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관찰사 이윤인의 조선왕조실록 기록물.

야촌(1) 2008. 9. 30. 20:43

관찰사 이윤인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자료

 

1. 단종 11권,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6월 10일(신묘) 2번째기사

    지사 이정랑 조원희가 호조 정방이 난신의 가재를 사용한 일로 대죄하게 할 것을 아뢰다

 

 지사(知事) 이휘(李徽)와 정랑(正郞) 조원희(趙元禧)가 아뢰기를, “요새 호조낭리(戶曹郞吏)가 난신(亂臣)의 가재(家財)로 주찬(酒饌)을 베풀었는데, 신(臣) 등은 우연히 공사(公事)로 인하여 가서 참여하였습니다. 

 

비록 물건의 출처를 알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청컨대 대죄(待罪)하게 하소서.” 하였고, 이조정랑(吏曹正郞) 최사로(崔士老) ·홍연(洪演) ·조근(趙墐) ·좌랑(佐郞) 이윤인(李尹仁)·김덕원(金德源)도 또한 아뢰기를, “지난 3월 그믐날, 신 등이 장난삼아 송춘시(送春詩)를 지어 호조에 보냈더니 호조 낭리가 소작(小酌)을 베풀고 청하므로, 신 등이 파사(罷仕)한 뒤에 지나다가 들려서 참여했습니다. 청컨대 대죄(待罪)하게 하소서.”

 

하였고, 집의(執義) 이언(李堰, 興陽人)도 또한 아뢰기를,  전일에 공물(貢物)을 상정(詳定)하는 일로 호조에 나갔더니, 본조(本曹)에서 소작(小酌)을 베풀었으므로 신이 참석하였습니다. 청컨대 대죄(待罪)하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2. 단종 12권,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8월 9일(무자) 3번째기사,

    권우 등의 일로 이로부터 먼저 계문한 뒤에 정조의 비위를 핵문하게 하다

 

처음에 정주목사(定州牧使) 권우(權虞)를 옮겨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삼고, 권숭지(權崇智)를 정주목사로, 송복산(宋福山)을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삼아 낙점(落點)2640)하여 내려보내니, 이조낭관(吏曹郞官)들이 회의(會議)하고 문선사 정랑(文選司正郞) 홍연(洪演)에게 이르기를, “지금 대목(大牧)2641)에 임명된 자들은 대개 명류(名流)도 아니고 인망(人望)에도 바람직하지 못한데, 그대는 어찌하여 종용(從容)히 진백(陳白)하지 아니하는가?”

 

하니 홍연 이 곧 당상(堂上)에 고(告)하였으나, 그 언사(言辭)가 무례(無禮)하여, 당상이 이를 듣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임명장[批]이 내려지자 물론(物論) 말들이 자자(藉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헌부에서 이조(吏曹)의 당해(當該) 아전(衙前)을 불러 권우 등이 이임(移任)한 이유를 묻고, 또 김질(金礩)등이 품계(品階)를 뛰어 벼슬을 제수받은 까닭을 묻고, 인하여 홍연과좌랑(佐郞) 이윤인(李尹仁)·판서(判書) 정창손(鄭昌孫) ·참판(參判) 최항(崔恒) ·참의(參議) 어효첨(魚孝瞻) 등을 핵문(劾問)하였다. 세조(世祖)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헌부(憲府)에서 묻는 바는 족히 대답 할 만한 것이 못된다.” 하니 홍연 등이 마침내 대답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다시 물으니, 세조 가 아뢰기를, “대소 조관(朝官)의 주의(注擬)는 모두 교지를 받아 시행하고 지극히 비밀로 하여, 외인(外人)이 미리 알아서는 아니됩니다. 지금 헌부(憲府)와 간원(諫院)에서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영사(令史)를 불러 제수한 사유(事由)를 묻고 초사(招辭)까지 받는 데 이르렀습니다.

