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장 훈련원판관 증 병조판서 경주이공 격암공 경국추모비명
(義兵將訓鍊院判官 贈 兵曹判書 慶州李公 格菴公 敬國追慕碑銘)
한밝學術院長 哲學博士 李相斐 撰
하늘이 대환난(大患亂)을 내리심은 백성(百姓)을 일깨울 충신(忠臣)을 내고자함이라.
임진(壬辰)에 왜적(倭賊)이 二十一萬軍으로 반도(半島)를 석권(席卷)할 때, 팔도(八道)에서 일어난 의병장(義兵將)으로 호남(湖南)의 란입(亂入)을 막았으나 정유(丁酉 : 1597년 선조 30)에 다시 十五萬兵을 투입(投入)하여 덮치니 남원(南原)이 떨어지고 전주(全州)에 왜적(倭賊)이 집결(集結)하여 국력(國力)의 원천(原泉)인 노령이서(蘆嶺以西)를 노략하려하니 이곳의 보루(堡壘)인 입암산성(笠巖山城)에 전운(戰雲)이 짙어 감으로 관민(官民)이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대 공(公)이 분연(奮然)이 일어나 나는 대대(代代)로 국은(國恩)을 입은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 국란(國難)을 외면(外面)하고 홀로 살기를 구(求)하랴.
나라를위하여 싸우다가 죽을뿐이다 하고 현감 안국공(縣監 安國公), 첨정 영국공(僉正 榮國公)과 더불어 국창의(救國 倡義)하고 가동(家僮) 십수인을 고른뒤 팔방(八方)에 방문(榜文)을 띄워 수천(數千)의 충의군(忠義軍)을 모아 출정(出征)하니 의기(義氣)가 중천하였다.
때에 독전중(督戰中)이던 전라감사(全羅監司) 이정암공(李廷馣公)이 달려와서 효문(孝門)에서 충신(忠臣)이 났다고 상탄(賞嘆:탐복) 하면서 윤진군(尹軫軍)과 합류(合流)할것을 권(勸)하므로 북향(北向)하던 말머리를 돌려 입암산성(笠巖山城)에 입성(入城)하고 토왜(討倭)의 방책(方策)을 숙의(熟義)하던중 밤을틈타서 적(敵)이 침공(侵攻)하므로 총력전(總力戰)을 폈으나 세궁력진(勢窮力盡)으로 윤진공(尹軫公)등, 장졸(將卒)이 거의 전사(戰死)하니 측근(側近)이 공(公)에게 피신(避身)하여 후일(後日)을 기(期)하자 했으나 나라가 기우는대 나의일신(一身)만을 도모(圖謨)하겠는가?
오직 죽음으로 보국(保國)할뿐이다 하고 란군중(亂軍中)에 뒤어나아가 적장십여급(敵將 十餘及)을 베고서 안국공(安國公)과 함께 장열(壯熱)한 최후(最後)를마치니 영국공(榮國公)과 가복용금(家僕龍金)이 탄우(彈雨)를무릎쓰고 두분의 시신(屍身)을 수습(收拾)하여 돌아왔는대 부인송씨(夫人 宋氏)가 연일 호곡(連日 號哭)하다가 公의 장일삼일(葬後三日)만에 公의 뒤를따르니 세인(世人)이 윤진공(尹軫公)이 순절(殉節)하자 뒤이여 권씨부인(權氏夫人)이 성중(城中)에서 자진(自盡)한일에 견주어 그 정절(貞節)을 칭미(稱美) 하였다.
公의 숭고(崇高)한 훈업(勳業)은 철종 칠년(哲宗 七年)에야 은졸지전(隱卒之典)을 입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서(追敍)되고 장성 오산창의사(長城 鰲山倡義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부인송씨(夫人宋氏)에게도 정부인(貞夫人)이 내려으니 公이 창의(倡義)한지 二百六十年만의 일이었다
늦은감은있으나 대사마(大司馬)를 배수(拜受) 했으니 의병대장(義兵大將)에게 상응(相應)한 포전(褒典)으로 이해된다.
公은 경주이씨(慶州李氏) 휘(諱) 알평(謁平) 시조(始祖)의 원대손(遠代孫)으로 부정 증 호조판서(副正贈戶曹判書) 휘(諱) 천종(千種)을 조(祖)로 증(贈) 형조판서(刑曹判書) 휘(諱) 덕붕(德鵬)과 정부인 광산김씨(貞夫人 光山金氏) 사이에서 사형제중(四兄第中) 차자(次子)로 중종(中宗) 三十八年 고부(古阜: 전북정읍)에서 탄생(誕生)하였다.
천자(天姿) 준위(峻偉)하고 지용(智勇)이 절륜(絶倫)하였으며 경사(経史)에 정통(精通)하였는대 특(特)히 춘추(春秋) 가운대 임진불궁 이수대절(臨陣不屈 以樹大節)을 평소(平素)에 애송(愛誦)하였다고 한다.
선조 육년(宣祖六年 : 1573년) 공(公)의 나이 三十一歲에 무과(武科)에올라 누진(累進)하고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에 이르럿을 때, 잠시 정양차(靜養次) 하향(下鄕) 하였는대 마침 왜란(倭亂)이 발발(勃發)한것이였다.
후손(後孫)인 상수(相洙), 상술(相術) 종친(宗親)이 래방(來訪)하여 비명(碑銘)을 청(請)하면서 제공(提供)한 여러 사록(史錄)을읽고 공(公)이 절륜(絶倫)의 충신(忠臣)임에 감동(感動)하여 위와같이 쓰고 찬미(讚美)한다
충용(忠勇)의 가통(家統)이어 궁마(弓馬)로 입신(立身)하고 춘추(春秋)의 이수대절(以樹大節) 뼈속깊이 새기고서 나라위해 바치기로 심신(心身)을 닦더니만 미증유(未曾有)의 왜란(倭亂)에 일가(一家)가 창의(倡義)하여 살신(殺身)만이 구국(救國)임을 스스로 보이시니 청사(靑史)에길이 빛날 민족(民族)의 스승이리!
檀紀 四三三三年 十月 日(서기 2,000년. 10월. 일)
한밝학술원장 철학박사 이상비 찬(한밝學術院長 哲學博士 李相斐 撰)
광산 이병현 근서(光山 李炳玹 謹書)
慶州李氏松灘公派 格思齋宗會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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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내용]
28世 이경국(李敬國)선생은 평리성암공의 12대손)으로 세계는 아래와 같다.
16世 평리성암공 인정(仁挺)→24世 송탄공( (松灘公) 원(黿) →25世 세길(世吉)→26世 천종(千鍾)→27世참의공(參議公) 덕붕(德鵬)→28世 격암공 이경국(格菴公 李敬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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