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발해 인물 15

제5대 성왕(成王) - 재위 794∼794

제5대 성왕(成王) 재위 794∼794 이름은 대화여(大華璵). 할아버지는 문왕이며, 아버지는 대굉림(大宏臨)이다. 폐왕 대원의(大元義)의 뒤를 이어 즉위, 수도를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기고 중흥(中興)이라는 연호를 세웠으나 곧 죽었다. [참고문헌 : 新唐書] ◇渤海國志長編(金毓, 華文書局, 1934)

제3대 문왕(文王) - 재위 737∼794

제3대 문왕(文王) 이름은 대흠무(大欽茂). 무왕의 아들이다. 1980년에 발견된 정효공주묘비(貞孝公主墓碑)에 의하면 대흥보력금륜성법대왕 (大興寶曆金輪聖法大王)의 존호를 사용하였다 한다. 737년에 즉위하여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였고, 774년(대흥 38) 보력(寶曆)으로 개원(改元)하였다가 다시 대흥의 연호를 쓰게 되어 병몰할 때까지 그 연호를 지켰다. 1948년 돈화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에서 출토된 정혜공주묘의 비문을 보면 ‘보력’이라는 연호가 7년 이상 쓰였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왕은 고왕 대조영(大祚榮)이래 30년간의 수도였던 지금의 돈화분지(敦化盆地)안에 있는 오동성(敷東城)의 비좁은 지역을 벗어나 두만강 하류로 흘러들어가는 해란하(海蘭河)유역에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목단강..

제2대 무왕(武王) /재위 719∼737

제2대 무왕(武王) 이름은 대무예(大武藝)이다. 발해국의 건국자 대조영(大祚榮)의 아들이다. 713년(고왕 15) 당나라가 고왕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할 때, 대무예도 같이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하였다. 719년(무왕 1) 3월 고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인안(仁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우고, 영토를 크게 넓히는 등 발해국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722년 송화강(松花江)하류에서 흑룡강(黑龍江)유역에 걸쳐 거주하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자, 당나라는 그곳에 흑수부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두어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는 흑수말갈이 외교관계를 취할 때는 발해의 사전양해를 얻었던 전통을 파기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무왕은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통모하여 복..

제1대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 재위 699∼719

대조영(大祚榮) 본명 대조영(大祚榮). 고구려 유민으로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의 영주(營州)지방에 그 일족과 함께 옮겨와 거주하였다. 696년 이진충(李盡忠)· 손만영(孫萬榮) 등이 이끈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말갈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하였다.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고 회유하여 당나라의 세력 아래 다시 복속시키고자 하였으나 그것을 거부하였다. 당나라는 거란군을 격파한 뒤, 성력연간(聖曆年間, 698∼699)에 추격군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에 항복한 거란족 출신의 장군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나라 군사가 공격해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