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맥.붕당.혼맥

청주지역 사림들의 교육적 전통과 학맥

야촌(1) 2019. 1. 27. 19:34

2017년 청주문화원에서 발행한 청주문화 제32호에 실린 글입니다.

 

청주지역 사림들의 교육적 전통과 학맥

 

Ⅰ. 머리말

 

청주는 상당, 서원, 주성 등 여러 가지 별칭이 있는 지역이다. 청주 지역의 특성과 관련하여 신항서원의 마지막 원장을 지낸 송래희는 청주를 ‘시와 예절의 고장(詩禮之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청주는 ‘양반의 고을’, ‘선비의 고장’, ‘교육도시’로 이미지화 하다가 근래에 와서는 학자들을 중심으로 ‘학향(學鄕)’이라는 애칭이 종종 사용되고 있는데 예로부터 청주는 학문을 숭상하고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았던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문화는 단기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시간이 축적된 후에 그 특성이 나타나는 것처럼 청주지역의 교육적 이미지도 오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학문과 사상, 문화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축적되어 형성된 것이라 하겠다.

 

대체로 충청지역의 학문적 전통은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면서 예학을 주된 특징으로 하여 발전하였다.

김장생-김집의 적통이 송시열로 이어지면서 호서사림은 기호지방은 물론 전국을 아우르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연히 청주지역도 송시열의 학문적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이이의 학통과 김장생의 예학이 청주지역에서도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송시열-권상하의 문인들인 강문8학사 사이에서 인물성동이논쟁이 전개되었고,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는 명덕주리주기논쟁이 전개됨에 따라 충청지역도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었고 결국 청주라는 지역의 학문적 특성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여기에서 필자는 청주지역의 교육적 전통과 16~17세기 재지사족의 교육활동 그리고 조선후기 기호사림의 학맥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전통의 흐름을 파악하여 청주지역의 교육적·학문적 특성을 살펴봄으로써 청주지역의 성격 규명에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Ⅱ. 청주지역의 교육적 전통

 

청주지역과 교육을 연관시킬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용두사지철당간에 기록된 ‘학원경’과 ‘학원낭중’이라는 명문이다.

고려 초 광종 때 세워진 이 철 당 간에 기록된 ‘학원경’과 ‘학원낭중’이라는 관직명이 실제로 청주에 있었던 관직이거나 청주지역의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교육과 청주지역을 연관시켜 주고 있음은 틀림없다.

 

고려 성종 때 전국의 12목에 학교를 세우게 하였다는 기록과 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보내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12목의 하나였던 청주에도 학교가 설립되었고 유학을 중심으로 한 교육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초기부터 형성된 청주의 교육적 배경은 고려 말 인쇄문화로 결실을 맺게 된다. 1305년( 충렬왕 31)에 청주 원흥사에서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목판으로 간행하였으며,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 때 청주에서 수개월을 머무르는 동안 과거시험을 실시하고 합격자의 방을 망선루에 붙이기도 하였다.

 

1377년 우왕 때 흥덕사에서는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하여 서적인쇄를 통한 교육문화 전통의 꽃을 피웠다.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관학으로 향교가 설치되면서 청주의 교육적 전통이 정착되는 모습이 나타난다.

 

조선 태조 때 교육제도가 정비되고 전국의 각 지방에 향교가 설치될 무렵 청주 향교도 재정비되면서 규모를 새롭게 하였다.

1444년(세종 26) 세종이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초정에 행차하였을 때 청주향교에 통감강목, 근사록, 소학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고, 1464년(세조 10)에는 세조가 속리산을 가는 길에 청주 향교에 들러 친히 문묘제향을 주관하여 제사를 올림으로써 청주 향교는 삼남 제일의 향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조선 초 국왕과 직접 인연을 맺음으로써 청주지역의 유림들에게 청주가 삼남 제일의 고장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단종1년(1454)에는 충청도관찰사 민건, 청주목사 황보공 등 청주지역 관리들이 직접 목판으로 《신간대자명심보감(新刊大字明心寶鑑)》을 간행하였다. 명심보감은 천자문을 뗀 어린이들이 배우는 가장 기본적인 윤리 서적으로 유교적 윤리규범을 확산시키는데 영향을 끼친 교양서적이다.

