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정인지선생 신도비명 - 서거정 지음

야촌(1) 2011. 8. 28. 02:47

  영의정하동부원군학역재정문성공신도비

(領議政河東府院君學易齋鄭文成公神道碑)

 

서거정(徐居正) 지음

 

밤에 반짝이는 별을 보면 수만 수억개나 깜박 깜박하고 있으니 이것은 하늘에 놓은 글이요. 물은 얕은 곳으로 흘러 흘러 고개를 넘고 산을 돌아 강을 이루고 있으니, 이것은 땅에 놓은 글이며 돌고 도는 천지간에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사륜(絲綸-임금의 명령 또는 가르침) 보불(임금을 섬김)하는 것은 사람의 글이다.

 

하늘에 있는 별의 정기와 높은 산에 있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합쳐서 큰 인물을 낳았으니 그의 공적은 족히 천지의 조화를 배합하게 하여 만물이 생을 누리게 하나니 그 몸은 비록 돌아갔다 하더라도 그 후광은 길이 길이 남아 하늘에서 풍운조화(風雲造化)를 이루듯 온 누리에 덕화를 입히나니 여기 이런 분이 곧 하동정씨 문성공이다.

 

삼가 정씨의 계보를 살피어 보면 휘(諱)는 인지(麟趾)요. 자는 백저(伯雎)이다. 고조부의 휘는 지연(之衍)이니 고려때에 첨의찬성(僉議贊成-正二品)이요. 증조부의 휘는 익(翊)이니 대호군(大護軍-從三品)이요 조부의 휘는 을귀(乙貴)니 벼슬이 종부령(宗簿令-從五品)이다.

 

공이 귀하게 됨에 3대 추증을 받았으니 아버지 흥인(興仁)공은 석성현감(石城縣監)으로 돌아가셨음에 순성적덕병의보조공신(純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正一品)의 증직을 받았고 어머니 진(陳)씨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증직을 받았으니 낭장(郎將) 천의(千義)의 따님이다.

 

현감공은 숨은 덕이 있었으니 벼슬이 높다하여 아부하지 않았고 조그만 벼슬로 소격전에 근무할 때도 몸을 단정히 하고 소임을 다 하였다. 진씨가 공을 잉태하였을 때 태몽을 꾸었는데 백발 노인이 나타나 경사스럽고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여 준 일이 있었다.

 

태조 5년(1396) 병자년 신축(12월) 무술(28일) 을묘시에 공을 탄생하였다. 하늘에 있는 별의 정기를 타고난 듯, 영특한 기운이 돌았으며 사주(四柱)는 중국의 소내한(蘇內翰-소동파) 자첨(子瞻)과 같았으며 보는 사람마다 별의 정기를 타고 났다고 하였다.

 

5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니 보는 것마다 모두 외우고 글을 붙였다. 영락(永樂) 9년(태종 11-1411) 신묘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16세로 합격하였는데, 당연히 장원 자리에 앉혀야 하나 나이가 적다하여 억지로 4등에 두었다.

 

태종 14년(1414) 19세에 문과에 장원하여 예빈주부(禮賓主簿-從六品)의 제수를 받았다.

얼마 후에 사헌부 감찰에 천배되었고 다시 예조좌랑(禮曹佐郞-正六品)에 이배되었다가 병조로 전배되었다.

 

태종대왕이 왕위를 물려 주던 날 세종대왕을 보고 말씀하시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신하를 잘 만나야 하고 신하를 만나더라도 훌륭한 인재를 만나야 하나니 여러모로 생각해 보니 정(鄭) 아무야말로 그런 인재인것 같다"라고 하였다.

 

세종대왕 역시 크게 등용할 뜻이 있어 세종 2년(1420) 경자에 병조정랑을 제수하였고, 그 후 예조 이조를 거쳐서 임인년(1422)에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正四品)를 받았고 갑진년(1424)에 직전예문응교(直殿藝文應敎)에 진배(進拜) 되었으니 세종은 역시 사람을 잘 아시고 선임 하신 것이다.

 

정미년(1427) 문과 복시에 장원급제 하였는데 그 때의 시험문제는 경제와 세법에 관한 것이었다. 공은 하은주(夏殷周) 3대(三代)의 공법(貢法-오늘날의 세법)을 인용하여 지금의 세법의 불합리한 점과 고쳐야 할 점을 소상하고 명백하게 아뢰었다.

