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고려시대 인물

민족의 자존심, 이제현

야촌(1) 2010. 10. 8. 21:55

 

이제현李齊賢 : 1287(충렬왕 13)~1367(공민왕 16)」은 천품이 후덕하고 진중했으며 또한 학문이 깊고 넓어 그의 이론과 벌이는 일은 무엇이든 다 볼만한 것이 있었다.

원(元)의 부마국(駙馬國), 고려(高麗)고려 말 강대해진 원(元)의 내정 간섭으로 고려는 25대 충렬왕(忠烈王 : (1236~1308) 부터 반드시 왕의 시호(諡號)에 충(忠) 자를 붙여야 했다.

이후 고려는 25대 충렬왕(忠烈王)→충선왕(忠宣王 : 1275~1325)→충숙왕(忠肅王 : 1294~1339)→충혜왕(忠惠王 : 1315~1344)→충목왕(忠穆王 : 1337~1348)→제 30대 충정왕(忠定王 : 1337~1352)까지 굴욕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그 기간 고려는 태자(太子)가 원(元)의 연경(燕京 : 오늘날의 베이징)에서 지내고 원나라공주와 결혼해 돌아와 왕(王)이 되는 부마국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 : 1330 ~ 1374)이 등장하면서 그 굴욕의 역사는 끊기게 된다.

□ 몸뚱이보다 간이 더 큰 사람


1323년 원나라가 고려를 없애고 아예 하나의 성(城)으로 삼고자 하는 '입성책동'이 발발하자.

이제현(李齊賢)은 연경(燕京)으로 달려가 원(元)나라 영종(英宗 : 생몰>1304~1323>재위>1321~1323)과 문신에게 장문의 상소를 올려 단번에 원나라의 입성책동(立城策動)을 막았다고 한다.

당시 원나라의 부마국 지위에 있던 고려의 재상(宰相)이 상소하나로 중대사건을 해결한 셈이니 그의 장문의 상소와 당당함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 일을 두고 당시 원나라 사람들은 '이제현(李齊賢)은 훤칠한 키에 우람한 덩치를 가졌다. 

그런데 그런 몸뚱이보다 간이 더 크다'고 말했다.

31대 공민왕(恭愍王)이 등극하자 이제현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고 공민왕을 도와 원이 내정간섭을 위해 설치한 정동행성과 쌍성총관부를 빼앗았고 강력한 반원 졍책을 펼친다.

이때 활약한 장수가 바로 이자춘李子春 : 1315(충숙왕 2)~1360(공민왕 9)과 이성계李成桂 : 1335년(충숙왕 복위 4)~1408년(태종 8) 부자였다. 이후 반원정책으로 친원파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그 일파를 모조리 참살하고 배원정책(排元政策)을 더욱 강력하게 펼친다.

 

그리고 신진사람 35명을 영입해 개혁의 받침돌을 만들고 이때 영입된 이색李穡 :1328~96(충숙왕15~태조5)은 조선의 정도전鄭道傳 : 1342(충혜왕 3)~1398(태조 7)과 햐륜河崙 : 1347(충목왕 3)~1416(태종 16)에게 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는 암울했던 고려말 민족의 자존심을 홀로 지킨 재상이라 할만하다. 
강한 군사력이 아닌 그의 문장과 학식으로 이루어낸 일이니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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