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고려사(高麗史)

고려 충선왕이 티벳으로 유배간 이유는?

야촌(1) 2010. 5. 13. 22:52

1. 700년전....

   충선왕은 티벳으로....

   만 오천리의 유배길을 갔다.

 

 고려 26대왕인 충선왕!

 

마흔 여섯이 되던 1320년, 예기치 못한 운명을 맞게 된다.

한 나라의 국왕인 그에게 유배 명령이 떨어진다.

 

충선왕의 유배지는 당시의 토번으로, 지금의 티벳! 그곳에 도착하는데만도 반 년이 걸리는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그럼 고려 충선왕이 티벳까지 유배를 간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 26대 충선왕!

공민왕이나 혹은 조선 시대 여러 왕들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죠.

그런데 그는 우리 역사상 그 어느 왕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왕입니다.

먼 이국 티베트까지 유배를 갔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티벳이라면 여기, 아시아 서쪽 끝이죠.

지도상으로 봐도 상당히 먼 거리라는 걸 알 수 있는데요.

 

아마 700여년전 충선왕이 유배될 땐, 더 멀고 낯선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왕이었던 그가 왜 그 먼 나라로 유배를 가게 된 것일까요?

우선 충선왕이 갔다는 티벳으로 가보겠습니다.」

 

북경에서 비행기로 다섯 시간만에 보이는 히말라야의 설산. 그 산자락에 티벳이 있다.

티벳에서 가장 큰 도시인 라싸!.

이미 9세기에 수도였던 이곳은 역사 도시의 중심지이자 종교의 중심지이다.

 

 

 

 

 

신비의 불교 왕국답게 시내 중심에 달라이 라마가 거주했던 포탈라궁과 그 옆으로 사원들이 있다. 

일 년 내내 이곳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에게 신에 대한 믿음은 곧 삶이다.

 

떨어진 거리만큼이나 사람들과 도시의 모습이 우리와는 다른 티벳!.

700년전 충선왕은 정말 이곳까지 왔던 것일까?

 

<고려사>에는 충선왕이 유배갈 당시의 심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혈혈단신으로만 오천리 떨어진 이곳으로 와야 했던, 충선왕의 처참한 심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충선왕은 티벳의 어느 지역으로 유배를 간걸까? 

지영재 교수는  충선왕 시대 충신이었던 이제현을 연구하고 있다.

 

이제현(李齊賢)은 충선왕의 유배지까지 가서 충선왕을 직접 만나고 돌아온 인물로이제현(李齊賢)이 남긴 글에는 충선왕을 만나러 가면서 쓴 시(詩)가 있다. 

 

 

 

이 시들을 통해 충선왕의 만 오천리 유배길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이제현(李齊賢)의 시(詩)에 처음 등장하는 지명은 '탁군'이다.

 

부드러운 흙은 매번 태향 산맥과 닿으니 산동성은 오른팔이요, 하북성은 목덜미라...

지리적인 위치를 상세히 적고 있다.

 

"지금은 탁주시(涿州市-줘저우)로 승격되었는데, 북경에서 중국의 남방이나 서쪽으로 여행할려면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첫 번째 있는 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 지영재 박사(전 단국대 중문학과 교수)- 

 

 

↑탁군을 지난 경유지들도 시(詩)를 통해 가능하다. 그 길을 모두 연결하면 이렇게 된다.

 

북경에서 남쪽에 위치한 탁군으로 내려온 뒤 서쪽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정주, 서안, 란주 등 모두 중국의 역참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도스마부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도스마부터 라싸까지도 역참을 이용했다면 이렇게 두 갈래 길을 추정할 수 있다.

 

만 오천리의 길이 얼마나 멀고 험했는지 이제현의 글에 잘 나와 있다.

혁선으로 강을 건너고, 소달구지에서 잠을 자야 무려 반 년이나 가야 했던 고난의 길이었다. 

"따라간 사람도 벼슬아치는 두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마부라든지 짐꾼인데 중간에 가다가 다 돌아가 버렸지요. 

게다가 기후도 나쁘고 교통도 나쁘고 가다가 다 도망가 버린 거 같아요."

 

티벳에 도착한 충선왕의 거주지는 <고려사>에 남아 있다.

유배지는 도대체 어디였을까? 

"1320년 12월 무신일에 원나라 황제가 상왕(충선왕)에게 불경을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토번 살사결로 유배 보내다."

-고려사 세가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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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의 유배지는 티벳의 살사결이라는 지역이다.

살사결은 중국식 발음으로 사스.  사스를 알고 있는지 중국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사스 지역에 대해 아십니까?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비슷한 발음의 지역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비슷한 발음의 지명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래전에 쓰이던 지명인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다. 취재진은 라싸 서장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14세기 지명인 살사결을 확인할 수 있을까?

 

"만약 원대라면 사캬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나라 때 종교, 정치의 중심이 바로 사카사원이었습니다."

 - 바쌍판두어 연구원, 라싸 서장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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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사결은 지금의 사키아 지역, 라싸에서 서쪽으로 450킬로미터 더 들어간 지역이다.   

