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후계」암투가 임금의 가정을 파탄 내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28호 | 20090823 입력]
정당정치는 여야의 공존이 전제조건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피력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공존의 요체다.
그러나 대립이 격화되는 정치 현실은 상대를 제거하고 싶은 독존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공존의 정치가 파괴되면 패자만 화를 입는 것이 아니다.
권불십년이란 말처럼 정권이 바뀌면 과거 상대를 찔렀던 창은 나를 겨누게 된다.
三宗의 혈맥 숙종
⑥미인계 정국
▲장희빈 초상역관 집안의 서녀인 장희빈은 아들 균(훗날 경종)을 낳았으나 인현왕후를 저주한 혐의로 죽임을 당했
다. 우승우(한국화가)
숙종 14년(1688) 11월 21일. 8명의 노비가 메는 옥교(屋轎 :지붕 있는 가마)가 궐 안에 들어섰다. 옥교에 탄 여인을 알아본 지평 이익수(李益壽)는 사헌부 금리(禁吏)와 조례(<7681>隷 :관아 노비)를 시켜 여인을 끌어 내리게 한 다음 노비들을 처벌하고 상소를 올렸다.
「신(臣)이 들으니 ‘장소의(張昭儀:장옥정)의 어미가 8인이 메는 옥교를 타고 대궐에 왕래한다’고 합니다. 소의의 어미는 한 천인(賤人)인데 어찌 감히 옥교를 이렇게 무엄(無嚴)하게 드나들 수 있습니까?」(『숙종실록』 14년 11월 21일)숙종은 화가 났다.
그는 환관에게 ‘여인을 끌어내린 사헌부 금리와 조례를 잡아다 누가 사주했는지 엄한 형벌을 써서 알아내라’고 명했다. 숙종은 “연전(年前)에 귀인(貴人 :김씨)의 어미가 출입할 때 사헌부에서 이렇게 모욕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
궁중의 시녀들도 일개 천인에 불과하지만 품계가 상궁에 오르면 법에 의거해 가마를 탄다. ...하물며 왕자 외가에서 전교(傳敎)로 출입하는데…”라고 화를 냈다. 혹독한 형신을 받은 금리와 조례 두 사람은 귀양을 가기 위해 옥문을 나섰다가 곧 죽고 말았다.
옥교에 탄 여인은 10월 27일 숙종이 바라던 왕자를 낳은 후궁 장씨의 모친 윤씨였다.
이 사건의 본질은 차기 왕위를 둘러싼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권 다툼이었다.
▲장희빈이 묻힌 대빈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의 외진 자리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훗날 장희빈이라 불리게 되는 소의 장씨는 중인 역관(譯官) 집안의 서녀(庶女)였다. 숙부 장현(張炫)은 『숙종실록』에 ‘국중(國中)의 거부’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자인 데다 수역(首譯 :역관의 우두머리)으로서 숙종 3년(1677)에는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랐다.
그만큼 남인 정권과 가까웠는데 이 때문에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종친 복창군(福昌君)과 함께 유배당했다.서인들은 소의 장씨(장옥정)를 남인들의 여인계로 보았고 실제로 그런 성격이 있었다.
장옥정은 남인들과 가까웠던 자의대비(慈懿大妃 : 인조의 계비)전의 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왔는데, 『숙종실록』은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전하고 있다. 대비의 후원을 업은 장옥정은 막 인경왕후 김씨를 잃은 청년 임금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제동이 걸렸다.
숙종의 모친 명성왕후 김씨가 장씨를 강제로 출궁시킨 것이다. 서인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는 국왕의 승은을 입은 여인은 민간에 거주할 수 없다는 관례마저 깨고 궁에서 쫓아냈다.
명성왕후는 1681년(숙종 7년) 숙종을 서인 명가인 민유중(閔維重)의 딸과 재혼시켰으니 그가 바로 인현왕후 민씨였다. 그러나 명성왕후 김씨가 숙종 9년(1683)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변했다. 복상기간이 끝나자 자의대비의 권고를 받은 숙종은 다시 장옥정을 입궐시켰다. 서인들은 당황했다.
인현왕후 민씨가 왕자는커녕 공주도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옥정이 왕자라도 생산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숙종 12년(1686) 7월 홍문관 부교리 이징명(李徵明)은 지진이 발생하자 『사기(史記)』에 ‘외척(外戚)이나 여알(女謁 : 궐내에서 정사를 어지럽히는 여자)이 극성하면 지진이 온다’고 써 있다면서 이렇게 상소했다.
“외간에 전해진 말을 들으니, 궁인(宮人)으로서 은총을 받고 있는 자가 많은데, 그중의 한 사람이 역관 장현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합니다. 만일 외간의 말이 다 거짓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마는 만약 비슷한 것이 있다면, 신은 종묘사직의 존망이 여기에 매어 있지 않으리라고 기필하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는 장녀(張女:장옥정)를 내쫓아서 맑고 밝은 정치에 누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숙종실록』12년 7월 6일) 장옥정 때문에 재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처음은 아니었다.