 

15세기 청주에서 간행한 신간대자명심보감은 현존하는 명심보감 중 가장 빠른 시기에 간행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비록 직지심체요절과는 인쇄의 주체와 방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교육문화라는 전통이 조선으로 넘어와 16세기 사림의 시대까지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청주에서의 서적간행은 주로 문집류가 중심을 이루는데 청주 관아에서의 인쇄활동은 영남이나 호남지역에 비해 미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한 것과도 관련이 되지만 청주지역이 영호남에 비하여 근기지방과 가까워 문화적 혜택을 쉽게 받을 수 있었던 지리적 특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17~19세기 동안에 청주목사로 부임한 수령들의 거주지를 보면 서울인 비율이 86.5%를 차지하고 있어 청주지역은 서울의 문화적 그늘 아래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16세기의 청주지역은 여러 가문의 사림들이 사화를 피해 청주지역에 터전을 잡으며 재지사족으로 정착해 가는 시기였고 이들 사림들은 사적 교육공간인 서당이나 향교 또는 개인적 사숙을 활용한 교육활동을 전개하면서 사족들 간의 족적·학문적 유대관계를 형성하였다.

 

아울러 향약이 시행되고 신항서원이 설립되면서 사림중심의 유교적 질서가 청주지역에 정착해 가는 모습이 나타났다.

특히 신항서원은 청주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서원으로서 청주지역 재지사족들의 장수(藏修) 공간이 되어 교육적·학문적 전통을 잇는 중심지가 된다.

 

Ⅲ. 16~17세기 재지사족들의 교육활동

 

청주지역 사림들의 학문적 연원을 살펴보면 16세기 무렵에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신항서원과 직·간접으로 관련되는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등 다양한 학문적 계통이 나타나고 있다.

 

우선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고령신씨 가문의 신식과 신용 형제가 있다. 이들은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동인-남인 계열의 사림으로 각각 쌍천서원과 봉계서원에서 제향 되었던 인물이다.

 

16~17세기 청주지역 고령신씨 가문의 사림들은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정구, 정경세, 허목의 문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영조 조 노론에 맞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는 정치적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신항서원 창건에 참여하고 원장까지 지낸 안동김씨 김응생, 김계생 형제도 퇴계의 문인이다. 김응생, 김계생 형제의 문인으로 조강이 있는데 조강은 송인수와 성제원의 문인이기도 하다.

 

조강은 신항서원 건립에 앞장섰으며 임진왜란 시기에는 청주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대표적인 지역 사림이다.

조강은 초계변씨 가문의 변경수⋅경복 형제 및 경주이씨 이득윤 등 지역사림들과 교유함은 물론 조헌⋅정철 등 당대의 저명한 인물들과도 교유를 하였다.

 

청주목사로 부임한 이정⋅이증영 등과도 가까이 지내면서 청주지역에서 향약을 실시하는데 앞장서는 모습을 보임은 물론 청주 향교에서 강학을 실시하며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인 《모계집》에 수록된 문인은 모두 18명인데 관직을 차지한 사람이 13명이나 되어 입격자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장례 때에는 문인과 복(服)을 입은 자가 많았고, 원근에서 그를 위해 흰 띠를 두른 선비가 8·9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청주지역에서 조강을 중심으로 모인 사림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조선중기 향교를 중심으로 한 청주지역의 교육적 단면을 볼 수 있다. 특히 조강과 변경수⋅이득윤과의 학문적 교유는 1570년(선조 3) 신항서원의 창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신항서원이 설립되기 직전에는 경주이씨 이잠과 그의 아들인 이득윤의 교육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잠은 청주 수락동(현, 미원면 가양리)에 섬계서당을 열어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며 여러 문인들과 교유를 하였는데 《섬계선생 문인록》에 기록되어 있는 이잠의 문인은 71명이다.

