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행 묘표(權幸墓表)
[시대] 조선
[연대] 1588년(선조 21년)
[유형/재질] 비문/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393 번지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유성룡(柳成龍) / 권오(權晤) / 미상
[개관]
1588년(선조21)에 세워진 권행(權幸)의 묘표이다.
찬자는 조선중기의 문신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고, 서자는 권 행의 22세손인 권오(權晤)이다.
권행(생몰년 미상)은 고려태조 때의 공신으로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시조이다.
본래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신라말엽 공이 고창군(古昌郡)을 맡고 있다가 지리적인 이유로 고려조에 투항하여 권 씨 성을 하사 받았다.
성이 김(金)에서 권(權)으로 된 것이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후 자손이 더욱 번성하여 고려조는 물론이고 본조에서도 벼슬한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930년(태조 13)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을 포위하여 전세가 고려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이때유금필(庾黔弼)의 주장으로 공격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당시 고창 지방호족으로 추측되는 이들이 협조를 잘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공으로 태조는 안동을 본관으로 삼게 하고, 대상(大相)이라는 관직을 내려주었다.『증보문헌비고』에는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부(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로 봉해진 기록도 보인다.
묘표의 내용은 크게 3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단락에는 권 씨의 내력에 대한 설명이 있다.
두 번째 단락에는 권 행의 묘지를 발견하게 된 경위를 서술하고 있다.
처음에 장사지낼 때는 묘도가잘 갖추어지고 비석도 있었으나 세대가 멀어질수록 어느 곳이 무덤인지 아는 사람이 없게 되었는데, 18세손인 권옹(權雍)과 그의 아들 유작(裕綽)이 무덤을 찾고 무덤을 다시 가꾸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세 번째 단락은 손상된 비석을 다시 세우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web)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단행본)(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7
(단행본)안동문화원,『안동군지정문화재편람』,영남사,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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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 권행(權幸)의 묘
안동부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천등산(天燈山)이라는 산 속의 감좌이향(坎坐离向) 의 언덕에 실로 고려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 권공(權公)의 관(冠)과 신발이 묻혀 있다.
공의 이름은 행(幸)이다. 본래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신라말엽 공이 고창군(古昌郡)을 맡고 있다가 지리적인 이유로 고려조에 투항하여 권씨 성을 하사받았다. 성이 김(金)에서 권(權)으로 된 것이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후 자손이 더욱 번성하여 고려조는 물론이고 본조에서도 벼슬한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이름난 가문과 번성한 문벌을 꼽을 때에 반드시 권씨를 으뜸으로 쳤으니 그 역시 성대한 일이다.
처음 공을 장사 지낼 때 묘도(墓道)에 글을 새기지 않아 세대가 멀어질수록 묘역이 인멸되어 어느 곳이 무덤인지 아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성화(成化) 연간(1465~1487)에 공의 18대손인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이에 지극히 뜻을 두어 무덤 자리를 찾고 지석(誌石)을 찾아냈으며 무덤 주위에 나무를 더 심었다. 옹이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그곳 언덕에 묻혀 묘역을 수호하겠다고 유언을 남겼으니, 바로 묘의 남쪽 두번째 무덤이 그것이다.
옹의 아들 유작(裕綽) 등이 옹의 뜻을 받들어 비석을 세우고 표지로 삼았다. 용재(慵齋) 이공(李公) 종준(宗準)이 음기(陰記)를 썼다.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 21) 공의 원손(遠孫)인 현 관찰사 군 극지(克智)가 절도사로서 임무를 띠고 남쪽 지방을 안정시킨 후 순력(巡歷)하던 차 이곳에 들러 성묘하고 이 지방에 사는 종인(宗人)들을 모아 제사지냈다. 제사를 지내고 묘를 손질할 때 일꾼들이 비석을 잘못 건드려 넘어뜨리는 바람에 비석이 깨졌다.
관찰사가 곧 종인들과 상의하여 비석돌을 사서 다시 새기고 좋은 날을 잡아 나무를 다시 심었다. 나 성룡(成龍)도 공의 외손인지라 그 일을 기록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내가 그윽이 생각해 보건대 공의 훈업(勳業)은 사책(史策)에 실려 있고 후손은 보첩(譜牒)을 갖추어 두었고 혜택은 한 나라에 미쳤으니 다시 번거롭게 기록할 필요가 없을 듯하였다.
이에 삼가 비석을 세우게 된 전말만 대략 갖추어 후인들이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보첩을 살펴본즉 공을 태사(太師)로 일컫고 있으나 옛 비석에는 실려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심쩍어서 감히 보태 말하지 않았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전(前) 예조판서 유성룡(柳成龍)이 삼가 쓰다. 22세손 권오(權晤)가 글씨를 썼다. 황명(皇明) 만력(萬曆) 16년(1588, 선조 21) 윤6월 3일에 세우다.
