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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선생 묘비(鄭球先生 墓碑)

야촌(1) 2009. 4. 26. 12:41

■ 정구선생 묘비(鄭球先生墓碑)

 

◈ 생졸년 : 1490년(성종 21)~ 미상

◈ 묘비 건립 연대 : 1626년(인조 4년)

◈ 유형/재질 : 비문/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조경(趙絅) / 조경(趙絅) / 미상

 

▣개관

1626년(인조 4)에 세워진 정구(鄭球)의 묘비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정구의 외증손인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이 짓고 썼다. 정구(생몰년 미상)의 자는 대명(大鳴), 호는 괴은(乖隱)이다. 1510년(중종 5)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했으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두문불출하며 병을 핑계로 18년 동안 앉아서만 지냈다고 한다. 

저서로 『괴은집(乖隱集)』 4권이 있다.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반부에서는 그의 가계 및 생애를 서술하였다. 관직을 시작한 지 10년도 되지 않아 세상과 인연을 끊었으므로 분량이 다른 묘비에 비해 매우 적은 편이다. 후반부에서는 자녀관계를 서술하였는데, 자손이 많아 전체 분량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끄트머리에 비석을 세우게 된 경위를 짧게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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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은 정 선생 묘지(乖隱鄭先生墓誌)

 

선생의 휘는 구(球), 자는 대명(大鳴), 호는 괴은(乖隱)이다. 본관은 동래(東萊)로 고려조에 찬성사를 지낸 휘 목(穆)의 후손이다.

 

고조 휘 절(節)은 호조 참의를 지냈고, 증조 휘 자순(子順)은 비안 현감(比安縣監)을 지냈고, 조부 휘 결(潔)은 청주 목사(淸州牧使)를 지냈다. 부친 휘 유의(有義)는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지냈으며 상서승(尙書丞) 양주(楊州) 조찬(趙瓚)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다.

 

선생이 벼슬에 나아간 차례는 다음과 같다.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정덕(正德) 경오년(1510, 중종5)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들어가 예문관 검열에 선발되었다. 사간원 정언과 병조 낭관을 거쳐 단천 군수(端川郡守)로 나갔으며 뒤에 첨정(僉正)과 부정(副正)에 이르렀다.

 

선생의 덕성은 다음과 같다. 내실을 힘쓰고 겉치레를 싫어하였고, 겉으로는 유순하고 속으로는 방정하였으며, 영리를 좋아하지 않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았다.

 

선생의 공정하고 강직함은 다음과 같다. 선생이 예문관에 있을 적에 사필(史筆)을 잡고서 정사당(政事堂)에 앉았다. 대개 이것이 옛 제도인데 폐지하고 시행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공이 어느 날 이를 시행하니, 정권을 장악한 자들이 눈을 흘기며 미워하였다. 훗날 선생이 외직으로 내쳐진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선생의 심원한 생각은 다음과 같다.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은 뒤로 문을 닫아걸고 다리병이 있다고 핑계대고서 자리에 앉아 있은 지가 18년이었다.

 

아들인 장령공(掌令公)이 재차 아내를 맞이할 때에야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는데, 집안사람들조차도 그때서야 선생이 거짓으로 아픈 척 한 것을 알았다.

 

이밖에는 평생토록 살림의 유무를 따지지 않은 채 문장 짓는 일로 스스로 즐겼으니, 《괴은집(乖隱集)》 4권이 세상에 전한다.

 

부인 광주 김씨(光州金氏)는 사지(司紙) 휘 중문(仲文)의 따님으로 아들 둘과 딸 둘을 낳았다. 장남 희등(希登)은 장령을 지냈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에 화를 당하였다.

 

차남 희승(希昇)은 일찍 죽었다. 장녀는 첨지 한양(漢陽) 조수곤(趙壽昆)에게 출가하여 아들 둘과 딸 셋을 낳았다. 장남 진(瑱)은 후사가 없다.