티벳의 수도 라싸까지만 해도 먼 곳인데, 그곳에서 서쪽으로 깊숙이 더 들어갈 만큼 유배지는 먼 곳이었다.

 

라싸에서 자동차로 쉬지 않고 달렸는데도 아홉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 오전에 출발했는데 사키아에 도착하니 석양이 지고 있었다.

 

고산 지대라서 그런지 여느 도시들처럼 주변 경관은 황량했다. 하지만 충선왕이 왔던 14세기경 사카는 티벳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다.

티벳의 네 개의 종파 중 하나인 사키아파는 13~14세기 티벳 뿐만 아니라 중국 황실과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번성했었다. 

 

 

 

마을에 가장 크게 자리한 건물이 사키아 사원. 13세기에 지어진 오랜 역사를 가진 사원이다.

충선왕, 그가 머물렀던 곳도 이 사키아 사원이었을 거라 추정하고 있다.

 

이제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사원은 지금도 쓰이고 있다.

승려들이 불공을 들이고 있고 신도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1320년, 충선왕은 정말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했을까?

혹시 충선왕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주지 스님은 충선왕에 대해 알고 있었다.

"원나라 때 충선왕이 이곳에 온 적이 있습니다.

게다가 충선왕의 아들도 이곳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당시 중국 대륙의 왕과 라마 스님들도 이곳에 와서 종교 공부를 하곤 했습니다.

원나라 시절 샤캬 사원에 대한 전설 이야기 중 충선왕과 그의 아들이 이곳에 와서 불경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 챵바러제 주지스님, 사캬사원

 

 

↑충선왕이 머물던 숙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이 건물 역시 13세기에 지어져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지금 이곳은 승려들이 기거하는 방으로 승려들은 이곳에서 참선을 하고 불경을 공부한다.

 

주지 스님에 의하면 충선왕이 왔을 당시 이곳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숙소였으며 충선왕도 이곳에서 불경 공부를 했다고 한다. 주지스님은 당시 충선왕의 모습을 짐작케 하는 귀중한 유물이 있다며  취재진을 안내했다. 

 

● 샤캬사원유물보관실.

     사원 건물 깊숙히 있는 탱화들이 보관되어 있는 방이다. 오래된 사원답게 국보급 탱화들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자물쇠까지 채워 고이 간직하고 있는 탱화 하나를 꺼냈다.

이 그림이 충선왕과 관계 있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 그림은 충선왕이 유배올 당시의 그림이다.

이곳에 불경을 공부하러 온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속에 새겨진 주지스님의 이름은 당시 충선왕이 유배올 당시의 스님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그림은 원대의 것이며, 원대의 역사에 충선왕 관련 고사를 섞어 그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14세기경, 당대 최고 사원이었던 사키아 사원.

탱화속에는 지금과 흡사한 사원의 모습이 보인다.

 

 

 

영향력이 있는 사원이었던만큼 이 사원에는 아시아 각지에서 불경을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속에 충선왕이 있었다.

 

반 년 넘게 걸려 고생 끝에 도착한 사키아 사원. 그림속에 원의 제후 복장을 한 이를 충선왕으로 보고 있다.

 

마치 요새 같은 사키아사원.

700여 년전 충선왕은 이곳에서 외롭고도 적막한 생활을 불경 공부를 하며 달랬던 것이다.

그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3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2. 13세기 고려의 대몽항쟁, 그리고 쿠빌라이의 외손자 충선왕의 탄생!~

 

"티벳 지역은 고산 지대라 나무가 많지 않은 지역입니다.

그래선지 쓸쓸하기만 한데요, 충선왕의 유배 생활이 얼마나 외롭고 적막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충선왕은 이곳에서 2년 반 동안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도스마라는 곳으로 옮기게 됩니다.

 

도스마는 이즈음, 티벳보다는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먼곳이죠. 

이곳에서 7개월간 머문 뒤에야 유배에서 풀려납니다. 모두 3년 2개월의 긴 유배 생활이었습니다.

 

고려의 충선왕이 티벳에 유배를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유배 생활을 해야 했을까요?

충선왕의 이력을 보면 우리가 잘 몰랐던 또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봐 주십시요. 원 황제 쿠빌라이입니다.

충선왕은 바로 이 쿠빌라이의 외손자입니다. 그러니까 쿠빌라이의 딸이 충선왕의 어머니인 셈이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쿠빌라이는 원제국이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는데 기반을 쌓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쿠빌라이의 외손자가 충선왕이라니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고려의 대몽 항쟁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강화도 고려궁지

 

고종 18년인 1231년, 몽고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30여 년간 항쟁한다. 그리고 30여년 만에 결국 고려는 몽고와 강화조건를 맺기에 이른다.

 

그 이유는 몽고의 계속된 침략으로 본토가 초토화되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때마침 원나라의 강화 조건이 완화되었다. 

 

 "처음에는 국왕이 직접 몽골에 들어와 항복을 해라,

최씨 정권의 실력자가 강화에서 나와 항복을 해라 하다가,

나중에는 고려 태자가 몽골에 와서 항복을 해라, 이렇게 조건이 완화된 것이죠."