 

시험관 맹사성(孟思誠)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대책문(對策文)을 하은주 3대의 세법을 인용하였으니 과연 얻기 어려운 글이로다"하였다. 왕이 특별히 그 품계를 올려 직제학 겸 세자우필선(直提學兼世子右弼善-正三品)을 제수하였다.

 

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세종대왕이 공을 보고 잘 보필하라고 당부하시기도 하였다. 가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고 다음 해에 세종대왕이 부제학(副提學-正三品)을 제수하니 공은 굳이 사양하였지만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왕이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말씀 하시기를 "정 아무는 글이 뛰어나서 집현전에 배치하고 싶으나 중국에서 오는 밀서 등은 고금사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면 안되겠기에 문관(文官)의 자리에 그대로 두는 것이다"라고 하시었다.

 

경술년(1430)에 가선대부(嘉善大夫-從二品)에 진계(進階)되어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고 예문제학 인수부윤 이조참판(藝文提學仁壽府尹吏曹參判)에 전배되었다. 그 때에 세종대왕께서 천문에 뜻을 두시고 책력, 해, 별을 보고 시각을 정하는 기계며 천체관측에 쓰는 기계, 해의 그림자를 보고 시각을 나타내는 장치, 물이 떨어지는 분량을 보고 시각을 나타내는 장치 등을 제작하는데 눈금 하나 하나까지 정밀하게 하여 만들었다.

 

여러 신하들이 가서 보았으나 모두 그 이치를 알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였다. 대왕이 말씀하시기를 "이런 기계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정 아무 뿐이다"라고 하셨다. 대왕이 또 명하기를 "역대역법(曆法-책력)이며 일식과 월식, 오성(五星)의 위치가 춘하추동, 사시 사철 변화의 기록이 혹은 같기도 하고 혹은 다르기도 하니 공이 바로 잡도록 하라"하셨다.

 

공이 손수 모든 것을 산출하여 바로 잡으니 비록 일관(日官-기상 관측관)으로 늙어온 사람도 아무 흠을 잡지 못하였다. 대왕이 또 명하기를 "율려(律呂-음악)와 산법(算法-수학)을 계몽하는 일은 너무 심오해서 경이 아니면 할 수가 없도다" 하시니 공이 이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 뒤에 경연(經筵-임금과 강론하는 자리)에서 왕의 물으심에 소상히 대답하니 왕이 무척 가상히 여기셨다.

 

고향에 돌아가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하겠다고 상주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시더니 을묘년(1435)에 충청도 관찰사를 제수하시고 그 뜻을 이루게 하셨다. 공이 관찰사로 있는 동안 도 내에는 전부터 내려오던 좋지 못한 풍습이 사라졌고 백성들은 공의 교화를 입어 옛날의 아름다운 풍습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같은 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무오년(1438년)에 3년상을 마치었고 바로 예문제학(藝文提學)의 제배를 받았다. 공은 시부진사(詩賦進士)를 개설할 것을 건의 하였다. 세종대왕이 공에게 자치강목훈의(資治綱目訓義)를 저작(著作-저술)할 것을 명 하였으며 경신년(1440) 형조참판의 제배를 받았다.

 

세종대왕이 판서 정연(鄭淵)에게 조용히 묻기를 "누가 경을 대신할 수 있을고" 하시니 연은 평소에 공이 사심없이 공평하게 처리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답하기를 "공이라면 능히 대신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얼마 안있어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로 계급이 올라갔고 판서로 발탁되었으며 같은 해 겨울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전배되었다. 하정사(賀正使)로 중국 북경에 가서 사신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돌아왔다.

 

공은 일찌기 국가 관리가 답험(踏驗-현장에서 결정함)해서 조세를 받는것은 선왕의 도가 아니며 더우기 많은 관원이나 간사한 관원들이 좀을 먹고 있는 예가 많으니 공법(貢法)을 시행하자고 상소하여 아뢰었다. 세종대왕은 군신(群臣)에게 의논하라고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은 이해 관계로 싸우기만 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지금 한 고을의 답험도 어려워서 이렇게 시비가 분분하여 시행이 안되는데 하물며 나라 전체를 무슨 수로 답험하여 결정할 것인가. 공법을 이용하면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이 처리할 수가 있으니 그렇게 된다면 즉시 계산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들 조금씩 수그러 졌다.

 

세종대왕은 공을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삼아 전제(田制)에 대한 일을 모두 위임하니 드디어 전제를 6등급으로 나누고 연도에 따라서 9등급으로 나누는 법을 정하였다. 이는 하,은,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은 것으로 경중을 가리고 다과를 참작하여 그 중간 지점을 택하는 방도이니 몇 년이 못가서 백성들은 참으로 좋은 법이라 하였으며 올해 낼 세금이 얼마인가를 알게 되니 편리한 세법이라 하며 칭송하였다.