 

청주지역으로 사림들이 정착하던 16세기임을 고려할 때 꽤 많은 인원으로 보이는데 문인들 중에는 문과 합격자가 4명, 사마시 합격자가 19명, 남행(南行) 6명, 무과 6명 등 관직 진출 비율이 상당히 높게 나타나고 있다.

 

문인 중에서 주목되는 인물로는 신항서원의 원장을 지낸 남양홍씨 홍순각이 있으며, 다수의 초계 변 씨 가문의 인물들이 있어 경주이씨와 초계 변 씨 두 가문의 친밀도를 파악할 수 있다.

 

이잠과 왕래 강학한 인물 가운데는 신항서원 원장을 지낸 변경복⋅경록 형제, 체화당사우에 배향되는 노일원 그리고 청안(증평)에 구계서원을 창건하는 신경행 등이 지역의 사림들로서 주목된다.

 

이잠의 아들인 이득윤 또한 가학을 통해 학문적 기초를 닦았고 관직생활 보다는 학문에 전념하며 많은 문인을 길러내는데 힘썼다. 이득윤은 일찍이 영남학파 정구와 교유를 하였으며 서경덕의 문인인 서기의 문하에서 《대학》·《심경》·《주역》등의 책을 배운 뒤에 역시 화담문인인 박지화에게서 역학을 배웠다.

 

중봉 조헌이 옥천에 내려와 은거할 때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교유한 사실도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말년에는 옥화대에 은거하며 김장생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태극도설〉과《주역》을 토론하였다. 이득윤의 문인 중 주목되는 인물로는 한백겸과 이덕수가 있는데, 한백겸은 《동국지리지》를 저술한 실학의 선구자로 1602년 청주목사를 지낼 때 선조의 유허지를 찾아서 청주한씨 시조 제단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덕수는 청주지역 한산이씨의 대표적인 인물로 김장생의 문인이기도 하였다. 송시열과도 교분이 아주 두터웠으며 신항서원의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득윤의 동생 이광윤은 경상도 예천으로 장가를 가서 퇴계의 제자인 조목의 문인이 되었고, 이득윤의 아들 이홍유는 김집의 문인으로 청주지역의 사림 홍석기, 신지익 등과 교유하였다.

 

이잠과 이득윤에 이어 청주 인근의 문의현 지역, 지금의 가덕면 삼항리를 중심으로 왕성한 교육활동을 전개한 이는 숙옹 유흥룡(1577∼1656)이다. 유흥룡은 송인수의 문인이었던 유희령의 증손으로 송준길⋅송시열과도 교유가 있었던 인물인데 송시열은 유흥룡 사후 그의 묘표를 직접 짓기도 하였다.

 

후대에 간행한 《숙옹유고》의 서문은 송명흠이 지었는데 《숙옹유고》에 기록된 그의 문인은 231명으로 나타난다.

문인 중 문과급제가 3명, 생원 1명, 진사 5명, 무과급제가 4명, 기타 관직을 역임한 자 4명 등이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진사 출신이 많은 것으로 보아 시(詩)와 부(賦) 같은 문예 창작의 교육에 뛰어나지 않았나 생각된다.

 

비록 문인들의 본관이나 거주지 같은 인적 사항이 거의 기록되지 않아 자료 활용에 아쉬운 점은 많지만 보성오씨, 진주유씨, 영산신씨 등 대체로 청주지역의 재지사족으로 짐작되는 인물들이 나타나고 있고, 청주, 문의, 괴산, 보은, 옥천, 천안 등에 거주하는 문인이 나타나는 점으로 보아 17세기 전반기 청주지역에서 그의 학문적 영향력이 컸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7세기 이후 공교육으로서의 향교 교육이 약화되면서 향교가 지녔던 교육적 전통의 맥은 자연스레 서원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1608년(선조 41) 청주 목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대학장구혹문》의 판본이 화양서원으로 옮겨져 서적간행과 교육활동에 활용된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해 준다.