 

비록 당상 낭관(堂上郞官)이더라도 먼저 계문(啓聞)하지 않고 마음대로 핵문(劾問)하는 것은 세종(世宗)의 삼가고 치밀한 뜻[謹密之意]에 어긋남이 있으니, 청컨대 이제부터 만약 잘못 제수(除授)하는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법사(法司)에서 교지를 받은 연후에야 비로소 핵문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로부터 먼저 계문한 뒤에야 정조(政曹)의 비위(非違)를 핵문하게 되었다.

 

3. 세조 19권, 6년(1460 경진 / 명 천순(天順) 4년) 1월 12일(경인) 2번째기사

    경기우도 찰방 이윤인을 파직하다. 명하여 경기우도 찰방(京畿右道察訪) 이윤인(李尹仁)을 파직(罷職)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 구치관(具致寬)이 일찍이 임금 앞에서 이윤인 이 현능(賢能)하다고 포상(褒賞)하였는데, 얼마 아니되어 병조판서(兵曹判書) 한명회(韓明澮)가 황해도에 와서 이윤인 이 잔열(孱劣)하다고 말하였으므로, 드디어 그 직을 파면하였다.

 

4. 세조 19권, 6년(1460 경진 / 명 천순(天順) 4년) 1월 19일(정유) 2번째기사

    이윤인을 다른 관직에 서용하다. 경기우도(京畿右道)의 역리(驛吏)등이 상언(上言)하기를, 빌건대이윤인(李尹仁)의 관직을 그대로 두소서.” 하니, 명하여 이조(吏曹)에 내렸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임기[考]가 이미 찼으므로 다시 임용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다른 관직에 별도로 서용(敍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 세조 24권, 7년(1461 신사 / 명 천순(天順) 5년) 5월 20일(기미) 2번째기사

    조효문· 김순· 이교연· 이효장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효문(曹孝門)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김순(金淳)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이교연(李皎然) · 이효장(李孝長) · 황석생(黃石生)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정식(鄭軾)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함우치(咸禹治)를 중추원 부사·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이효성(李孝誠)을 중추원 부사· 경상우도 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로, 송처관(宋處寬)을 행 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로, 이시애(李施愛)를 첨지중추원사로, 노숙동(盧叔仝)을 행 첨지중추원사· 경상도관찰사로, 강효문(康孝文)을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이윤손(李允孫)을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김계손(金繼孫)을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문여량(文汝良)을 행 사헌집의(行司憲執義)로, 이영은(李永垠)을 사헌장령(司憲掌令)으로,이윤인(李尹仁)을 수사헌장령(守司憲掌令)으로,이극균(李克均) · 이영부(李永敷) 를 수 사헌 지평(守司憲持平)으로 삼았다.

 

처음에 행 첨지중추원사 황치신(黃致身)이 함길도에 사는 여자종[婢] 용로(容老)의 소생을 관청에 바치고, 충청도 태안군(泰安郡) 에 사는 공천(公賤) 종[奴] 을충(乙忠)을 바꾸어 가졌는데 도관(都官)으로 부터 입안(立案)을 받은 뒤에 을충과 아우 을생(乙生)을 아울러 사역(使役) 시키고자 하여 입안(立案) 안에 본디는 용로 소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용로 밑에다 급(及)자를 고쳐 쓰고 또 을충 밑에 을생의 이름을 더 써서 넣어 이미 바꾼 노비를 사역하고 있으며, 또 해마다 관청에 바칠 노비(努婢)의 신공(身貢)을 거두어 들였으니, 그 간사하고 속이는 것이 심하였다.

