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풍고 김조순 신도비명 병서( 楓皐 金祖淳 神道碑銘 并序) /조선 제28대왕 순조의 장인

야촌(1) 2011. 6. 14. 18:03

■ 충문공 풍고 김조순 신도비명 병서(忠文公楓皐金祖淳神道碑銘并序)

    생졸년 : 1765 (영조 41) ~ 1832(순조 32)

 

 왕명에 의거 외손 대제학 남병철(南秉哲=철종의 장인) 근찬

생졸년 : 1817년(순조 17)∼1863년(철종 14).

 

어제 유명 조선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손사 행 보국숭록대부 영돈령부사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규장각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영안부원군 시 충문 김공 신도비명 병서


충문 김공은 나의 외조부이다. 기유년(헌종 15, 1849년)에 소자는 순원성모(순조비)의 명에 따라 왕위에 올라 대통을 잇게 되었다. 공은 위로는 조종의 심법으로부터 아래로는 민생의 편안함과 근심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알아두어야 할 일에 대하여 그때그때 빠짐없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또한 나는 공의 나라를 위한 충성과 집에 있어서의 효행과 근신, 한 가지 언동과 한 가지 일에 이르기까지 아침저녁으로 모시는 사이에 보고 들어 공의 덕업에 대한 시종을 자세히 알 수가 있었다. 옛날 정종께서 재위하실 때 여러 어진 신하들이 대거 진출하여 밝고 화평한 정치를 기약하였음이 이때보다 더할 때가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성스러운 임금님의 특별히 빼어난 지우를 받아 왕께서 몸과 마음을 진실로 의지하고 마음속 깊은 신임으로 의탁하신 분은 오직 공뿐이었다. 또한 어린 세자의 보필을 부탁받아 이에 감격하여 밤낮으로 몸이 파리하도록 마음과 힘을 다하여 오직 왕실에만 마음을 써서 우리 순조의 30년 재위를 도와 오늘날까지 왕실에 복을 이어준 분도 역시 공 한사람뿐이다.

 

공의 휘는 조순이고 자는 사원이며 호는 풍고다. 김씨는 안동에서 계출하였으니 고려 태사 휘 선평이 시조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휘 상헌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인데, 일찍이 척화를 주장하다가 심양에 구치되어 갔어도 굴하지 않고 대의를 천하에 밝혔다.

 

2대를 내려와 휘 수항이 있으니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충공이다. 이 분도 사림의 영수로서 기사년에 화를 입었고 이 분이 휘 창집을 낳으니 바로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이다. 이 분은 경종께서 병이 잦자 세제 책봉을 결행타가 아들과 손자 3세가 임인사화에 죽었다.

 

증조의 휘는 제겸인데 벼슬은 승지에 이르렀고 후에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휘가 달행이니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부친의 휘는 이중이니 벼슬은 부사를 지냈고 후에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이 분의 첫 번째 부인은 평산 신씨로 목사를 지낸 휘 사적의 따님이고, 둘째 부인은 함평 이씨로 진사 휘 형옥의 따님인데 후에 모두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다.

 

공은 첫째부인의 소생으로 영조 을유년(영조 41, 1765년) 8월 22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머리가 빼어났으며 단정하고 장중하여 행동거지가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6,7세에 글을 배우는데 선생이 엄하게 다스리니 하루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집안 사람들이 사방으로 찾아보니 으슥한 곳에서 책 한권을 손에 들고 쉴사이 없이 읽고 있었으니, 이는 스스로 힘써 노력과 스승의 계발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부터 공부가 날로 진취하였다니 그 타고난 품성이 도를 가까이 함은 태어날때부터 벌써 이러하였다.

 

정조 을사년(정조 9, 1785년)에 문과에 급제하니 임금께서 불러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과연 문정(김상헌)을 닮은 손자로구나.”하셨다. 처음 휘는 낙순이었는데, 이때에 임금께서 지금 이름을 하사하셨다.

 

마침내 명을 내려 벼슬길에 나아가게 했는데, 매우 깊고 엄한 자리에 처하게 하여 학식과 덕이 뛰어난 선비로 대하였다. 만년에는 더욱 더 중하게 여겨 동궁께 유시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야 말로 틀림없이 그릇된 도리로써 너를 보필하지는 않을 것이니 너는 스승으로 섬겨라.”라고 하였다.