- 이익주 교수,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원나라의 강화 조건이 완화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남송 정벌을 꾀하던 원나라는 남송과의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밀고 밀리는 전쟁의 한가운데서 결국 원나라의 황제 헌종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1256년 원 황제 몽케 사망.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원나라 황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황제의 자리를 놓고 헌종의 다섯 아들 사이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 중 황제 쟁탈전에 나선 것은 둘째인 쿠빌라이와 막내인 에릭부케다.

당시 막내 에릭부케는 수도 카라쿠룸에 있었고, 쿠빌라이는 전쟁터에 나가 있었다. 

 

헌종이 죽자 두 아들은 서로 황제임을 주장했고, 결국 전쟁터에 있던 쿠빌라이는 에릭부케를 치러 수도로 향한다. 

두 세력간의 싸움은 치열했다. 4년간에 밀고 밀리는 전투는 계속 됐다. 

 

이즈음 강화를 위해  원나라로 향하던 고려 태자 왕식은 누굴 만나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고려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순간이었다.

고심 끝에 고려 태자가 선택한 이는 쿠빌라이였다.

 

그것은 나중에 고려에 행운을 가져다주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던 쿠빌라이에게 고려 태자는 천군만마를 얻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만 리나 떨어진 먼 나라요,

일찌기 당나라 황제가 친히 정벌하였으나 항복시킬 수 없었는데

이제 그 태자가 스스로 와서 나를 따르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 쿠빌라이

 

"쿠빌라이로서는 그동안 30년 동안 몽고에 항쟁을 했던 고려의 태자가 자신에게 귀환을 했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 자기에게로 기운다는 천명의 소재가 된 것입니다." 

- 이익주 교수

 

이후 쿠빌라이는 동생 엘릭부케를 제압하고, 1260년, 원제국의 5대 황제로 등극한다.

그가 바로 원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세조다.

 

황제가 된 쿠빌라이는 고려에 우호적이었으며 강화는 고려에 유리하게 이루어졌다.

 

그 중에 하나가 고려를 원의 직할령으로 복속하지 않고 고려의 자주국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의 의관을 비롯한 풍속까지도 고려의 것을 그대로 쓰도록 한다.

 

"불개토풍(不改土風)

의관은 본국의 풍속에 따르고 모두 고치지 않는다."

- 고려사 원종 원년 8월 -

 

원나라의 침략을 받았던 나라들과 다른 조건이었다.

고려 태자가 원에 있는 동안 고려 고종이 죽자 쿠빌라이는 세자를 고려로 돌려 즉위케 한다.

그가 바로 고려 24대 원종이다.

 

"고려 태자가 몽골에 가 있는 동안 고려 고종이 사망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쿠빌라이는 고려 태자를 책봉을 하고 고려로 귀국을 하게 하는데, 이 사건은 고려로 하여금 몽골의 조공, 책봉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단히 상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 이익주 교수,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고려로 돌아온 원종은 그로부터 11년뒤 원나라에 한가지 제안을 하게 된다.

고려 태자와 원 공주간에 혼인을 맺자는 것이다.

 

"갑술에 왕이 도당(원)에 글을 올려 청혼했다." - 원종 11년

원종은 왜 이런 제안을 했을까?

 

"원종의 입장에서는 원 황실의 지지를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왕실을 위협하는 저항 세력으로부터 왕실을 보호하고, 또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은 몽골과 강화 정책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고려 국가의 위상을 계속 보장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 이익주 교수

 

이로써 원종의 아들인 충렬왕과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공주가 결혼을 하고 되고, 그 두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충선왕(忠宣王)이다.

 

고려 왕실의 후계자이자 원나라 쿠빌라이의 외손자로 태어난 충선왕!

그는 당시 고려와 원나라간에 독특한 관계 속에 태어난 인물이었다.

 

3. 자주 국가로의 위상을 꾀하다 밀려난 아버지 충렬왕! 그 뒤를 잇는 아들 충선왕! 

 

"고려와 원의 관계는 당시 원의 대외 정책에 있어 유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원은 아시아를 비롯해 유럽의 일부까지 점령했는데요, 원의 침략을 받은 나라는 이렇게 멸망해 그 이름마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고려만 원과 분명한 국경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당시 원나라의 위세를 봤을 때 이것은 특별한 경우인데요,

이럴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려가원의부마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마국은 고려가 혼인 관계를 통해 이룩한 고려와 원의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바로 이 혼인 관계를 통해 태어난 첫 인물이 충선왕입니다.

 

출생 과정부터 독특했던 충선왕은 즉위 과정도 남달랐습니다.

대개의 경우 선왕이 세상을 뜨거나 병이 나서 정사를 돌볼 수 없을 때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인데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이 예순이 되던 해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습니다.

 

아버지 충렬왕은 목숨이 위태롭지도 건강이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충선왕이 왕위를 물려받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태어난 지 채 2년이 안 된 1277년 1월, 쿠빌라이의 외손자 충선왕은 세자로 책봉된다.

두살 때 이미 충렬왕을 이을 후계자로 책봉된 충선왕은 어릴 때부터 원에 자주 들어간다.