 

갑자년(1444)에 예문대제학에 전배되었다. 세종대왕이 치평요람(治平要覽), 사륜전집(絲綸全集), 역대병요(歷代兵要) 등을 편수하라 하시매 모두 체재를 갖추어 편찬하였다. 세종대왕이 공에게 귀신에 대하여 하문하시니 경연에서 소상하고 정밀하게 아뢰었다.

 

어느 날 군신(群臣-여러신하)과 더불어 신하들의 어짐과 그렇지 않음을 이야기 나눈 일이 있는데 공에게 단점이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이에 왕은 "그렇지 않다. 정모는 사리에 통달한 군자다. 짐이 스스로를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나 후세에 짐 만큼 사람 알아 보는 사람도 드물다할 것이다.

 

정모는 참으로 얻기 어려운 재목이다. 짐이 만나게 된것을 큰 다행으로 여기는 바이다"라고 하셨다. 을축년(1445년)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종1품) 겸 판병조사(判兵曹事)의 전배를 받았으며 병인년(1446)에 판예조(判禮曹) 겸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의 이배를 받았으니 모두가 문형(文衡-대제학의 별칭)에게 내리는 은전이다.

 

다음해(1447년) 판예조(判禮曹)가 되었다. 사람을 천거할 때는 여러 재상들의 의견을 들었으며 개인적으로 안다고 하여 천거하는 일은 없었다. 그 해 여름에 소헌왕후(昭憲王后)가 돌아가시어 국장을 모셔야 하는데 마침 큰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 재궁(梓宮-왕이나 왕비의 관을 높임말)이 건너갈 수가 없기에 낙천정(樂天亭)에 모시기로 하였는데 어떤 재상은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재상은 북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고 하여 결정을 못보고 있었다.

 

공이 뒤 늦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말하기를 "예기(禮記)에 보면 빈궁(殯宮-왕후의 관을 발인때 까지 모셔 두던곳)은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아직 부모가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까닭이요 현궁(玄宮-무덤)에 있을 때에는 북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유명을 달리하는 유택인 때문이다.

 

지금은 아직 빈소이니 마땅히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여러 재상들이 하는 말이 "재상이 글을 많이 읽지 않았다면 어찌 그 말을 믿겠는가"하였다. 세종대왕이 문신(文臣)들로 하여금 목조, 익조, 도조, 환조께서 이씨조선의 기틀을 만들어 놓으신 업적과 태종대왕이 계통을 이어받기 까지의 어려움을 중심으로 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으라 하시고 그 교정은 공이하라 하시었다.

 

세종대왕이 친히 언문을 창제하시고 5음(궁상각치우) 청탁 합성하는 법을 정하시어 동국정운(東國正韻), 훈민정음(訓民正音) 등의 책을 만들었으니 공의 협찬이 매우 컷다. 기사년(1449년)에 공조판서를 제수 받았다. 세종대왕이 공에게 고려사를 편찬하라 하시니 먼저 전사(全史)를 편찬하고 다음에 절요(節要)를 편찬하니 모두 체재를 갖추어서 편찬하였다.

 

경오년(1450)에 의정부 좌참찬에 전배되었고 얼마 후에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중국에서 경태황제(景泰皇帝)가 즉위하여 시강(侍講) 예겸(倪謙) 등이 조서(詔書)를 가지고 왔다. 문종대왕의 명령에 따라 공이 관반(館伴)이 되어 모든 일을 주선하여 서로 사귀며 대접함에 예로써 하였으며 옛날과 지금의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음이 조금도 예에 어긋남이 없이 하니 시강은 공을 더욱 존경하였다.

 

어느 날 밤 시강이 묻기를 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니 공이 답하기를 동정(東井)에 있다고 하였다. 작별하려고 할 때 시강이 말하기를 이렇게 밤이 깊었는데 어떻게 가려고 하느냐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 이 금오가 두렵소 하니 시강이 또 말하기를 왕옥만 만나지 마시오(일종의 농담이다) 하고 서로 웃었다.

 

이렇듯 무슨 말이든 첩구응대 못하는 바가 없었으니 공의 명성은 온 세상에 널리 퍼지었다.