 

차남 현(玹)은 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낭관 벼슬을 지냈으며, 아들 익남(翼男)을 낳았다. 익남은 나이 오십에 세상을 떠나 벼슬이 봉사(奉事)에 그쳤다.

 

이분들이 바로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이다. 내게는 구(緱)라는 아우가 있는데 나이가 어리다. 차녀는 학생 유유정(柳惟精)에게 출가하여 아들 덕규(德規)를 낳았고, 덕규는 딸 둘을 낳았다.

 

선생의 장남 장령공은 두 번 장가를 들었다. 전부인 유씨(柳氏)는 딸 둘을 낳았다. 후부인 이씨(李氏)는 첨사 계홍(繼洪)의 따님으로 아들 둘과 딸 둘을 낳았다.

 

장남 눌(訥)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다. 차남 근(謹)은 향리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가 네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당상관에 올랐으며, 뒤에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한 공으로 참판에 추증되었다.

 

참판은 참판 유수훈(柳秀薰)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아들 지경(之經)은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병진년(1616)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통정대부가 되었다.

 

부사 눌은 진흥군(晉興君) 강신(姜紳)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다. 아들 식(栻)은 갑자년(1624, 인조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장녀는 사인(士人) 유기선(柳基善)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사인 송시철(宋時喆)에게 출가하였으니, 모두 당시의 명망 있는 가문이다. 내외의 손자들이 남녀 모두 백여 명이다.

 

통정공(通政公)이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비석을 갖추었기에 내가 마침내 그 개략을 서술하여 후손들에게 알린다.

[주01] 괴은 묘지 : 이 글은 정구(鄭球, 1490~?)에 대한 묘지이다. 정구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명(大鳴), 호는 괴은(乖隱)이다.

 

용주유고 > 용주유고 제14권 / 지(誌)

 

[原文]

 

乖隱鄭先生墓誌

 

先生諱球。字大鳴。號乖隱。東萊人。高麗贊成諱穆之后。高祖諱節。戶曹參議。曾祖諱子順。比安縣監。祖諱潔。淸州牧使。考諱有義。務安縣監。娶尙書丞楊州趙瓚女生先生。先生進塗則弘治辛酉進士。正德庚午上第。入槐院選內翰。歷正言騎曹。出爲端川守。後至僉正,副正。德性則務實惡華。襮順裏方。不喜榮利。不交要人。正直則其在翰院。操史筆坐政事堂。蓋故事也。廢而不行已久。一朝行之。柄用側目。異日斥外萌是云。深致則自經己卯士禍。輒杜門稱軟脚。着席者十八年。及子掌令公再迎婦。乃起步。雖家人始覺其佯病。其他平生。不問有無。以文章自娛。有乖隱集四卷行于世。夫人光州金氏。司紙諱仲文女。生二男二女。男長希登掌令。乙巳賢。次希昇早卒。女長適僉知漢陽趙壽崑。生二男三女。男長瑱。無后。次玹。丁卯生員。仕爲郞。生一男曰翼男。得年五十。官止奉事。卽絅父若祖也。絅有弟緱。幼。次適學生柳惟精。生一男德規。生二女。掌令公凡二娶。前配柳氏。生二女。後配李氏。僉使繼洪女。生二男二女。男長訥。武科府使。次謹。以里選進宰四邑陞貂。後用宣廟扈從功贈參判。參判娶參判柳秀薰女。生一男一女。男曰之經。己酉進士。丙辰文科。今爲通政。府使娶晉興君姜紳女。生一男二女。男栻。甲子進士。女長適士人柳基善。次適士人宋時喆。皆時望族。內外孫男女凡百餘人。通政公承先志備樂石。絅遂敍其槪。俾來裔有知。

 

外高孫前縣監趙絅 書 

天啓六秊丙寅三月 日

 

용주유고 제14권 / 지(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