 

기록에 남은 공식적인 방문만도 네 차례,

네 살에 두 번,  열살에 한 번, 그리고 열다섯살에 한 번이었다. 어려서부터 원에 자주 들어가 견문을 넓혔던 것이다.

 지금은 명대의 성인 자금성만 남아있지만, 이 자리에 원나라의 궁이 있었다.

 

원에 온 충선왕은 궁에 입궐해 외할아버지인 쿠빌라이를 자주 만난다.

당시 쿠빌라이와 충선왕의 만남 중에 충선왕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자치통감>을 읽고 있는 충선왕을 찾아와 쿠빌라이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쿠빌라이가 찾아와 요사이 어떤 공부를 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충선왕은 통감을 읽고 있다고 대답을 합니다.

 쿠빌라이가 어떤 구절이 제일 기억에 남냐고 되묻자 충선왕은 한나라 유방과 당나라 태종이 가장 위대한 군주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러자 쿠빌라이가 그럼 나와 한나라 유방과 당나라 태종을 비교하면 어떠하냐고 다시 물었는데, 이 때 충선왕은 아주 재치있게 답변을 합니다.

'자기는 아직 어려서 비교할 수는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 박종기 교수, 국민대 국사학과 -

 

이외에도 세자 시절에 충선왕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원나라에 가는 충선왕에게 신하 중 한 사람이 여행경비로 은 40근과 호피 20장을 바치자

충선왕은 이를 받지 않으며 "이 물건들은 모두 백성들을 괴롭히고 원성을 산 물건이니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 충렬왕 13년 -

 

1298년 충선왕 즉위(당시 24세)! 고려의 세자로 있던 충선왕은 갑작스럽게 왕위를 물려받는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고려사절요>에 보면

충선왕이 아직 세자이던 시절,

 

원나라에서는 '의동삼사상주국 고려국왕세자 영도첨의사사'라는 작위를 준다.

이는 국정을 관장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작위를 받고 고려로 돌아온 충선왕은 직접 국정에 참여한다.

 

"세자가 원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의동삼사상주국 고려국왕세자 영도첨의사사'에 책봉하고 은인(銀印)을 하사하였다."

- 충렬왕 21년 8월 -

 

세자가 도검의사에 나가 일을 보았으며,  일을 보고 온 세자에게 백관이 하례를 했다는 기록이다.

세자 신분이지만 왕에 버금가는 권한을 가진 것이다.

 

"세자가 도검의사에 나가 일을 보았다.

일을 본 후 세자는 수령궁에 나아가니 왕이 공주와 함께 경루에 올라가서 보았다.

세자가 자신의 처소로 돌아오자 백관이 하례를 올리므로 답례하였다."

- 충렬왕 21년 9월 -

 

"충렬왕을 제쳐두고 자신의 새로운 파트너로 충선왕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충선왕에게 모든 권한을 주어 고려에 귀국하게 했고, 고려에 귀국한 충선왕은 원의 성정을 등에 업고 고려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게 된 것입니다."

- 김당택 교수, 전남대 역사교육과 -

 

과연 충렬왕은 왜 원나라에 머물렀던 세자에게 갑자기 밀려나게 된 것일까?

 

경남 마산시 합정동!

이곳에 충렬왕과 관계된 유적이 남아 있다.

몽고정(蒙古井)이다.

 

몽고정은 원나라 군사이 썼던 우물로, 충렬왕 때 판 것이다.

일본 정벌을 위해 이곳에 주둔했던 원나라 군사들을 위해 만든 시설인 것이다.

 

몽고정 근처에도 원과 관련된 유적이 있다.

정동행성 성터 발굴지이다.

 

 

 

이 때 충렬왕은 원의 일본 정벌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선다.

 

"당시 충렬왕은 합포 이곳에 정동행 중서성이라고 하는 임시군사기구를 이곳 성터에 위치시키고, 충렬왕 본인 자신이 1281년 4월 1일에 개경을 출발하여 보름 정도 소요되어 합포에 서 내려와 한 석 달간 이곳에 머물게 됩니다.

당시 충렬왕의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부분이 되겠습니다."

-송정안 학예연구사, 마산시립박물관 -

 

당시 일본에 파견된 군대 중 상당수가 고려군임을 알 수 있다.

 

 

 

일본 정벌에 나선 여몽연합군의 모습을 그린 <몽고습래회사>를 보면 전면에 나선 군대는 모두 고려군들이다. 고려군이 주력군이 되어 전투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여몽연합군은 태풍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지만 충렬왕이 이렇게 원의 정벌을 적극적으로 도운 것은 이유가 있다.

 

"이 시기에 가끔 발생하고 있는 왜구를 소탕하고,또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서 몽고 제국내에서 고려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동익 교수, 경북대 역사교육과 - 

 

다루가지(달노화적-達魯花赤) 폐지. 

 

이후 고려 내정 간섭을 위해 설치되었던 다루가치가 철수되었다.

일본 원정은 원나라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충렬왕의 외교 정책 중 하나였던 것이다.

 

사실 충렬왕은 즉위초부터 원나라로부터 자주를 시키려는 노력을 해왔다.