경신년(정조 24, 1800년)에 순원왕후께서 세자빈의 간택에 응하여 겨우 재간을 마치자 정조께서 승하하시니 공은 애통해하고 몸 상한 것이 부모의 상을 당함과 같이하였다. 그 후 더욱 힘써 왕위를 이은 임금을 도와 선왕을 추모하면서 지금 임금을 지극한 충성으로 모시는 의리를 다하였다. 임술년(순조 2, 1802년)에 왕비를 맞아들이는 예를 올릴때 순조께서는 어린 나이였다.

 

미처 문묘를 배알하지 못하였었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태묘(종묘)에 친향하기 전에는 석채(문묘의 배알)를 선행할 수는 없다.”하였다. 이에 공은 당시 재상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태묘에는 향사 이외에도 세시의 전배가 있지 않습니까?

 

성상께서는 아직껏 선사의 묘정을 알지 못합니다. 한나라 고조는 맨 먼저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으니 이는 실로 왕업의 기본입니다. 석채를 묘향보다 먼저 드린다하여 실례될 일은 없다고 봅니다.”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도 이 말을 옳게 여겨 청하여 행하게 되었다. 신사년(순조 21, 1821년)에 효의왕후(정조비)를 마땅히 건릉(정조의 능침)에 합부하여야 하겠지만 건릉은 처음 쓸때부터 물이 스미고 무너져내려 해마다 자주 수축을 하여야 했다.

 

공은 이점을 걱정하여 주문공이 영부릉을 의논한 고사를 인용하여 건릉은 천만년 영구히 도모하기 어려운 곳이라 말하고 천봉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현융원(사도세자의 묘소)의 오른쪽 언덕에 자리를 정하고 천봉하도록 하였다.

 

이 역사에 공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자리를 잡느라 수고가 많았지만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다. 이는 공이 전례에 밝고 또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한 시대의 덕화를 밝히고자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미년(순조 11, 1811년)에 관서 지방에 토민의 난이 있어 경향이 시끄러웠으나 공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국가의 기밀사무를 관장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안정을 되찾으니, 민심도 이를 믿고 두려워함이 없었다. 적이 평정되니 관찰사가 호포를 시행하려 하였다.

 

공은 “오늘날 관서지방의 급무는 민생을 넉넉하게 하고 민심을 진정시키는데 있는데 이런 일이란 치안이 완전히 회복이 된 뒤에 의논할 일이라.”하고 이해와 득실의 한계를 분명히 들어 조정에 건의하여 이것을 만류하도록 하니, 관찰사도 납득하고 이를 그만두었다.

 

이로써 관서지역이 평안하게 되었다. 이는 공이 이리저리 계책을 내고 임기응변으로 일을 융통성 있게 처리하는 것이 왕안석이 백성들을 제도한 국량보다도 더 뛰어난 예이다.

 

공은 의리를 지킴이 본래부터 엄준하였고 사물의 시말을 꿰뚫어 보았으며 원용하고 비유하고 계획하고 실행함이 실정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병인년의 대징토 때에 공은 재상과 집사자에게 서신을 보내 너그럽게 용서하도록 권하였으나 의론이 분분하였다.

 

공은 무고한 사람들이 관련됨을 깊이 걱정하여 여러 차례 조정에 건의하였으며 이로써 죄를 면한 자가 많았다. 대체로 공은 율곡이 조정의 의견을 조정하려고 한 노력을 본받아 이를 행하려고 하였으나 여러 논의들이 격앙하여 끝내 이룰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용하여 서로 더불고 화평한 복을 기리고자 하였으니 이는 어찌 공께서 일을 처리하는 데만 그러하였겠는가? 이는 공의 도량이 넓어 모든 것을 용납하였기 때문이니 참으로 옛말에 이른바 지공무사한 대인이라 할 수 있겠다.