 

오늘날의 청주지역도 신항서원이 향교를 대신하여 지역사회에서 교육적 전통의 맥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청주지역에는 신항서원을 시작으로 18세기 초까지 대략 20여개의 서원이 건립되어 재지사족과 문중 자제들의 교육을 실시하게 되는데, 이렇듯 조선후기에 청주지역에서 많은 서원이 건립된 것은 선현에 대한 봉사를 매개로 하여 교육활동의 중심 역할을 서원에서 담당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검암서원의 경우는 조헌 등 9분을 모시는 서원인데, 숙종 때 서원의 강당인 충효당(忠孝堂)을 지으면서 그 전말을 기록한 자료를 보면 배향 인물의 특징을 충과 효로 인식하면서 후손 자제들에게 춘추와 효경의 학습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율곡 이이가 청주에서 시행한 향약의 4덕목을 제시하며 자손들에게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어 율곡의 교육적·학문적 영향력이 서원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후대에 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Ⅳ. 호서사림의 학맥

 

유흥룡의 교육활동 이후 청주지역은 명문 사족인 한산이씨와 혼인으로 맺어진 송시열(1607∼1689)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다. 옥천에서 출생한 송시열은 19세 때인 1625년(인조 3)에 청주의 주성동에서 한산이씨 이덕사의 딸과 혼인을 하였으며, 1630년(인조 8)에 충남 연산의 김장생과 김집에게 나아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효종이 승하한 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송시열은 화양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오랫동안 생활의 중심지로 삼았다.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볼 때 송시열이 화양동을 처음 찾은 것은 1651년(효종 2)이었으며, 1666년(현종 7) 화양동 계곡에 집을 짓고 본격적으로 거처한 이래 1688년(숙종 14) 4월 마지막으로 화양동을 떠날 때까지 무려 23번이나 왕래하며 기거하였다.

 

송시열은 화양동을 근거지로 생활하면서 청주지역의 사림인 홍석기, 유흥룡 등과 교류를 하며 수많은 문인들을 양성하였다. 청주지역에는 송시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흔적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목은 이색의 「신도비음기(神道碑陰記)」, 강수 박훈의 「유정서원춘추향축문(有定書院春秋享祝文)」, 규암 송인수의 「신도비음기(神道碑陰記)」, 천곡 송상현의 「신도비명(神道碑銘)」,「경연 효자비문」 등을 짓기도 했는데 이들은 모두 신항서원의 배향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송시열이 신항서원의 원장을 지내며 지역 사림들에게 배향인물들의 특징인 절의와 충효 사상을 확립하기 위한 활동으로 여겨진다. 또한 신항서원기, 청주향교지, 영모당기 등의 기문과 지덕해의 묘비, 변경복⋅유흥룡⋅한일휴⋅신지익 등 지역 사림들의 묘표와 묘갈 등을 직접 지으며 청주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신항서원의 묘정비를 건립한 송시열은 비문도 직접 지었다. 증평에 있는 구계서원의 위차를 조정하였으며, 가덕에 있는 덕천서원 건립에도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우리나라의 서원에서 가장 많이 배향된 인물이 송시열이다.

 

묘소가 청천에 있는 그는 총 70여 곳의 서원과 사우에서 제향 되고 있으며, 그가 모셔진 서원 중 37개소가 사액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높은 위상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17세기 송시열이 등장하면서 청주지역은 이이→김장생→송시열로 연결되는 학문적 전통을 수용하게 되었고, 청주지역을 주기론적 기호학파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송시열로부터 시작된 학맥의 주류는 크게 김창협을 중심으로 한 근기노론과 권상하를 거쳐 강문8학사로 이어지는 기호노론의 두 갈래로 나뉜다.  지역을 달리하는 이들 두 노론 세력들 간에 인물성동이논쟁(호락논쟁)이 전개되는데 충청지역은 권상하, 한원진, 윤봉구, 채지홍 등의 주 활동 무대로 이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인물성이론의 입장에 있었던 것 같다.

