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관(譯官) 이화종(李和宗)이 요동에서[압해(押解)하는 일 때문에 갔었다.]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지난 3월 4일 강을 건너서 6일에 탕참(湯站)에 들어갔더니 수보관(守堡官) 한승경(韓承慶)이 ‘무슨 일로 왔는가?’ 하고 묻기에, 신이 야인들에게 잡혔다가 우리에게로 탈출해온 중국 사람 때문에 왔다고 답했습니다.
승경이 또 ‘그대 나라 사람들은 이치를 따르지 않는 자가 많아 내가 공문(公文)을 발송했는데 그대는 알고 있는가?’ 하므로 신이 안다고 대답하고 이어 자문(咨文)의 내용에 따라 공손히 ‘우리 나라의 주리(州吏)가 실례한【바로 의주(義州)의 김철(金鐵)의 일임.】 것인데 전하께서 듣고 매우 미안하게 여겼다.
전에 중국에 들어가는 사신은 으레 통사를 보내어 예로써 문후를 했고, 본보의 대인(大人)도 음식물을 보내어 사례하였고, 영접하는 군마도 단지 문을 지키는 사람들과 말만 하고 통과하여 온 지 오래되었다. 더구나 지금 조정(朝廷)이 모든 나라를 평등하게 대하여 내외의 구별이 없이 두터운 예로써 접대하기 때문에 상계(上界)에 들어가면 부모의 나라같이 여겨 밤에 다녀도 도적 또한 해를 입히지 않았다.
간혹 하인들이 잘못하는 일이 있을 경우 중한 일이면 본국에 이자(移咨)하고 가벼운 일은 그대로 용서했으므로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한 사람도 장(杖)을 맞은 사람이 없었는데, 어찌 주리(州吏)가 견책을 당함에 따라 본국에서 공경히 따르는 예를 무너뜨림으로써 본국이 소추(小醜)라는 이름을 얻게 됨이 이로부터 시작될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이는 본국의 신민들이 주리에 대해 매우 분노하는 것이다.
대인의 차부(箚付)에 의하면 진헌하는 방물(方物)을 조사하려고 3일 전에 미리 대상(臺上)에 보고하라 하니, 이것은 진실로 전에 없던 일이다. 이를 요동에 알려 의견을 들은 후에 행하도록 하라.’ 하니, 승경이 부끄러운 얼굴로 ‘차부에 방물을 조사한다는 말이 없었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기에, 신이 ‘방물 약간과 가축 약간을 대상에 보고하고 통역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숫자에 따라 조사하게 한다는 말은 무엇인가?’고 물었습니다.
승경이 ‘말만 하였을 뿐이지 어찌 조사할 리가 있겠는가. 다만 본보는 건주위(建州衛)와 이어져 있으니 말이 다른 사람들이 캄캄한 밤에 다닌다면 어찌 의심치 않겠는가. 이는 먼저 알려고 한 것뿐이다.’고 답하므로 신이 ‘강가의 완악한 백성들이 금지(禁地)에 들어와 승낙도 없이 농사짓는 것을 전일 양(楊)·상(常)·증(曾) 세 어사(御史)가 서로 잇따라 금하여 몰아내고 집을 헐고 돌을 세워 표지를 세웠으나, 완악한 백성들은 아직도 뉘우치지 않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인의 맑은 덕을 한껏 듣고 있으니 결단코 강가의 근심이 없을 것으로 안다.’ 하니, 승경이 ‘내가 본보에 있는데 누가 감히 내 뜻을 어기겠는가? 나에게도 법도가 있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므로 다례(茶禮)를 행하고서 물러나왔습니다.
