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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서 묘표(協川 李胤緖 墓表/謚狀/神道碑銘)

야촌(1) 2009. 4. 21. 23:26

■ 증 찬성 합천이공 묘표(贈 贊成 協川李公 墓表)

    이윤서『李胤緖, 1574년(선조 7) ~ 1624년(인조 2)』



미수(眉叟). 허목(許穆) 찬(撰)

옛날에 이알평(李謁平)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신라초기에 여러부족의 한 대인(大人, 6부의 관장을 말함)으로서 성(姓)을 얻어 비로소 커져, 그 자손에 현달한 자가 많았다.

고려에 이르러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이경분(李景芬)이 강양(江陽 : 합천의 옛 이름) 땅을 식읍(食邑)으로 봉작 받아 드디어 대대로 강양사람이 되었고, 우리 중종 때 절도사 이윤검(李允儉)이 있었는데, 그 아들 이희증(李希曾)이 홍문관 수찬이 되었고, 그 뒤 연달아 2대(代)는 현달하지 못하고 공에 이르렀다.

공은 휘(諱)가 윤서(胤緖)요, 자(字)는 선승(善承)이다. 개연(慨然)히 학문에 뜻을 세우고 글을 배워 과거 공부를 하였는데, 우리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나라에서 무과(武科)를 설치하여 무예(武藝)에 특출한 재주가 있는 사람을 많이 뽑게 되었다.

공은 글 공부를 그만두고, 활쏘기를 익혀 단번에 합격을 하였다. 그러나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사졸 틈에서 고생하다가 선조(宣祖) 33년에 천거한 사람이 있어 처음으로 선전관(宣傳官)을 제수받았으나,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그만두었다.

5년 뒤에 다시 복직하여 4년 만에 청하현감(淸河縣監)이 되었는데, 잘 다스린 공효가 있어 상(上)이 표리(表裡, 옷감)를 상으로 하사했다. 만력(萬曆 : 명나라 신종 연호) 말년에 요동(遼東)이 패하자 우리 변방에 말썽이 많아져 성진(城津)에 방수(防戍)를 두었다.

공이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는데, 유능하다 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했고, 함흥 별장(咸興別將)으로 옮겨 공로가 있으므로, 직급이 종2품에 올라 구성(龜城)의 원으로 전임했다.

이때 명(明) 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용천(龍川)을 지켰는데, 그의 장졸들이 우리 수장(守長)을 깔보아 형편없는 짓을 많이 했으나, 공을 보자 머리가 땅에 닿게 절하면서 ‘공은 큰 인물이다.’ 하고, 서로 조심하여 다시는 경내에 들어와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도독(都督)을 추격하는 흑한(黑漢)의 군사가 갑자기 온다는 말을 듣고 누군가가 병란을 피할 계책을 말하자, 공이, “외구(外寇)가 쳐들어오는데, 도망간다면 어찌 장수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임기가 차자 백성들이 1년 더 머물기를 바라므로 이듬해에야 들어와 위장(衛將)이 되었다.

인조(仁祖) 원년에 이괄(李适)이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영변(寧邊)을 지키러 나갔는데, 공이 어질어 임용(任用)할 만함을 알고 상에게 천거하여 중군(中軍)을 삼았으나, 공은 이괄이 횡포하며 불손함이 많음을 보고, 마음속으로 근심했다.

이듬해 봄에 이괄이 과연 거병하여 반역하자, 공이 은밀히 초관(哨官) 왕유영(王有榮)에게, “네가 거느리고 있는 병사를 데리고 원수부(元帥府)에 나아가 여러 장수를 만나보고, 나의 편지를 전하되, 나의 말이 ‘마땅히 목숨 바쳐 전하께 보답하겠다.’고 하더라 하라.” 하고, 첩과 두 자녀를 은밀히 보낸 뒤에 별장(別將) 유순무(柳舜懋)와 모사하여 장중(帳中)에 나아가 여러 번 이괄을 베려고 칼을 들고 일어나려 했으나 적당한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이괄이 순천(順川)까지 마구 몰려오자, 공이 유순무에게, “답답하게도 계책을 이룰 수 없으니, 죽어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군사를 헤치고 바로 나가 원수부에 가서, 먼저 자살하여 여러 장사(壯士)들에게 보여 한이나 남지 않게 하고자 한다.” 하고, 드디어 그와 언약하고 납서(蠟書)로써 먼저 원수에게 알렸다.