 

기호노론은 송시열-권상하의 학통이 강문8학사들로 인해 분산되면서 영·정조 시기와 세도정치 시기를 거치는 동안 몇몇 분파가 생겨나기는 했지만 송시열 중심의 성리학적 계통이 주류를 이루며 근·현대 시기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송시열의 적통을 이은 수제자로 권상하(1641~1721)를 들고 있다. 권상하는 젊어서 유계와 송준길을 사사하다가 만년에 송시열의 적전이 되었다고 한다.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출중한 인물이 많았지만 권상하는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온전히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렸다.

 

권상하는 스승인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1695년(숙종 21) 화양서원을 설립하였는데 이후 화양서원은 기호사림의 구심점으로써 사론을 주도하며 군림하는 최고의 서원이 되었다. 화양서원과 함께 자리 잡고 있는 만동묘 또한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어 1703년(숙종 29) 권상하 등이 건립한 것이다. 이런 위상으로 인해 그는 화양서원과 신항서원의 원장직을 담당함은 물론 화양서원과 누암서원 등 송시열이 향사 된 서원의 각종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권상하는 이단하·박세채·김창협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로는 한원진·이간·윤봉구·채지홍·이이근·현상벽·최징후·성만징 등의 강문8학사가 있다. 그의 문인들에 의해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 전개되어 조선후기 사상계를 이끌게 된다.

 

이 논쟁은 인·의·예·지·신의 오상(五常)을 금수(禽獸)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 하는 문제, 그리고 사람의 희노애락의 정(情)이 발동하지 아니한 미발의 상태, 즉 심체(心體)에 기질(氣質)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다가 생겨났다.

 

본격적인 논쟁은 권상하 문하의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서 시작되었으며 권상하가 한원진의 설에 찬동하면서 점차 논쟁이 확대되어 근 100년 간 전개되었다.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이재·박필주·어유봉 등의 낙하(洛下: 서울) 학자들은 인성과 물성은 다 같이 오상을 가진다는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과, 미발한 마음의 본체는 기질의 선악이 없는 본래의 선이라 하는 미발심체본선론(未發心體本善論)을 주장하였다.

 

이것을 낙론(洛論)이라고 부른다. 비록 이간은 아산 즉 충청도에 살았지만 그의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낙하에 많이 있었으므로 낙론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한원진의 설을 지지하는 권상하·윤봉구·최징후·채지홍 등은 인성은 오상을 가지지만 물성은 그 오상을 모두 가지지는 못한다면서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과 미발한 마음의 본체에도 기질의 선악이 있다는 미발심체유선악론(未發心體有善惡論)을 역설하였다. 이들은 호서지역의 학자들이 중심이었기에 호론(湖論)이라고 부른다.

 

호락론자들은 모두 이이 계통의 기호학파에 속하였으므로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철저하게 신봉하였다.

이통기국설은 주희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이통’이란 이는 인과 물에 공통적·보편적인 것으로서 동일하게 상통한다는 것이고, ‘기국’의 기는 인과 물에 국한적·특수적인 것으로서 상이하다는 것이다.

 

이간은 주리적 입장에 서서 이통과 이동을 내세움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구동(俱同)으로 보아 한 가지로 오상을 가진다는 동시오상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일관시켰던 반면 한원진은 주기적 관점에서 기국과 기이(氣異)를 강조함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상이한 것으로 보았고, 그것은 기질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주장을 하여 논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권상하는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때문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때문이다’라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설을 들어 한원진의 인물성이론에 동조하였다. 권상하의 학통을 이은 한원진(1682∼1751)은 송시열의 학문과 실천을 계승하기 위해 이기심성(理氣心性)의 문제를 집중 연구하여 주자-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지는 도통 흐름의 체계를 확정지으려 했다.