 

을충의 아우 을생(乙生)이 고소하여 일이 발각되자, 황치신 이 먼저 도관(都官)에 가서 그 입안(立案)을 잃어버렸다고 거짓 일컫고서 다시 받기를 청하니, 도관이 사건을 형조(刑曹)에 보내서 사헌부(司憲府)로 전송(轉送)하였다. 사헌부에서 핵실(覈實)하고자 하여 함길도에 이문(移文)하여 그 노비의 역사(役事)하는 곳을 물으니, 회답하기를, ‘본주인 황치신의 집에서 역사하고 있다.’고 하여, 간사한 계책이 다 탄로났다. 

 

사헌부에서 장차 황치신의 죄를 청하려고 하니, 황치신이 이것을 알고 먼저 거짓 꾸미어서 임금에게 상언(上言)하였다. 임금이 이를 믿고, 장령(掌令) 구달충(具達忠)이 아뢰어 청하게 되자, 임금이 ‘사헌부는 일의 형편을 분변(分辨)하지 못하였다.’ 하고, 명하여 모두 좌천(左遷)시키었다.

 

6. 세조 26권, 7년(1461 신사 / 명 천순(天順) 5년) 11월 17일(계축) 1번째기사

    황수신 박원형이 황산곶이에 사람을 옮긴 건에 대해 아뢰다. 좌찬성 황수신(黃守身) ·형조 판서 박원형(朴元亨)이 아뢰기를, 자(前者)에 경차관(敬差官) 복승리(卜承利)를 보내어 진도(珍島)의 사람을 황원곶이[黃原串]에 옮기고, 황원(黃原)의 소· 말을 진도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이제 듣건대, 황원곶이의 땅은 협착한데 진도의 사람은 많아서 만약 다 옮기면 그 땅으로는 능히 수용할 수가 없어, 백성이 반드시 피차(彼此) 생업(生業)을 잃을 것입니다. 청컨대, 다시 일을 아는 사람을 보내어 자세히 형세를 관찰하여 마땅한 데에 따라서 포치(布置)하되, 만일 옮겨 가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들어 주고, 그 하고자 하지 않는 자는 강요하여 생업을 잃는 데에 이르지 말게 하소서.”

 

하니, 전지하기를, “만약 또 사람을 보낸다면 폐단이 있지 않겠느냐?” 하였다. 황수신 등이 다시 아뢰기를, “단기(單騎)로써 가게 하면 무슨 폐단이 있겠습니까?”

 

하니, 곧 명하여 황수신을 전라도 도체찰사(全羅道都體察使)로 삼고, 사복시 소윤(司僕寺小尹)이윤인(李尹仁)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또 복승리 에게 유시하여 사민(徙民)하는 것을 우선 정지하도록 하였다.

 

7. 세조 26권, 7년(1461 신사 / 명 천순(天順) 5년) 11월 25일(신유) 1번째기사,

    우부승지 김겸광을 인견하여 평안도의 일을 하문하다

 

임금이 우부승지(右副承旨) 김겸광(金謙光)을 인견(引見)하여 평안도(平安道)의 일을 묻고, 좌의정 신숙주(申叔舟) · 남양 부원군(南陽府院君) 홍달손(洪達孫) · 양산군(楊山君) 양정(楊汀)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윤성(洪允成) ·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사우(金師禹) 등을 불러서 이를 의논하고, 명하여 신숙주를 평안도 · 황해도 도체찰사로 삼아, 교서(敎書)를 주었는데 그 교서에 이르기를, “경(卿)을 평안도 ·황해도 도체찰사로 삼으니, 양도(兩道)의 관찰사(觀察使)· 절제사(節制使) 이하로 만일에 경의 지휘를 어기는 자가 있거든 경은 마땅히 군법(軍法)대로 종사(從事)하라.” 하였다.

 

홍윤성(洪允成) ·김사우(金師禹) 를 편비(褊裨)로 삼고, 예문 직제학(藝文直提學) 안관후(安寬厚)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정문형(鄭文炯) ·전 군사(郡事) 김영전(金永湔) ·도관 좌랑(都官佐郞) 허종(許琮)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또 양정(楊汀)을 양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고, 사복소윤(司僕少尹)이윤인(李尹仁)· 이조좌랑(吏曹佐郞) 정효상(鄭孝常)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는데, 무릇 교서(敎書) 등의 일은 신숙주와 한결같았다.