자산(慈山)에 이르러 밤에 유순무(柳舜懋), 이신(李愼), 이탁(李) 등과 함께 포를 쏘아 호응하니, 사방 군영이 일시에 요란해져 뿔뿔이 흩어졌다. 공이 곧 달려 나가니 따르는 사졸이 3천 명이었다. 원수(元帥)를 보고 분개하여 말하기를, “내가 장수로 역적 속에 있으면서, 역적을 베지 못하고 역적이 마구 달려오게 하였으니, 내 무슨 낯으로 세상에  서겠는가.” 하고, 자기의 종에게 부탁하여 집에 가서 가족에게 이르기를, “내 오늘 죽음을 결행하겠으니, 이 일을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당에 고하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목을 찔러 죽으니, 온 군중(軍中)이 모두 그를 훌륭하게 여겨 눈물을 흘렸다.

상(上)이 이 사실을 듣고 ‘열장부(烈丈夫)의 지조이다.’ 하여 형조 판서를 추증하고, 사제(賜祭)하여 그 충성을 포상하였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첫머리에 녹공(錄功)하여 우찬성(右贊成)을 가증하였다. 공은 몸이 장대하여 풍채가 있었으며, 남을 잘 포용하므로 남들이 그의 감정 변화를 잘 알 수가 없었다.

큰 난리를 당하여 그 마음을 변치 않고, 몸을 죽여 절의(節義)를 나타냈으니, 아, 훌륭하도다.정경부인(貞敬夫人) 전씨(全氏)는 본관이 전주로, 고(故) 찰방(察訪) 전우(全雨)의 딸이다. 자식이 없어 족자(族子) 이형원(李亨源)을 후사로 삼았고, 서출(庶出) 자녀 둘이 있었는데, 아들은 이거원(李巨源)이다.

팔계군(八溪郡) 북쪽 오세(吳世) 마을에 충신총(忠臣塚)이 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이귀성(李龜城)의 묘’라 한다. 내가 신라 충의전(新羅忠義傳)을 읽어 보니, “선덕왕(善德王) 시절에 백제가 군사를 일으키자 대야성주(大野城主) 품석(品釋)이 궁지에 몰려 항복하려 하였다.

그러자 죽죽(竹竹)이 ‘백제는 신의가 없는 나라이니 힘껏 싸우다 죽는 게 낫다.’ 하였으나, 품석이 듣지 않고 먼저 그 군사를 내보냈는데, 과연 복병이 있어 몹시 급하게 저격하자 품석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죽죽은 ‘우리 아버지가 내 이름을 죽죽이라 하였으니, 이는 나를 가르치신 것이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욕된 일이 없게 하겠다.’ 하고 더욱 굳게 성을 막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어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어질게 여겼고, 지금까지 그 마을 이름을 죽죽이라 한다.” 했다.

이분이 또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했을 때, 중군으로서 장수들을 불러 약속하고 밤에 모든 영병이 모두 흩어지게 했으며, 자신은 3천 기병을 이끌고 달려 나가 원수(元帥)를 보고 스스로 말하기를, ‘적을 베지 못했으니 전하께 아뢸 면목이 없다.’ 하고 자살하였으니, 얼마나 장렬한 일인가.

또 10여 년 뒤 남한산성에서 패하였을 때, 정 문간공(鄭文簡公 정온(鄭蘊))이 순절(殉節)한 일이 있었는데, 모두 근방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5, 60리였다고 한다.

미수기언 >기언 별집(記言別集) 제22권 >구묘문(丘墓文) >

 

[註解]

 

[주-01] 납서(蠟書)비밀의 누설과 습기로 인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문서를 밀랍(蜜蠟)으로 싸서 봉하여 넣

              는 것을 말한다.

[주02]제부(諸部)의 …… 얻어 : 신라는 서기 32년(유리왕9)에 그 이전의 육촌(六村)을 육부(六部) 체제로 정비하

            여 그 이름을 바꾸고 각 부에 성씨를 하사하였는데,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을 양부(梁部)로 바꾸고 이씨

           (李氏) 성(姓)을 사하였다.


[주03]강양(江陽) : 경상도 합천의 옛 이름이다.

