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벽(李檗)

야촌(1) 2010. 7. 14. 22:24

■ 33世 이벽(李檗)

 

   [세 계] 국당공(菊堂公) 후 26世 지퇴당공(知退堂公) 정형(廷馨)의 7대손.

   [생졸년] 1754년(영조 30)∼1786년(정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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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庵). 세례명은 요한세자이다.

세거지인 경기도 광주 출신. 무반으로 이름 높은 가문의 후손으로, 부만(溥萬)의 아들이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매부이다.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하는 남인학자의 일원이었으며, 이가환(李家煥)· 정약용· 이승훈(李承薰)· 권철신(權哲身)· 권일신(權日身)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맺었다. 무반으로 출세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소원을 뿌리쳤으며, 문신으로도 진출하지 않고 포의서생(布衣書生)으로 생애를 마쳤다.


이른 시기부터 조선 후기 주자학의 모순과 당시의 유교적 지도이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아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중, 사신들을 통하여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西學書)를 열독하였다.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서양선교사들과 중국의 실학자 서광계(徐光啓)·이지조(李之藻) 등이 저술한 한문으로 된 천주교서적들은 천주교의 교리·신심·철학·전례와 아울러 서구의 과학·천문·지리 등의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러한 서적들을 치밀히 연구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1779년(정조 3) 권철신· 정약전(丁若銓) 등 기호 지방의 남인학자들이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실학적인 인식을 깊이 하고 새로운 윤리관을 모색하려는 목적의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는데, 이때 그가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학자들에게 전하고, 후일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 서장관으로 가게 되었을 때 영세를 받아올 것을 부탁하고, 그 절차를 잘 가르쳤다. 그

리하여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많은 천주교서적들을 가지고 오자, 다시 그에게서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천주교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서울 수표교(水標橋)에 집을 마련하여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교분이 두터운 양반학자와 인척들 및 중인계층의 인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천주교를 전교하였다. 이때 세례받은 사람들은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이윤하(李潤夏) 등 남인 양반학자들과 중인 김범우(金範禹) 등이었다.


그뒤 천주교의 의식이나 전교를 위하여 교단조직과 교직자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다른 신자들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교단조직인 이른바 ‘가성직자계급(假聖職者階級)’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교단조직은 자발적으로 수용된 한국천주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벽은 이 교단조직의 지도자로서 그의 집에서 포교(布敎)·강학(講學)·독서·사법(師法) 등의 천주교 전례의식(典禮儀式)을 주도하였으며, 새로 입교한 남인학자들은 모두 그의 제자로 칭하였다.


1785년 봄에는 장례원 앞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사대부·중인 수십명이 모인 가운데 ‘설법교회(說法敎誨)’하는 모임을 매우 엄격하게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천주교모임은 그해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세상에 드러나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며, 성균관유생들의 척사운동으로 인하여 일단 해산되었다.


그뒤 천주교신앙에 대한 아버지의 결사적인 반대를 받아, 당시 사회에서 포기할 수 없었던 효정신(孝精神)의 윤리관과 새로운 진리로 체득한 천주교사상 중에서 양자택일을 하여야 하는 심각한 갈등 속에서 고뇌하다가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


그의 말년의 신앙에 대하여 달레(Dallet, C. H.)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배교로 단정하고 있으나, 효를 절대적인 이념으로 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그렇게 단순히 처리할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다. 《성교요지 聖敎要旨》가 유일한 저작으로 전한다.

 

이것의 전반부는 신구약성서를 중심으로 한 한시로 기독교성서의 이해와 복음정신의 사회화인 구세관(救世觀)을 표현하고, 후반부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정의론(社會正義論)이라 할 수 있는 정도관(正道觀)을 서술한 것으로서, 저자의 성서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당시 우리나라의 자발적인 천주교수용이 성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기독교사상과 동양유학사상이 결합된 윤리와 규범을 제시하였으며, 그것은 후일 한국천주교가 유례없는 대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黃嗣永帛書
◇與猶堂全書(丁若鏞)
◇曠庵李檗의 西學思想(金玉姬, 가톨릭출판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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