 

8.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12월 19일(무술) 1번째기사

    최항· 이석형· 윤찬· 이계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항(崔恒)을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 영성군(寧城君)으로, 이석형(李石亨)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윤찬(尹贊)을 형조 참판(刑曹參判) 파성군(坡城君)으로, 이계전(李季專)을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성임(成任)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강희맹(姜希孟)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이파(李坡)를 좌승지(左承旨)로, 신면(申㴐)을 우승지(右承旨)로, 윤필상(尹弼商)을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오백창(吳伯昌)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허종(許琮)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박안성(朴安性)을 행 사헌장령(行司憲掌令)으로, 조민(趙岷)을 행 사간원헌납(行司諫院獻納)으로, 송숙기(宋淑琪)를 행 사헌지평(行司憲持平)으로, 이윤인(李尹仁)을 겸 지병조사(兼知兵曹事)로 삼았다.

 

9. 세조 35권, 11년(1465 을유 / 명 성화(成化) 1년) 2월 13일(경인) 1번째기사

    문무과 합격자를 발표하다

 

문과(文科)· 무과(武科)를 방방(放榜)하였다. 임금이 중궁(中宮)과 화위당(華韡堂)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와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 좌의정 구치관(具致寬) · 우의정 황수신(黃守身) · 우찬성 박원형(朴元亨) · 좌참찬 최항(崔恒) ·예조판서 원효연(元孝然) · 병조판서 윤자운(尹子雲) · 예조참판 임원준(任元濬) · 병조참판 송문림(宋文琳) · 청성군(淸城君) 한종손(韓終孫) · 예조참의 김수령(金壽寧) · 지병조사(知兵曹事) 이윤인(李尹仁) , 승지(承旨)등을 불러서 술자리를 베풀고, 성진(成晉) 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권자(卷子)를 가져오라.” 하고, 친히 책제(策題)를 강(講)하니, 성진 이 또한 읽고 또한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저 유생(儒生)은 겉으로 추구(追求)하는 자가 적지 않으니, 겉으로 추구하는 척 한다면 마음으로도 또한 추구하여야 한다. 이제 성진(成晉)은 그렇지 않다.” 하였다.

 

10. 세조 37권, 11년(1465 을유 / 명 성화(成化) 1년) 10월 14일(무자) 1번째기사

      사정전에서 선전관 등에게 학문에 힘쓸 것을 명하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받고, 이어서 진남군(鎭南君) 이종생(李終生) ·좌참찬(左參贊) 최항(崔恒) ·이조판서(吏曹判書) 한계희(韓繼禧) ·공조판서(工曹判書) 윤사흔(尹士昕)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이석형(李石亨)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식(鄭軾) , 행 상호군(行上護軍) 설정신(薛丁新) · 강곤(康袞) · 어득해(魚得海) ,병조 지사(兵曹知事) 이윤인(李尹仁)및 병조(兵曹)의 낭청(郞廳)· 선전관(宣傳官)· 진무(鎭撫)등을 불러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정식에게 이르기를, “경이 의금부(義禁府) 관원이 되어 일기가 점점 추워지니 옥수(獄囚)를 모름지기 급히 신문하여 결단하여서 곡진하게 구호하도록 하라.” 하고, 진남군 이종생 에게 명하여 지병조사(知兵曹事) 이윤인, 선전관·진무 등에게 《병장설(兵將說)》을 강(講)하게 하고, 인하여 선전관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무슨 글을 읽느냐?” 하니, 모두 부복하여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배우지 않아 학술이 없고 하는 일 없이 한가롭게 세월을 보내어서, 오늘도 이와 같고 내일도 또 이와 같고 내년에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마침내 늙은 데에 이르니, 나라에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곧 파출(罷黜)할 것이나 용서하는 것이니, 다시는 이와 같이 하지 말라.” 하였다.

