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보림(李寶林)

야촌(1) 2010. 7. 15. 16:03

■ 19世 문숙공(文肅公) 이보림(李寶林) 

 

   [생몰년] 1337년(추정) ~1385(우왕 11)

   [가계] 익재공의 장손(長孫). 종부시 부령(宗簿寺副令)/贈 門下侍郞) 서종(瑞種)의 장자(長子)

   [거주지] 개경(開京)

   [봉호]  계림군(鷄林君)

   [시호] 문숙(文肅)

   [경력] 우사간(右司諫), 남원부사(南原府使), 판안동부사(判安東府事), 경산부사(京山府使), 정당문학(政堂

              文學)

   [고려문과] 공민왕(恭愍王) 4년(1355) 을미(乙未) 을미방(乙未榜) 丙科2위(12위/3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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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문하시중을 지낸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장손(長孫), 종부시 부령(宗簿寺副令-正四品)/贈 門下侍郞-正二品)공 서종(瑞種)의 장자(長子)이고. 어머니는 밀직사(密直使) 유(侑)의 딸로 정부인(貞夫人) 풍산홍씨(豊山洪氏)이다. 

 

공은 안보(安輔)의 문생으로 안을기(安乙起), 정습인(鄭習仁), 염국보(廉國寶), 이인(李韌), 이원령(李元齡), 우현보(禹玄寶) 등과 함께 동문수학(同門修學) 하고 문학에 능하였다. 스승 안보(安輔)는 그를 평생 아들 같이 귀히 여겼다 한다, 

 

문과는 안을기(安乙起), 이원령(李元齡>훗날 李集으로 개명), 한방신(韓方信) 정습인(鄭習仁)·우현보(禹玄寶) 등과 함께 공민왕(恭愍王) 4년(1355) 을미방(乙未榜)에 급제하였다. 또한 공은 성품이 엄격하고 품행이 방정 하였으며 정사(政事)에 재능이 있어. 특히 고을의 옥사(獄事)를 잘 처리했다.

 

1357년(공민왕 6) 우사간(右司諫-正六品)으로 있을 때, 염철별감(鹽鐵別監)을 각 도에 나누어 파견하였는데, 좌간의(左諫議) 이색(李穡), 기거사인(起居舍人) 전녹생(田祿生), 좌사간(左司諫) 정추(鄭樞) 등이 글을 올려 염철별감의 파견은 폐단이 있어 불가하다 상소하였으나 재상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359년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어서는 새로운 제도로 제용재(濟用財)를 설치해 공공 비용으로 충당하고 백성들로부터 함부로 수탈하지 않았다. 또한, 경산부사(京山府使 : 지금의 星州)로 옮겨서는 어려운 송사를 잘 처리하여 평판이 좋았다. 

 

1363년(공민왕 12)에는 숙부인 밀직공(密直公) 창로(彰路)와 함께 익재의 시문을 모은 《익재난고(益齋亂藁)/원고가 많이 흩어져 모두 거둘 수가 없으므로 난고(亂藁)라고 이름 붙임》와 문학론을 담은 《역옹패설櫟翁稗說)》를 모아 편집하고 이색(李穡)의 서(序)를 받아 역옹패설 4권 1책과 익재난고 10권 4책을 조부(祖父) 생전에 처음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초간본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같은 해 안렴사(按廉使-오늘날의 광역시장 및 도지사 급의 임시파견 지방관)로 있을 적에 는 순군제조(巡軍提調) 김용(金鏞)이 흥왕사(興王寺)의 행궁에 머무르던 왕을 시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우정승 홍언박(洪彦博) 등을 살해하자 그를 국문하여 밀성군(密城郡)에 유배시켰다. 

