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수 권공 묘표 음기(都元帥權公墓表陰記)
송시열 지음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의 왜란(倭亂)에 공[公 : 권율(權慄)을 말함]은 여러 번 뛰어난 공을 세웠다. 이에 명(明) 나라 황제가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이제 전라도 지방을 보니 적을 무찌르고 사로잡음이 매우 많아 그곳 백성들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하고, 홍로시(鴻矑寺)의 관원을 보내어 선유(宣諭)하였다.
출정한 명 나라 장병들도 서로 말하기를, “권 장군의 군대는 다른 진영의 군대와는 다르다.”하였으며, 총독군문(總督軍門)의 경략사(經略使) 송응창(宋應昌)도 본국(本國)에 자문(咨文)을 올려 표창하기를 청하는 글에서, “조선의 3도(道)에 소속된 모든 고을의 군대는 적을 만나면 싸워 보지도 않고 미리 겁내어 도망쳐 버릴 뿐, 누구 하나 의병을 일으켜 큰 난리를 막고 영토를 지켜 국가를 회복시키려는 영웅이나 걸사(傑士)는 볼 수 없으니, 조선에는 인재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권모(權某)만은 외로이 고을을 지켜 무리를 불러 모아 여러 번 기이한 꾀를 내어 그때마다 많은 적군을 막아냈고, 근래에는 다시 모래를 자루에 담아 식량처럼 속여 왜적을 유인해서 그들을 무찔렀으니, 이야말로 어려운 때의 충신이요 나라를 중흥시킨 명장(名將)입니다.” 하였다.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도 상주(上奏)하는 글에서, “조선의 신하 권모만이 외롭고 위태로움에서 홀로 지켜 강한 왜적(倭賊)을 막았다.”하였다.
선조대왕(宣祖大王)도 여러 차례 간곡하게 표창하는 글을 내렸는데 그 글 가운데는, “정성과 힘을 다하여 공로가 크게 드러났고 용맹과 지략은 세상에 뛰어나 이름이 천하에 떨치매, 적병들이 그 위엄을 두려워했다.” 고까지 하였으며 또, “경(卿)이 아니었던들 나라가 어떻게 오늘과 같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이 몇 가지 사실은 모두 백사(白沙 : 이항복(李恒福)가 지은 공의 행장과 묘지(墓誌)와 전첩비(戰捷碑)의 음기(陰記)에 실려 있다.
최근에는 상촌[象村 : 신흠(申欽)] 신공(申公)이 또다시 이 사실을 비면(碑面)에 표장(表章)하였는데 그 몇 해 뒤에 내가 또 특별히 그 비 뒤에 쓰기를,“이 몇 가지 사실들은 마땅히 여러 번 써야 할 것이지 한 번만 써서는 안 될 것이다.”하였다.
하물며 병자년과 정축년에 걸친 호란(胡亂)이 있은 뒤로 황조(皇朝)의 덕음(德音)이 다시는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아니하매 모든 백성들이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생각을 누르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여러 번 쓰지 않을 수 있겠으며 뉘라서 이를 부질없이 반복하는 것이라 하겠는가.
그 자손으로서 원비(原碑 : 신흠이 지은 권율의 신도비를 가리킴)에 실리지 않은 사람은 현감[縣監-아들 익경(益慶)을 말함]의 둘째 사위 참판(參判) 조수익(趙壽益)과 셋째 사위 강원지(姜元祉)이다.
무 현감[武縣監 : 무과 출신 현감. 익경(益慶)의 아들 집(㠎)을 말함]의 아들은 판관(判官)인 혁()이고, 공의 둘째 아들 업(嶫)은 숙(俶)ㆍ휴(休) 두 아들을 두었고, 셋째 아들 헌(巘)은 임(任)ㆍ인(仁) 두 아들을 두었다.
