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청음 김상현(淸陰 金尙憲)의 이득윤 선생 만사

야촌(1) 2008. 6. 24. 11:51

●청음 김상현(淸陰 金尙憲 )의 이득윤선생 만

 

선조 때의 징사 이제 몇몇이나 남아 있나 / 先朝徵士幾人
서계옹의 집도 역시 무너졌단 말 들리네 / 聞道西溪亦廢廬
양하 학문 전수받아 누가 뜻을 통달했나 / 授學楊何誰達意
공사만이 관 사양해 홀로 명예 맑았었네 / 辭官龔舍獨淸譽
통덕문의 앞길에는 풀 수북히 자라 있고 / 草深通德門前路
포희괘의 뒤 책에는 먼지 잔뜩 끼어 있네 /  塵掩包羲卦後書
평생 동안 길 어긋나 끝내 얼굴 못 봤기에 / 蹉跌百年終不面
천 리 밖서 슬픈노래 부르면서 서성이네 / 哀歌千里重躊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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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해(譯解) 

 

◇징사(徵士) : 은거하고 있다가 조정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출사한 사람을 말한다.


◇양하(楊何) : 한나라 때의 학자로 무제(武帝) 때에 중대부(中大夫)가 되었는데,《주역》에 특히 박식하여 오경박사의 학

   관을 세울 때《역경》의 박사가 되었다.


◇공사(龔舍) : 한(漢)나라 무원(武原) 사람으로, 자는 군천(君倩)이며 오경(五經)에 정통하여 공승(龔勝)과 함께 초(楚)땅

 의 양공(兩龔)으로 불렸다. 처음에 천거를 받아 징소(徵召)되어 간대부(諫大夫)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으며, 다시 징소되어 박사가 되었으나 또다시 병으로 사퇴하였다. 애제(哀帝) 때 태산 군수(太山郡守)를 지내다가 몇달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고하고 물러난 뒤로는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집에 있다가 졸하였다. 

 

일찍이 미앙궁(未央宮)에서 숙직하다가 거미줄에 날벌레가 걸려서 날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나의삶도 저와 마찬가지다. 벼슬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거미줄과 같은 것이다. 어찌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는 즉시 관(冠)을 나무에 걸어 둔 다음 물러난 고사가 전한다.《漢書 卷72 王貢兩龔鮑傳》


◇통덕문(通德門) : 후한(後漢) 때 정현(鄭玄)의 덕을 표창하기 위하여 세운 문이다. 공융(孔融)이 고밀현(高密縣)에 고하기를, “옛날 동해(東海)의 우공(于公)은 겨우 일절(一節)이 있었는데도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문려(門閭)를 훌륭하게 꾸미도록 했는데, 정공(鄭公)과 같은 덕으로서 그만한 대우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그가 살던 거리와 문호를 넓혀 높은 수레도 통행할 수 있게 확장하고 통덕문이라 이름지었다.《後漢書 卷35 鄭玄列傳》

 

◇포희괘(包羲卦)의 뒤 책 :《주역》을 말한다. 포희(包羲)는 복희씨(伏羲氏)이다. 복희씨가 황하에서 용마(龍馬)가 하도(河圖)를 등에 지고 나오자 그것을 보고, 팔괘(八卦)를 그리고 이를 다시 64괘로 만들었으며, 그 뒤에 문왕(文王)이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지었고, 공자(孔子)가 십익(十翼)을 지어서 《주역》이 완성되었다. 이득윤이 역학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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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윤(李得胤)

 1553년(명종 8년)~1630년(인조 8년). 조선 중기의 학자(學者)이자 악인(樂人)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이다.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박지화(朴枝華)에게 역학을 배우고, 1588년(선조 21)에 진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혼란한 정계를 피하여 고향에 머무르면서 김장생(金長生). 정두원(鄭斗源) 등과 서한을 교환하며 역학과 음악에 대해 토론하였다.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두어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 거문고에 관련된 명(銘). 부(賦). 기(記). 시(詩). 서(書). 악보. 고금금보(古今琴譜) 등을 집대성하여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라는 귀한 거문고 악보를 후세에 남겼다.

 

인조반정 이후에 괴산 군수가 되어 민심을 수습하고 관기(官紀)를 바로잡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저서로는 《현금동문유기》 외에 《서계집(西溪集)》, 《서계가장결(西溪家藏訣)》이 있다.

 

●김상헌(金尙憲),

 1570(선조 3)-1652(효종3). 본관 안동. 자 숙도(叔度). 호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 어려서 윤근수(尹根壽) 등에게 수학하였고 《소학(小 學)》 공부에 힘썼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이조 판서,예조판서, 공조 판서, 병조 판서를 지내고,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大賢)으로 추대받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저서에《야인담록(野人談錄)》·《풍악문답(豐岳問答)》 따위가 있고, 《청구영언》 따위의 가곡집에 시조 4수가 전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