숙종 6년(1680) 11월 혜성이 나타나자 『숙종실록』은 ‘장녀(張女)’가 ‘임금의 총애를 받기 시작할 무렵이 이때’였다며 ‘이로써 하늘이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겠다’라고 적을 정도였다.
『숙종실록』은 곳곳에서 인현왕후의 부덕(婦德)과 장씨의 패덕(悖德)을 비교하고 있지만 “어느 날 내전(內殿 : 인현왕후)이 명하여 (장씨의)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는 『숙종실록』(12년 12월 10일)의 기록처럼 민씨 역시 질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숙종실록』이 “내전(인현왕후)이 (장씨를)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임금에게 권하여 따로 후궁을 선발하게 하니, 김창국(金昌國)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왔다”라고 기록하는 것처럼 인현왕후는 질투보다 당익(黨益)을 앞세울 줄 아는 냉혹한 정객이기도 했다.
인현왕후의 권유로 입궐한 여인은 숙종이 “연전에 귀인(貴人:귀인 김씨)의 어미가 출입할 때…”라고 예를 들은 김 귀인이다. 그러나 김 귀인이란 미인계는 장옥정의 상대가 되지 못해 숙종은 재위 12년 12월 장씨를 숙원(淑媛 : 내명부 종4품)으로 책봉했다. 내명부(內命婦)는 정5품 상궁까지는 궁녀, 종4품 숙원부터 정1품 빈(嬪)까지는 후궁이었다.
장씨가 숙원에 책봉되자 사간원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는 “장씨의 일은 전하께서 그 미색(美色)으로 인함이며 전하가 장씨를 책봉한 것은 그를 총애하기 때문이니 오늘날 신민(臣民)들의 근심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숙종실록』12년 12월 14일)라고 비난할 정도로 서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장옥정은 서인들의 이런 반발을 비웃듯 버젓이 왕자를 생산했다. 숙종은 재위 14년 만에 처음으로 왕자를 낳았으나 집권 서인이 하례하지 않고 왕자의 외할머니까지 끌어내자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숙종은 왕자 탄생 3개월이 채 안 된 재위 15년(1689) 1월 10일 전· 현직 대신과 6경(六卿 : 판서), 판윤(判尹 : 서울시장), 삼사(三司) 장관을 명소했다.
신년 초의 느닷없는 명소였으므로 많은 대신이 모이지 못했다. 숙종은 “국본(國本 : 세자)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매인 곳이 없으니 오늘의 계책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만약 지체시키고 어정거리고 관망(觀望)하면서 감히 이의(異議)가 있는 자는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라”고 강하게 말했다. 국본(國本) 운운한 것은 갓 낳은 왕자를 후사로 결정할 속셈을 표명한 것이었다.
『숙종실록』은 “여러 신하가 대답할 바를 알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이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으니 물러가기는 하겠습니다만 또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반대한 것을 필두로 대부분이 반대했다. 반대 논리는 단 하나였다.
‘중궁(中宮 : 인현왕후)께서 춘추가 한창이시니 후사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남용익이 여러 대신과 2품 이상에게 널리 의논해 처리하자고 요청했으나 숙종은 “대계(大計)는 이미 정해졌다”고 거절하고 갓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했다.
닷새 후인 1월 15일에는 이 사실을 종묘· 사직에 고묘(告廟)했다. 왕조 국가에서 선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 고하면 번복할 수 없으므로 장희빈이 낳은 아이가 숙종의 뒤를 이을 것이었다. 그러나 고묘 15일 후인 2월 1일 서인 영수 송시열이 재논의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파란이 일었다.
송시열은 ‘송나라 철종(哲宗:재위 1085~1100)이 10세가 되도록 번왕(藩王)으로 있다가 신종(神宗:재위 1067~1085)이 병이 난 뒤에야 비로소 태자에 봉해졌다’는 예를 들면서 원자 정호가 성급한 조처였다고 비판했다.
주장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라도 종묘에 고묘(告廟)한 사안에 이의를 제기한 자체가 왕권 도전이란 혐의를 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나 숙종은 입직(入直:숙직) 승지와 홍문관원들을 불러 노기 띤 목소리로 “일이 결정되기 전에 말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지만 이미 결정된 후에도 말하는 것은 그 뜻의 소재가 반드시 있다”고 비판했다.
숙종은 또 ‘명나라 황제도 황자 탄생 넉 달 만에 봉호(封號)한 일이 있다’고 말해 송시열이 든 송나라 철종의 예가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고 반박했다. 숙종은 정권을 갈아치우기로 결심하고 다음날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하고 소론 여성제(呂聖齊)로 대신했으며 남인 목내선(睦來善)을 좌의정, 남인 김덕원(金德遠)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숙종 15년(1689)의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2월 4일 송시열은 제주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재집권에 성공한 남인들은 10년 전 경신환국 때 당한 정치보복을 잊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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