판관 혁은 상형(尙珩)ㆍ상규(尙珪)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재랑(齋郞) 벼슬을 했다. 숙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상중(尙中)ㆍ상정(尙正)ㆍ상경(尙經)ㆍ상칭(尙稱)이고, 임(任)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상충(尙忠)ㆍ상문(尙文)ㆍ상질(尙質)이다. 성원(聖元)은 상형의 아들이고 성보(聖輔)는 상규의 아들이다. 외손자들은 너무 많아 모두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예로부터 나라를 중흥한 임금은 훌륭한 신하를 얻어 신임하여 맡겼으니 주(周) 나라의 방숙(方叔)과 소호(召虎)와 윤길보(尹吉甫)와 중산보(仲山甫)가 그러했고, 한(漢) 나라 운대(雲臺 공신(功臣)들을 추모하기 위해 화상을 걸어 놓은 곳)의 여러 장수들과 당(唐) 나라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 등은 모두 충의(忠義)의 정성을 다해 신임을 받아 동이의 물을 쏟아 내리듯 쉽게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송(宋) 나라의 이강(李綱)과 장준(張浚)은 참소를 입어 끝내 공을 세우지 못하였음을 볼 때, 공의 지혜와 용기가 비록 옛사람보다 뛰어났다 할지라도 우리 선조대왕의 사람을 아는 슬기로움과 오로지 신임하여 맡겨 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공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당시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오히려 형리(刑吏)의 손에서 죽을 뻔하기도 하였음을 볼 때, 공이 충신(忠信)과 선도(善道)로써 임금에게 신임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임금은 훌륭하고 신하는 어진 예는 천 년에나 한 번 있을 정도로 드문 일이다. 원비(原碑)에, “공은 중형(仲兄)의 아들 익경(益慶)을 데려다 뒤를 이었다.”
하였다.
[주01]비풍(匪風)과---생각: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은 《시경(詩經)》 회풍(檜風)과 조풍(曹風)의 편명이다. 종실(宗室) 주(周) 나라가 망하여 여러 제후국(諸侯國)이 곤(困)함을 당하면서도 망해 버린 주 나라를 사모하여 읊은 시이다. 여기서는 명 나라가 망했을 때 우리나라가 청 나라에게 곤욕을 당하면서도 명 나라를 사모함을 비유하여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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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都元帥權公墓表陰記