원의 간섭으로 관제를 개정할 때도 원의 관제와 일치하는 것만 개정을 했다. 

 

 

 

그리고 고려의 독자적인 관제는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는데 도병마사, 식목도감, 정당문학 , 국사 같은 것이 그 예다. 이러한 충렬왕은 일본 원정 이후 더 강한 조건을 원에 제시한다. 

 

원이 군사기지로 쓰는 탐라를 돌려줄 것과 전쟁 때 잡혀갔던 고려백성을 돌려보내라는 네 가지의 요구 조건이다. 

이에 원나라 성종은 네번째 요구사항을 제외한 세 가지를 들어준다. 

 

그러나 그로부터 7개월 뒤, 원은 그 요구사항을 일방적으로 깨어버린다.

"충렬왕은 원의 쿠빌라이 세조와 같이 정치를 했던 인물이라 원의 성종이 처음에는 충렬왕의 요구 조건을 거절하질 못합니다.

 

그러나 결국 성종의 입장에서는 충렬왕의 강력한 왕권 구축이라는 것은 원나라가 원하는 바가 아니고, 충렬왕이 성종의 통제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냥 방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김당택 교수-

 

이러한 배경속에 원은 충렬왕을 밀어내기 위해 세자 충선왕에게 막강한 권한을 주었던 것이고 결국 충렬왕은 스스로 물려나게 된다.

원의 압력에 의해 갑작스레 아버지 충렬왕에게서 양위를 받은 충선왕. 그는 그렇게 고려 26대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4. 부원세력 억압 등, 개혁 조치들.

    8개월 만에 폐위되는 충선왕! 

 

"이처럼 원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 충선왕!

그런데 충선왕이 왕위에 머문 기간은 아주 짧습니다.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폐위되고 그의 아버지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 이유를 국제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1298년 충선왕 즉위 후 8개월 만에 전격 퇴위

 

"충선왕의 폐위 역시 고려와 원의 관계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우선 기록상에 있는 충선왕의 폐위 과정부터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충선왕의 폐위 즈음 고려 조정에는 큰 사건이 터집니다.

일명 '조비, 계국 사건'입니다.

 

지금 제 옆에 충선왕과 두 명의 여인이 있는데, 한 명은 후궁인 조비고, 다른 한 명은 원에서 온 계국공주입니다.

충선왕의 정실부인은 계국공주지만 충선왕이 사랑한 여인은 고려여인인 조비였습니다.

 

조비는 충선왕이 계국공주와 혼인하기 전에 이미 부부의 연을 맺은 충선왕의 첫 여인입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계국공주는 원나라 조정에 서신을 보냅니다.

 

"왕이 황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조비가 나를 저주하게 만들어 충선왕의 사랑이 조비에게 있으니 조비에게 벌을 내리옵소서"

그러자 원은 조비가족을 감옥에 가두고 충선왕 부부를 원에 불러들입니다.

이 웃지 못 할 사건으로 충선왕은 폐위되고, 맙니다. 그럼 충선왕은 계국공주의 질투 때문에 폐위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단지 표면적인 이유고 충선왕을 폐위시키기 위한 빌미일 뿐입니다.

진짜 이유는 충선왕과 원의 힘겨루기였습니다.

 

충선왕은 즉위하자마자 개혁적인 정책들을 내놓는데요,

그 중 하나는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는 이들을 과감하게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몽골어를 익히 관직에 오르거나 고려와 원 황실 간에 연락망을 통해 권력을 얻은 환관들, 그리고 응방에서 일하는 관원들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응방(鷹坊)은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부터 생긴 기관으로 원의 조공으로 바칠 매를 사육하던 기관이었습니다. 당시 원과 관련이 있다는 하나만으로 세력은 대단했고 부패도 심했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응방의 매들은 금은포를 먹나보다'란 말이 유행할 정도였습니다.

충선왕은 이들이 받는 징여물을 일절 금했습니다.

 

이런 원을 통해 권력을 얻는 부원세력(친원 세력) 대신, 충선왕은 고려 사대부들을 새로 등용을 합니다.

관제도 과감히 바꿔버립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선왕의 정책이 원나라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짐작이 가는데요,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원에서 볼 때 이것은 또 다른 정치적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정치적 격동이 원과의 사전 협의 없이 고려 독자적으로 이뤄졌다고 하는 점이 원을 상당히 불안하게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충선왕에 의해 배제되었던 충렬왕과 충렬왕 측근세력의 치열한 반대공작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조비 사건 같은 경우처럼 충선왕에 대한 음해가 빈번했던 것이죠.

원으로써는 이러한 고려와의 정치적 불안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 때문에 충선왕을 왕위에서 다시 퇴위시키는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익주 교수-

 

새로운 파트너로 선택된 충선왕 역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기미가 보이자 곧 바로 충선왕을 폐위시킨 것입니다.

 

5.원에서의 충선왕의 입지 강화!

   그러나 ‘전지정치’는 한계를 드러내고!

