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정척 신도비명(鄭陟神道碑銘) - 어세겸(魚世謙)

야촌(1) 2011. 6. 23. 02:17

  정헌대부 지중추원사 수문전대제학 휘 공대 정공 신도비명 병서

(正憲大夫 知中樞院事 修文殿大提學 諱 恭戴 鄭公 神道碑銘 竝書)

 

어세겸(魚世謙) 찬(撰)

 

문인 추충정난익대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함종부원군 어세겸(魚世謙)은 삼가 글을 짓다.

공의 이름은 척, 자는 명지, 호는 정암으로 진주인이다. 증조의 이름은 장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원사이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자순이고 가선대부 공조참판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설이고 자헌대부 호조판서이다. 어머니 강씨는 정부인이다. 모두 공(公)으로 인하여 추증되었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영락 무자년(1408년, 태종 8) 나이 19세에 향공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갑오년(1414년, 태종 14)에 급제하여 교서정자에 임명되었다. 그의 경력(踐歷) 가운데 가장 드러난 것은 사헌부 감찰, 예조정랑 겸 검상관, 봉상시 소윤, 의정부 사인, 지제교 판승문원사 겸 춘추관 편수관이다.

 

이보다 앞서 국상 때에 쓸 재궁(왕의 관)을 (국상) 때에 닥쳐서 마련하곤 하였는데, 공이 미리 만들어 칠을 해놓았다가 쓰는 것이 어떠냐고 청하여 처음으로 장생전을 세우게 되었다.

 

정통 갑자년(1444년, 세종 26)에 첨지중추원사로 임명되었다가, 공조·호조·예조참의를 거쳐 경창부윤으로 승진하였다. 기사년(1449년, 세종 31) 가을 성절사에 충원되었는데, 이때 달자(恐子)가 명나라의 서울을 침범하였다. (그래서) 요계(요양과 계주)의길이 막혀서 사람들이 가기를 꺼렸으나, 공은 의연하게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떠나는 날 임금의 특명으로 왕세자가 전송하며 위로하였다. 길을 떠났는데 황제가 북쪽으로 순행하고 경성이 포위되어, 인심이 흉흉하고 사람들이 두려워 하였다. (그런데도) 공이 급히 재촉하여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경성에) 도착하였는데, 새로운 황제가 이미 제위를 승계하였다.

 

(공은) 황제를 뵙고 북쪽을 향하여 황제의 즉위를 하례하였다. (그러자) 군자들이 예를 안다고 하였다.

예조참판으로 옮겼다가 판한성부사 수문전제학으로 승진하였다. 을해년(1455년, 세조 1) 충청도에 흉년이 들었다. 세조가 공에게 명하여 도관찰사로 삼고, 편전으로 불러 “번거롭겠지만 경이 나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라”고 하였다. 들어와서 지중추원사 수문전대제학이 되어 본국지도를 편찬하였다.

 

성종 초에『오례의주』를 정하는데 참여하였다.

공이 예학에 조예가 깊어 모든 조정의 의제의 신구 조목에 의혹이 있을 때면 반드시 나아가서 바로 잡았다. 여러 차례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관)를 맡아 당대의 재덕이 뛰어난 선비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을미년(1475년, 성종 6) 8월 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6세였다. (임금이) 공대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인정 많고 신중하였으며, 일을 처리하는데 사리에 정통하고 재지가 예민하였다. 겉만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숭상하지 않았고 생업을 일삼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을 때에도 한결같이 청렴과 정성으로 일관하였다. 해서와 전서가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는 몸이 여윌 정도로 슬퍼하였고, 여묘(廬墓)살이 3년 동안 매달 15일 때마다 가묘에서 제사를 받들었다. 계절마다 나오는 물건을 얻거나 내선을 하사받으면, 제사 음식으로 올리지 않고서는 자신이 먼저 먹는 일이 없었다.

 

그는 태종·세종·문종·세조·예종·성종 여섯 임금을 섬겼다. 세조가 일찍이 공에게 “부왕께서 항상 청(淸)·직(直) 두 글자로 경을 인정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있다”고 하고 옷과 말을 하사한 사실이 『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공은 원래 보승산원 김견의 딸에게 장가가서 4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효근·공근·충근·양근이다. 큰 딸은 종사랑 김기효에게 시집갔고, 작은 딸은 전생주부 김세형에게 시집갔다. 나중에 동지총제 이양몽의 딸에게 장가가서 1남을 두었는데, 성근이다.