 

공은 좋은 일과 궂은 일을 함께하는 처지에서 몸은 나라의 안위를 짊어지고 명예와 지위와 지우를 받음이 저토록 높고 빛났어도 마음은 항상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가져 조정의 기밀에는 참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께서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자문을 구하였으며 이때는 즉시 봉서로 말씀을 올리고는 바로 초고를 없애버렸다. 매번 들어가서는 고하고 나와서는 순종하였고 모든 훌륭한 점은 모두 주상의 공으로 돌리니 공의 힘이 컸음을 세상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평소에 아들들을 가르칠 때에는 의로써 바로잡았다. 공이 현암의 시골집에 있을 때 둘째 아들의 문과 급제 소식을 듣고도 즐거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도리어 서신을 보내 힘쓸 것을 격려하기를 매우 준절히 하니 사람들은 분수에 넘치는 일을 경계하는 공의 뜻을 알고 크게 감복하였다.

 

중년에 옥호에 작은 집을 짓고 때때로 쉬며 목욕하며 지냈는데 집이 매우 박루하여 항시 거처하는 방은 겨우 두간 넓이에 지나지 않아 손님이 오면 쉬어갈 수조차 없었다. 의복, 기명, 장식품 등은 애당초 마음에 두지를 않았고 오직 좌우에는 서적만이 있었을 뿐이다.

 

공의 담백함은 이와 같았다. 익종께서 동궁으로 계실 때 외조모를 위하여 탁지(호조)에 명하여 견평방 본 집에 당을 한 채 지어드렸다. 공은 그때에 여주 묘막에 있었는데 돌아와 보니 그 문이나 창이 모두 조각품으로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음을 심히 불쾌하게 여겨 결국은 고쳐버렸다.

 

이는 공이 본디 검소함을 지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분수이외의 복은 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안이 본래 가난하여 끼니를 이어가지 못하였고 귀하게 된 뒤에도 자산을 늘리는 데에는 마음이 없었으며 봉록의 여분마저 친척이나 친구에게 또 혹 소원한 사람에게까지 나누어 주었다.

 

문생이나 하인 등 조석으로 상대한 사람이 백명이 넘었어도 후하거나 박함이 없이 똑같이 대하여 각기 환심을 샀다. 이로 볼 때 공은 온화함과 돈후함이 쌓여 스스로 많은 복을 받게 된 것이다. 공의 인과 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니 지금까지도 공을 칭찬해 마지않는 사람들이 많다.

 

경사와 제자백가를 널리 섭렵하여 그 뜻을 관통하였으며 글을 지으면 문장이 청건하고 준아하여 자연히 대가의 궤범을 이루었다. 시례를 익히고 성리학의 연원을 찾고 또 이를 진지하게 실천하였다.

 

속유와 천학들이 바라고 도달할 바가 아니었다. 벼슬길에 나아가 관직을 역임한 것은 공의 입장에서 볼 때 많다고는 할 수 없으나 모두 당세에서 가장 주요한 직책들이었다.

 

참외(종9품에서 종7품까지 벼슬)로는 설서, 검열, 대교, 홍문관 정자를 지냈고, 6품으로 올라서는 동학교수, 부교리 겸 지평, 장악원과 사복시의 정, 서장관, 장령 겸 직각, 응교를 지냈으며 통정으로 올라서는 동부승지, 형 · 병 · 이 · 예 · 공 5조의 참의와 대사간 겸 보덕을 지냈고, 가선으로 올라서는 병조와 예조의 참서, 동지춘추관사, 부총관, 총융사, 부제학, 장용사를 거쳐 병조판서, 지의금부사, 예문제학, 지경연 실록사를 지냈으며 정헌이 더해져서는 규장각제학, 형조 · 예조판서, 동지성균관사, 지돈령부사, 대제학, 지성균관사를 지냈고 숭정으로 올라서는 판의금부사, 금위영, 어영청, 훈련도감의 대장, 제학 선혜청 관상감 장용영 군기시 상의원 사재감 내의원 혜민서 종부시 내자시 사복시, 전설사의 제조를 역임하였다.


임술년(순조 2, 1802년) 가례를 마치고는 보국숭록대부에 올라 영안부원군에 봉하여지고 영돈령부사를 지냈다. 공은 만년에는 더욱 세상일은 물리치고 삼청동 소무속헌에서 한가하게 소일하면서 지냈다.

 

하루는 퇴청을 하고 집에 돌아와 담소하며 즐기기를 평일과 다름없이 하였는데 갑자기 병도 없이 이 세상을 마치니, 때는 임진년(순조 32, 1832년) 4월 기묘일이오 향년 68세이다.

