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한시(漢詩)

박충좌(朴忠佐)가 북경(北京)으로 올라갈 때 전송하다.

야촌(1) 2010. 10. 8. 20:20

익재난고 제1권> 시(詩)

 

■ 송도(松都)에서 소경(少卿) 박충좌(朴忠佐)가 북경(北京)으로 올라갈 때 전송하다.

 

    지은이 : 李齊賢 : 1287(충렬왕 13)~1367(공민왕 16).

 

옥피리 서너 곡조 끝마치고 / 玉管停三疊(옥관정삼첩)
금잔으로 취하도록 권해보세 / 金杯勸十分(금배권십분)
임금님 은총에 보답할 뿐 / 但應期報主(단응기보주)
우리들 이별은 애석히 여길 것 없지 / 不用惜離群(불용석리군)
풀이 다 마르니 낙타는 사막에서 울고 / 草盡駝鳴磧(초진타명적)
바람이 높으니 기러기는 구름 속에서 울부짖네 / 風高鴈叫雲(풍고안규운)
평생 뜻은 사방에 한 번 나서려고 했었는데 / 平生四方志(평생사방지)
밤에 누워 꿈을 꾸면 그대 따라가리 / 淸夢又隨君(청몽우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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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좌(朴忠佐)

   [생졸년] 1287(충렬왕 13)∼1349(충정왕 1).

   [고려문과] 충숙왕(忠肅王) 미상(未詳)년 (9999) 미상(未詳) 충숙왕 시년 미상(忠肅王 十三年 丙寅榜)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화(子華), 호는 치암(恥菴)으로, 군부총랑(軍薄摠郞)을 지낸 장(莊)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이정(白頤正)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배우고 돌아왔을 때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제일 먼저 가르침을 받았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332년(충숙왕 복위 1)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갔을 때 폐신(嬖臣) 박련(朴連)이 양민을 노예로 삼으려 하는 것을 막다가 그의 참소로 무고를 당하여 해도(海島)로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빙자하여 취임하지 않았으며, 또다시 예문응교(藝文應敎)에 제수되어 경상도 염세(鹽稅)를 감독하게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내서사인(內書舍人)·밀직제학(密直提學)·개성부윤 등을 거쳐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다.

 

1344년(충혜왕 복위 5)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 이천(李천)과 함께 진사를 시취하였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과 함께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가 되었고, 이어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왕에게 《정관정요 貞觀政要》를 시강하여 상을 받았다.

 

1345년(충목왕 1) 정방(政房)을 복치(復置)할 때 찬성사로 그 제조관(提調官)이 되었으며,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성품이 온화하고 검약하며 일생 동안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예안의 역동서원(易東書院)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문제(文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