 

그는 성화(成化=명나라 헌종 년호) 무자년(1468년, 세조 14) 진사시와 갑오년(1474년, 성종 5) 문과 양시에 급제하였는데, (합격한)나이가 모두 공과 같아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성근은) 홍문관에 들어가 경악(經幄=왕에게 유학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는 일)에 임한 지 10년에 이르렀고, 이미 승지를 지냈다.

 

충근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윤·운·저이다. 기효는 3남을 낳았고, 세형은 1남을 낳았다. 성근은 5남을 낳았는데, 아들은 여신·주신·임신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부인 이씨가 죽고 6일이 지나 공도 세상을 떠났다. 9월 계유일에 광주 읍치의 서쪽에 합장하였다.

 

나는 공의 문하생이라서 승지(성근)가 비문의 찬술을 부탁하기에 감히 사양치 못하고 명하기를,

 

진주의 산은 충만하고 진주의 물은 사방을 감돌았네.

수려한 정기를 모아서 공께서 태어나셨도다.

위대하다. 철인의 나라의 길조여.

의례를 답습하여 문명을 밝혔도다.

정직하고 또 곧은 절의는 나라의 전형이 되고 노성하였네.

이미 수를 누렸고 또 가성을 드날렸도다.

자손이 있어 도를 통하였도다.

산이 높고 물도 더욱 맑아 유경이 면면히 이어지리라.

 

홍치 11년(1498년, 연산군 4)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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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위 치 : 하남시 초이동 산13번지

크 기 : 전체 높이 280cm, 비신 175cm, 폭 97cm, 두께 38cm

 

[원문]

 

正憲大夫知中樞院事修文殿大提學諱恭戴鄭公神道碑銘 竝書

門人推忠定難翊戴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咸從府院君魚世謙撰

 

公諱陟字明之號整菴晋州人曾祖諱莊通政僉知中樞院事祖諱子淳嘉善工曹參判考諱舌資憲戶曹判書驢姜氏貞夫人皆以公故贈之公少聰明永樂戊子年十九以鄕貢中司馬試甲午登第選補校書正字其踐歷之最顯者曰司憲府監察禮曹正郞兼檢詳官奉常少尹議政府舍人知製 敎判承文院事兼春秋館編修官前此 國恤梓宮臨時取辦公請預造歲柒之始建長生殿正統甲子拜僉知中樞院事歷工戶禮三曹參議陞慶昌府尹己巳秋充 聖節使時恐子犯 帝京遼踞路梗入皆憚行公毅然無難色拜辭日特 命王世子餞慰及上途 皇帝北狩京城被圍衆洶懼公疾驅不少稽至則新皇帝己嗣位朝見旣向北賀 聖節君子曰知禮轉禮曹參判陞判漢城府事修文殿提學乙亥忠淸道饑 世祖命公爲都觀察使 召便殿若曰煩卿活我饑民入爲知中樞院事修文殿大提學撰本國地圖成宗初參定五禮儀註公深於禮學凡 朝廷儀制新舊科條有疑必就正累知貢擧一時豪傑之士多出其門乙未八月二日卒年八十六 賜諡恭戴公天資醇謹處事精敏不尙文飾不事産業居官磊職一於淸恪楷字篆文皆臻妙性至孝執喪哀毁廬墓三年每朔望祭家廟得節物賜內膳不薦不先食身事 太宗世宗文宗世祖睿宗成宗六朝世祖嘗語公父王常以淸直二字許卿言猶在耳因 賜衣馬事在輿地勝覽公初娶保勝散員金堅之女生四男二女男曰孝謹恭謹忠謹良謹女適從仕郞金起孝次適典牲主簿金世亨後娶同知摠制李養蒙之女有一男曰誠謹中成化戊子進士甲午文科兩試年甲皆與公同人異之入玉堂侍 經幄至十年己經承旨忠謹生三男一女男曰奫班 起孝生三男世亨生一男誠謹生五男男曰礪臣舟臣次霖臣餘皆幼夫人李氏卒越六日公下世九月癸酉合葬于廣州治西以余出公門下承旨囑撰碑文不敢辭銘曰

 

晋山磅玳晋水榮兮儲精鍾秀公乃生兮偉哉哲人方之楨兮蹈義襲禮昭文明正直是與節彌貞兮 國有典則憑老成兮旣壽而乂播家聲兮有子有孫道益亨兮維山之高水逾淸兮遺慶連綿愛難名兮。<끝>

 

弘治十一年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