 

1375년(우왕 1) 판안동부사(判安東府事-正三品)로 있을 때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치적이 최상이라 하여 그해 5월 대사헌(大司憲-從二品)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따라 중서성에 바치는 글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논핵하고 평민으로 폐하여 길안현(吉安縣)에 귀양 보냈다하여 한때 이인임에 아부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正三品)가 되었으며, 제주에서 바친 고력(羖䍽 : 일종의 빈묵양(牝黑羊-흑염소)을 여러 주에 나누어 기르게 하였는데 죽는 것이 많아지자 백성들에게 그 값을 물리므로 권중화(權仲和,1322~1408/權漢功의 庶子로 정승에 이름)와 함께 부당성을 지적하여 정지시켰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中書門下省의 從二品)에 올랐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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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급제자 동기 33인 명적]

 

●장원 : 안을기(安乙起)

●갑과(甲科) 2인 : 이천기(李天驥)․김승덕(金承德)

●을과(乙科) 7인 : 정무(鄭袤)․민경생(閔慶生)․우현보(禹玄寶)․함승경(咸承慶)․최복하(崔卜夏)․이원령(李元

     齡, 廣州人 李集으로 개명)․ 전익(全翊)

●병과(丙科/동진사(同進士) : 23인장하(張夏)․이보림(李寶林)․조경덕(曺敬德)․정습인(鄭習仁)․전영이(田永

    儞)․서문철(徐文哲)․권주(權鑄)․이륵(李勒)․신계령(申繼齡)․송공서(宋公序)․양이시(楊以時)․염국보(廉國

    寶)․권군보(權君保)․오사충(吳思忠)․한의(韓義)․최반(崔磐)․전자이(全子怡)․송언충(宋彦忠)․임효선(林孝

    先)․김제민(金齊閔)․이영(李穎)․이심(李深)․한달한(韓達漢)

 

[참고문헌]

◇高麗列朝登科錄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史綱目. ◇牧民心書(56-2)◇慶州李氏戊辰譜(1748년),

 

    執筆 :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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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기록내용》

 

●공민왕 1(恭愍王一)/정유 6년(1357), 원 지정 17년

 

◇염철별감(鹽鐵別監)을 각 도에 나누어 파견하였는데, 좌간의(左諫議) 이색(李穡), 기거사인(起居舍人) 전녹생

    (田祿生), 우사간(右司諫) 이보림(李寶林), 좌사간(左司諫) 정추(鄭樞) 등이 글을 올려 염철별감의 파견은 폐

    단이 있어 불가하다 하였다.

 

   왕이 재상과 대성(臺省)을 불러 염철(鹽鐵)의 이해를 물었더니, 이색과 이보림은 병이라 일컫고 나아가지 않았

   으나, 전녹생과 정추는 전일의 의논을 고집하였다. 좌간의 남긍(南兢)은 동료들과 평소에 서로 좋게 지내지 않

   았는데, 홀로 말하기를, “파견함이 편리하옵니다." 하여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공민왕 2(恭愍王二)/계묘 12년(1363), 원 지정 23년

 

◇대호군 임견미(林堅味)와 호군 김두(金斗)를 보내어 김용(金鏞)을 계림부(鷄林府)로 옮겨 가두게 하고 안렴사

    이보림(李寶林)과 함께 국문하니, 김용이 말하기를, “내 8년 동안에 세 번 재상을 하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

    한 것이 없었는데, 어찌 왕을 범할 마음이 있었겠는가. 다만 홍시중을 없애고 싶어서 한 일이다." 하였다.

 

   임견미 등이 힐난하기를, “무엇 때문에 안도적(安都赤)을 죽였는가." 하니, 김용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드디어

   김용을 죽여  그 머리를 경성에 전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도당 10여 명을 베었다.

 

   그 밖에 곤장을 때려서 귀양보낸 자도 수십 명이었다. 왕은 그래도 김용을 못잊어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두

   번이나 탄식하며, “누구를 가히 믿을 것인가." 하였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김용이 가졌던 묘아안정주(猫兒眼精珠)를 얻어 도당에 바치니 일좌(一座)가 돌려 가면서

   구경했으나, 평리(評理) 최영만은 돌아다보지도 않고 말하기를, “김용의 큰 뜻을 이런 물건들이 흐려 놓았는데

   제공들은 무엇때문에 구경하시오." 하였다.

 

●공민왕(恭愍王)/임자 21년(1372), 대명 홍무 5년

 

   간관 이보림(李寶林), 장하(張夏) 등이 아뢰기를,“김문현(金文鉉)이 역적 신돈에게 붙어서 아비와 형을 참소하

   여 죽였니, 그 얽어서 모함한 일은 신돈과 이춘부가 상시 말했으며, 온 나라 신민(臣民)이 다 압니다.