 

11. 세조 37권, 11년(1465 을유 / 명 성화(成化) 1년) 11월 8일(임자) 1번째기사

       중신들에게 술자리를 베풀고 신숙주에게 세자 보필을 당부하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영응대군 이염(李琰) ·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 ·영의정 신숙주(申叔舟) ·호조판서 노사신(盧思愼) ·공조참의 김수령(金壽寧) ·예조참의 조근(趙瑾) · 병조지사(兵曹知事) 이윤인(李尹仁)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었다. 세자(世子)가 입시하여 술을 올리니, 임금이 신숙주에게 이르기를, “너도 마땅히 세자를 잘 가르치고 세자도 또한 사부(師傅)를 예(禮)로 공경하여야 한다.” 하였다.

 

12. 세조 37권, 11년(1465 을유 / 명 성화(成化) 1년) 12월 12일(을유) 3번째기사

       강원도 관찰사 이윤인에게 실농한 백성들을 구휼하도록 하다.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윤인(李尹仁)에게 이르기를, “본도(本道)가 근자에 실농(失農)한 것으로 인하여 백성이 믿고 살아갈 수가 없으니 내가 심히 측은하게 여긴다.

 

도내에서 천신(薦新)하는 이외에 진상하는 물선(物膳)은 모두 임시로 제거하게 하고, 영서(嶺西)의 거민(居民)은 모두 복호(復戶)하게 하고, 공물(貢物)을 거두지 않은 것은 아울러 모두 견감하고, 금년 이후에는 반(半)을 임시로 제거하여 인생을 소복(蘇復)하도록 힘쓰라. 그런데 소복하는 근본은 농상(農桑)에 힘쓰고 어염(魚鹽)을 통(通)하는 데에 있다.

 

지금 소금을 굽는 데에 쓰이는 수철분(水鐵盆) 1백 부(部)를 이미 경상도(慶尙道) 로 하여금 만들어 수송하게 하였으니, 경이 그것을 영동(嶺東) 여러 고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서 소금을 굽게 하라.” 하였다.

 

13. 세조 38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윤3월 21일(임진) 1번째기사

      강원도 관찰사 이윤인과 인견하다.

 

대가(大駕)가 지평(砥平) 에 이르니,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윤인(李尹仁)이 하직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인하여 술을 올리기를 명하고, 어의(御衣) 1령(領)을 내려 주며 유시(諭示)하기를, 네가 문무(文武)에 본디 뛰어난 재주가 아니나, 네가 민간의 일을 조금 알기 때문에〈강원도〉방면(方面)의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니, 직책을 공경하고 삼가서 내 명을 폐함이 없게 하라.” 하였다.

 

14. 세조 41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2월 13일(기유) 1번째기사

       이파. 이윤인·정칭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파(李坡)를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이윤인(李尹仁)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정칭(鄭偁)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삼았다.

 

15. 세조 41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2월 25일(신유) 1번째기사

      종친· 재추· 승지들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제장들을 불러 진법을 익히게 하다

 

