命冠服。公奉表如京謝恩。公姿相魁偉。巍然萬人中。帝見而奇之曰。黃髥宰相。後須復來。辛丑。陞左議政。主禮圍。取安崇善等三十三人。時稱得士。乙巳。宣宗章皇帝登極。如京進賀。公自參知政事。出入廟堂二十餘年。爲相九年。政務寬大。不喜更張。持大體。當世宗銳意初政之時。啓沃獻替。裨益弘多。朝廷想望其風裁。公亦盛滿爲戒。欲乞退者有年。先時。有忌公者構公暗昧之過。太宗親雪之。太宗上賓。忌公者挾前憾。嗾臺欲抵公死。世宗知公無他。重違臺臣之請。謫礪山郡。是丙午春也。世宗念舊勳。眷顧不衰。每論議大事。必曰。鐵城在。必處之矣。未幾欲召還復相。忌公者又沮之。己酉夏。以病卒。享年六十二。世祖還賜職牒功臣錄券。公氣宇寬洪。性稟忠直。輔以學問之正。故其發於議論。措諸事業者。蔚乎可觀。平生與人言。未嘗矯飾。又不崖岸自異。及其臨決大事。確然不動。屹如山岳。掌銓注十餘年。選賢與能。予奪不以私。故人無怨言。眞太平宰相也。惜乎一遭顚躓。不能贊成世宗維新之治。亦天也。公先娶陽川許氏典理判書錦之女。生一男二女。臺。中樞院副使。女長適主簿柳方善。次適副正柳汲。後娶全州崔氏奉常大夫軍簿摠郞丁智之女。封弁韓國大夫人。生六男。曰谷。大護軍。曰垤。漢城少尹。曰埤。同知中樞院事。曰場。上護軍。垤,埤,場皆中武科。有時譽。曰增。行靈山縣監。曰墀。行大護軍。兼承文院參校。中丁丑文科。生四女。長適僉知尹三山。次適求禮縣監李宏植。次適左議政權攬。次適繕功副正黃從兄。臺娶牧使權詳之女。生四男。曰越。僉知。曰晨。副正。曰嶷。僉知。曰庚。主簿。生三女。長適咸陽君䛥。次適縣監鄭自淑。次適僉正李諿。谷娶司藝李陽明之女。生二女。長適府尹姜希顏。無嗣。次適生員南恮。垤娶掌令鄭之唐之女。生二男。曰準。縣監。曰則。議政府舍人。壬午及第。生六女。長適縣監趙廷老。次適郡守朴堠。次適縣監許蘅。次適府使李時珤。次適知中樞院事金淳。次適參奉慶祥。埤娶縣監尹煥之女。生一男儀。宣略。一女適主員鄭純彥。後娶修義校尉吳泉之女。生一男偉。生二女幼。場娶郡守李糾之女。生二男。曰崑。曰巘。一女適南衡。增娶觀察使李暿之女。生四男。曰泙。縣監。曰浤。進士。曰泗。曰濱。生二女。長適趙銅虎。次幼。墀娶鄭保之女。生四男。曰陸。掌隸院判決事。甲申壯元。曰陲。進士。曰隰。曰陌。柳方善生二男。長曰允庚。次曰允謙。典校校理。生五女。長適房峻。次適金永堅。次適崔榮祖。次適郡守金元信。次適許塡。柳汲生二男。曰從京。淳昌郡守。曰從華。鍾城府使。尹三山生六男。曰塢。上護軍。曰塘。保功將軍。曰壕。楊州牧使。曰垓。縣監。曰坦。上護軍。曰坡。直長。生三女。長適僉知朴栴。次適西林正怟。次適靑原正霖。李宏植生五男。曰孟禧。縣監。曰仲禧。禦侮。曰季禧。察訪。曰永禧。副正。曰益禧。女適主簿金禮童。權攬生二男。曰傑。吉昌君。曰健。進士。生七女。長適淸原君韓世龜。次適經歷朴士華。次適監察申億年。次適主簿金壽亨。次適佐郞愼守勤。次適參奉閔師騫。次適申末平。黃從兄生三男。曰瓘。生員。曰瓚。曰珪。越生二男。曰嫡孫。護軍。曰嗣孫。晨生一男。曰嶔。嶷生三男。曰珌。曰琬。曰琢。庚生五男。曰精。曰遵。曰質。皆生員。曰博。藝文檢閱。曰逵。進士。準生一男。曰英。則生二男。曰茁。曰蕡。儀生一男。曰豐。泙生二男。曰孝胤。曰忠胤。陸生二男。曰峓。曰嶮。內外孫曾。百有餘人。初。公卒後三日。崔夫人亦卒。窆廣州治之西栗村離坐坎向之原。同域異墳。厥後諸孤相繼淪逝。餘四十年。碑尙未立。今參校公慨然欲豎。命居正銘之。居正外祖妣李氏。卽鐵城之姊。忝在戚屬。義不敢辭。謹銘。銘曰。堂堂鐵城。有炳勳烈。相府潭潭。麟閣屹屹。久宅百揆。功存納麓。人有蓍龜。國有柱石。造物者何。戲劇於人。何數之奇。何亨之屯。黃閣朱崖。蒼蠅白壁。公則不嫌。公處自若。王曰念公。公歸不日。公歸復相。天奪何急。雖則云然。所存者長。山礪河帶。公則不亡。王立蘭茁。子孫其昌。廣陵峨峨。廣水沄沄。立石不朽。維公之墳。<끝>