 

 이렇게 충렬왕에 이어 충선왕마저 원나라의 간섭을 최소화 해보려고 노력하다가 폐위되고 말지만 그러나 충선왕은 그 후 십년 뒤 또 다시 왕위에 오릅니다. 그렇다면 충선왕이 어떻게 또 다시 왕위에 오르는지 그 행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폐위된 충선왕은 다시 원으로 들어갔다.

원에 들어온 충선왕은 어떤 활동을 하게 되는 걸까?

우선 충선왕의 행적을 찾았다.

 

중국의 당 중앙국무원입니다.

원대에 태자궁이 위치하고 있었던 곳입니다.

 

북쪽에는 쿠빌라이와 그의 황후가 생활했던 곳입니다.

이쪽 동남쪽은 바로 명.청 시대의 자금성과 붙어 있습니다.

 

이 일대가 원 왕조의 황실이었죠.

아마 충선왕은 이 주변에서 생활했을 것입니다."

-짱 융 자앙 교수, 중국인민대학 원사 전공-

 

충선왕이 원나라 태자궁 근처에 살았을 것이라 추정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에 들어온 충선왕은 훗날 원나라의 황제가 되는 무종, 인종의 선생님이자 인척 관계였습니다.

 

무종, 인종은 충선왕의 어머니 계국 공주의 남동생 타르마발라의 자식들로 충선왕과는 외사촌지간이 된다.

 

 

 

충선왕과 무종, 인종 형제가 얼마나 가까이 지냈는가는 이제현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황제가 되기 전 무종, 인종이 충선왕과 한 집에서 기거하며 밤낮으로 떠나지 않으며 그 친밀함이 남달랐다고 한다.

"무종과 인종이 황제가 되기 전에 주상과 한 집에 거처하여 밤낮으로 서로 떠나지 않았다."

 - 익재난고-

 

그런데 충선왕이 무종, 인종과 친밀하게 지낸 건 단지 인척 관계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충선왕에게는  또 다른 생각이 있었다.

 

"충선왕이 원에서 개인적인 생활을 유지했다기보다는 정치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무종, 인종 형제들과 함께 한 집에 살면서 형제같이 지냈다는 것은 어느 한순간에 그렇게 한 게 아니고 황실 계통 중에서 무종, 인종과 교류하는데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 김광철 교수, 동아대 역사학과-

 

이러한 충선왕의 활동을 보여주는 일화가 원 황실 근처의 연못 옥연담에도 전해지고 있다.

원의 고위직에 있는 인물이 충선왕을 위해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호숫가 예쁜 별당 소문이 헛되지 아니하니

국공이 우리 임금 모시고 잔치를 베푸노라 

생황 노래 끝나기도 전에 거마는 시끌벅적

아득한 서산 해는 지려는 듯 어스레 하도다."

- 익재집-

 

즉 폐위된 뒤 충선왕은 원에서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는 활동을 계속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원 황실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원 성종(티무르)에게는 아들(타이시)이 하나 있었는데 몸이 허약하여 일찍 죽는다.

그리고 성종마저 죽고 나자 원 황실에서는 황제의 자리를 둘러싼 소용돌이가 일게 된다.

 

여기서 최종적으로 대립하게 된 두 사람은 무종(하이산)과 아난타.

두 세력간의 치열한 쟁탈전은 무종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과정에서 충선왕은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무종의 편에 서게 되고 무종의 즉위 과정에 공을 세운다.

 

"충선왕이 중국 내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혹자는 그가 혹시 정보전달업무를 담당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신분이 비교적 특별하기에 만약 몽고 귀족이 드러내놓고 정보를 잡아  하이산에게 전달했다면 쉽게 포착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충선왕은 외국인이므로 조정내부 아난다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 짱 융 자앙 교수, 중국인민대학 원사 전공-

 

무종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충선왕의 공을 인정해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린다.

 

"착한 일에는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는 것은 지극히 공평한 일로써 임금에게 충성하는 큰 절조를 보전하기 위해 특별히 당신에게 개부의동삼사태자재부 상주국부마도위 벼슬을 주고, 심양왕(瀋陽王)으로 봉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충선왕이 심양왕에 봉해졌다는 것이다.

심양은 대몽항쟁기 때에 몽고에 저항한 고려사람들이 건너가 살던 땅으로 원나라 땅이지만 고려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다. 

원은 이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충선왕을 왕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2개월 뒤 충렬왕이 죽자 고려 국왕에 봉한다.

심양왕에 이어 다시 고려왕에까지 오른 충선왕. 이는 원에서 충선왕의 입지가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와 같이 2개의 왕위를 갖고 있는 귀족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비록 그의 지위에 대한 구체적인 사료는 없습니다만 저는 그가 조정에서 왕을 제외하고 지위가 가장 높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짱 융 자앙 교수, 중국인민대학 원사 전공-

 

그런데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고려에 단 1년간 머문 뒤 다시 원으로 돌아간다.

왕이 고려에 머물지 않고 교지를 통해 다스리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이른바 '전지정치'가 실행된다.

 

충선왕은 왜 이런 전지정치를 하게 된 것일까?

 

"무종이 즉위하고 나서 곧 이어 고려왕에 충선왕이 즉위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충선왕이 원나라에 미치는 정치적 영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충선왕은 원나라에 계속 머물면서 원의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면서 고려국왕으로서의 입지도 굳히고 또 제후국 고려의 입지도 보장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원에 머문 것으로 보입니다."