화위당(華韡堂)에 나아가서 여러 종친(宗親)과 재추(宰樞), 그리고 승지들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또 여러 장수(將帥)들을 불러 내원(內苑)에서 습진(習陣)하게 하였는데,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이윤인(李尹仁)을 좌상대장(左廂大將)으로 삼고,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 정문형(鄭文炯)을 우상대장(右廂大將)으로 삼고, 수성도정(壽城都正) 이창(李昌)과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 이형손(李亨孫) ·좌부승지(左副承旨) 어세공(魚世恭)을 좌위장(左衛將)으로 삼고, 행 호군(行護軍) 최적(崔適)과 병조참의 박서창(朴徐昌) ·행 호군 김용달(金用達)을 우위장(右衛將)으로 삼았으며, 좌상(左廂)· 우상(右廂)으로 나누어 4위(衛)로 하였고, 각 위마다 50인씩으로 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말하기를, “겸사복(兼司僕)들은 효용(驍勇)이 남보다 뛰어나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할 수 있다.” 하였는데, 장차 교전(交戰)하려고 할 즈음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묻기를, 겸사복 10인이 출전(出戰)하면 몇 사람으로 이를 당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정문형 이 경솔하게 대답하기를, “열 사람이면 열 사람으로 당할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그렇지 않을 것이라 여기어 사복(司僕) 20인으로 하여금 1위(衛)와 교전하게 하고, 우전(羽箭)을 사용하고 돌아다니며 치사(馳射)하게 하였다. 이것이 끝나자, 임금이 병조판서 김국광 에게 명하여 장졸(將卒)들에게 유시하기를, “너희들이 습진(習陣)하는 것으로 상사(常事)를 삼아 힘쓰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승부가 결판나지 않은 것이다.” 하고, 곧 각(角)을 재촉하여 독전(督戰)하게 해서 다시 교전하게 하고야 파(罷)하였다. 장수와 사졸들에게 술을 내려 주고, 또 선전관(宣傳官)들에게 명하여《병장도설(兵將圖說)》을 논란(論難)하게 하였다.

 

16.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5월 7일(신미) 2번째기사

       모화관에 거둥하니 재추가 입시하고 장진충· 정난종 등에게 진법을 익히게 하다.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관문(館門)에 나아가니,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 ·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 ·좌의정 심회(沈澮) ·우의정 최항(崔恒) · 남양군(南陽君) 홍달손(洪達孫) ,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윤사흔(尹士昕) · 강순(康純) , 좌찬성(左贊成) 조석문(曹錫文) ·우찬성(右贊成) 윤자운(尹子雲) ·우참찬(右參贊) 김국광(金國光) · 서원군(西原君) 한계미(韓繼美) ·이조판서 한계희(韓繼禧) ·호조판서 노사신(盧思愼) ·예조판서 강희맹(姜希孟) ·공조판서 임원준(任元濬) ·형조판서 서거정(徐居正) ·예조참판 이계손(李繼孫)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 정문형(鄭文炯) ·병조참판 박중선(朴仲善) · 형조참판 정난종(鄭蘭宗)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이윤인(李尹仁)· 공조참판 안빈세(安貧世)와 종친(宗親)· 승지(承旨)등이 모시었다.

 

임금이 장진충(張進忠)과 정문형 · 정난종 · 어유소(魚有沼) ·금산 도정(金山都正) 이연(李衍) ·평성 도정(平城都正) 이위(李徫) , 이형손(李亨孫) ·어세공(魚世恭) ·이돈인(李惇仁) ·신말주(申末舟) , 호산 도정(湖山都正) 이현(李鉉) , 김유(金紐) ·이의형(李義亨) ·유흥무(柳興茂) ·이철견(李鐵堅) ·이극균(李克均) ·구치동(丘致峒) ·최적(崔適) 등으로 하여금 장수를 삼아,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우전(羽箭)을 사용하여 쫓아가며 서로 쏘게 하고, 또 장사(將士)로 하여금 혹은 말을 달리며 쏘고, 혹은 격구(擊毬)하고, 혹은 멀리 쏘고, 혹은 말을 타고 창(槍)을 쓰게 하여, 그 뛰어난 것을 시험하고, 또 천례(賤隷)로 하여금 과녁을 쏘고, 손으로 치게 하여, 잘하는 자는 베[布]로 상을 주고, 이어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17.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5월 25일(기축) 1번째기사 종친·장상을 불러 친정을 의논하