10일에 요동에 도착하니 순안 어사(巡按御史)는 금주위(金州衛) 등으로 순행나갔으므로 여러 대인들을 만나보고 12일에야 돌아왔습니다. 13일에 도사(都司)를 배알하고 자문을 바친 다음 앞서처럼 말하였더니 대인 곽계종(郭繼宗)과 서보(徐輔)가 함께 앉아 전후의 사실을 자세히 묻고는 ‘마땅히 회의하여 조처하겠다.’ 하였습니다. 이날 각처에서 청구한 물건을 정납(呈納)하니 모두들 전하의 후의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각 술과 음식을 차려 후하게 대접한 다음 또 별도로 인정(人情)으로 주는 물건을 정납하면서 다시 한승경이 우리 나라 사람을 구타한 잘못을 말하였습니다. 15일에 또 도사에게 가서 다시 고하니 장인(掌印) 곽대인이 ‘여러 의견이 승경이 잘못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승경은 공무를 봉행하면서 법을 지켰고 앞길이 원대하니 다른 사람과 비교되지 않는다.’고 하므로, 신이 ‘한 대인은 바로 3대(代)나 총병(摠兵)을 지낸 후예로 무거(武擧)에 올라 재주와 명망이 이미 드러났다.
근래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장을 치고 또 전례에 벗어나는 문서를 보내 조공하러 들어가는 사람들은 3일 전에 갖추어 보고하게 하고 모든 방물과 가축을 조사하려 하여 조정의 옛법을 마음대로 고쳤으니 이것은 공무를 봉행하면서 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 같다.’고 하니, 대인이 ‘한때의 잘못된 일이다.
내가 지금 전례를 따르라는 자문을 보내고, 또 탕참관으로 하여금 옛법을 따르도록 차부(箚付)할 것이니 그대는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신이 또 ‘압록강 가에서 농사짓는 것을 금지하는 법은 앞의 세 어사들과 도사의 대인들이 외람되이 농사짓는 사람들을 엄중히 다스려 집을 헐고 곡식을 벤 다음 돌을 세워 표지를 만들어 크게 금함을 보였다.
그러나 금번 한 대인의 처사를 살펴보면 이미 만들어진 법을 고치기 좋아하니 또 앞으로 어찌 될 지 알 수 없다.’고 하니, 대인이 ‘어찌 마음대로 고칠 리가 있겠는가.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답하였습니다.
또 곽 대인이 지금 승경의 집을 빌어 살고 있으므로 승경과 잘 알고 있기에 승경은 자기 집 하인 2명을 뽑아 자문(咨文)의 내용을 탐문하게 했고, 또 천호(千戶) 김진(金鎭)을 보내어 대인들에게 말을 전하게 하여 무사하기를 바랐습니다.
또 승경은 둔포(屯鋪) 8∼9곳을 새로 설치하여 지금 담을 쌓고 있는데, 만일 성식(聲息)이 있어 탕참의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질 경우 여기에 모여 도적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라 했습니다.
또 장인대인 곽계종과 삼대인 서보가 신을 불러 요구하는 물목(物目)을 주었는데 신의 생각에는 요구한 물건(物件)을 받고나서 또 여러 가지 물건을 구청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 같아 미관(微官)이라서 계달할 수 없다고 핑계대고 받지 않았습니다. 3월 10일에 회자(回咨)를 받았고 16일에 출발하여 20일에 다시 강을 건너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해송(解送)한 사람들을 조처한 일은 수레와 배로 국경을 넘어 나무를 도벌(盜伐)한 죄로 장예(張禮) 등 4인은 모두 섬서 진번위(陝西鎭蕃衛)로 보내고 박월(朴鉞) 등 10인은 모두 대동 좌위(大同左衛)로 보내어 각각 종신토록 충군(充軍)시켰으며, 김양(金亮) 등 15명은 잡아다가 별도로 문초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답하기를, “아뢴 내용은 알았다. 이는 요동의 일이다. 북경의 일도 들은 게 있으면 서계하라.” 하니, 화종이 회계하였다. “북경의 일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없습니다.”
- 중종 31년 병신(1536, 가정 15) 4월 1일(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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