 

   그 아비가 죽음에 다다라, 문현에게 모함을 당하였다고 말하며 원통하게 여기는 소리가 있었는데, 이 또한 사람

   들이 다 들었습니다. 이것은 정히 천지에 용납될 수 없는 바이며, 왕법에서 반드시 목 베어야 하니, 이를 버려두

   고 묻지 않는다면, 천리가 없어지고 인도가 끊어집니다. 법대로 처단하여 후세에 보이소서."하였으나, 왕이 윤

   허하지 않았다. 간관이 다시 간하였으나 좇지 않았다

 

●신우(辛禑)/을묘신우 원년(1375), 대명 홍무 8년

 

◇판 안동부사(判 安東府事) 이보림(李寶林)을 치적으로 발탁하여 대사헌으로 삼았다.

 

◇북원이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백안첩목아왕[공민왕]이 우리를 배반하고 명 나라에 붙었기 때문에 너희 나라

    의 임금을 죽인 죄를 용서한다." 하였다.이때에 이인임과 지윤이 원 나라 사신을 맞고자 하니, 삼사좌윤(三司左

    尹) 김구용(金九容), 전리총랑(典理摠郞) 이숭인(李崇仁), 전의부령 정도전, 예문응교(藝文應敎) 권근(權近)

    이 도당에 글을 올리기를, “만일 원 나라 사신을 영접한다면 온 나라 신민이 모두 난신적자의 죄에 빠지게 될 것

    입니다.

 

   훗날 무슨 면목으로 현릉(玄陵)을 지하에서 뵈오려는가." 하였다. 경복흥ㆍ이인임이 그 글을 물리쳐 받지 않고,

   드디어 정도전으로 하여금 원 나라 사신을 맞게 하였다. 도전이 복흥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사신

   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올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명 나라에 묶어 보내겠다." 하여, 언사가 매우 공손하지 못하였

   고, 또 태후께 아뢰어,  “사신을 맞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니, 복흥과 인임이 노하여 도전을 회진(會津)에 귀양

   보냈다.

 

◇성균대사성 정몽주(鄭夢周)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바다 밖 한쪽에 있어서, 우리 태조가 당 나라

    말에 일어나면서부터 예로써 중국을 섬겼는데, 그 섬기는 대상은 오직 천하의 의로운 군주만을 보고 따를 뿐

    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원씨(元氏)가 자초하여 북으로 파천되고 명 나라가 일어나니, 우리 승하하신 왕께서 분명히 천명을 알

   고 표문을 받들어 '신하'라 일컬었습니다.

 

   황제께서 가상하게 여겨 왕의 작위로 봉하고, 하사품과 바치는 물품이 서로 연속되었는데, 금상이 즉위하던 초기

   에 적신 김의가 천사(天使 명 나라 사신)를 전송하다가 중도에서 제 마음대로 죽이고 반역하여, 북원으로 들어가

   서 원씨의 남은 무리와 함께 심왕을 들여보내려고 꾀하였으니, 패역이 심한데도 국가에서 김의의 죄를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상 김서를 시켜 북방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오계남(吳季男)은 국경을 지키는 신하로서 제 마음대로 정료위(定遼衛)의 세 사람을 죽였고, 장자온(張子溫) 등

   은 김의의 일행인데 정료위까지 가지도 않고 공연하게 환국하였으나 내버려 두고 불문에 부쳤습니다.

 

   이제 북쪽 사신이 와서도 대신을 보내어 국경에서 영접하기를, '북원의 노여움을 격발시키지 않고 군사를 늦추기

   위함이다.' 하였습니다. 원씨가 나라를 잃고 멀리 와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한 번 배불리 먹어서 잠깐 동안이라

   도 생명을 연장하려 하는 것입니다.

 

   명목은 왕(심왕)을 들여보내는 것이나 실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함이니 거절하면 우리의 강함을 보이는 것이요,

   섬기면 도리어 그 뜻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으로 군사를 늦추려 하는 것이 실상은 불러들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조서를 보내 우리에게 대역의 죄를 씌우고 이어서 용서하는 체하였는데, 우리가 본래 죄가 없는데

   무엇을 용서하는 것입니까. 국가에서 만일 원 나라 사신을 잘 대접하여 보낸다면, 이것은 온 나라 신하와 백성

   이 사실도 없이 스스로 대역의 이름을 뒤집어 쓰는 것이니, 다른 나라에 소문이 들리게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

   다.