萬曆壬辰之亂。公累立奇功。皇帝詔曰。今觀全羅道斬獲甚多。該國人民尙可振作。因差鴻臚寺官宣諭。天朝東征將士相謂曰。權家軍與他陳自別。總督軍門經略宋應昌移咨本國。另行奬賞。略曰。王國三道諸郡。悉皆望風奔潰。曾無一英雄傑士倡義師排大亂。守封疆以圖恢復者。王國可謂無人。獨權某扼守孤縣。招集衆庶。屢出奇謀。時抗大敵。近復囊沙爲糧。誘倭來搶而劫殺之。此正板蕩忠臣。中興名將。兵部尙書石星奏本以爲陪臣權某獨守孤危。以抗強勁。宣祖大王前後奬諭備至。至曰忠勞茂著。勇略超世。名聞天下。威慴敵國。又曰。非卿國家何以得至今日。此數者具載於白沙所撰行狀及墓誌及戰捷碑陰記。最後象村申公又表章于此碑之面。後幾年。余又特揭于其陰曰。此數者宜屢書而不一書也。況自丙丁以來。皇朝德音。不復東來。東土含生。不勝匪風下泉之思。益何心而不屢書也。夫誰曰疊床而架屋也哉。其子孫之不載於原碑者。縣監第二第三。女壻參判趙壽益,姜元祉也。武縣監男判官。嶪二男俶,休。巘二男任,仁也。判官二男尙珩,尙珪。長齋郞。俶四男尙中,尙正,尙經,尙稱。任三男尙忠,尙文,尙質也。曰聖元,聖輔。尙珩,尙珪出也。外裔多不能盡錄。嗚呼。自古中興之君。無不得人而任之。周之方,召二甫尙矣。漢之雲臺諸將。唐之郭,李諸人。皆以忠義誠愨。蒙被委任。成功如建瓴然。宋之李,張讒間搖惑。卒以無成。然則公雖智勇邁古。而微我宣廟知人之哲而委任之專。則功焉得而有成哉。然當時如李忠武舜臣。猶不免於對吏幾死。則公之以忠信善道。自結於君上者可知也。主聖臣良。可謂千載一時也。原碑曰公取仲氏子益慶爲後云。<끝>
宋子大全卷一百九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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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行正憲大夫知中樞府事兼諸道都元帥權公墓誌。- 李恒福
萬曆二十年壬辰夏四月。日本擧國入寇。衆號六十萬。列郡瓦裂。京師荷擔。維時有臣曰權某。嘗以材能局度雄一世。罷官家居。上思之曰。予聞權某有才。可試之巨鎭。卽日公起廢爲光州。未幾。賊掇尙州踰鳥嶺。大鞣忠州。進陷京城。主上西廵。公傳檄傍郡。得一千五百餘兵。進陣梨峙。以阨兩南之吭。遇賊大來嘬鋒。嶺下踣之。朝廷逾欲試之於大。秋遷羅州牧使。未之官。擢拜全羅道觀察使。公拜命痛哭。遂大選全州。自領精兵一萬。刻日西上。其在水原也。據禿城爲固。危動京都。直搖西路。秀嘉惧公乘其虗。行長恐公議其後。屹然爲虎豹之勢。坐牢關西心。其在高陽也。築幸州爲柵。遇賊大衆。乘虗猝至。圍柵數重。登埤大喝。諸將伏氣。一軍披靡。公見賊逾多。神逾風發。以二千遠來之卒。當數萬方張之賊。斬級百餘。聲生勢張。其在坡州也。阻山城爲壘。賊屢出推鋒。先嘗我師。怛威避銳。終不敢犯。用能獨抗大難。爲諸軍首。東制羣盜。西綴行長。翼蔽西路。扞衛行在。以不累我聖上知臣之明。猗歟偉哉。及天朝大將軍李提督如松。與秀嘉等諸酋約和。憚公善戰。勒公無動。縱賊全歸。公潛師躡後。竟爲所覺。提督遣一偏將。阻津濟師。