 

부음을 듣고 임금께서는 매우 슬퍼하다가 마침내 큰 소리로 곡을 하며 애도하고는 조정과 저자의 문을 닫게하고, 조문하고 부의를 보내며 은졸(공신의 죽음에 임금이 애도의 뜻을 표함)에 예를 더하였다.

 

임금께서 친히 제문을 지어 제를 올리고 영의정에 증직하고 충문이란 시호를 내렸다. 계사년(순조 33, 1833년) 4월에는 정조 묘정에 배향하도록 명하셨다. 부인은 청양부부인 심씨로 정랑을 지낸 휘 건지의 따님이오,

 

이조판서 휘 택현의 증손녀이다. 품성이 조용하고 그윽하며 용모와 행실은 정숙하여 대혼(순원왕후혼사)을 치룬 후로는 집안이 빛을 보게 되었지만 늘 조심스럽게 처신하여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궁궐에 출입하지 아니하였다.

 

또 궁궐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곧 바로 나와서 말하기를 “외부 사람은 오래 머물러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다. 공도 일찍이 여자 선비로 허여하였다. 공보다도 4년 먼저 이 세상을 떠나시니 동궁께서 친히 사저에 나와 조상하였다.

 

임진년(순조 32, 1832년) 6월에 여주 효자리에 공을 장사지냈고, 병신년(헌종 2, 1836년)에 백석동으로 옮겼다가 신축년(헌종 7, 1841년)에 다시 이천 가좌동 임좌의 자리에 옮겨 부부인과 합장하였다.


맏아들은 유근이니 문과출신으로 판돈녕부사를 지냈는데 좌찬성에 증직된 용순의 후사로서 출계하였고, 다음은 원근이니 문과출신으로 참판을 지냈으며, 다음은 좌근이니 원임 영의정이다. 맏딸은 순원왕후요, 다음은 판관 남구순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지금 판서로 있는 이겸재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승지 이긍우에게 출가하였다.

 

서녀는 전 군수 이병익에게 출가하였다. 유근의 양자 병주는 지금 참판이오, 딸들은 전 참판 이인기, 현 목사 조장호, 판서 조병기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며, 서자 병도는 현재 군수로 재임중이다. 원근의 아들 병지는 전 승지요, 서자 병완은 전 군수이며, 병륙은 전 지평이오, 딸은 검서관 심의훈에게 출가하였다.

 

좌근의 양자 병기는 전 판돈녕부사이다. 순원왕후는 익종대왕을 탄생하시었고 딸은 세명을 두었는데 명온공주는 동령위 김현근에게 하가하였으며, 복온공주는 창녕위 김병주에게 하가하였고, 덕온공주는 남녕위 윤의선에게 하가하였다. 익종대왕은 헌종대왕을 낳으시고 헌종이 후사가 없어 소자가 들어와 대통을 물려받았다.

 

남구순의 아들 병철은 현재 판서로 재임중이요, 병길은 현재 참판이다. 딸들은 김병기, 조구희에게 출가하였다. 이겸재의 아들은 전 현감 승서, 현 현감 승위, 현 사과 승기, 승유, 현 승문 정자 승순이오, 딸은 진사 한장석에게 출가하였다. 이긍우의 아들은 현재 현령인 순익과 승지인 정익이다.

 

오호라! 지난날 내가 집안이 매우 가난하고 힘들었을때 집안을 지키고 몸을 보전하여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오로지 우리 순조와 순원왕후의 은덕이었다. 그 은덕 실로 끝이 없었으니 이 모두가 실은 공이 좌우에서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공의 높은 사행은 이미 역사에 쓰여지고 솥과 제기에 새겨져 다시 더 찬송할 일은 없다.

 

다만 몸소 문자를 다루어 비에 새겨 묘를 드러내려고 한 것은, 소자가 겨우 임금의 복제를 마치고 현인을 추모하는 사모함이 깊어 성모의 은혜에 다하지못한 보답을 공에게 붙여 그 만의 하나라도 표장코저 하는 것이다. 명에 이른다.