현릉(顯陵-문종대왕)이 경연에 나오시어 불교의 서적 중에서 능엄경에 사람의 마음을 평론한 글이 제일 좋더라 하시니 공이 말하기를 불경은 사람의 마음을 밝은 곳으로 인도는 하였지만은 불도를 가지고는 나라를 다스리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유도(儒道)는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으로 마음가짐을 삼나니 욕심을 적게 가질 수 있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죄라든가 복이라든가 하는 지설에 현혹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뢰니 듣고 있던 대왕도 그 이론이 옳다고 하시었다. 임신년(1452)에 숭정(崇政-종1품)으로 품계가 올랐고 병조판서에 이배하게 되었다.

 

단종은 너무 유충하여 정사를 친히 보살피지 못하심에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 권신들과 간사한 무리들이 이 틈을 타서 조정에 들어와 권좌에 앉아 큰 역사(役事-공사)를 시작하고 군인들을 소속 판서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징발하여 공사 일을 시키고 있었다.

 

공은 법을 들어 공박하였으나 그 때의 정국은 의정에서 6조의 권한까지 전횡하고 있었기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공은 권신과 간신들과 항쟁하기를 마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두려워 하였다. 겨울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겸 판예조사(判禮曹事)로 승진 하였으나 실상은 그 실권은 뺏고 허명만 높힌 것이었다.

 

계유년(1453)에 세조대왕이 국가의 어려운 일을 진정시켰으니 공도 이 대책(大策)에 참여하였다. 의정부 좌의정에 탁배(擢拜)되었고 수충위 사협찬 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하였다.

 

을해년(1455)에 세조대왕이 즉위하자 영의정 겸 세자사에 승배되었고 동덕좌익철권(同德佐翼鐵券) 공신호를 받았다. 병자년(1456)에 부원군을 봉하고 얼마 후에 정승 자리로 들어갔다가 만기가 되어 벼슬을 사임하였다. 무인년(1458년)에 다시 돌아와서 부원군에 봉하였다.

 

기묘년(1459)에 임금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여 부여에 가서 있다가 한 달 후에 다시 부름을 받고 돌아왔으니 공의 성품은 강직하여 알고 있는 것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하였다. 나라에 세금을 바칠때의 일이다.

 

방납(防納)이라는 이름으로 농민의 마음을 괴롭히고 나라를 좀먹는 무리들의 폐단을 막기 위하여 의견을 자세히 진술하여 끝내는 그런 좋지 못한 일을 없애게 하였다. 중들이 방종하여 왕법(王法-법률)을 지키지 않자 법으로 다스릴 것을 주청하니 상은 선뜻 윤허하였다.

 

을유년(1465)에 연세 70으로 궤장(지팡이)을 하사받았다. 세조대왕이 여러 학자들에게 4서 5경을 나누어주고 구결(口訣-토를 다는것)을 달으라 하였으니 공은 모시(毛詩) 즉 시경(詩經)을 받고 거기에 구결을 다는데 옛날 사람들이 하던 식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여 알기 쉽도록 구결을 다니 선유(先儒)들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대왕이 그것을 보고는 껄껄 웃으면서 "정노(鄭老-정아무 노인)는 높은 곳을 보고 기운차게 걷고 있으니 그 전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구려" 하였다. 어느 날 세조대왕이 공과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이치를 이야기 할 때 공은 크게 4성(四聖)의 말씀을 들고 다시 정자(程子)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말을 들어서 이야기 하니 전후좌우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대왕은 피곤함도 잊으시었다.

 

무자년(1468) 예종대왕이 즉위하였는데 남이(南怡)가 역모로 죽음을 당하였고 정난익대(定難翊戴) 공신의 호를 받았다. 기축년(1469)에 전하(성종)가 즉위하시자 덕이 높은 노인이므로 겸영경연(兼領經筵)으로 하루 한번씩 승정원에 들리어 서무를 결재하시니 이 때부터 원상(院相)이라 하게 되었다.

 

신묘년(1471)에 공신호를 받았으니 순성명량경제좌리(純誠明亮經濟佐理) 여덟자이다. 이로부터 연로하여 벼슬을 사임하고자 여러번 대왕에게 아뢰었으나 대왕은 윤허하지 않았다.

 

무술년(1478) 겨울에 병환으로 눕게되니 대왕이 의원을 보내어 약을 쓰도록 진념하시었으나 효험이 없었다. 병환중에도 정신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운명하시던 날은 태연자약 여러 아들과 더불어 고금의 흥망성쇠와 그 득실을 강론 하기도 하며 보통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얼마 안있어 조용히 운명을 하시었으니 향년이 83세였다. 유명(遺命-자손에게 남기는 말)으로 부도법(浮屠法-불경의식)을 쓰지 말도록 하였다. 대왕이 부음을 듣자 매우 슬퍼하시면서 수라도 별로 들지 않으시고 부의도 후하게 내리셨다.