 

평생 학문의 목표를 스승의 학설을 지키는 데에 두고 스승의 학설이나 입장에 대해서는 의문이나 비판의 여지없이 절대 정당한 것으로 따랐다. 그는 이단을 인간과 짐승의 구분이 없는 것, 유교와 불교의 구분이 없는 것, 화이의 구분이 없는 것 3가지로 분류하며 비판했는데 구분이 없는 무분(無分) 상태를 유교적 질서가 무너진 상태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무분비판론은 이간과의 인물성동이논쟁을 통해 한층 강화되기도 하였다. 이 호락논쟁은 조선후기 성리학의 이해가 심화되면서 노론 내부에서 심층적인 토론문화로 전개된 것이었지만 송시열 학파 중심의 노론 세력이 남인·소론과 정치적·사상적으로 대립하는 과정에서 표출된 내부 분열이자 이념의 재정비 움직임이었다.

 

당시에는 실사구시를 표방하는 실학자들의 사회개혁론이 제기되고 있었고, 양명학·고증학·서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싹트고 있었던 시기였는데 이들 송시열-권상하계 노론들은 그들의 사회적·정치적 현실대응 방안에 대한 정당성을 정통 주자학에서 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람과 생물은 본성이 다르다는 주장을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차등적 인식을 바탕으로 당시의 신분적 질서와 화이적 질서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것이라 하겠다.

 

한원진의 호론에 동조한 강문8학사 중에 윤봉구(1683~1767)가 있다. 그의 제자만을 따로 간행한 《병계문인록》을 보면 235명의 문인이 나온다. 송치규와 위백규를 비롯하여 한원진의 족질 등이 나타나고 있지만 문인록의 기록 사항이 간략하여 청주지역과 직접 연관되는 인물만을 따로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는 신항서원의 원장을 지냈으며, 율곡 주향의 위차문제에 지역 사림들의 불만이 표출되었을 때 율곡만을 따로 제향하는 일정쌍묘의 방안을 제시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신항서원이 율곡을 주향으로 하는 서원으로 존속되기를 원했으며 과거 송시열이 결정한 위차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호락논쟁에서 윤봉구는 한원진의 호론을 따라 인물성이론의 입장에 있었다. 그의 인물성이론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형성 이전에 부여되는 천리(天理)는 동일하나, 일단 만물이 형성된 뒤 부여된 이(理), 즉 성(性)은 만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처럼 본성의 문제를 물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성론이 자연물에까지 확대된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이황·이이의 이기론 이후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상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예학에 의해 구체적인 사회 규범으로써 경직되어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 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강문8학사들은 대체로 서신을 통한 토론, 대면 학습, 회합을 통한 공동강회 등의 방식으로 교육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서원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스승과 동문의 저술을 교정하는 등의 학술활동도 함께 진행하였다. 

 

이와 같은 강문8학사들의 교육문화 활동은 당시 조선의 교육체제가 서원의 보급으로 교육의 양적 기반이 확대되어 있는 상황에서 서원이나 향교 등 제도권 교육 외에도 특정인의 문하에서 지속적인 교육을 받는 문인(門人) 중심의 교육이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원진의 문인으로 송시열의 현손인 송능상(1709∼1758)이 있다. 그는 예학에 밝았으며 인물성동이 논쟁에서는 호 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윤봉구·이재·임성주를 비롯하여 친족인 송명흠과도 학문적 교유를 하였는데, 송명흠은 송준길의 고손으로서 동춘당의 가학을 계승하면서도 스승인 이재를 비롯하여 김원행, 김양행 등과도 학문적 교유를 돈독히 하여 낙론계열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송능상의 학문과 사상은 제자이자 족질인 송환기(1728∼1807)에게 이어졌다. 송환기는 송시열의 5세손으로 문의에서 출생하였다. 주로 회덕지역을 근거지로 하면서 신항서원의 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는데 한원진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호락논쟁 당시 그는 호론의 입장에 있었으며, 학덕을 겸비하여 조야의 존경을 받아 수많은 문인을 형성하였다. 그의 문인만을 별도로 간행한 《성담문인록》을 보면 모두 511명의 문인 명단이 나온다. 보통의 문인록보다 훨씬 많은 문인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문인의 자, 출생년도, 본관, 거주지, 입사 경력, 부친 성명, 현조 등이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문인들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문인록에 기록된 인물들을 거주지별로 대략 구분해 보면 충청도 33곳 176명, 전라도 39곳 173명, 경상도 28곳 88명, 황해도 9곳 21명 등으로 나타나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남지방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등에서도 문인이 나오고 있어 전국적으로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문인의 거주지를 살펴보면 충북 황간이 20명으로 가장 많고, 청주와 전라도 남원이 18명으로 그 다음으로 많다. 이는 송환기가 청주지역의 신항서원과 화양서원의 원장을 역임한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10여 곳의 원장을 지낸 이력으로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강학 활동을 전개한 것과도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써 송환기 역시 청주지역의 사림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송환기의 문인으로 송치규(1759∼1838)가 있는데 그는 송시열의 6세손으로 낙론을 지지한 김정묵(1739∼1799)의 학통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송치규는 독서를 통해 이치를 깨닫고 자신을 반성하며 실천하는 것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는 천성이 온순하고 의리에 투철하였으며 그가 죽자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였고 문인 100여 명이 상복을 입고 상여를 따랐다고 한다.