[주04]어머니의 초상을 당하여 : 한국문집총간 96집에 수록된 《백헌집(白軒集)》 권43의 〈구성부사 증 우찬성

           이공 신도비명(龜城府使贈右贊成李公神道碑銘)〉과 한국문집총간 234집에 수록된 《간옹문집(艮翁文

          集》 권17의 〈증 숭정부 의정부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 행 가선대부 구성도호부사 이공 시장(贈崇政大夫

          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行嘉善大夫龜城都護府使李公諡狀)〉에는 조모상(祖母喪)을 당한 것으로

          나온다.


[주05]표리(表裏) : 옷감의 겉감과 안감이다. 옷을 한 벌 지을 수 있는 옷감을 말한다.

[주06]흑한(黑漢)의 군사 : 청나라 군사를 말한다.


[주07]납서(蠟書) : 밀랍(蜜蠟)으로 싸서 봉한 편지를 말한다.


[주08]팔계군(八溪郡) 북쪽 오세향(吳世鄕) : 한국문집총간 234집에 수록된 《간옹집(艮翁集)》 권17의 〈증 숭

            정대부 의정부우찬성 겸 판의금부사 행 가선대부 구성도호부사 이공 시장(贈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判

           義禁府事行嘉善大龜城都護府使李公諡狀)〉에는 ‘오세향’이 ‘오서촌(烏棲村)’으로 나온다. 팔계군은

          초계군(草溪郡)이다.


[주09]우리 …… 것이다 :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말고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東

           史綱目第3下壬寅 八月》


[주10]정 문간공(鄭文簡公)의 일 : 1637년(인조15) 1월 무진일에 당시 69세이던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우리나

            라가 청(淸)나라에 항복하는 것에 분개하여 할복 자결을 시도한 일을 말한다. 《桐溪集 文簡公桐溪先生年

            譜, 韓國文集叢75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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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贊成李公墓表 - 許穆



先古有李謁平者。新羅初。以諸部大人得姓始大。其子孫多顯者。至高麗有尙書左僕射景芬。封食邑江陽之地。其世遂爲江陽人。及我恭僖世。有節度使允儉。其子希曾。爲弘文館修撰。其後連二世不達至公。公諱胤緖。字善承。慨然有自立之志。學讀書。爲擧子業。東方大亂。國家設武科。多取奇才武藝。公卽棄其業。執弓矢一射而決。然不甚知名。困於列士。我昭敬王三十三年。有薦之者。初授宣傳官。以母憂去。後五年。復爲之。四年。爲淸河縣監。有治理效。上賜表裏以償之。萬曆末。遼左陷敗。我邊境多事。北邊爲置防戍於城津。公爲僉節制使。以能。陞折衝將軍。遷咸興別將。又有功能。增秩從二品。移守龜城。時明將毛文龍鎭龍川。其將卒折辱我守長多無狀。及見公。叩頭拜曰。公大人。相戒飭。更不侵擾。入府境。聞黑漢追都督兵猝至。或言避兵計。公曰。寇至而去。惡在其爲將也。終不動。及苽。百姓借留一年。明年。入爲衛將。我仁祖元年。李适爲副元帥。出鎭寧邊。知公賢可任屬。薦於上。以爲中軍。公見适驕橫多不遜。心憂之。明年春。适果擧兵叛。公私謂哨官王有榮曰。若以所領兵赴元帥府。見諸將傳我書道我言。當以死報殿下。私遣其妾與二女子。與別將柳舜懋謀。卽帳中斬适。持劍欲起者數。不得其當。适長驅至順川。公謂舜懋曰。鬱鬱計無所遂。吾死晩矣。欲潰軍直出。至元帥府。先自殺以示諸將士無恨也。遂與之決。約以蠟書先報元帥。至慈山。夜與柳舜懋,李愼,李等發砲應之。四營一時擾亂散歸。公卽馳出。士卒從者三千人。見元帥慷慨言曰。我爲將在賊中。旣不能斬賊。使賊長驅。吾何面目立於世也。屬其奴。歸告其家人曰。吾乃今日決死。以此告先人之廟。遂自刎死之。一軍賢之。皆涕泣。事聞。上曰。烈丈夫之志也。追爵刑曹判書。賜祭以褒其忠。錄其功原從之首。加贈右贊成。公長大有風儀。善容人。人不見其喜怒。臨大亂。能不變其心。殺身以見其節義。於乎韙矣。貞敬夫人全氏。籍全州。故察訪雨之女。無子。以族子亨源爲後。有庶出子女二人。子曰巨源。八溪郡北吳世鄕。有忠臣塚。卿人謂之李龜城墓云。余嘗讀新羅忠義傳。善德中。有百濟之師。大野城主品釋。窮迫約降。竹竹曰。百濟無信之國。不如力鬪而死。品釋不聽。先出其士卒。果有伏甲。狙擊甚急。品釋自刎死。竹竹曰。父名我曰竹竹。此敎我也。寧死無辱。拒守益堅。城陷死之。國人賢之。至今名其鄕曰
竹竹。又斯人者。方李适擧兵叛。以中軍。召諸將約束。夜令諸營兵皆潰亂。身以三千騎。馳出見元帥。自言不斬賊。無面目報殿下。自殺死之。何其烈也。其後十有餘年。南漢之敗。有鄭文簡公事。皆傍邑人地之相近。且六十五十里云。