 

정승을 비롯하여 사대부가 모두 조상을 하였고 농부나 군졸까지도 놀라 탄식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공은 인품이 뛰어나고 마음이 너그러웠으며 조그만 일에 억매이지 않고 활발한 기상을 가졌다. 또한 학문이 고명정대(高明正大) 하므로 무슨 일을 의논하거나 여러가지 처리한 일들을 보면 너무나도 훌륭해 배울만한 것이 많았다.

 

평생에 책을 손에서 떼어본 적이 없었고 경사(經史)를 넓게 보았으며 대의만을 좇았고 조그마한 일에는 억매이지 않았다. 특히 주역(周易)을 좋아해서 학역(學易)이라는 현판을 서재에 걸었다. 글은 호호탕탕하며 심오하고 맑고 고요함이 극에 달했고 조그마한 꾸밈새도 없었다. 천문과 지리 복서(卜筮-점치는 것), 수학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천성이 검약하여 비단옷을 좋아하지 않았고 음식도 고기 같은 것을 즐기지 않았으며 수레나 말 안장 등은 일체 화려하지 않게 하였다. 여섯조(六朝)에서 여섯 임금을 섬기는 동안 영의정의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은 언제나 자신의 행동을 근신하였고 항상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삼가 살피어 보면 사대부로서 예의를 지켜 왔기에 집에는 사사로이 청탁하러 오는 사람은 일체 보이지 않았다. 평생동안 학문에 관한 일을 맡고 있었기에 조정의 고상한 글이며 대책(大冊-훌륭한 책)은 모두 공의 손을 거쳐서 나왔다. 책을 저술하고 역사책을 저작하는 것을 모두 도맡아서 처리하였으며 여러번 과장(科場)의 시관(試官)을 관장하였으며 선발된 자 모두 당대의 명사(名士)이었다.

 

정무(正務=나랏일)를 집행함에 커다란 윤곽을 잡아서 그 중추(중심) 부분에 힘을 기울이고 사소한 일에는 손을 대지 않으니 공평하고 너그러워 그 공명정대함이 유리창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과 같았다. 사리를 논함에 있어서는 물 흐르듯 하였으며 말이 진행 될수록 설득력이 있었고 모든 진리를 설파하였다.

 

일찌기 술자리에서 옛 사람 이야기가 거론 되었는데 "나를 아는 사람들은 공자님 앞에서 놀 사람이라 하나 순수하고 깨끗함은 안자(顔子)와 같고 독실한 사람은 증자(曾子)와 같다고 하는데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자유(子游), 자하(子夏)같은 사람들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인데 어찌 하리오"하며 스스로 평함에 있어 이와 같이 겸손하였다.

 

문과대과에 세번 장원급제하여 삼괘(三掛)의 영광을 얻어 인각(麟閣=명신 이름이 걸리는 누각)에 올랐다. 수는 팔순을 넘겼으며 부귀공명과 복록을 누림이 고금에 없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교만하거나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이 없이 오직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며 40여년 동안 국가의 주석(柱石-주춧돌)이 되었다.

 

그 동안 임금의 총애를 받아 가면서도 사사로운 이(利)에 억매이지 않고 오직 대의명분을 위하여 일하다가 돌아갔으니 참으로 재상중의 재상이구나. 이듬해(1479) 3월 기미에 충주남쪽 마을 불정면 외령리(忠州佛頂面外嶺里) 인좌신향(寅座申向)의 곳에 합폄하였다. (★ 정경부인 경주이씨 묘는 공의 묘보다 십여보 윗쪽에 있다.)

 

공의 초취(初娶)는 한양조씨(漢陽趙氏)이니 돈녕(敦寧) 후(候)의 따님으로. 선졸 무자(先卒無子)이고, 재취(再娶)는 경주이씨(慶州李氏)니 판 한성(判漢城) 휴「携, 정순공 이성중(靖順公 李誠中)의 三子」의 따님으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 하였고 5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광조(光祖)로 벼슬이 대호군(大護軍)이며 공보다 먼저 돌아갔고 차남은 현조(顯祖)니 세조대왕의 따님 의숙공주(懿淑公主)를 맞이하였고 수충위사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輸忠衛社定難翼戴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으로 수록대부(綏祿大夫-正一品)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에 봉하였고 학문이 장하여 장원급제 하였으며, 3남은 숭조(崇祖)니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하남군(河南君)이요.