 

   신하된 자로서 참을 수 있는 일입니까. 또 하물며 명 나라 조정에서 처음에 김의의 일을 듣고 이미 우리를 의심하

   였을 것인데, 또 원씨와 서로 통하고 김의의 죄를 묻지도 않는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의심없이 우리가 사신을

   죽여 적에게 주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만일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 바다와 육지로 동시에 진격해 온다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할 것입니까. 작은 적의

   군사를 늦추려 하다가, 실상은 천하(명 나라)의 군사를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사리가 대단히 분명하여 깨닫기 쉬운 것인데도, 조정에서 말하지 못하는 것같이 하는 것은 그 까닭을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전날에 여러 소인들이 일으킨 변 때문에, 그 당시의 재상으로 있던 이가 명 나라의 문책을 당할까 두려

   워하여 실상은 김의와 공모해서 명 나라를 끊고자 한 것입니다.

 

   안사기가 실정이 드러나니 스스로 목을 찌른 것이 그것입니다. 사기가 죽은 뒤에 빨리 계책을 정하여 여러 사람의

   분노를 쾌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이제까지 아무 소문도 없으니 인심이 물끓듯 하여 다른 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상께서 결단을 내려 원 나라의 사신을 잡고 원 나라의 조서를 거두며 오계남ㆍ장자온과 김의

   가 데리고 갔던 자를 묶어서 남경에 보내면, 우리의 애매한 죄가 변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정료위와 약속하여 군사를 양성해서 시기를 보아 북쪽으로 향한다고 소리치면, 원씨의 남은 무리가 자취

   를 거두어 멀리 도망가 국가의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박상충도 글을 올려

   말하였다.

 

◇찬성사 황상(黃裳)을 서북면 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로, 좌부대언 성석린(成石磷)을 체찰사로 삼아서 강계

   (江界)에 가서 원나라사신을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대사헌(大司憲) 이보림(李寶林)이 이인임의 뜻에 따라,

   임박(林樸)이 중서성에 바치는 글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논핵하고 평민으로 폐하여 길안현(吉安縣)에 귀양 보냈

   다.

 

◇왜적이 김해부(金海府)를 침범하여 사람과 짐승을 죽이고 노략질하며 관사를 불살랐다. 도순문사 조민수(曹敏

   修)가 적과 싸워 패전하고, 대구현(大丘縣)에서 또 패전하여 죽은 군사가 매우 많았다.

 

   왜선 수십 척이 또 김해로부터 황산강(黃山江)을 거슬러 올라 밀성(密城)을 침범하려 하므로, 민수가 요격하여

   수십 급(級)을 베었다. 우(禑)가 궁중에서 왕명을 전하는 내시를 보내어 옷과 술과 말을 주니, 민수가 전(箋)을

   올려 사례하였다.

 

   좌정언 김자수(金子粹)에게 명하여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 하니, 자수가 사양하며 아뢰기를, “민수가 한 도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김해ㆍ대구 싸움에서 비겁하고 나약하여 패전하고 많은 군사를 죽였으니, 밀성의 조그만

   승전을 가지고는 공로가 죄를 가리지 못합니다.

 

   옷ㆍ술ㆍ말의 상을 준 것이 이미 지나치거늘, 또 무슨 회답하는 교서란 말입니까. 또 회답하는 교서는 공덕을 기

   록하는 것인데, 이제 민수가 기록할 만한 공이 없으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우(禑)가 노하여 자수를 순위부(巡衛府)에 가두고, 지윤ㆍ하윤원에게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지윤의 무리가

   위지(違旨)의 죄를 적용하려 하니, 자수가 말하기를, “선왕이 간관을 둔 것은 임금의 잘못을 시정하기 위함이

   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왕의 말이 옳지 않을 때에는 간관이 간쟁하나니, 원하건대 여러 공들은 국가가 간관을 둔 본의

   를 살피십시오." 하였다. 지윤이 노하여 곤장을 때려서 귀양 보내려하여 도당(都堂)에서 의논하니, 여러 재상들

   이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밀직부사 이보림이 말하기를, “자수가 비록 작은 선비이나 간관이요, 또 소위 위지(違旨)라는 것은 사람을 동쪽

   에 배치하라 하였는데 제 마음대로 서쪽에 옮기는 것 같은 일을 말하는 것이니, 자수의 죄를 이것으로 논죄할 수

   는 없다."하였다.