及天將罷兵歸。公亦引兵還本道。朝廷以公屢立大功。兵威益張。癸巳六月。陞爲諸道都元帥。進駐嶺南。丙申。遆爲漢城府判尹,戶曹判書。俄拜忠淸道觀察使。復拜元帥。丁酉冬。天子大發兵。遣總兵官麻貴。統衆四萬。都御史楊鎬監軍攻蔚山。戊戌。又遣大司馬邢玠,提督劉綎等。三路總兵。攻順天。公再從征兩路。號令嚴明。身先士卒。天朝將官。無不拭目。稱其能。己亥夏。以疾乞歸。上許之。方將脫遺兜鍪。退與道俱。冲漠保神。坐撫遐齡。以是年七月初七日。卒于寓舍。壽六十三。前夫人曹氏。軍器寺僉正輝遠之女。後夫人朴氏。江西縣令世炯之女。無子。前夫人有一女。其壻曰余。推忠奮義平難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鰲城府院君。謹按權氏。出安東。其始有金幸者。事麗祖。實封安東。爵爲太師。賜姓權氏。至十六世而有諱近。官至贊成。號陽村。至公間六世矣。曾祖曰僑。楊根郡守。祖曰勣。江華府使。父曰轍。議政府領議政。先夫人曹氏。夏城府院君益淸之後。迪順副尉承晛之女。合二姓之貴。歸成于公。克紹厥緖。此公世系之大略也。公字彦愼。號晩翠堂。以嘉靖十六年丁酉十二月二十日生。年四十有六。萬曆壬午。登第。始以承文院正字。轉成均館典籍,司憲府監察,禮曹佐郞,戶曹正郞。三出爲全羅道都事,鏡城府判官,義州牧使。亂後。以光州首事。一歲中超遷。至資憲大夫。階爲二品。位列九卿。建牙開府。坐鎭二南。謀行功從。剗削大敵。此公履歷之大經也。自幼不好弄嬉戱。異凡兒。不縱爲子弟華靡事。先夫人嘗撫而奇之曰。吾門有兒。及長果然。公拔起統衆。未有遠名。梨峙之戰。諸將見公挺身。冒刃而出。潛相謂曰。儒者能如是耶。及幸州之捷天朝大司馬宋應昌。賞以紅段絹四端,白金五十兩曰。板蕩忠臣。中興名將。兵部尙書石星。以爲獨守孤危。以抗强勁。事聞。天子嘉之曰。今觀全羅斬獲數多。後公嘗入朝。上勞之曰。非卿。國家何以得至今日。及復爲元帥。公辭之。上曰。卿名聞天下。威慴敵國。元帥之任。捨卿伊誰。淸正,行長。憚公威名。每見我使。必問權元帥起居。此公功烈之大數也。卜得九月十五日。將葬公于洪福山鴨谷之原。其宗人之從事於戎者。泣以告余曰。公在嶺南。嘗手箚聖旨及天朝咨揭數語曰。我死。有壻李議政在。必能誌我墓。此足以光吾後也。余聞而嘻曰。嗚呼信哉。自我公卒至葬。凡吊賻祭使者交道。繼以推恩。爵之崇秩。斯可謂哀榮無憾者。而又如卽流芳垂後。以顯厥績。有聖主之敎。有天子之詔。有宋公石公之褒。足以吐辭成法。永爲口碑。如欲以疣贅之辭。模寫喬嶽。逡廵於大功之下。斯强顔耳。咸曰諾。遂叙其事而不銘。 <끝>
백사집 > 白沙先生集卷之二 / 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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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元帥權公神道碑銘 - 申欽
