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발해 인물 15

제15대 대인선(大諲譔) - 재위 907∼926

대인선은 발해의 제15대 마지막 임금이었다. 그의 재위 시절의 발해는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팽창주의에 두려움을 느끼고 신라 등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이를 견제하려 하였다. 이에 야율아보기가 925년 12월 대원수 요골(堯骨) 등을 이끌고 친정(親征)을 감행하자, 발해는 저항다운 전투도 치르지 못하고 다음해 정월에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포위되어 항복하였다. 이로써 발해는 건국 후 229년 만에 멸망하였다. 그해 7월에 있었던 거란군의 회군시에 그는 왕후와 더불어 거란 본토로 끌려갔다. 그뒤 거란이 정해준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의 서쪽에 성을 쌓고 살았다. 그뒤 사용한 이름은 거란이 내린 오로고(烏魯古)였으며, 왕후는 아리지(阿里只)였다. 이 이름은 《요사 遼史》 국어해(國語解)에는 ..

제14대 대위해(大瑋瑎) - 재위 894∼906

연호와 시호·가계 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당시의 내치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치에 관한 기록만이 있다. 일본에는 전대의 현석(玄錫)때도 다녀왔던 문적원감(文籍院監) 배정(裵)을 894년에 파견하였으며, 905년 당나라에 오소도(烏炤度)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한동안 대위해는 발해왕계에서 빠져 있었으나, 김육불(金毓)의 노력에 의하여 《당회요 唐會要》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어 발해의 제14대왕으로 밝혀졌다. [참고문헌] ◇唐會要. ◇渤海國志長編(金毓, 1934)

제13대 대현석(大玄錫) - 재위 871∼893

제13대 대현석(大玄錫) '현석왕'이라고도 한다. 제12대 왕인 대건황(大虔晃)의 아들이다. 《신당서》 발해전(渤海傳)에는 당나라 의종(懿宗)때 세차례나 당나라에 조공의 사신을 보낸 것으로 적혀 있으나 믿기 어렵다. 그것은 경왕이 즉위한 872년에서 겨우 1년반이 지나 당나라의 의종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과의 교류는 매우 활발히 전개하여 877년(경왕 6)에는 공목관(孔目官) 양중원(揚中遠)을 비롯한 105인으로 된 사절단을 보냈고, 882년에는 배정(裵挺)등 105인으로 된 대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이처럼 대규모의 사절단을 자주 일본에 보냈던 것은 평화적인 무역으로 이익을 얻고자 한 것이며, 정치·군사·문화의 교류에 뜻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참고문헌 : 新唐書] ◇渤海國志長篇(金毓, 華文..

제12대 대건황(大虔晃) - 재위 858∼871

작성일 : 2013. 09. 23 ■제12대 대건황(大虔晃) 제11대왕 대이진의 동생이다. 연호와 시호는 전하지 않으며, 당시의 내치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고, 단지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치에 관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당나라와의 교섭은 당나라 내부의 농민폭동과 관련하여 빈번하지 못하였던 데 반하여, 일본과의 교섭은 계속되었다. 858년 겨울 정당성좌윤(政堂省左允) 오효신(烏孝愼) 등 104인을 일본에 보냈으며, 860년에도 이거정(李居正) 등 105인을 일본에 보냈는데, 그 목적은 주로 신라에 대한 견제와 경제적 이해관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舊唐書. 新唐書. 渤海國志長編(金毓, 1934)

제11대 대이진(大彛震) - 재위 831∼857

작성일 : 2013. 09. 23 연호는 함화(咸和)이며, 시호는 전하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신덕(新德)이며, 할아버지는 제10대 선왕(宣王)이다. 즉위하자 여러 사신과 학생을 당나라에 파견하는 등 선왕에 이은 율령제국가 수립에 노력하였고, 당나라와의 경제·문화 교류에 힘썼다. 왕자 명준(明俊)을 832년· 836년 ·837년 세차례에 걸쳐 수십인과 함께 당나라에 파견하였으며, 왕자 광성(光晟)· 연광(延廣)· 대지악(大之萼) 등도 833·839·846년에 각각 당나라에 파견하여 당나라의 문화수용에 적극성을 띠었다. 이때 학생 해초경(解楚卿)· 조효명(趙孝明)· 유보준(劉寶俊)· 이거정(李居正)· 주승조(朱承朝)· 고수해(高壽海) 등도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당나라에서는 장건장(張建章)이 서적을 가지고 ..

제10대 선왕(宣王) - 재위 818∼830

제10대 선왕(宣王) 이름은 대인수(大仁秀). 대조영(大祖榮), 즉 고왕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발해국을 중흥시킨 군주이다. 발해국은 제6대 강왕(康王) 대숭린(大嵩璘)이 809년에 죽은 뒤 그를 이은 정왕(定王) 대원유(大元瑜)부터 희왕(僖王) 간왕(簡王)에 이르는 3대왕의 재위기간이 너무 짧아 정치적 불안을 나타내며 국세는 도리어 위축된 느낌마저 보였는데, 818년(선왕 1) 선왕대에 이르러 침체된 국세를 회복하였다. 《신당서》에는 선왕이 “해북(海北)의 여러 부족을 쳐서 크게 영토을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해국과는 예로부터 대립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송화강(松花江)하류에서 흑룡강(黑龍江)유역에 걸쳐 살고 있던 흑수말갈(黑水靺鞨..

제8대 희왕(僖王) - 재위 812∼817

제8대 희왕(僖王) 재위 812∼817 성명은 대언의(大言義)이며, 제7대 정왕의 아우이다. 주작(朱雀)이라고 건원(建元)하였으며, 재위 동안 당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냈다. 814년에는 당나라에 불상을 보내기도 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발해 불교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이밖에 특기할 업적은 없다. [참고문헌 : 新唐書] ◇渤海國志長編(金毓, 華文書局, 1934)

제6대 강왕(康王) - 재위 794∼809

제6대 강왕(康王) 이름은 대숭린(大嵩璘). 제3대 문왕의 막내아들이다. 794년에 즉위한 제5대왕 대화여(大華璵)가 그해에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정력(正曆)’이라는 연호를 썼다. 당나라에서는 즉위 이듬해인 795년 2월 대숭린에게 ‘발해군왕’의 책봉을 내리고, 798년에는 다시 ‘발해국왕’의 책봉을 내렸다. 15년간에 걸친 치적은 네 차례에 걸친 당나라에의 사신파견과 빈번하였던 일본과의 사신내왕이 알려져 있을 뿐, 특기할 만한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참고문헌] : 新唐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