 

4남은 경조(敬祖) 요. 5남은 상조(尙祖)니 모두 호군(護軍)이다.

장녀는 사용(司勇) 권금성(權金成)에게로 출가했고 차녀는 판관 김유악(金由岳)에게로 출가했다.

 

대호군(大護軍-光祖)은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의 따님을 맞이하여 1녀를 두었으니 1녀는 권자균(權自均)에게로 출가했고 하남군(河南君-崇祖)의 초취는 판관 박후의 따님인데 1녀를 두었으니 회원군 쟁에게로 출가했고 후취는 현감 조충로(趙忠老)의 따님이니 4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경조(敬祖)의 초취는 계양군(桂陽君) 증의 따님이니 2남을 낳았고 후취는 관찰사 이계손의 따님이며 상조(尙祖)는 부정(副正) 안온천의 따님을 맞이하였다. 사용 권금성은 2녀를 낳았고 판관 김유악은 1녀를 낳았으니 연성군 지에게로 출가했다.

 

어느날 하성부원군(현조)이 와서 공의 행장과 신도비명을 나에게 부탁함으로 서거정(徐居正)이 글을 쓰고자 하니 눈물이 앞서는구나. 아! 슬프도다.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내려 앉았구나. 다시는 대부군자(大夫君子)의 얼굴을 볼 수가 없도다.

 

아! 슬프도다. 천지신명이시여, 이 자리에 영원히 광명을 내리소서.

영산(靈山)의 정기를 받아 세상에 태어났으며 중국 미산(眉山) 소동파의 넋을 받았으니 아마도 창여(昌黎-唐宋 팔대가중 한명인 한유의 호)도 공의 시문(詩文)에는 따르지 못하리로다.

 

때에 맞추어 태어나신 현인군자(賢人君子)요, 보기드문 재상이로세. 벼슬길에 올랐음에 그 이름을 옥당(玉堂)인 인각운대(麟閣雲臺)에 걸었도다. 조용히 담소하는 모습은 태산과 같이 근엄하셨으며 일을 경륜하심에 막힘이 없으셨으며 간교함을 미워하셨으며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셨도다.

 

수신정홀(垂身正笏-몸을 단정히 함)하고 음성과 얼굴빛을 흐트러지게 하지 않으며 여러가지 정무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신상필벌 하시고 하시는 일은 언제나 어긋남이 없으니 모든 사람의 신망의 대상이 되었도다.

 

또한 스스로의 안위는 조금도 생각지 않으시고 6조(여섯임금)를 섬기시니 연세는 80세가 넘었도다. 강건하심은 거북의 수를 타고 나셨고 상서로운 기풍은 봉의 기상이로다. 나이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보다 저 세상으로 먼저 감은 물이 흐르는 이치와 같음을 공은 벌써부터 알고 계셨기에 당신이 감(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도다.

 

슬프도다!

공의 그 충성심과 덕행은 영원히 거울삼아 잊지 않으오리니 영혼이여 사라지지 마소서! 아름다운 봉우리에 솔나무 청청하고 맑은 물 굽이쳐 흐르는 그 명당(名堂) 자리가 공의 무덤이구려. 조그마한 일은 쓰지 아니하고 뚜렷한 일만 기록하여 후손에게 소시(昭示=밝게 일러줌)하는 바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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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領議政河東府院君學易齋鄭文成公神道碑

 

徐居正 撰

 