贈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永嘉府院君。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八道都元帥權公之墓。麗牲之石旣具。右議政申欽脩辭而勒之曰。公之攻討之績。簡易崔公岦紀之於幸州。公之事行之懿。公之壻鰲城相國李公恒福誌之於幽隧。宜無以加諸。顧稽古昔典章。如公茂烈。行應銘法。法當表之大逵。以詔來者。公諱慄。字彥愼。遠祖幸新羅宗姓。討甄萱有功。麗祖賜姓權。封之安東。仍籍焉。十三世而溥。政丞以壽福終。一家封君者九。歷三世而近。官贊成。卽公六代祖也。曾祖曰僑。楊根郡守。祖曰勣。江華府使。考曰轍。議政府領議政。歷事四朝。爲太平宰相。妣曰曹氏。迪順副尉承睍女。夏城府院君益淸之後也。嘉靖丁酉生公。弱不好弄。長而無紈綺華靡之習。議政公奇之曰。吾門有人。攻經學甚勤。而少踸踔。滯於公車。萬曆壬午。中式年文科。時年四十六。識者或知爲將相器也。由承文院正字著作博士。陞成均館典籍。更司憲府監察,禮曹佐郞戶曹正郞全羅都事鏡城判官。辛卯。復除戶曹正郞。超拜義州牧使。壬辰春。坐事罷。夏。日本酋秀吉逞射天計。遣秀嘉,行長等。衆號六十萬。入寇。擧國劻勷。宣廟下敎曰。予聞權慄才可試之。拜光州牧使。公卽日陛辭。賊踰鳥嶺陷忠州。巡邊使申砬死之。賊長驅薄京城。大駕西狩。全羅道觀察使李洸與忠淸道觀察使尹國馨,慶尙道觀察使金睟。領兵十萬到振威。洸問策於將佐。公曰。主公掃境內以來。國之存亡。在此一擧。今宜奬率大軍。直指水原。由通津涉祖江。遮遏臨津。稟命行在。則我得其勢。可以圖大。洸不從。未見賊而潰。公還光州。奮曰。廟社丘墟。主上播越。爲臣子者。豈可坐待國亡。傳檄旁郡。得兵一千五百。進屯梨峙。扼兩南吭。嶺南賊與錦山賊合力來攻。公挺劍而出。先冒白刃。諸將相謂曰。儒者亦如是耶。士氣百倍。敗之於嶺下。朝廷欲試之巨鎭。秋。遷守羅州。未之官。躋授全羅觀察使兼巡察使。公拜命痛哭。大選全州。自領精兵一萬。爲西上計。據水原禿城爲固。危動京師。直搖西路。秀嘉懼乘其虛。行長慮議其後。若防制水。坐牢關西心。宣廟解尙方劍馳賜之曰。諸將不如令者。以此從事。又令義兵諸陣悉統於公。京城賊患公落其角距。出數萬衆作三陣。往來挑戰。公堅壁不應。間出奇兵摧之。居五日。賊燒營遁。畿輔之賊亦捲入京城。癸巳。自禿城移柵於陽川。分兵列援。欲直渡陽川江。進壘城西鞍峴。諸將力止之。軍於高陽之幸州山。京城賊方盛。見公孤軍深入。二月十二日。賊盡其精勇。分二路夜逼幸州寨。公起視之。則兇鋒蔽野。圍寨數重矣。公卽令士卒傳餐。擇善射者列於睥睨間。下矢如雨。且揀力士。投石擊之。繼放車子火。自朝至暮。賊九進九却。已而賊待束草縱火。大喝登寨。公提尙方劍。立督諸將。諸將爭先薄戰。賊遂熸。賊之將卒死者。不紀其數。委其軍實而走。收斬一百三十餘級。捷聞。特加資憲大夫。將士賞賚有差。皇朝游擊査大受來見公嘆曰。外國亦有眞將矣。宋經略應昌移咨奬之曰。權布政可謂板蕩忠臣。中興名將。賞以綵幣白金等物。兵部尙書石星奏曰。陪臣權慄獨守孤城。以抗強勁。天子嘉之曰。全羅斬獲數多。該國人民。尙可振作。公旣蹂幸寇。徙營坡州。坡乃迤西孔道。賊憚之。又欲報幸州之敗。刺血祭天。謀犯公而竟不敢窺足而右。四月京城賊遁去。公將以輕兵躡之。會李提督如松方用計退賊。阻公使不得南。六月。拜諸道都元帥駐嶺南。冬。拜刑曹判書。轉議政府右參贊。甲午春。以疾辭。宣廟軫之。醫問交道。有武士避戍匿於全州。公斬之。體臣聽其家人訴請公罪。公罷笑曰。爲將數歲。不得以軍法斬一卒耶。謝事歸江華故里。未幾。敍拜漢城判尹。戶曹判書知義禁府事兼管備邊司。入侍前席。宣廟敎曰。非卿國家何以得至今日。輟內廏馬賜之。丙申。拜忠淸道觀察使。宣廟命爲都元帥曰。卿忠勞茂著。勇略超世。名聞天下。威慴敵國。