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가뭄·홍수·냉해·태풍·병충해, 5災가 한꺼번에 덮치다

야촌(1) 2010. 9. 15. 17:30

■ 가뭄·홍수·냉해· 태풍· 병충해,

     5災가 한꺼번에 덮치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20호 | 20090627 입력]

 

16~19세기는 전 세계적인 소빙기(小氷期)였다. 조선에서는 17세기 중·후반 현종 때 기상이변과 재난이 집중되었다. 예송논쟁이 치열했던 한편으로 대동법 논쟁이 거셌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배 엘리트들은 백성들의 조세를 경감해주고 풍년 든 지역의 곡식 일부를 흉년 든 지역으로 직접 보내는 탄력적 운용으로 국가적 재난을 극복하려고 했다.

 

三宗의 혈맥 현종

경신 대기근

 

 

▲대기근-인생(58.5Χ95cm), 우승우(한국화가) 조선 왕조 후기에 굶주리던 백성의 형상. 현종은 재위 기간 내내 흉

    년에 따른 대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렸다. 거리에는 유리걸식하거나 굶어 죽은 시신이 즐비했다.

 

현종 시대는 전혀 상반된 두 가지 요소가 공존하던 기묘한 시대였다. 지배층인 사대부들은 자의대비의 상복 착용 기간이란 형이상학적 문제를 가지고 격렬하게 논쟁했다.

반면 피지배 백성들은 개국 이래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흉년과 대기근(大饑饉:굶주림)에 시달렸다. 예송논쟁이 한창이던 현종 즉위년 6월 『현종실록』은 “봄부터 기근이 들어 상평청(常平廳)에서 3월부터 죽을 쑤어 기민들에게 제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평청은 평시에는 비축 곡물과 자금을 관리하던 부서로서 기근 대책까지 맡고 있었다. 이것이 현종 재위 내내 계속된 대기근의 시작이었다. 문신들이 효종의 군비 강화 정책에 반대한 데는 흉년이 잇따르는데도 이유가 있었다.


현종 1년(1660) 2월 대신들은 군량 부족을 명분으로 훈련도감과 금군(禁軍:국왕 호위부대)의 결원을 보충하지 말자고 주청했다. 문신들은 효종이 가능하지도 않은 북벌에 매달리면서 쓸데없는 군사 숫자만 늘려놓았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부왕만큼 북벌 의지가 강하지 못했던 현종은 군비 축소에 동의했다.


현종 2년(1661)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은 “근래 지방 곳곳에 전염병(<7658>疫)이 성행하고 있으며 영·호남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고 보고했다.

기근에 전염병이 더해진 것이다. 현종 2년(1661) 윤7월 당초 비변사 소속이었던 진휼청(賑恤廳)을 사실상의 상설기구로 독립시킨 것도 이 때문이었다.

현종 3년(1662) 2월 경상감사 민희(閔熙)는 “본도에 기근이 든 망극한 정상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그 위에 전염병까지 성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호남도 마찬가지여서 현종 3년(1662) 호남 진휼 어사 이숙은 ‘2월 17일 현재 굶어 죽은 아사자(餓死者)가 142인이고 6147인의 전염병자 중 사망자가 998인’이라고 보고했다.

 

이숙은 “연초에 벌써 이와 같으니 앞으로 어떠할지 알 수 있습니다”라고 우울한 전망을 덧붙였다.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리며 그해를 보냈으나 현종 4년(1663)과 5년(1664)에도 재난은 그치지 않았다.

재해를 더 큰 재해가 덮고, 전염병을 더 센 전염병이 덮는 형국이었다. 국왕 자리는 바늘방석이었다.

 

현종은 재위 5년 10월 홍문관 부제학 이경억(李慶億) 등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홍수와 가뭄과 기근이 없는 해가 없으니 내 마음이 기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변이(變異)가 겹쳐 나타나는 것은 보아하니 진실로 나의 거친 정치 때문에 하늘의 죄를 얻은 것이다.

”(『현종실록』 5년 10월 12일)


현종이 조선 임금 27명 중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계속되는 재난으로 하늘의 견책을 두렵게 여기고 반성하는 ‘공구수성(恐懼修省)’의 처지에서 후궁을 두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나선 인물이 대왕대비 자의대비 조씨였다.

 

조씨는 현종을 위해 역관 최우의 딸을 후궁으로 간택했다.

그런데 그 직전 영의정 정태화가 ‘최우의 딸이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기로 약조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현종실록』 5년 12월 30일자는 ‘정태화의 말을 듣고서 임금이 기뻐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고지식한 정태화가 현종의 속내도 모르고 곧이곧대로 주달하는 바람에 후궁 입궁은 백지화되었다.
문신들은 현종이 최씨 소녀를 내쫓은 것을 칭찬했으나 이런 공구수성이 전염병과 기근을 물리쳐주지는 못했다.

 

재위 6년·7년·8년에도 흉년이었다. 재위 9년에는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현종 9년(1668) 3월에 경상감사는 전염병(染病)으로 죽은 자가 230여 명이라고 보고했고, 『현종실록』은 “각도에서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해 온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고 적고 있다.