       고 이극배·오자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종친(宗親)· 장상(將相)을 불러 친정(親征)을 의논하고, 광릉군(廣陵君) 이극배(李克培)를 사복장(司僕將)으로 삼고, 행 대호군(行大護軍) 오자경(吳子慶)을 내금위 장(內禁衛將)으로, 허형손(許亨孫)을 사자 위장(獅子衛將)으로, 율원정(栗元正) 이종(李徖)을 장용대장(壯勇隊將)으로, 행 대호군(行大護軍) 이철견(李鐵堅)을 파적위장(破敵衛將)으로, 전 행 호군(行護軍) 최유림(崔有臨)을 공현 위장(控弦衛將)으로, 헌납(獻納) 조간(曹幹)을 만강대장(彎强隊將)으로, 영가군(永嘉君) 권경(權擎)을 좌사대장(左射隊將)으로, 금산도정(金山都正) 이연(李衍)을 우사대장(右射隊將)으로, 평성도정(枰城都正) 이위(李徫)와 형조참판 정난종(鄭蘭宗) ·수성도정(壽城都正) 이창(李昌) ·행 대호군(行大護軍) 이윤인(李尹仁)·의빈(儀賓) 심안의(沈安義)를 5부(部)의 장(將)으로 삼고, 각자 비장(裨將) 5인씩 선택하게 하였다.

 

18. 세조 44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10월 1일(계사) 4번째기사

       박식· 윤말손· 이윤인· 함우치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식(朴埴)을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윤말손(尹末孫)을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이윤인(李尹仁)을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함우치(咸禹治)를 행 함흥 부윤(行咸興府尹)으로 삼았다.

 

19. 세조 44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12월 10일(임인) 3번째기사

       전라도관찰사· 순천부사 에게 순천부에 있는 침향을 살피게 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윤인(李尹仁)·순천부사(順天府使) 유계번(柳季潘) 에게 치서(馳書)하기를, “듣건대 순천부(順天府)의 해농창(海農倉) 가까운 땅에 침향(沈香)이 있어서 나무와 비슷하다고 하고, 또한 돌산도(突山島)에도 많이 있다고 하니, 경(卿) 등이 자세히 살펴서 아뢰어라. 또 많은 사람이 베어가는 것을 금지하라.” 하였다.

 

 20. 세조 45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월 10일(신미) 3번째기사

        전라도관찰사에게 진산에서 산출되는 석자황은 더 채취하지 말 것을 명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지를 받들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윤인(李尹仁)에게 치서(馳書)하기를, “도내(道內)의 진산(珍山) 에서 산출(産出)하는 석자황(石雌黃)은 더 채취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21. 세조 46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5월 19일(무인) 2번째기사

       전라도관찰사에게 표류한 중국인들에게 백포철릭을 주게 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지를 받들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윤인(李尹仁)에게 치서(馳書)하기를, “이제 표류(漂流)한 중국인[唐人] 쇄경(鎖慶)등이 본도(本道)에 이르거든, 각기 백포 철릭(白布帖裏) 1령(領)씩을 주어라.” 하였다.

 

22. 예종 6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7월 17일(무술) 5번째기사

       평양부윤 이덕량을 파직시키고, 이윤인으로 대신하게 하다. 평양부윤(平壤府尹)이덕량 을 파직시키고, 이윤인

      (李尹仁)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23. 성종 4권, 1년(1470 경인 / 명 성화(成化) 6년) 3월 5일(갑신) 7번째기사