 

記言別集卷之二十二 / 丘墓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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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行嘉善大夫龜城都護府使李公謚狀 - 李獻慶

 

李君東璧來自嶺之南。蹐李獻慶之門。跽而請曰。吾祖贈贊成公節死于适變時。國典曰死節人。雖職卑贈謚。况吾祖職亦不爲卑乎。將請節惠之典於朝。敢以狀德之文煩執事。幸執事賜之一言。以備太常採焉。獻慶取考其家錄事蹟。作而歎曰。烈哉。乃祖死節事。應謚法乎。唐之靑巖處士甄濟爲祿山從事。及祿山叛形兆。托以風瘖。歸隱其家。祿山疑其實不病。使人齎劒脅之。濟引頸承刃。其後慶緖又脅致之東都。終不屈。亂平唐帝賢以舘之。使受僞爵者羅拜以愧之。至今赫赫在竹帛間。乃祖初以朝命爲逆适中軍。及适叛。欲斬适不得便。卒自刎以明心。其事與濟略同。而自刎也又不翅引頸承刃。豈不卓卓乎尤難哉。濟之賢。遇史筆如韓昌黎。得以暴天下後世。而公不遇昌黎。欲使僕訥於辭而兼又年衰筆退者狀之。奈公賢何。東璧又進而請益懇曰。毋庸辭也。昌黎亦嘗哀甄逢之志而許之。豈執事待僕不如逢哉。獻慶不得辭。乃叙其言行顚末及世系子孫而狀之曰。公諱胤緖字善承。始祖諱景芬。爲高麗尙書左僕射。食采江陽。遂爲江陽之李。及我恭僖世。有節度使允儉。其子希曾文科修撰。修撰之子彭年,孫天受。皆隱德不仕。天受娶衿川金氏煕胤之女。以萬曆甲戌生公。兒時屹然有大志。才勇出倫。及長治擧子業。文藝日進。甲午國家以邊聳大設武科。取奇才異能。公棄所業。持弓矢一射而决然。不甚知名。困於列士。庚子始除宣傳官兼備局郞。以祖母憂去。乙巳復除宣傳官。出爲淸河縣監。有治理效。上賜表裏以賞之。萬曆末遼左陷敗。我邊境多事。刱設城津鎭於關北。公爲僉使。以能陞折衝。賜書褒嘉。秩滿改咸興別將。以繕兵之暇。起冶鑄充軍須。以省飛輓之費。以功增秩從二品。又賜書褒嘉。移授龜城府使。時天將毛又龍鎭龍川。其將卒橫暴甚。侵害吏民。折辱守宰。多無狀。及見公叩頭拜曰。公大人。相告戒不敢撓其境。聞虜騎追毛帥猝至。或勸之避。公曰寇至而去。惡在其爲將也。終不動。朴燁爲按使。虎而冠者凌轢長吏特甚。獨稱公以長者。不敢慢易待之。及瓜百姓借留一年。明年入爲衛將。時都元帥張晩鎭平壤。逆适以副帥開府寧邊。适知公賢。請於上以爲中軍。公見适驕橫多不遜。心憂之。甲子春适殺金吾郞。脅戍卒叛。公方卧病聞變大憤。不食欲死。勺水不入口。人或强勸則張目叱曰爾等欲使我生還鄕里。何面目拜先廟見父兄長老乎。立呼哨官王有榮。謂曰我將死矣。汝以所領兵。從間道先歸平壤。見張元帥傳吾書。