- 박종기 교수, 국민대 국사학과-

 

실제 충선왕이 원의 정치에 깊숙히 개입하면서  원에서의 충선왕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높아지고 따라서 고려의 입지도 강화된다. 

그 한 예가 '고려심왕시서'다. 이 시는 원나라 학자 요수가 지은 것으로  충선왕이 심양왕에서 심왕으로 승격된 것을 축하하여 지은 시다.

 

그리고 그로인해 정치체제, 관료임명, 형벌, 조세 등

여러 부문에서 고려의 독자성이 더욱 강화되었다고 적고 있다.  

 

실제 이 시기 고려사 기록들을 보면

전왕에 비해 원의 고려 간섭이 현저히 줄었음을 볼 수 있다. 

 

"충선왕이 원의 실력자로서 권력을 회복하고 고려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고려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일단 원의 사신이 고려에 와서 내정을 간섭하려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원에서 물자를 요구하는 것도 충렬왕 때에 비해 현저히 줄어듭니다."

- 이익주 교수-  

 

이렇게 원의 간섭이 줄어들자 충선왕은 고려내에 개혁을 단행한다.

그 중 하나가 각염법으로 일종의 소금전매제도다. 소금의 이익을 국가가 전적으로 관장해 바닥이 나 있던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한 것이다.

 

이외에도 세도가들에 의해 맘대로 메겨졌던 조세를 균등하게 하기 위해 토지 조사를 실시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교서를 내린다.

 

백성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튼튼히 하려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에는 한계가 있었다.

 

"전지정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한계는 충선왕이 직접 고려 국정에 개입하지 않고 자신의 측근을 통해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측근 세력들의 도덕성, 그것이 개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됩니다.

 

충선왕의 측근 세력들은 개혁에 참여하면서 도덕적으로 굉장히 부패하고 자신의 이권을 챙기게 되고 결과적으로 충선왕의 개혁 정치는 자신의 의도대로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 박종기 교수-

 

원에 머물면서 교지로 고려를 통치했던 충선왕!.

분명한 한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를 자주국으로 지키려는 충선왕의 고육지책이었다.

 

 6.원 내부 권력 쟁탈전의 희생양!

   결국 티벳으로의 유배길을 가게되고.......

 

"충선왕은 고려왕이 되고 나서도 고려에 오지 않고 원에 계속 머물러 있었습니다.

원의 맘에 들지 않으면 고려왕을 맘대로 폐위시키던 원의 간섭이 극심했던 시기에 더우기 한번의 폐위 경험이 있었던 충선왕으로서는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이자 최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해서 충선왕은 원에 계속 머물게 됩니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왕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고 충선왕의 귀국을 강력하게 요청하게 됩니다.

이 때 충선왕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선택은 고려로의 귀국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러주는 것이었습니다.

충선왕의 이러한 선택은 왕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고려로 귀국하는 것보다 원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고려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충선왕은 상왕의 지위에서 원에 계속 머물게 되는데요,

그런데 이런 충선왕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원 조정에 깊숙히 관련된 충선왕은 갑자기 티벳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아들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러준 뒤 다시 원으로 돌아온 충선왕은 여전히 원에서 탄탄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원으로 돌아온 1313년 10월, 충선왕은 과거제 실시를 건의했고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원에도 과거 제도가 실시되기에 이른다.

"과거제 시행은 왕이 일찍이 요수의 건의를 황제께 아뢰어 허락 받은 것이다."

- 익재집-

                                                

뿐만 아니라 원나라 황제는 충선왕에게 우승상을 제의한다.

우승상은 황태자가 겸임하는 관직으로,우승상이 된다는 것은 원 조정에서 황제와 황태자 다음으로 높은 서열에 오르는 것이었다.

"우승상 독노가 파면되어 황제가 충선왕을 재상으로 삼으려 하니 왕이 굳이 사양하여 가로되

"제가 어찌 감히 영귀를 탐내어 그 자리에 올라 폐하의 밝으심을 더럽히리오리까.""

 - 고려사 충선왕 5년-

 

그러나 충선왕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원나라에 만권당(萬卷堂)을 짓는다.

만권당은 말 그대로 만 권의 책이 있는 집으로 충선왕은 정치 일선에서 벗어난 뒤 만권당에서 학문에 정진하고자 한 것이다.  만권당에는 조맹부를 비롯해 원나라의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조맹부의 글씨와 서법이 고려에 전해진 건, 만권당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조맹부 서체

 

충선왕은 원나라 학자 뿐아니라 고려 학자 이제현을 불러 원과 고려의 학문 교류를 시도한다.

"충선왕은 이러한 만권당을 통해서 자신의 정책을 구상하고 또한 새로운 학술 교류를 시도하고 한편으로는 만권당을 통한 자신의 어떤 정치를 시험하려고 했던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박종기 교수- 

 

이러한 만권당을 통해 새로운 기반을 닦아나가던 충선왕에게 위기가 닥친다.