純誠明亮佐理功臣崇政大夫行議政府左參贊兼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經筵事達城君徐居正。撰。

 

 

李原의 墓域은 京畿道 城南市 中院區 島村洞 固城李氏 世葬地에 位置해 있었으나, 1990年 都市開發로 인하여 京畿道 廣州市 木洞 山 113番地 陵安山(264m) 자락으로 遷葬하였다. 木洞 마을會館 건너편 木洞 277-3番地에는 齋室인 廣慕齋가 位置해 있다.

 

廣慕齋 옆에는 팔작지붕 形態에 丹靑을 한 神道碑閣이 세워져 있다.

碑閣 안에는 長方形 臺石위에 大理石 材質에 碑身을 세우고 팔작지붕 形態의 屋蓋石을 갖춘 碑座蓋石形의 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嘉靖 39年인 1560年(明宗 15年)에 세워진 神道碑에는 『容軒李公神道碑』라는 篆額이 새겨져 있다.

 

神道碑의 碑文은 左贊成과 藝文館大提學을 歷任한 文忠公 四佳亭 徐居正이 撰述하였고, 判敦寧府使와 兵曹判書를 歷任한 安惠公 李名珪가 글씨를 썼고, 高孫으로 藝文館直提學과 禮曹參判을 歷任한 雨堂 李澤이 篆書를 썼다.

 

墓所에는 配位 陽川許氏, 全州崔氏 等 雙墳으로 造成되어 있다. 封墳에는 龍尾와 활개를 갖추었다.

封墳 옆 右側에는 龜趺위에 烏石의 碑身을 세우고 이수(螭首: 뿔 없는 용을 아로새긴 형상)를 갖춘 龜趺螭首形의 墓碑가 세워져 있다.

 

1992年 仲春之月에 建立된 墓碑 前面에는 『左議政襄憲公容軒李先生之墓』라 陰刻되어 있고, 後面에 碑文은 成均館大學校 名譽敎授 文學博士 驪州 李佑成이 撰述하고 安東 金忠顯이 前面에 글씨를 썼고, 後孫 東益이 後面의 글씨를 썼다.

 

封墳 앞에는 魂遊石, 床石, 鼓石, 香爐石, 樽石, 長臺石 等이 配置되어 있고, 左右에는 石羊과 文人石이 세워져 있다. 또 中央에는 火窓이 4個인 長明燈이 세워져 있다.

 

 

容軒 李公神道碑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