       효원·김종순· 어세겸· 한치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황효원(黃孝源)을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의정부 우참찬(行議政府右參贊)으로, 김종순(金從舜)을 자헌대부(資憲大夫)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어세겸(魚世謙)을 가정대부(嘉靖大夫) 함종군(咸從君)으로, 한치의(韓致義)를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김견수(金堅壽)를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훈련원도정(行訓鍊院都正)으로, 김필(金㻶)을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로, 성윤문(成允文)을 가정대부(嘉靖大夫)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겸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로, 이윤인(李尹仁)을 가정대부(嘉靖大夫)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겸 평양부윤(平壤府尹)으로, 이계손(李繼孫)을 가정대부(嘉靖大夫) 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 겸 영흥부윤(永興府尹)으로, 예승석(芮承錫)을 통정대부(通政大夫) 수 강원도관찰사(守江原道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로, 양순석(梁順石)을 통정대부(通政大夫) 수 황해도관찰사(守黃海道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로 삼았다. 경기관찰사로 유수를 겸하고, 평안도 · 영안도의 관찰사로 부윤을 겸하고, 경기 · 강원도 · 황해도의 관찰사로 절도사를 겸하는 것이 이때에 비롯되었다.

 

24. 성종 6권, 1년(1470 경인 / 명 성화(成化) 6년) 6월 3일(경술) 5번째기사

       평안도관찰사 이윤인에게 도내 연해 고을의 해일의 피해를 보고하게 하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윤

       인(李尹仁)에게 하서(下書)하기를,

 

“듣건대 도내(道內)의 연해(沿海) 여러 고을에 해일(海溢)이 많아 볏곡식[禾穀]을 손상시켰다고 하니, 경(卿)이 친히 그것을 살펴서 아뢰어라.” 하였다.

 

25. 성종 6권, 1년(1470 경인 / 명 성화(成化) 6년) 7월 9일(을유) 5번째기사

       평안도관찰사 이윤인이 백성으로 하여금 황충을 잡게 할 것을 청하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윤인

       (李尹仁)이 치계(馳啓)하기를,

 

“도내(道內)의 평양(平壤) · 성천(成川) · 영유(永柔) · 자산(慈山) · 순안(順安) · 삼등(三登) · 상원(祥原) · 중화(中和) · 곽산(郭山) · 순천(順天) · 은산(殷山) · 강서(江西) · 용강(龍岡) · 삼화(三和) · 함종(咸從) 등의 고을에 청색·황색·흑색의 삼색(三色) 황충(黃蟲)이 화곡(禾穀)을 손상시키니, 백성들로 하여금 잡아서 땅에 묻도록 하소서.” 하였다.

 

26. 성종 10권, 2년(1471 신묘 / 명 성화(成化) 7년) 6월 14일(을묘) 3번째기사

       평안도관찰사 이윤인이 개천군의 백성을 진휼할 것을 청하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윤인(李尹仁)이 치계(馳啓)하기를,

 

“이달 25일에 개천군(价川郡)에 우박(雨雹)이 내려, 전지 3백여 결(結)을 손상 시킨데다 양맥(兩麥)도 또한 미처 수확하지 못하여 거민(居民) 모두가 양식이 떨어졌으니, 청컨대 군자창(軍資倉)을 발(發)하여 진휼하게 하소서.”

 

하였다. 호조에서 이에 의거하여 오래 묵은 피곡(皮穀) 2천 석(石)을 주어 진구(賑救)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27. 성종 102권, 10년(1479 기해 / 명 성화(成化) 15년) 3월 11일(정묘) 3번째기사

       마전에 사는 죽은 관찰사 이윤인의 아내인 정부인 홍씨를 정문하도록 하다. 예조(禮曹)에서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 마전(麻田)에 사는 졸(卒)한 관찰사(觀察使) 이윤인(李尹仁)의 아내인 정부인(貞夫人)홍씨(洪氏)는 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산소 옆에 여묘(廬墓)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친히 치전(致奠)하고 항상 슬프게 울면서 우울해 하였으며, 집에 두 번이나 불이 났는데 자신이 불길을 무릅쓰고서 신주(神主)를 안고 나왔습니다.

 

무릇 철따라 나는 물건과 새로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바친 후에 먹었으며, 종신토록 지키는 바를 변하지 않았으니, 그 품행이 특이합니다. 청컨대 정문(旌門)하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여 후인(後人)에게 장려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