 

1820년(순조20)에 청주 신항서원에서 간행한 이흘(李忔)의 문집인 《설정집(雪汀集)》의 서문을 쓴 것으로 보아 청주지역 사림과의 연관성도 짐작할 수 있다. 권상하와 같이 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노론 정치가로 정호(1648~1736)가 있다.

 

그는 정철의 후손으로 충주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상을 치르고 난 후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을 받았다.

1684년(숙종 10) 문과에 급제를 하면서 정계에 진출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권상하에게 여러 번 정계 진출을 권유하기도 했다.

 

평생을 은둔해서 학문에만 몰두한 권상하와 대비된다. 정호는 기사환국, 갑술환국, 신임사화 등의 역사적 사건을 두루 경험하고 좌천과 유배를 거듭하다 결국 영의정까지 오르는 험난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청주의 신항서원과 화양서원의 원장을 지냈는데 신항서원의 원장을 지내며 서원의 위차를 동서분수로 정하여 지역 사림들의 불만을 해소했던 일도 있었다. 그의 학통을 이은 김위재는 호론의 입장을 나타냈다.

 

김위재(1701~ ?)는 김장생의 후손으로 정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치적으로도 같은 노론에 속하여 소론과 심한 정쟁을 겪었다. 그는 1721년(경종 1) 세자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난 신임사화로 완도군 신지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영조 즉위 후 겨우 사면되자 서산에 은거하였다.

 

사면 이후 학행으로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서산 출신으로 영조 때 대사헌을 지낸 김유경은 그의 학식과 덕을 칭송하였고, 서산의 사림과 아이들까지 김위재를 존경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학식이 공자 못지않다고 하여 ‘호서 부자(夫子)’라고 불렀다고 하며 그의 학문은 아들 김정묵에게 온전히 계승되었다.

 

김정묵(1739~1799)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학업에도 충실하였으며, 능히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도 있었으나 조부 김운택이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관직에는 뜻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경전 외에도 《심경》』·《근사록》·《성학집요》 등을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는 성리학과 예설에 밝았다.

《남당집》 중 심성·이기·예설 등에 관한 한원진의 논술이 이이·송시열의 본뜻에 많이 위배됨을 지적하고, 고증을 통하여 변증하는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의 호론 사상은 제자 송치규에게 전달되는데 김정묵은 제자 송치규가 너무 온순하여 호를 강재(剛齋)라고 지어 주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호서사림의 학맥을 정리해보면 권상하→한원진→송능상→송환기으로 이어진 호론학맥과 권상하에서 윤봉구로 이어지는 호론학맥, 그리고 송시열에서 정호→김위재→김정묵으로 이어지는 낙론학맥이 있었던 것인데 이들 세 호서노론의 학통은 모두 송치규에게 전달되면서 낙론으로 통일된다.