장엄하고 위엄있는 충문은 정조의 충신이다.
독실함은 대대로 내려온 가풍이니 밝고 어질게 도왔도다.
몸과 마음을 의탁한 것은 임금께서 몸소 가리신 것이라네.
그리하여 감격하여 보답을 하고저 시종 두루 다스렸지.
바른 도를 잡는 엄함에는 정신과 의기가 바탕이었다네.

 

조금의 차착도 없이 패연히 원두를 찾아냈지.
공만 있고 사가 없으니 조정에서는 존경을 받았네.
관복과 홀로 자세를 바로하니 바라보면 엄하고 접하면 온화하였다네.
물욕을 누르는 덕량은 큰 산의 기운이었고,
발휘함이 빛남은 깊은 학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네.

 

요순의 법도로 삼아 다스리는 계획을 내고 임금을 보좌하였지.
강수와 한수로 씻고 가을 햇빛에 말린 것처럼 희고 빛났다네.
우리 순조는 오래 다스려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잘 이끌었다네.
공은 참으로 충순하여 있는 힘껏 몸을 바쳤다네.
옛날 뛰어난 신하들을 찾아봐도 누가 공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겠는가?

 

공이 높아도 자긍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 가득할까 경계하였네.
삼청동 수석 좋은 곳에서 서적은 정연하였지.
군자는 수고로워도 겸손하여 거목은 큰 집을 지탱하였다네.
인에 젖게 하고 온화로 인도하여 나라의 운을 크게 이어나갔다네.
묘정에 배향됨은 아직도 남은 복이 많았기 때문이다.

 

슬프다!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잃었으니 소자가 무엇을 알겠는가?
자세한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으니 추모하는 뜻만 깊고 간절하네.
이를 어떻게 드날려 말하랴. 사실만을 골라 글을 엮는다.
나라가 길이 공의 힘을 입을 것이니 이 큰 비를 보라.


외손 숭록대부 행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 경연 춘추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경연일강관 규장각 제학 남병철은 왕교를 받들어 삼가 전을 하고 아울러 씀.

 

崇禎紀元後四庚申(1860) 月 日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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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御製 有明朝鮮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孫師行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兼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奎章閣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永安府院君諡忠文金公神道碑銘并序

 

