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경주이씨효열비(고흥 금산면 어전리)

야촌(1) 2010. 3. 2. 15:39

경주이씨효열비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효열(孝烈)을 기리는 비문 금산면 어전리 평지마을 경주이씨 부인은 성이 이씨(李氏)이고 경주(慶州)가 그 본관이니, 보한당(保閒堂) 휘 욱(郁)의 11세손 원춘(元春)의 따님이시다. 

 

집안에 있을 때에 가정의 가르침에 훈도(薰陶)되었고, 《예기(禮記)》의 <내칙(內則)> 편(篇)을 즐겨 읽었으며, 뜻과 행실이 단정하고 의젓하였다. 자라서는 학성군(鶴城君) 김완(金完)의 11세손 김차태(金次泰)에게 시집갔는데, 시부모를 섬김에 있어 한결같이 옛날의 법도를 따랐다. 

 

시아버지가 일찍이 병이 들어 오래도록 낫지 않아, 백방으로 치료하고 봉양하였으나 그 효력을 보지 못한 채 점점 위독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부인은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변을 맛보아 혀에 느껴지는 달고 쓴맛으로 병의 상태를 증험하였고, 이어 허벅지 살을 베어 드시게 함으로써 연명하여 다소 차도가 있을 수 있었다. 

 

시어머니가 늙어 치아가 없게 되자, 부인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시간을 맞추어 고당(高堂)에 올라가 젖을 드시게 하였으니, 시어머니가 식사를 하지 못하면서도 몇 년 동안 건강하고 편안하게 사실 수 있었다.


옛날 최산남(崔山南)의 할머니인 당 부인(唐夫人)이 미명(美名)을 독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소학(小學)》에 보이는 내용. 최산남(崔山南)의 증조모인 장손 부인(長孫夫人)이 나이가 많아 이가 없었는데, 조모인 당 부인(唐夫人)이 효성으로 섬기면서 젖을 먹여 몇 년 동안 건강하였다고 함.


나이 28세에 김차태의 병이 위독해지자 북극성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이 대신 죽기를 빌었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입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여 잠시 며칠을 연명하게 하였다. 마침내 하늘로 여기던 남편을 잃게 되자, 울부짖으며 몹시 애통한 나머지 곧 죽고자 하여 밤을 틈타 몰래 따라 죽으려고 계획하였는데, 집안사람들에게 발각되어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을 돌리도록 권고하자, 인하여 스스로 생각하기를, “뱃속의 어린아이는 남편의 남겨진 혈통이다. 보호하고 기르고 잘 가르쳐 집안의 법도를 이루어 훗날 지하에서 남편을 만나는 것이 바로 나의 직분이다.” 하였다.


이리하여 생각을 바꾸어 부지런히 집안 일을 처리하고 아들을 가르치고 길러 성취시켜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있게 하였다. 위대하도다! 부인이 선조의 발자취를 이어 후손들을 넉넉하게 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효열을 완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해 칠월 상순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달성(達城) 후인(後人) 완운(浣雲) 서광필(徐光弼)은 짓다.


◇성암공 인정의 10대손에 보한당 욱이 계시는데 보한당 욱의 11세손 연촌의 따님이라 하셨습니다.
  시기적으로는 약 100년 전후가 아닌가 싶네요.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는 박치기와 김일이 태어난곳 이기도 하답니다.
 
옮긴이 : 승주(영암 망호정)

 

 

↑경주이씨 효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