 

   도당에서 그 말을 옳게 여겨, 다만 귀양 보내기를 청하였다. 우(禑)가 이르기를, “순위부에서 이미 그 죄를 의논하

   였는데, 지금 가볍게 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우사(右使) 김속명(金續命)이 들어가 태후께 아뢰기를,“신은 무인이기에 사리는 알지 못하나, 문신들이 모두 말

   하기를,  '간관이 비록 왕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죄를 주지 않는 것은 언로(言路)를 열어 놓기 위함이다.' 합니다.

 

   지금 자수의 죄가 작은데 벌을 중하게 의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였다.태후가 우(禑)에게 청하기를,

   “내가 늙어서 겪은 일이 많지만, 간관을 때리고 욕뵈는 것은 듣지 못하였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닫을 것이니, 나라 일은 장차 날마다 잘못되어질 것이오."하였다.

 

   이에 곤장을 면하고 전라도 돌산에 수자리 살도록 귀양 보냈다. 지윤의 무리가 생각하기를, 자수가 반드시 낭관

   (郞官)들과 의논하였을 것이라 하여, 간의 정우(鄭寓)를 경상도 죽림에 수자리 살도록 귀양 보냈다.

 

●신우(辛禑)/을축 신우11년(1385), 대명 홍무 18년

 

◇계림군 이보림(李寶林)이 죽었다. 사람됨이 엄하고 굳세며 바르고, 행정하는데 재능이 있었다. 일찍이 경산부를

    맡았을때, 길에 나갔다가 어떤 부인이 우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이 여자의 우는 소리가 슬프지 않고 기뻐하는

   것 같다." 하고 잡아서 심문하니, 과연 간부와 짜고 남편을 죽인 여자였다.

 

   또 한 사람은 이웃 사람이 자기 소의 혀를 잘랐다고 몰아댔는데, 이웃 사람은 부인하였다. 보림이 그 소를, 사람을

   시켜 오래 목마르게 한 다음, 간장을 물에 타 놓고서 마을 사람을 다 모아 놓고 명령하기를, “너희들이 차례로 소

   에게 물을 마시게 하되, 소가 마시려 하거든 그만두고 다음 사람에게 넘겨 주라."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명령대로 하여 차례가 그 피의자에게 이르니, 소가 놀라서 달아났다. 그래서 그 피의자를 잡아서

   심문하니, 과연 자백하기를, “이 소가 내 벼를 뜯어 먹었기 때문에 그 혀를 잘랐다."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을 내 놓아서 다른 사람의 보리를 거의 다 뜯어먹어버려 보리밭 임자가 말 임자를 고소하려 하

   니, 말임자가 사정하기를, “나도 보리밭이 있으니, 보리가 익으면 당신에게 주겠소.그러니 관청에 고소하지 마

   시오." 하여, 보리밭 임자가 허락하였다.

 

   여름이 되어, 그 말이 뜯어먹은 보리가 다시 싹이 돋아 그래도 수확할 것이 있자, 말 임자가 말하기를, “당신의 보

   리도 여물었으니, 내가 반드시 당신의 보리를 갚아줄 이유가 없다."하여, 보리임자가 고소하였다.

 

   보림이 두 사람을 앞마당에 불러 말 임자는 앉히고 보리 임자는 세워 놓고 말하기를, “동시에 빨리 달려서 못 따라

   가는 자는 벌을 주겠다." 하였더니, 말 임자가 따라가지 못하였다. 따져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 사람은 서고 나는

   앉았으니, 어떻게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보림이 말하기를, “그 보리도 마찬가지다. 뜯어먹은 뒤에 다시 싹이 났으니, 제대로 여문 보리를 따를 수 있겠느

   냐. 네가 처음에 말을 내놓아서 남의 밭에서 뜯어먹게 한 것이 첫째 죄요, 사사로이 그 주인한테 빌어서 관청에

  고하지 못하게 한 것이 둘째 죄요,꾀를 내어 약속을 어기고 보리를 주지 않았으니, 셋째 죄다.

 

 법을 어지럽힌 백성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곤장을 때리고, 그 밭 보리를 고소한 자에게 돌려주

 었다. 그가 정사를 엄하고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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