 

같은 해 9월에는 말의 전염병이 크게 번져 사복시(司僕寺)의 말 50여 필이 죽자 살아남은 어승마(御乘馬)와 주마(走馬)를 경복궁 성내로 옮겼다. 소의 전염병도 유행했다. 현종 4년(1663) 국가 제향(祭享)에 쓸 검은 소가 갑자기 죽어 민가에 격리시켰으나 계속 죽어 제향에 쓸 희생을 걱정할 지경에 이르렀다.

 

비교적 환경이 깨끗한 궁중의 소가 이 정도면 민간의 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현종 4년(1663) 9월 소의 종자가 끊길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소를 죽인 자’를 ‘사람을 죽인 자’의 형벌로 사형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때의 재변이 조선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이 시기를 소빙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현종 9년(1668) 10월 사은사 일행이 돌아와 청나라의 산동(山東)·강남(江南) 등 3개 성에 지진이 발생해 수천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조선도 몇 년째 집들이 흔들릴 정도의 지진이 각지에서 발생했다.

 

사신들은 몽골이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도 전했는데, 이에 대해 여러 신하는 “청나라가 반드시 지탱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낙관적인 희망을 피력했다. 자신들이 직접 북벌에 나서지는 못해도 하늘이 멸망시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조정의 이런 분위기에 대해 사관(史官)은 강한 비판을 하고 있다.

 

“이때 우리나라도 재이(災異)가 거듭 발생해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해 실로 보전하기 어려운 형세인데 이것을 근심하지 않고 청나라에 변이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한 번 듣자 상하가 희색이 만면했다.

 

몽골이 한번 난을 일으키면 우리가 먼저 화를 입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서 장막 위의 제비가 집이 타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현종실록』 9년 10월 13일)


재위 10년에도 흉년이 들었으니 실로 재위 10년 동안 단 한 해도 기근이 없던 때가 없었다.

그러나 이듬해 시작되는 경신(庚辛) 대기근에 비하면 약과였다.

 

현종 11년(1670:경술년)·12년(신해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재난이 다가오고 있었다.

현종 11년의 불길한 전조는 새해 벽두의 전염병 소식으로 나타났다.

 

『승정원일기』 현종 11년 1월 4일자는 충청감사가 “도내 각 읍에 전염병이 돌아 513명이 감염돼 30명이 사망했다”는 보고를 전해주고 있다. 2월에는 사망자가 80명으로 늘어났다. 전염병은 위로는 평안도로 북상하고 아래로는 경상도를 거쳐 제주도까지 상륙했다.


여기에 기상이변이 가세했다. 현종 11년 윤2월 26일자 『승정원일기』는 조보(朝報)를 인용해 도성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기상이변을 전해준다. 어둑새벽에는 눈발이 휘날리더니 정오에는 작은 콩만 한 우박이 쏟아지다가 오후 2시(未時)쯤부터는 비와 눈이 뒤섞여 퍼부었다.

 

양력 4월 말에 해당하는 윤2월 말에 생긴 변괴는 냉해(冷害)의 조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현종실록』 11년 4월 14일자는 ‘평안도 위원(渭源) 등지에 연 이틀 밤 서리가 내렸고, 영원(寧遠)에는 서리와 눈이 내렸으며, 평양(平壤)·은산(殷山) 등 8개 읍에서는 우박이 내려 싹이 튼 각종 곡식과 삼·목화 등이 모두 손상을 입었다’고 전하고 있다.

 

5월에는 평양에 오리알만 한 우박이 반 자(尺) 정도 쌓일 만큼 쏟아져 네 살 된 아이가 즉사하고 꿩·토끼·까마귀·까치들도 많이 맞아 죽었다. 초여름인 음력 4~5월의 우박과 서리에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다. 『현종실록』 11년 5월 조는 “전라도와 경상도에 한재가 참혹했다”고 전하고 있다. 냉해 위에 한해(旱害:가뭄)가 덧씌워진 것이다.


같은 달 경기도 교하(交河) 등 9읍에서는 황충(蝗蟲)이 극성을 부렸다. 냉해와 한해 위에다 충해(蟲害)가 더해진 것이었다. 6월에는 태풍이 부는 풍해(風害)까지 기승을 부렸다. 기상이변은 전국적 현상이었다.

 

『현종실록』 11년 7월 30일자는 “평안도 창성(昌成)에 우박이 크게 내렸고, 충청도 대흥(大興)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고, 원양도(原襄道:강원도)의 영서(嶺西)의 여러 고을에 서리가 내렸으며 원주(原州)에는 우박이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에 수해(水害)까지 덧붙여졌다. 그해 7월 전라도 감사는 “전라도 용담(龍潭) 등 여러 고을에 큰바람이 불고 큰비가 내렸으며 또 새벽에는 서리가 내렸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흉년의 원인은 한해·수해·냉해·풍해·충해의 다섯 가지로서 이 중 한두 가지만 겹쳐도 쑥대밭이 되는데 다섯 가지 재해가 한꺼번에 닥친 것이었다.

 

길에는 집을 떠나 유리하거나 굶어 죽은 백성들이 즐비했고 “몇 년이 지나면 초목만 남을 것(『현종실록』 11년 9월 15일)”이라는 흉언(凶言)이 횡행했다. 실로 국망의 위기였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