1320년 원나라 인종이 사망한다. 그것은 충선왕의 지지 기반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 황실에서는 또 다시 황제의 자리를 놓고 분열과 갈등이 생긴다.

무종은 아들에게 왕위를 주는 대신 동생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대신, 인종이 세상을 뜨면 무종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인종은 이 약속을 무시하고 자신의 아들(영종)에게 양위를 한다.

"인종이 이 합의를 어깁니다.

 

그래서 인종이 죽고 난 다음에, 인종의 아들 영종이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여기서 문종과 인종 연합 세력 내부의 균열이 생기게 되는데 이 때 충선왕의 정치적 입장이 대단히 난처하게 됩니다."

- 이익주 교수

 

이 때 충선왕은 문종의 편에 섰고, 결국 인종의 아들 영종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충선왕은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다. 

환관 임백안의 고사가 터진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전답과 노비를 강탈하는 전횡을 일삼던 임백안을 충선왕이 벌을 주자 이에 앙심을 품고 충선왕을 모함한 것이다.

 

"앞뒤 정황으로 살펴보건대 임백안은 영종과 대립하고 있던 태후쪽의 인물로 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태후는 임백안을 움직여 충선왕을 모함하게 합니다."

- 이익주 교수-

 

원나라 정치 싸움에 희생양이 된 충선왕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금산사로 피신한다.

 

 

 

당시 강남지역에 있던 금산사는 충선왕과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한 때 불경 공부에 심취했던 충선왕은 이곳에 자주 와서 불공을 드렸고 원을 대표해 이 절에 어향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충선왕이 금산사에 이르렀을 때 이미 영종의 명을 받은 군사들이 금산사에 진을 치고 있었다.

 군사들에게 붙잡힌 충선왕은 북경으로 가 형부로 넘겨지고 그리고 머리가 깍인 채 석불사에 안치된다. 

 

북경 피재호동!.

지금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지만 고지도를 보면 피재호동 어딘가에 석불사가 있었다고 한다.

"석불사는 큰길로 변한 곳 어딘가에 있었을텐데 지금은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석불사에 갇혀 원 황실의 처분만 기다렸을 충선왕!.

결국 2개월 뒤 티벳으로 유배가라는 원나라 영종의 명령이 떨어진다.

 

 <고려사>에 의하면 충선왕을 티벳으로 보내는 이유는 불경을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1320년 12월 무신일에 원나라 황제가 상왕(충선왕)에게 불경을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토번 살사결로 유배 보내다."

-고려사 세가 35-

 

그러나 그것은 대외적으로 내세운 명목이었을 뿐이었다.

"불경을 공부하라는 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목이었을 뿐이고 실제로는 원 황실 내부에서 일어난 치열한 권력 쟁탈전에 희생이 되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자체는 충선왕이 자처한 부분이 있습니다.

 

원 황실의 내분에 개입해서 한번은 승리자가 되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지만 언젠가는 그 권력으로부터 배척을 당할 수도 있는 여지를 잉태하고 있었다고 보여 집니다."

- 이익주 교수-

 

충선왕의 유배길은 초라했다.

기록에 의하면 유배 명령이 떨어지자 충선왕을 모시던 많은 신하들은 도망을 가버리고 몇 명만 남아 충선왕의 유배길을 따랐다고 한다. 

"토번은 원나라 서울에서 1만 5천 리 떨어진 곳이었다.

 

상왕을 시중하던 재상 최성지 등은 도망하여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오직 직보문각. 박인각가. 전대호군.장원지 등이 상왕을 따라 유형지까지 갔다."

-고려사-

 

1만 5천리나 떨어진 곳으로 향하는 충선왕의 유배길은 초라하고도 처참했다.

의지할 곳 하나없는 낯선 땅 티벳에서의 유배 생활은 더더욱 외롭고 쓸쓸했을 것이다.

 

한 때 고려와 원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충선왕에게 닥친 기막힌 운명!.

그것은 원간섭기, 고려국왕에게 내려진 비극적 운명이었다.

"충선왕이 북경으로 돌아온 건 3년만이었습니다.

 

원나라 영종이 죽고 태정제가 즉위하자 충선왕이 유배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하지만 북경으로 돌아온 지 2년만에 충선왕은 51세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쿠빌라이의 외손자로 태어나 왕위에 두 번 오르고 그리고 티벳 유배까지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고려의 왕 계보도입니다. 폐위와 복위를 반복했던 것은 비단 충선왕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무려 네 명의 왕이 두번씩 왕위에 올랐고(충렬왕 - 충숙왕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숙왕 - 충혜왕 - 공민왕..) 그것은 원 간섭기, 고려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본 충선왕!.

 

그의 행적에서 우리는 고려를 자주국으로 지키려 했던 그의 의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라는 존속했지만 원에 종속되었던 고려의 운명속에서 그의 선택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암흑의 시기요, 아픔의 역사였던 원 간섭기, 어쩌면 돌아보고 싶지 않은 우리의 역사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살펴본 충선왕의 삶은 또 다른 역사적 교훈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KBS고두심의 역사스페셜>

 출처 :금강불교 원문보기▶   글쓴이 : 황금마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