忠文金公予外祖也歲己酉小子以 純元聖母命嗣有丕基上自 祖宗心法下至民生休戚靡不畢擧於遇物之誨而公之爲國忠藎居家孝謹一言動一事爲朝夕承聆於侍懽之餘獲詳公德業終始焉昔 正廟在宥彙進羣彥托契昭瀜於斯爲盛而受 聖明特達之知心膂以倚之肺腑以寄之感激輔幼之遺托夙夜盡瘁乃心王室䔍棐我 純考三十載大猷式至今衍休靈長者惟公一人是己公諱祖淳字士源號楓臯金氏系出安東高麗太師諱宜平寔爲鼻祖至我朝有諱尙憲左議政文正公甞斥和拘瀋不屈明大義於天下再傳而有諱壽恒領議政文忠公領袖士林被己巳禍是生諱昌集領議政忠獻公當 景廟寢疾決筞建儲並子若孫三世殉壬寅禍曾祖諱濟謙承旨 贈左賛成祖諱達行 贈左賛成考諱履中府使 贈領議政元配平山申氏牧使諱思迪女繼配咸平李氏進士諱衡玉女並 贈貞敬夫人公元配出也以 英宗乙酉八月二十三日生幼而穎粹端重動止異凡兒髫齡課讀被塾師訶督忽一曰不知所在家人四訪則就避奧處手一卷書披閱不掇盖出於憤悱啓發自是文辭日進其天姿近道自嶽降之初己如此 正廟乙巳登文科 上召見甚喜曰文正肖孫初諱洛淳至是 上賜今名遂授法從軄俾處深嚴以宿儒待之晚來愈重之 諭東宮曰斯人也必不以非道導爾尔其師之庚申 純元王后膺 世子嬪選甫再揀 正廟禮陟公哀毀若喪考妣益戮力輔 嗣王克盡追先報今之義至壬戌舟梁禮成時 純考冲年也未及謁文廟或言 太廟親享之前不可先行釋菜公移書時相曰 太廟享祀之外尙有歲時展拜 聖上尙不知先師廟庭漢高祖首祀夫子實基靈長之業釋菜雖先於 廟享不可謂失禮也於是朝議是之遂稟請而行之辛巳 孝懿王后當合祔 健陵而陵自始封泉漏沙崩頻年修築公用是憂懼援朱文公議永阜陵故事言 健陵乖不可以爲千萬年圖遂卜 顯隆園右岡遷奉之是役也公周流覽相積有賢勞而不少憚焉此公之博雅典禮務盡誠敬用昭一代之制作也辛未有關西土警京外騷訛公不動聲色密賛機務彌綸奠安民情恃以無恐及賊平道臣擬行戶布公以爲今日西土之急務在裕民食鎭民心若此事則己治己安之後方可議也明其利害得失之分勸廟堂挽止道臣從以寢之西土賴安此公之發慮憲運籌策隨機應變有過乎安石濟蒼生之量也公於義理秉執素嚴峻洞見其源委頭顱援譬劈劃物無遁情丙寅之大懲討公書勉宰執必從寬貰而群議不合公深憂其干連多詿誤屢言於朝獲全者衆盖公以栗翁主調停爲一副義諦而群議所激終不可得焉則尙復包涵茹納與共和平之福豈特公所處乃然也此公之噐度寬弘容物畜衆眞古所謂至公無我之大人也公處休戚與同之地身佩邦國安危名位遭際如彼其隆且爀矣尙小心謙牧不與朝政機密而 上有事必詢即緘辤以對旋削其藳每入告出順歸美于上功利所及世或莫之詳也平居敎諸子以義方公在玄巖鄕盧聞仲子科報無嘉悅色貽書責勉言甚峻正人服其戎盈之意中年卜玉壺小築以時休沐屋宇甚樸陋燕居之燠室廑二架賔至不能容服飾噐翫初不經意惟左右圖史泊如也 翼廟在春儲爲府夫人令度支建一堂于堅平坊本第公時在黃驪丙舍及還見其戶牖雕鏤甚不怡竟改之此公之冲素守約爲公私留餘不盡之福也家素貧殆屢空及貴不以封殖留心俸廩之餘悉散與親戚久要以及踈遠其門生儓隷之晨夕門下者以百數計一視無厚薄各得其懽心和厚所積自底於膺受多祉此公仁愛入人之深到于今稱之者也於經史諸子博洽貫徹發爲文章率淸健雋雅自成大家䡄範若其服襲詩禮淵源濂閩眞知實踐又非俗儒淺學所可希到也其從宦踐歷於公不足多焉而皆極一時之選參外而說書檢閱待敎弘文正字陞六而東學敎授副校理兼持平掌樂院司僕寺正書狀官掌令文兼直閣應敎陞通政拜同副承旨參議兵刑吏禮工五曺大司諫兼輔德進嘉善階兵曹禮曹參判同知春秋館副摠管摠戎使副提學壯勇使 特授兵曹判書知義禁藝文提學知 經筵實錄事加正憲 奎章閣提學刑曹禮曹吏曹判書同成均知敦寧大提學知成均陞崇政判金吾禁御兩營訓局大將提擧宣惠廳觀象監壯勇營軍器寺尙衣院司宰監內醫院惠民署宗薄寺內資寺司僕寺典設司及壬戌 嘉禮超輔國封爵爲永安府院君領敦寧府事公晚益謝却世務養閒於三淸小無俗軒一日公退宴笑如平昔無疾而終時壬辰四月己卯也享年六十八訃聞 上震悼遂擧哀撤朝市弔賻隱卒加禮焉 親撰侑文而祭之贈領議政諡忠文癸巳四月 命從享 正宗廟庭配靑陽府夫人沈氏正郎諱健之之女吏曹判書諱宅賢之曾孫稟性幽閒儀度貞淑 大婚以後門闌爛然謙謙不自安非有不得已不入 大內入必旋出曰外人不可久留公嘗以女士詡之先公四年而卒 春宮臨弔私第壬辰六月始葬公於驪州孝子里丙申遷于白石洞至辛丑又改

