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예환(李禮煥)

야촌(1) 2010. 3. 3. 04:14

■ 34世 이예환(李禮煥)

 

   [생몰년]  1772년(영조 48)∼1837년(헌종 3)

 

조선후기의 학자로. 자(字)는 치화(致和), 호(號)는 난국재(蘭菊齋), 또는 수안(洙岸)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익재 재현(益齋 齊賢)의 후손으로. 송치규(宋穉奎)의 문인이고, 학행(學行)으로 관찰사(觀察使)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은 하지 않았으며. 문명(文名)이 높았고 저서로 난국재집((蘭菊齋集)이 있다.

 

난국재집은 이예환(蘭菊齋 李禮煥(1772∼1837)의 유문집(遺文集)으로 1851년(哲宗 2) 손자인 규현(奎鉉)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난국재(蘭菊齋)는 도학(道學)의 실천을 중시하였고 문장학을 경시하였으므로 유문(遺文)이 많지도 않았고 또한 정리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의 아들 기표(基표)가 1843년(憲宗 9)에 하백원(河百源)에게 부탁하여 편집하여 4권으로 산정하고, 동년(同年)에 하백원(河百源)으로부터 발문(跋文)을 받고, 1849년에 김면근(金勉根)의 서문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책이 간행되지 못하였다가 이 편집본(編輯本)을 그대로 하여 2년 뒤에야 간행을 본 것이다.

 

이예환(李禮煥)은 8~9歲에 이상욱(李相郁)에게 취학하였고, 그 후 성당 정선생(性堂 鄭先生)의 문하에 나아가 백사형(白師亨), 이상문(李相文)등과 함께 성리학에 전심하였고 과거공부는 폐하였다.

 

항상 도학(道學)을 강론하여 후생(後生)교화에 힘쓰니 그 지방의 사기(士氣)가 흥기(興起)하여 주자(朱子). 익재(益齋)의 사당(祠堂)으로 용암영당[龍岩影堂=오늘날 심사당(三思堂)]을 세우고, 성당서사(性堂書社)계를 만들어 교화에 힘썼다.

 

그리고 검재 송치규((劍齋 宋穉圭)와도 종유(從遊)하였으며 문명(文名)이 높았다. 권두에 1851년 당성 홍직필(唐城 洪直弼)이 쓴 서문과, 1849년에 김면근(金勉根)이 쓴 서문이 있다.

 

[권1] 부(賦) 1편 용암사당부(龍巖祠堂賦), 시(詩) 90首 대이금(大易吟) 등.

[권2] 書 39편 흥금백신(與金伯臣) 등. [권3]:書 56편 답금백신(答金伯臣) 등. 여기 105편의 서간문 중에는 성리학에 관한 내용이 많이 있다.

 

[권1] 제문(祭文) 27편 선조익재영정봉안문(先祖益齋影幀奉安文)등, 서(序) 3편 대동)첩서(大同계帖序)등, 발

          문跋文) 1편성당집발(性堂集跋), 잡저(雜著) 7편(大學退記, 洙岸書社約束, 呈大同계書 등). 이 중 「大

         學退記」는 ≪大學≫에 관한 여러 가지의 문제점을 해명한 기록이고 「洙岸書社約束」은 자신의 書社

         의 諸生들에게 지키도록 한 규약 같은 것이다.

        그 다음 行狀, 墓表, 傳 등 9편이 있고 부록으로 난국재(蘭菊齋)의 행장(行狀)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