星辰之森列乎上者天之文河嶽之流峙乎下者地之文經緯乎兩間詩書禮樂絲綸黼黻者人之文也蓋騎箕之精嵩嶽之靈降而爲命世之才其功烈足以配二儀後萬物而長存其精神雖喪亦可以爲光嶽爲風霆爲雨露鼓舞變化於穹壤之間者矣求之今河東鄭文成公卽其人也謹按鄭氏系出河東公諱麟趾字伯睢皇高祖芝衍高麗僉議贊成曾祖翊大護軍祖乙貴宗簿令皆以公貴追贈考興仁卒石城縣監贈純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妣陳氏贈貞敬夫人郞將千義之女縣監公有隱德不大厥施屈小官分司昭格殿凡齊醮心薰沐至誠從事陳氏初有娠夢白髮叜報異瑞於丙子十二月戊戌生公英氣間世分精造化四柱與蘇內翰子瞻相同具眼者皆曰奎璧之精五歲始讀書過目輒成誦善屬文永樂辛卯年十六中國子監試時公之試卷當爲第一試官以年少抑置第四甲午年十九中文科壯元授禮賓主簿俄遷司憲監察移禮曹佐郞轉兵曹遇知於 太宗內禪之日屬公於 世宗曰理國莫先得人得人要得良材鄭某其人也世宗有大用之志庚子拜兵曹正郞轉禮吏二曹壬寅授集賢殿應敎甲辰進直殿 藝文應敎亦妙選也丁未魁文科覆試時御策問以經界貢賦之制公引三代貢助徹之法當今貢法可復之宐絲分縷析明白剴切讀卷官孟思誠曰此子對策求之中原亦不可多得特命超階陞直提學兼世子右弼善 文宗在東邸 世宗命公轉秋丁母憂明年英陵起復爲副提學固辤不允上嘗語左右曰鄭某文材拔萃欲置集賢殿盡閱中密書淹貫古今以大厥施所以不置政院喉舌而置文地庚戌進階嘉善拜同知摠制轉藝文提學仁壽府尹吏曹參判時 英陵畱意天文曆算大小簡儀日星定時儀渾儀像天平懸珠定南仰釜等晷大小圭表欽敬報漏等閣製作精緻羣臣莫窺涯涘上曰惟鄭某可論文命纂歷代曆法同異日月食五星四暗躔度畱逆假令公親自据算縱橫推步雖老於日官者莫不消縮 上又命曰啓蒙律呂算法精奧非卿莫能闡探宐盡心講究後於經筵奏對稱旨上深嘉之先是縣監公歸老扶餘公屢辤歸養不允乙卯出爲忠淸道觀察使以遂榮養公按節廵宣有古宣化風是年丁父憂戊午服闋拜藝文提學建議設詩賦進士 英陵命公撰資治綱目訓義庚申拜刑曹參判 上從容問判書鄭淵曰誰可代卿者淵常服公折獄允遂以公對未幾進階資憲擢判書冬轉知中樞院事以賀正使赴京得奉使體公嘗以爲國家踏驗收租非先王之制多桀寡貉姦猾因之蟲蠹上書請行貢法 英陵下羣臣議羣臣各執利害爭不可决公曰今一州縣之中踏驗損實尙難盡行况天下四海之大可盡廵畎畝乎證援古今指畫措置出人意表言者小屈 英陵命公爲三道都廵察使田制事一委之遂定田分六等年分九等之法深得夏民遺制輕重合宐多寡得中行之數年民甚便之甲子轉藝文大提學英陵又命公纂次治平要覽絲綸全集歷代兵要等書皆得其體英陵問公以鬼神之理出入經傳論卞精詣上前席待之他日論羣臣賢否有短公者上曰不然鄭某達理君子予非自誇後世如寡人者小鄭某亦難得之才知遇於我幸矣乙丑進議政府右參贊兼判兵曹事丙寅移判禮曹兼成均大司成蓋典文衡也明年移判吏曹凡注擬人物博採羣議不以私恩貸之關節不行夏昭憲王后赴山陵適大雨江漲梓宮不可渡權厝樂天亭或云南首或云北首議竟未决公後至曰禮記在殯南首不死其親之意在玄宮北首之幽之故也今亦殯也宐南首諸公曰宰相不可不用讀書人信哉英陵命文臣撰述穆翼度桓肇基之跡太宗創垂之難作龍飛御天歌 命公刪定親製諺文定五音淸濁細字諧聲之法作東國正韻訓民正音等書公之協贊亦多己巳移判工曹 世宗命公等撰高麗史先修全史次及節要修史得體庚午轉議政府左參贊俄復爲工曹判書景泰皇帝卽位侍講倪謙等奉詔來 文宗命爲館伴公周旋交際得儐使體又與之商確古今往復酬唱侍講敬重之嘗夜坐侍講曰月在何分公曰在東井及辭別侍講曰如夜深何公曰可怕李金吾侍講曰莫逢王玉汝相與笑曰天下未嘗有無對之句公之名由是益著聞於天下 顯陵御經筵從容論釋氏曰枋嚴經論心處最好公曰釋氏雖明心道其道不可以治國吾儒以寡欲爲養心之要若能寡欲則不惑於釋氏罪福之說矣上然之壬申加崇政移兵曹判書 