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世 이진택(李鎭宅)
[생졸년] 1738(영조 14)∼1805(순조 5).
[문과] 정조(正祖) 4년(178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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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양중(養重), 호(號)는 덕봉(德峯). 경주출신이다. 아버지는 운배(雲培)요,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 국망(國望)의 딸이다. 이진원(李晉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8세 때 닭싸움을 보고 “상앙의 법률로 논죄할 것 같으면, 이 닭은 당장 삶아 먹을 것을((若論商앙法 此鷄當烹食)……” 이라는 글을 지어 선생을 놀라게 하였다. 1780년(정조 4)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성균관전적. 예조정랑. 사헌부감찰.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김상로(金尙魯). 홍계희(洪啓禧)가 사도세자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주장한 사람이다. 또, 1793년 그가 대간으로 있을 때 사노비혁파(寺奴婢革罷)를 주장한 상소를 올려 사노혁파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개혁론의 여파로 1801년(순조 1)에는 공노비해방을 보게 되었다. 한때, 정조의 신임을 크게 받았으나 관운이 좋지 않았다.
1802년 서유방(徐有防) 등을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삼수로 귀양 갔다가 2년 뒤에 풀려났고, 그 다음해에 죽었다. 저서로는 《덕봉집(德峯集)》이 있다.
※ 경주이씨 교감공 존사(存斯 교감공파 파조)의 후손으로 익재공후 판윤공파 소정문중(경주시 소정동 문중을 말
함)의 양자로 입적 가계를 이었다.
[참고문헌]
◇國朝榜目 ◇朝鮮人名辭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