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문형(李文炯)
[생졸년] 미상∼1466년(세조 12)
[문과] 세종(世宗) 29년(144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9위/33명
[세계] 익재공파 청호공후손(22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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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담(擔)의 손자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 從二品) 희(暿)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등(安騰)의 딸이다.
1447년(세종 29) 궁직(宮直)으로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1452년(문종 2)에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453년(단종 1)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2등에 책록되었으며 정랑(正郞 : 正五品)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정랑(正郞 : 正五品)에서 집의(執義 : 從三品)를 거쳐 1460년에는 시를 잘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승지(承旨 : 正三品)로 발탁되었고,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 正三品)으로 《손자주해 孫子註解》를 교정하였으며, 집의(執義 : 從三品)· 1461년(세조 7) 동부승지(同副承旨 : 正三品)를 거쳐 이듬해에는 1462년(세조 8) 우부승지(右副承旨 : 正三品)가 되어 《역대병요 歷代兵要》를 교정하였다.
그뒤 좌부승지(左副承旨 : 正三品)· 우승지(右承旨 : 正三品)를 거쳐 1463년에 형조참판(刑曹參判 : 從二品)· 이조참판(吏曹參判 : 從二品)에 이르러서는 천추사(千秋使 : 조선시대 중국 황태자(皇太子)의 생일을 축하(祝賀)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신(使臣)이다.)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명황계감 明皇誡鑑》의 가사를 교정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한성부윤(漢城府尹 : 從二品)을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 正二品)에 이르러서는 조선의 표류민을 돌려보낸 데 대한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었다. 그해 귀국하던 중 통주(通州 :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병사하였다.
성품이 온아하고 국량(局量)이 있었으며, 침묵을 지켜 말이 적고 비록 급한 일이 있을지라도 침착하고 조용하게 처리하였다. 아들이 없었으나, 첩을 두지 않고 조카로 후계를 삼았는데도 가정이 화목하고 엄하였다.문장이 뛰어났으며 고고한 한담(閑談)으로 문아(文雅)가 한때를 천단(擅斷)하니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였는데, 그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고 애석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북정록 北征錄》을 교정하였으며, 사후(死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世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