顯陵上賓主少國危權奸當國大興工役禁軍衛卒徵發自由公擧法抗爭時政府署事六曹事皆關决公又爭之與權奸不協人甚危之冬陞判中樞院事兼判禮曹事實奪也癸酉世祖炳幾靖難公參决大策擢拜議政府左議政尋賜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之號封河東府院君乙亥 世祖卽位陞領議政兼世子師加賜同德佐翼鐵券丙子封府院君俄復入相以盛滿辤戊寅還封府院君已卯因斯忤旨謫扶餘縣逾月召還公性鯁直知無不言嘗奏對極陳貢物防納病民蠹國之弊僧徒豪縱不可不以王法治之言甚切至上優納之乙酉以年七十賜几杖 光陵嘗命諸儒分授四書五經定口訣公定毛詩其定口訣不襲古人町畦自出機杼多擴先儒所未發上笑曰鄭老高視濶步故熊尙存又與公論無極太極之理公據大易四聖之言出入濂洛諸儒之說縱橫闔闢無不當理 光陵聽之亹亹忘倦戊子 睿宗卽位逆臣南怡等伏辜賜功臣之號曰定難翊戴己丑殿下卽位公以夙德耆艾兼領經筵日一仕承政院參决庶務謂之院相辛卯賜功臣號純誠明亮經濟佐理八字自後公屢以年老辤不允戊戌冬遘疾上遣內醫ꜹ藥餌治療不效病革精神不亂易簀之日談笑自若與諸子論古今得失俄而加元服翛然而逝享年八十三遺命喪祭不用浮屠法上震悼掇膳賻祭有加士大夫相與吊朝牛童馬卒莫不驚歎公天姿豪邁胸次豁達輔以學問高明正大故其發於議論措諸事業者卓卓可觀平生手不釋卷博觀經史要求大義不規規於訓誥尢喜易學扁其齋爲文浩汗發越精理造到不事藻餙至於藻餙至於天文地理卜筮算數無不硏究天性儉約衣不綺紈食不重肉車馬器玩一去華靡歷仕六朝都卿相之位愈自敬謹接士大夫以禮門無私客久典文柄朝廷製作高文大冊皆出其手撰書修史悉皆總裁屢掌文圍所得皆一時名士爲政務存大體不事ꝯ屑公平寬正洞如八窓論事初若落落愈久愈效公嘗酒酣尙論古人曰如我者倘遊聖門純粹如顔子篤實如曾子固不可及至如遊夏之徒未知何如也其自許如是公再擢魁科三長巖廓四圖麟閣壽踰八袠功名富貴福履之盛古今罕有而絶無驕矜之色爲國柱石係國家安危者四十餘年久居寵利克全終始眞宰相中之宰相也越明年三月己未窆于忠州南村佛頂里寅坐申向之原公先娶趙氏敦寧候之女後娶李氏判漢城携之女封貞敬夫人生五男二女長曰光祖大護軍先公歿曰顯祖尙世祖女懿淑公主輸忠補社定難翼戴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綏祿大夫河城府院君篤學登科曰崇祖純誠佐理功臣河南君曰敬祖曰尙祖皆護軍女長適司勇權金成次適判官金由岳大護軍娶延昌尉安孟聃之女生一女適權自均河南先娶判官朴堠之女生一女適會原君崢後娶縣監趙忠老之女生四男一女曰承忠承孝餘幼敬祖初娶桂陽君璔之女生二男後娶觀察使李繼孫之女尙祖娶副正安溫泉之女司勇生二女判官生一女適蓮城君〇一日河城具公行狀請銘神道居正奉書泣曰嗚呼悲哉山頹樑壞不復覩大人君子矣嗚呼悲哉銘曰 乾坤孕秀光嶽鍾精公乃挺生公又飛英眉山之蘇造化其分昌黎之韓雲漢其文應時之賢間世之才金馬玉堂麟閣雲臺從容談笑具瞻巖廊經綸黼黻訐謨贊襄垂紳正笏不動聲色乃施乃設以亭以毒無適不可時措而宐望係羣生身佩安危六朝耆舊八袠康强匪龜而神曰鳳其祥伯仲潞國終始汾陽遽爾不慗嗟哉鑑亡務德務功曰忠曰勤昭昭汗靑不朽者存蘂嶽蒼蒼獺水沄沄惟地之吉惟公之墳我銘不諛昭示後昆。<끝>

 

 

↑전면이 정인지선생 묘이고 뒤에 보이는 것이 정경부인 경주이씨 묘이다.

봉분앞의 높이 250㎝, 폭 90㎝의 갈명은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선생이 찬한것으로 전해지는데,

앞면의 각자는 식별이 가능 하지만 뒷면의 각자는 마모가 심해서 식별이 되지않는다.

 

충북 괴산에 있는 정인지 묘역 앞의 신도비(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