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굴러 들어온 복을 차다.
누르하치(奴兒哈赤)의 맏아들은 귀영개(貴永介)이다.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이기고 우리나라의 무신 강홍립(姜弘立)을 항복시킨 것이 모두 그의 힘이었다.
둘째 아들 퉁개불(佟介佛)은 정묘호란 때 우리나라를 침략한 자이다.
아홉째 아들 다이곤(多爾袞)은 이른바 섭정왕(攝政王)으로, 병자호란 때 강도(江都)를 함락한 자이다.
다섯째 아들 홍태시(洪太時)는 바로 숭덕제(崇德帝)이다.
「퉁개불은 화석예친왕(和碩禮親王) 대선(代善)이다. 홍태시는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이지 다섯째가 아니다.」
누르하치가 죽자 장자(長子) 귀영개가 즉위하여야 했으나 귀영개는 홍태시의 호방함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였고, 홍태시는 사양하지 않고 즉위하였다. 귀영개는 왕위를 잃고 나서 뜻을 얻지 못하여 우울해하다가 마침내 처자를 데리고 우리나라로 망명해 왔다.
우리나라에서 다만 항복한 포로로 그를 대하니 굶주리고 곤궁하여 의지할 데가 없었으며, 자식의 혼인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여 사랑하는 딸을 무인(武人) 박륵(朴玏)에게 첩으로 주어서 아들 둘을 낳았다.
병자호란 때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를 죽이고 청나라에 항복하였는데, 홍태시가 예전처럼 대우해 주고 박륵의 두 아들까지 함께 심양으로 데려갔다.
가령 우리나라가 귀영개 대하기를 가의(賈誼)가 삼표오이(三表五餌)로 오랑캐를 회유하였던 계책처럼 하여 그의 충심을 받아들이고, 병자호란 초기에 그에게 북쪽 지역의 군사를 주어 곧바로 만주로 쳐들어가게 해서 후당(後唐) 용민(龍敏)의 계책처럼 하였다면 오랑캐들이 반드시 군대를 돌려서 스스로를 구원하기에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진기한 보배가 제 발로 왔는데도 쓸 줄을 몰랐으니 애석하도다.
[주01]성언(醒言) : 사람을 깨우치는 말이란 뜻으로, 총 3권에 인물평 및 일화, 사론(史論), 필기(筆記), 한문단편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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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2]누르하치(奴兒哈赤) : 1559 ~ 1626. 청나라 태조(太祖)이다. 1618년 명나라를 쳐서 요동(遼東) 동쪽의 7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1626년 2월 영원성(寧遠城)을 침공하였다가 처음 패하였고, 그해 9월 30일 전투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죽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아들은 16명이다.
[주03]유정(劉綎) : ? ~ 1619. 자는 성오(省吾)이며 남창(南昌) 출신이다. 명나라의 요청으로 파견된 강홍립(姜弘立)과 연합하여 부차(富車)에서 후금군과 맞서 싸우다가 대패하자 자결하였다.
[주04]강홍립(姜弘立) : 1560 ~ 1627. 본관은 진주, 자는 군신(君信), 호는 내촌(耐村)이다. 오도 도원수(五道都元帥)로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1만 3000여 군사를 이끌고 명나라로 출정(出征)하여 1619년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의 군과 합류하였으나 대패하자, 광해군의 비밀 지시에 따라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하였다.
그 뒤 계속 억류되어 있다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도(先導)로서 입국하여 화의(和議)를 주선하였다. 그 뒤에는 국내에 머물게 되었으나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였다가 죽은 뒤에 복관(復官)되었다.
[주05]퉁개불(佟介佛) : 청나라 태조의 둘째 아들 대선(代善 : 1582 ~ 1648)이다. 숭덕(崇德) 원년(1636)에 화석예친왕(和碩禮親王)에 봉해지고, 건륭(乾隆) 43년(1778)에 태묘(太廟)에 배향되었다.
[주06]다이곤(多爾袞) : 1612 ~ 1650. 청나라 태조의 아홉째가 아닌 열넷째 아들이다. 숭덕 원년에 예친왕(睿親王)에 봉해졌고, 1643년 태종(太宗 : 홍태시〈洪太時〉)이 죽자 후계자로 지명되었지만 거절하고, 당시 여섯 살 난 태종의 아홉째 아들 복임(福臨 : 순치제〈順治帝〉)을 세운 뒤 정사를 도와 최초의 섭정왕(攝政王)이 되었다. 건륭 38년(1773)에 태묘에 배향되었다.
[주07]홍태시(洪太時) : 1592 ~ 1643. 태조의 여덟째 아들 태종으로, 연호는 숭덕(崇德)이다. 누르하치가 죽은 뒤 형제들을 죽이고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였으며, 군사 지도자로서의 남다른 재능을 지녀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였다. 그가 죽은 지 1년 후에 청나라는 북경을 함락하고, 중국의 전역을 평정하였다. 황태극(皇太極)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주08]윤계(尹棨) : 1583 ~ 1636.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신백(信伯), 호는 신곡(薪谷)이다. 정묘호란 때 상소하여 척화를 주장하였고, 1636년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는데 이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 하다가 청나라 병사에게 잡혔으나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몸에 난도질을 당하여 죽었다.
[주09]삼표오이(三表五餌) : 가의가 진헌(陳獻)한, 흉노(匈奴)에 대한 회유책이다. 삼표(三表)는 흉노의 용모를 사랑하고, 흉노의 재능을 아끼고, 신의를 확립하여 그들의 마음을 편안히 해주는 것이고, 오이(五餌)는 성대한 복장, 좋은 음식, 음악과 여자, 아름다운 저택, 예로써 대우해 주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아오게 하는 것을 이른다.
《漢書 卷48 賈誼傳》
[주D-10]용민(龍敏)의 계책 용민은 유주(幽州) 영청(永淸) 출신으로 자는 욕납(欲納)이다.
936년 후진(後晉)의 고조(高祖)가 태원(太原)에서 흥기하면서 거란(契丹)에 병력을 요청하였다.
이때 후당(後唐) 말제(末帝)는 회주(懷州)에 있었는데 형세가 매우 위급하여 신하들에게 계책을 묻자, 용민이 “후진이 믿는 것은 거란입니다. 동단왕(東丹王)에게 군사를 주어 유주(幽州)에서 서루(西樓)로 들어가게 하면, 거란은 국내의 근심이 있는데 어느 겨를에 후진을 돕겠습니까. 후진이 거란을 잃으면 전쟁이 끝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이의(李懿)에게 말하기를,
“건장한 말 1000필과 건장한 병사 1000명을 주시면 용장 낭만금(郞萬金)과 함께 평요(平遙)에서 산을 따라 적진을 뚫고 들어가 한편으론 싸우고 한편으론 행군하며 목적지에 반만 이르더라도 일은 성공할 것입니다.”
하여, 이의가 용민의 계책을 말제에게 아뢰었으나 말제가 따르지 않았다.
《新五代史 卷56 龍敏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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