국역 : 정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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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太師權公墓表 - 柳成龍
安東府西十里而遠。有山曰天燈。其中坎坐离向之原。實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權公冠履所藏也。公諱幸。本新羅宗姓。羅末。公守古昌郡。以地迎麗祖有功。得賜姓權。金之爲權。自公始。其後子孫益大以蕃。歷麗以及我朝。冠冕不絶。世之數名宗巨閥。必以權氏爲首。其亦盛矣。始公旣葬。墓道闕顯刻。世道愈遠。兆域湮廢。無有知其處者。成化間。公十八代孫平昌郡守雍。乃極意求尋於墓傍。獲誌石。就加封樹。臨歿遺命。自祔葬其原。爲守護計。卽墓南第三塚是也。而雍之子裕,綽等。承雍之志。立石而標之。慵齋李公宗準識其陰。萬曆戊子。公遠孫今觀察使君克智。以㫌節鎭南服。巡到于此。展省松檟。合宗人之在一境者以祭之。旣卒事。役隷誤觸石仆地而壞。觀察使卽與宗人謀買石鐫治。將涓吉改樹。以成龍亦係公外派。屬記其事。余竊謂公之勳業載史策。嗣息具譜牒。惠澤在邦人。無容更贅。謹略具立石顚末。俾來者有考焉。按譜稱公爲大師。而舊刻無載。疑不敢加云。
資憲大夫前禮曹判書柳成龍謹識二十二世孫權晤書。
皇明萬曆十六年閏六月初三日建。 <끝>
서애집 > 西厓先生文集卷之十九 / 碑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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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權公神道碑銘 幷序 - 權諰
公諱幸。本金氏。與新羅同姓。羅季與金宣平,張貞弼。守古昌郡。甄萱入羅。君弑國覆。高麗太祖赴救之。屯郡北甁山栅。與萱相持。公與金,張二人謀曰。吾輩義不與萱共戴天。顧力不能報。盍投王公。共滅此賊。遂以郡佐麗祖。有甁山之捷。義聲大振。麗祖喜曰。金幸炳幾達權。可謂能權矣。乃賜姓權。拜大相。陞郡爲安東府。封食邑。位至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卒葬于府西天燈山造火谷坎坐之原。子仁幸。官郞中。生子冊。冊求爲本府吏。數世爲戶長將校。初豪傑割據郡縣。麗祖旣統合。使仍守其地。長民者稱戶長。統兵者稱將校。遣王官監之。此外吏之始也。其後子孫益大以蕃。珪組蟬聯。奕世相望。廟于府以祀公。金公張公。亦與焉。權氏世主祀事。廟有玉笙,玉貫子,朝衣服,金帶,象笏,銀鉢,匙箸,漆杯盂。皆我太師公所服用之物。今七百餘年。世傳之手澤猶宛然。成化間。十八世孫平昌郡守雍。盡誠求之。得誌石於墓傍。爲加封樹。其遺命祔葬同原。雍之子裕,綽等。立碣以表之。萬曆戊子。二十二世判書克智。觀察嶺南。合宗人祭之。墓碣之仆者。買石新之。嘉靖壬寅。外裔金光轍爲府使。卽其廟。闢而新之。二十一世領議政轍爲觀察使。寘祭田守戶。丙辰。府使紹增其田。給穀百石。俾首吏姓權者掌之。以供粢盛。又治兆域而歲一祭之。癸亥。府使應挺。碑于廟。萬曆癸丑。二十四世吉川君盼觀察。重修廟宇。祭春秋以中丁。今癸巳。觀察使堣創齋舍墓下。僦人戶守之。己亥。榮川郡守聖源。禮祠展墓。慨然曰。子孫雖多。向非昌平公。孰知太師墓之在斯。神道早有銘者。何挈蕝之艱。以吾太師公而尙闕顯刻。茲非吾宗人之責乎。盍圖之。僉曰。諾。凡後裔之遠近貴賤咸響臻。卽斲石。府使李侯?卽外裔。幹其事。聖源及宗人屬諰記其事。噫。我始祖當羅,麗之際。大義較著。功烈卓然。赫赫在人耳目。名與天壤相敞。而前後爲方伯太守。非姓孫則外裔也。皆盡力于廟祀。若丘墓刱之修之。苗裔之在茲土者。典錢穀奉俎豆不絶。今又立石墓隧。使千萬世後。皆知爲太師公之墓。亦可見積德之盛也。原上之墓第一太師。第二平昌。第三則或稱平昌夫人之葬云。其下西崖柳相公成龍先墓在焉。亦外裔也。遂爲之銘曰。
量力達節。讎報恥雪。仁拯斯民。慶衍後人。麗祖賜姓。陞封錫號。丕視功載。靡德不報。有翼其廟。祀事孔明。手澤傳寶。金帶玉笙。誰其尸之。府中後裔。謹守迭掌。罔墜厥緖。有田有穀。有齋有碣。諸公相繼。刱修罔缺。載樹顯刻。亦與有光。其永有考。余言匪哤。序文中玉貫子,朝衣服,象笏,銀鉢匙著。永嘉志云。恭愍王駐本府時所賜。因草記有此誤錄。 <끝>
[주01] 著 : 箸
탄옹집 > 炭翁先生集卷之十二 / 墓碣銘。
↑안동 권씨 시조 태사 권행 선생 묘 / 소재지 : 경북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안동권씨 시조 태사 권행 묘표.(安東權氏 始祖 太師 權幸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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