于利川加佐洞坐壬之原府夫人祔焉男長逌根文判敦寧出爲 贈佐賛成龍淳后次元根文參判次左根原任領議政女長 純元王后次適判官南久淳次李謙在令判書次李肯愚承旨庶女李秉益前郡守逌根繼子炳㴤今參判女李寅夔前參判趙章鎬今牧使趙秉夔判書庶子炳陶今郡守元根子炳地前承旨庶子炳阮前郡守炳陸前持平女沈宜薰檢書官左根繼子炳冀前判敦寧 純元后誕 翼宗大王三女明溫公主下嫁東寧尉金賢根福溫公主下嫁昌寧尉金炳疇德溫公主下嫁南寧尉尹宜善 翼宗誕 憲宗大王 憲宗無嗣子小子入承大統南久淳子秉哲今判書秉吉今參判女金炳冀趙龜熙李謙在男承緒前縣監承緯今縣監承紀今司果承維承純今承文正字女韓章錫進士李肯愚子純翼今縣令正翼承旨嗚呼徃在昔年予小子遭家艱否維持全保得有今日罔非我 純考曁我 純元聖母之恩之德與天靡極而亦惟公實左右之矣公之卓然事功固己垂竹帛勒鼎彝固不待更加讃頌第惟躬效文字之役壽其貞珉俾闡幽堂者小子甫闋諒陰慕深羹墻以所未報於 聖母之恩敬爲公特寓表章之萬一云爾謹系之以銘曰

翼翼忠文 正廟藎臣世篤有受明良協寅心膂托重斷自 睿掄感激圖報終始彌綸秉執之嚴精義攸存不越繩尺沛乎逢原公耳無私朝廷是尊正色紳笏望儼即溫鎭物德量閒氣喬岳發揮焜耀寔資邃學堯舜治謨密勿帷幄江漢秋陽至象浩濯繄惟 純考久道化成公實忠順鞠瘁竱誠求古哲輔孰埓大名勳高不伐退然戒盈三淸水石圖史整暇君子勞謙巨木支厦浹仁導和 邦籙景迓從與配腏餘庥承藉嗟違親炙小子何知詳聆 聖母罙切追思曷云揄揚抽情綴辤 宗祐永賴視玆豊碑


外孫崇祿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經筵日講宮 奎章閣提學臣南秉哲奉敎謹篆并書. <끝>

 

崇禎紀元後四庚申 月 日立

 

 

↑영안부원군 김조순과 부인 청양부부인 심씨 합장 묘.

 

봉분 오른편에 있는 이 묘비의 비문 앞면 글씨는 조선의 제23대왕 순조(純祖)의 어필(御筆) 입니다.

 

김조순(金祖淳)묘는 부인 청양부부인 심씨와의 합장묘로 원래는 여주에 있었으나 1841년(헌종 7) 이곳 부발읍 가좌리로 이장되었습니다. 김조순(金祖淳.1765~1832)의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풍고(楓皐)이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4대 손으로 영의정 김좌근의 아버지며 순조의 장인입니다.

 

 

풍고 김조순 신도비각

 

봉분으로부터 동남쪽으로 60여 미터 아래에는 신도비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신도비 비문은 철종이 글을 짓고 남병철이 전액과 글씨를 썼으며 1860년(철종 11) 건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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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세도가문 안동김씨

 

안동 김씨는 1636년 병자호란때 왕실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로 피란하였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붙여 자결한 영의정 김상용(金尙容.1561~1637)과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척화론을 주장했던 영의정 김상헌(金尙憲.1570 ~ 1652)형제에서 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김상헌의 아들 김광찬의 뒤를 이어 손자 김수흥(金壽興.1626~1690), 김수항(金壽恒.1629∼1689) 형제가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영의정 김수항의 장남 김창집(金昌集,1648~1722)이 대를 이어 영의정에 오르고, 동생 김창협(金昌協)은 예조판서를 지냈습니다.

 

김창집에 이어 그의 4대손 김조순(金祖淳)이 영의정을 지냈으며,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이며, 삼남 김좌근(金左根. 1797~1869)은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내면서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 됩니다.

 

김좌근의 6촌(재종형제)인 김흥근, 김홍근도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숙종의 후궁이었던 영빈김씨(寧嬪金氏)도 김상헌의 현손이며 영의정 김수항의 종손녀입니다. 아버지는 김창국(金昌國)이고 할아버지가 김수증(金壽增)으로 김수항의 맏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