其書以三條計。矢之曰不死將有爲也。某日當斬适以獻。此一計也。不然曉以逆順。使賊衆潰散。賊勢孤則适可擒也。此又一計也。以劒自决死。以明此心之不從賊。又一計也。三者終必有一當。公其知之。仍遣妾及二女隨往。語其妾曰張元帥若疑我受汚而不納。汝死於大同門外。二女寄托於帥府別將南以興,朴震英可也。王有榮至帥府發書。帥見而賢之。卽開門納其家眷。並公書馳啓于朝。公在賊中。謀卽帳斬适。手劒欲起者屢。适亦自疑。以降倭數百。防衛甚盛。公不得發。适至順川。公謂別將柳舜懋曰吾計莫遂。吾死已晩。吾將潰軍往投張元帥以死。無令賊刃汚我頸也。至慈山。與舜懋及李愼,李?等約曰。聞砲而散。夜三皷。公先發砲。四營齊應。公卽上馬馳去。士卒從之者五千餘人。往見張元帥。帥下床接之。公執其手痛哭曰。我爲將。旣不能斬賊。使賊長驅。遺君父憂。何面目立於世也。吾在賊中已六日。吾不死。何以白吾心耶。屬其奴歸告家人曰。吾乃今日决死。以此告先人之廟。遂自剄死之。一軍壯而義之。無不感動出涕者。事聞上嘉歎曰烈丈夫之志也。追爵刑曹判書。賜祭以褒其忠。錄其功原從之首。後加贈議政府右贊成。㫌其閭曰忠臣之門。從潛谷金相公,延陽李相公之議也。公之逸歸元帥府也。賊衆太半潰散。餘存僅數千。适知衆心皆離。勢不可緩。日行數百里。徑趍京城。至鞍峴而敗。當時議者謂公之首倡大義。潰散賊衆。使賊膽破。功不在鞍峴諸將之下。不錄正勳可惜云。公長大有威儀。器度恢弘。善容人過。人不見其喜怒。善飮酒。不拘細節。忘身殉國。視死如歸。素所蓄積者然也。噫。公在其時。先爲密札。約日矢言於元帥。又以妾女爲質。其跡無可疑。其心亦足自暴。而以六日隱忍。未得其當爲深耻。終必自剄而後已。豈不以其重如彼。其輕如此哉。文忠公李景奭銘其碑曰衣不金紫。節則常山。葢比之顔常山之節。而公初不衣祿山金紫。爲尤高云爾。文正公許穆作墓表。亦比之新羅義士竹竹之死。鄭桐溪南漢之事。竹竹,桐溪皆公傍郡人。故並稱之也。公墓在八溪郡北烏棲村。鄕人至今稱爲忠臣塚云。公配曰完山全氏。察訪雨之女。視公爵封貞敬夫人。無子。子同宗弟瑛之子亨源。是生又新。又新有三子昌祉,昌禧,昌祐。昌祉武科五衛將。玄孫以下不盡錄。東璧。昌禧之曾孫也。獻慶雖不嫺於文。感公節義皦然有不可湮沒者。故忘其固陋。謹摭先輩記述。敢告有司。請所以易其名者。

 

간옹집 > 艮翁先生文集卷之十七 / 謚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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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城府使贈右贊成李公神道碑銘 - 李景奭

 

