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귀족의 땅을 백성에게 개국의 씨앗을 뿌리다

야촌(1) 2010. 11. 21. 20:07

■ 귀족의 땅을 백성에게 개국의 씨앗을 뿌리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82호]20100905 입력

 

한 체제를 전복하는 것은 무력으로 가능하지만 새 체제를 여는 것은 무력만으로는 불 가능하다. 

새 체제를 세우기 위해서는 사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구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새 체제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새 사상은 관념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의 지형을 바꿀 수 있는 실제적인 정책으로 나타나야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색 신도비와 사당 충남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개국군주 망국군주 태조

③ 과전법 실시

 

이성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계기는 위화도 회군이다. 

우왕 14년(1388) 3월 명나라가 고려와의 접경지역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갈등이 발생했다. 

 

그간 국사교과서는 철령위를 함경도 원산만이라고 설명해 왔지만 최근 중국 사서(史書)를 근거로 ‘철령위가 만주에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등장하고 있다.(복기대, 철령위 위치에 대한 재검토)

 

실제로 명사(明史) 오행지(五行志)는 “요동 철령위”라고 표기하고 있고, 같은 명사(明史) 이원명(李原名) 열전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고려에서 국서를 보내 요동의 문주(文州), 고주(高州), 화주(和州), 정주(定州)는 다 고려의 옛 영토이니 철령에 군영을 설치해 지키겠다고 주청했다.

 

이원명이 “그 몇 주는 다 원(元)의 판도에 들어가 있어서 요에 속해 있고[屬於遼], 고려 영토는 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있으며, 지금 철령위를 이미 설치했는데, 다시 청한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반대했다.(明史,李原名 列傳)

요동을 차지하려는 고려와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으려는 명의 갈등이 철령위 설치로 나타난 것이다. 

철령이 원산이라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다. 

명나라에서 요동 반환을 거부하자 우왕은 무력 점령을 결심하는데,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반대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치는 것,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 온 나라 군사를 들여 원정하는 틈을 타 왜적이 활개칠 것, 장마철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병사들이 역병을 앓을 것.”(태조실록 총서)

 



‘위화도’ 이성계를 비롯한 역성혁명 세력은 위화도 회군직후 토지개혁을 주창해 정국 주도권을 잡았다.


이색 초상 정도전의 스승이기도 했던 이색은 온건한 토지개혁과 고려 왕실의 존속을 주장했다.

이성계의 원정불가론이 우왕과 최영에 의해 거부되면서 요동정벌군이 꾸려졌다. 최영이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조민수가 좌군도통사, 이성계가 우군도통사인데, 고려사절요는 좌우군이 모두 3만8830명에 심부름꾼이 1만1600명이라고 적고 있다. 태조실록은 “모두 5만이었으나 10만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요동정벌군은 최영이 직접 지휘하려 했으나 우왕이 “경이 가면 나는 누구와 정사를 의논하겠는가?”라며 말리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요동정벌군은 그해 5월 위화도에 진을 쳤는데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절요는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위화도" 회군에 대해 태조실록의 남은(南誾) 졸기(7년 8월 26일)는 “무진년(1388)에 임금을 따라 위화도에 이르러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회군을 건의했다”면서 남은과 조인옥의 아이디어라고 서술하고 있다. 

남은·조인옥은 모두 정도전과 같은 정치노선을 걸었다는 점에서 정도전의 사주일 가능성이 높다.

 

드디어 정벌군은 말머리를 돌렸고 당황한 우왕은 자주(慈州)· 이성(泥城)으로 말을 달려 “정벌하러 갔던 여러 장수가 마음대로 회군했는데 너희 대·소 군민들이 마음을 다하여 막으면 반드시 크게 상을 주겠다”고 말했다.

 

회군했던 여러 장수들이 급히 우왕을 추격하자고 요청하자 이성계는 “빨리 가면 반드시 싸울 터이니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된다”고 거절하고, 군사들에게 “너희들이 만일 승여(乘輿=우왕의 가마)를 범하면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경계할 정도로 대세는 이미 결정 난 것이었다.

 

전 교부령 윤소종(尹紹宗)이 이성계에게 곽광전(藿光傳)을 바쳤는데, 곽광은 창읍왕(昌邑王)을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운 한(漢)나라 대신이다.그러나 위화도에서 이성계가 조민수에게 “우왕을 폐하고 다시 왕씨의 후손을 세우자”고 회유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다. 

 

이성계는 우왕의 아들이 아닌 왕씨를 세우려 했으나 조민수가 “마땅히 전왕(우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명유(名儒) 이색(李穡)의 주장을 명분 삼아 우왕의 아들인 9세의 창왕을 세웠다. 회군세력 사이 권력투쟁의 서전은 조민수의 승리였다. 하지만 회군 정국은 정도전과 조준의 기획에 의해 토지개혁 정국으로 급격하게 전환된다. 