元帥之任。捨卿伊誰。及辭朝。召見賜酒以勞之。復賜內廏馬。七月。湖西土人李夢鶴反。連陷五邑。朝廷命公討之。公提兵急趨。賊已就殱於洪州。治其黨與。上讞甚晳。湖路獲安。冬。我國人自日本來者傳言。淸正欲再入寇。朝野洶洶。公曰。設令淸正復來。自有待之之道。聚首憂畏何益。奏陳列柵制賊之策。丁酉秋。果再肆。陷晉州南原。直指畿甸。公且戰且行。斬級以聞。承召赴朝。倚公防截漢津。還朝翌日。旋與天朝將官彭友德渡江。戰於稷山大破之。冬。天朝大發兵。遣提督麻貴,經理楊鎬。攻蔚山賊。公領衆先攻。突騎徑前。斬後進者以徇。諸軍距躍蟻附以登。陷其外城。提督,經理交口稱之。戊戌春。以疾乞免。宣廟慰諭勉留之。天朝遣兵部尙書郉玠。督三提督分路討之。公隨劉綎攻順天賊。綎素無戰心。持重不進。公累畫策而綎不聽。未久賊大衂於水軍都督陳璘。且其酋秀吉死。諸路賊倂捲還。己亥夏。公病?控辭。宣廟許遞。七月六日。竟不起。享年六十二。宣廟震悼輟朝。賻賵有加。遣官致祭。命贈贊成。九月。窆于楊州洪福山戌坐之原。先兆也。越七年乙巳。論功錄宣武功臣一等。贈領議政府院君。公前夫人曰昌寧曹氏。僉正輝遠之女。溫莊和厚有壼範。年二十四而卒。贈貞敬夫人。有一女乃鼇城公也。生二男一女。男長星男。次井男。皆蔭仕爲郡守。女曰尹仁沃。星男初娶判書權徵女。生一男一女。後娶主簿金繼男女。生二男四女。井男娶承旨尹顗女。生一男一女。尹仁沃生一男一女。後夫人曰朴氏。竹山望族。縣令世炯女也。明惠持法度。奉姑承公。一順無違。公歿。以未亡自處。節祭時祀。無不式禮。時製衣服。設奠焚之。後公十年卒。戊申二月也。年六十二。封貞敬夫人。四月祔葬於公墓之兆。無子。公取仲氏子益慶爲後。益慶補蔭職爲縣監。初娶李光輪女。生三男。曰㠎武科縣監。曰岦。曰嶪。後娶李淨女。生一男三女。男曰巘。女曰李道基。餘幼。㠎有二男一女。嶫有一男。道基有一男。幷幼。公身頎八尺。容貌魁偉。符彩嚴重。制行忠朴。處父母兄弟。愉婉和厚。喪哀祭誠。一出眞素。待遇宗族。咸盡其懽。性好施與。家無長物。處事周愼。擧必萬全。臨敵對壘。言爲整暇。建牙開府。再領儲胥。身先士卒。號令嚴明。將士親附。謀行功從。剗削大敵。以寡敵衆。雖古名將。有不及者。皇朝石尙書星遇我國使者。詢公起居曰。爾國若有權公數人。何憂焉。倭人亦見我國人。必問權元帥何在。其爲華夷所共服如此。在戎行。手錄聖旨及天朝咨揭曰。我死。李議政必能誌我墓。此足矣。洎釋負。構一室於江鄕。號晩翠堂。寓其志也。嗚呼。欽是公元帥時幕佐也。有虞卿白璧之知。無中郞黃絹之辭。竊嘗評之曰。高山深林。龍虎變化者。公其人也。汾陽之勳而不得致中書之考。晉公之德而不得享綠野之樂。茲爲可嘅。而若其仗節盡瘁。身佩安危。丹書鐵倦。永保始終。足與二公媲云。銘曰。
若昔壬辰。蠢彼介鱗。鞠頑裒兇。奔突跳躑。孰獮孰剔。遍我箕封。惟上曰咨。疇董我師。繄爾其才。公膺其重。八路是總。再燃于灰。熸之于幸。大鋤其梗。于稷于蔚。左水右陸。扼項批脊。莫我敢越。斗極重恢。黃道褰開。伊公之烈。人謀畢凝。鬼神與能。伊公之籌。赫赫厥靈。巍巍其名。伊公之休。有山嶻峛。有碑嵽嵲。伊公之藏。公有幕佐。載揚載播。銘于墓陽。 <끝>
상촌고 > 象村稿卷之二十七 / 神道碑銘 一十一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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