甲子賊适之叛也未半途。有散其卒五千餘人。大挫賊勢。挺出而自刎死。義烈卓絶者。曰草溪李公。公諱胤緖。字善承。以萬曆甲戌生。幼時屹然有大志。才勇冠倫。長而學書力科業。文日益進。甲午。國家大取武。公乃投筆登虎榜。搶攘之際。混跡偏裨。庚子。始拜宣傳官兼備局郞。蓋武弁之選也。無何。以祖母憂去。乙巳。復爲宣傳官。己酉。監淸河縣。政最。賜表裏一襲。壬子。坐微事罷。戊子。朝廷有北顧憂。設巨防於城津。公膺簡爲僉使。凡固圉之務。甲列鎭。特加折衝階。賜璽書褒之。官滿。遷別將於咸興。勵兵之餘。爲冶鐵備軍實。大省蜚輓。庚申。用有勩進階嘉善。爲龜城府使。是時。天將毛文龍軍龍川。師律不肅。村野騷然。邑宰多被僇辱。將校之橫者。至龜城則相與禮而尊之。不敢陵。蓋服其政令嚴明也。公爲左營將。忽報敵騎迫隣境。爲追毛兵也。左右勸公遣衙眷。入山以避。公正色曰。長民將兵而先動可乎。終不動。敵亦尋退。人以是益義之。朴燁按關西。轢蹙諸長吏甚。獨稱公爲長者而重之。其見敬於人類此。用民願歲滿又留一年。癸亥。歸拜衛將。秋賊适開府寧邊也。請以公爲中軍。公在幕府。見其驕恣。常忽忽不樂。及适反驅戍卒而行。公腸裂髮豎。口絶穀粒。密爲書授哨官王有榮。使將所部從間道投元帥府。傳告死報之意。其妾及二女子。亦遣于帥府。與別將柳舜懋謀斬适。而旣未得其隙。則乃謂舜懋曰。吾計不諧。不忍苟活。吾將潰軍。出奔元帥以死。誓不爲賊刃汚也。遂相與結約。先馳蠟書于帥府。別將朴震英及到慈山。與李愼,李?等放砲齊散四營卒從之。賊氣死。公見元帥張公晩而大哭曰。吾不能斬逆豎。致令長驅。何面立於天地間乎。乃令其奴歸報宗長曰。吾今得死所矣。可以此告先廟。卽自刎其頸而死。一軍皆聳。遠近聞者。莫不壯之。朝廷嘉其忠。特贈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義禁府事。遣禮官賜祭。已而錄振武從勳一等。於是。加贈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公首倡大義。使賊膽破。功不在鞍峴諸將下。而未策正勳。公議惜之。公自先世家草溪。是年冬。葬于郡北吾世村面巳之原。從先兆也。公長身偉貌。風儀秀出。氣度恢豁。善飮酒。不拘細節。由由然處群不爭。量足以容人。材足以禦衆。居家莅職。喜怒不色。而當大事。毅然有不可奪之志。平日素所畜有如此者。故臨危效節。視死如歸。向使公雖不自頸。其忠義亦足以暴於天下。自以初不卽決者。欲將以有爲也。而六日隱忍。未得其當。縱決江河之水。難雪其羞辱。鴻毛泰山。乃決於一刎。不亦爲烈丈夫乎。人有爲公抗疏。請加哀贈之典。優批奬之。今上朝辛卯。其子亨源拜章乞旌表。禮部覆啓而揚其美。命詢大臣。大臣以爲可。上寵異之。乃表其家曰忠臣李某之門。於是乎榮耀極矣。李氏望著江陽。金紫光祿大夫尙書左僕射景分。寔爲鼻祖。僕射之後版圖判書云皓。聲名大彰徹。數世而有諱允儉。武科同知中樞府事。三爲閫帥。名載己卯名賢錄中。同知公生諱希曾。弱冠。擢第盛玉堂。爲修撰。早世。修撰生諱彭年。不仕而卒。卽公之三世也。考諱天受。隱而不出。人高其行義。自號介石亭。妣衿川金氏。煕胤之女。公配曰完山全氏。察訪雨之女。濯溪致遠之孫。視公爵封貞夫人。初察訪公擇壻。得公喜曰。得此佳壻。吾寢安矣。無子。子同宗弟瑛之子。卽亨源也。側出女二。亨源娶士人呂燦之女。生男女各一。側出長女爲判官尹佐辟之妾。夭歿。季爲縣令金坰之妾。亨源自南來。因友人請銘。以狀抵奭。奭固樂道人之善。而公私紛宂。未副者蓋積有年所。今又來留滯數月。其誠亦足以動人。旣爲之敍。而係之以銘曰。

當死不死。生孰與齒。死得其死。死亦不死。烈烈惟公。死而後已。衣不金紫。節則常山。百世聞風。可以立頑。<끝>

 

백헌집 > 白軒先生集卷之四十三○文稿 / 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