 

토지개혁을 통한 개국이 정도전의 개국 프로그램이었다. 

고려사 ‘신돈(辛旽)’조는 “요사이 국가 기강이 무너져 백성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권세 있는 자들이 모두 빼앗고 노비로 삼았다. 그 원한이 하늘을 움직여 수해와 가뭄이 끊이지 않고 질병도 그치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을 정도로 권세가의 불법적 사전(私田) 확장이 큰 문제였다.


고려사 ‘식화(食貨)’조는 “권세가들이 남의 땅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면서 주인을 내쫓고 땅을 빼앗아, 한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하여 전호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8~9할을 내어야 한다”고 적고 있고, “요즈음 들어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함이 매우 심하다.

 

그 규모가 한 주(州)보다 크며, 군(郡) 전체를 포함하여 산천으로 경계를 삼는다”고도 적고 있다. 

농업국가에서 자영농의 몰락은 망국(亡國)조짐이었다.충선왕을 비롯해 공민왕·우왕 등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등을 설치해 사전 개혁에 나선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막대한 사전의 소유자들이 모두 권력자들이기 때문에 고려 왕실에서 주도하는 사전 개혁은 실패했다. 

우왕의 요동정벌론은 권력가들의 사전에 손을 댈 수 없는 형편에서 요동이라는 새 땅을 얻어 농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조준은 1388년 7월 “전제(田制: 토지제도)를 바로잡아 국용(國用)을 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하게 하는 것이....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라는 상소를 올려 회군 정국을 토지개혁 정국으로 바꾸었다.

 

조준은 “백성이 사전(私田)의 도조(賭租: 소작료)를 낼 때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충당하는데 그 빚은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도 갚을 수 없고, 부모가 굶주리고 떨어도 봉양할 수 없습니다”라면서 사전 혁파를 주장했다.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도 잇따라 글을 올려 사전(私田) 개혁을 청했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은 토지개혁 정국이 잘 짜인 개국 프로그램임을 말해준다.

정도전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부전(賦典)에서 “전하(殿下: 태조)께서는 잠저(潛邸)에 계실 때 친히 그 폐단을 보시고 개연히 사전(私田) 혁파를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셨다.

 

대개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백성 수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計民授田) 옛날의 올바른 전제(田制)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었다”라고 말한 대로 사전을 혁파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토지정책이 개국의 명분이었다.

회군 세력이 사전 혁파를 들고 나오자 권세가들의 침탈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천명의 소재가 확인됐다. 반면 이성계의 경쟁자였던 조민수는 “사전(私田) 개혁을 저해하므로 대사헌 조준이 논핵하여 내쫓았다”는 고려사절요의 기사처럼 사전 개혁에 저항하다가 제거되었다.

 

이런 와중에 최영의 생질인 전 대호군 김저(金佇) 등이 여주로 이배(移配)된 우왕을 몰래 만나 “역사(力士) 한 사람을 얻어 이시중(李侍中: 이성계)을 제거하라”는 지령과 함께 칼 한 자루를 받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성계와 정도전 등은 “우와 창은 본래 왕씨가 아니므로 종사를 받들게 할 수 없으니, 마땅히 가왕(假王=가짜 왕)을 폐위시키고 진왕(眞王)을 세워야 한다”는 이른바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창왕도 쫓아내고 신종(神宗)의 7대손인 공양왕을 세웠다.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조선 개국 뒤에도 계속돼 우왕과 창왕을 ‘신우(辛禑)’, ‘신창(辛昌)’이라고 기록했다. 물론 이는 새 나라 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미지 조작에 불과하지만 핵심은 토지개혁이었다.

고려사 ‘식화지’는 “공양왕 2년(1391) 9월 기존의 모든 토지 문서[公私田籍]를 개경 한복판에 쌓은 후 불을 질렀다. 

그 불이 여러 날 동안 탔다”라고 전하고 있다. 모든 토지 문서를 불사른 토대 위에서 공양왕 3년(1391) 5월 새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이 반포되었다.

 

원래 정도전이 구상한 토지제도는 모든 백성들에게 농지를 나누어 주는 계구수전(計口收田)이었으나 고려사 조준 열전이 “논의에 참여한 자 53인 중에 토지개혁에 찬성하는 자는 18~19인에 불과했다. 반대하는 자는 대개가 권문세족 자제들이었다”라는 표현대로 권세가들의 격렬한 반발 때문에 직역(職域)이 있는 자들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것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조선경국전 부전(賦典)에서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제도를 정제하여 일대의 전법을 삼았으니, 전조(前朝: 고려)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 배나 낫지 않겠는가?”라고 자평한 대로 과전법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천명의 소재가 확인되고 새 나라 개창 준비가 끝난 것이었다.

 

[출처]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귀족의 땅을 백성에게 개국의 씨앗을 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