 

그리고 송치규의 낙론학통은 송달수(1808∼1858)에게 이어졌다. 송달수는 송치규로부터 송시열이 읽고 직접 구두를 정한 《근사록》을 받았다. 회덕의 고산사에서 스승 김정묵의 《남당집차변(南塘集箚辨)》을 교정하여 완성했다.

 

송달수도 낙론의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의 호락논쟁이 학문적 객관성을 떠나 학연과 세력에 따라 좌우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송달수의 학문은 다시 송병선·송병순 형제에게로 이어졌다.

 

한편 청주지역의 강문8학사로는 진천출신의 채지홍(1683~1741)이 있다. 그는 신항서원의 정호 원장을 도와 신항서원중건상량문, 신항서원중수기 등을 지으며 지역 활동을 많이 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채지홍은 스승인 권상하, 동료인 한원진과 마찬가지로 이기심성의 문제를 집중 연구했다. 그는 이는 기에 의하여 유행한다고 보았다.

 

즉 기의 분열운동에 이가 내재한다고 하여 논리상에서의 이의 주재성(主宰性)을 말했다. 따라서 기발·이발의 문제에 있어서는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인물성이론을 주장했던 호론에 해당한다. 채지홍은 스승 권상하를 모시고 화양서원에 가서 송시열에 대한 제향과 함께 주자대전에 대한 교육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주서차의, 의례문답 등을 교정하는 학술활동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강문8학사의 한사람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지만 후학 중에서 현달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아 그의 사후 청주지역에서의 영향력은 미약한 것으로 보인다.

 

Ⅴ. 근기노론의 학맥

 

송시열의 문인 중 근기노론의 대표적 인물은 김창협(1651~1707)이다. 예송논쟁 이후 환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송시열은 유배지에서 《주자대전》의 주석서인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편찬에 착수했고, 죽을 때까지 이 작업에 매달렸다.

 

책이 완성된 후 송시열은 김창협에게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라고 유언을 내릴 정도로 학문적으로 김창협을 믿었다.

김창협은 <주자대전차의>를 교정하면서, 송시열의 주석에서 미진한 문제를 노론 학자들과 토론했고, 이후 주자의 저술을 보완하는 작업이 노론 학자들의 주요한 전통이 되었다.

 

송시열이 <주자대전>에 매달린 이유는 주자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난 윤휴와 같은 남인들 때문이기도 하였고, 주자와 그 제자들의 저서 전모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17세기 이후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송시열에 이르러 주자대전의 주석 작업이 이루어지고, 김창협이 그 주석에 대해 다시 정밀하게 고증하는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자의 정맥이 곧 유학의 정맥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 중심에 김창협이 있었던 것이다.

 

김창협이 송시열과 다른 점은 상수와 박학(博學)을 중시하는 서울 지역의 학문적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낙론계 학풍의 시초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조성기와의 교유가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김창협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이이와 이황의 주장을 절충해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지만 주자의 학설을 굳건히 지키는 데에는 한 치의 양보가 없어서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을 적극 비판하였다.

 

김창협이 살았던 시기는 서울과 지방의 학문 경향이 점차 분기되는 시기였다. 남인도 영남남인과 근기남인으로 나뉘어 영남남인은 오직 퇴계, 조식의 학문만을 추구했고 근기남인은 퇴계에 이이의 학문을 함께 포섭하는 융통성을 보였다.

노론도 사정은 비슷했다.

 

근기지역의 노론과 호서지역의 노론으로 나뉘어 호서지역은 율곡의 학문만을 고수했고, 근기지역은 이이의 학문에 이황의 학문을 절충했다. 노론의 경향 분기도 김창집으로부터 비롯되면서 송시열의 직계 제자인 권상하의 호서학맥과 김창협의 낙론학맥으로 나뉜 것이다.

 

호서학맥과 낙론학맥의 분기는 곧 권상하의 제자들과 김창협·김창집의 제자들 사이에서 인물성동이논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김창협의 학통은 이재(1680~1746)에게 이어진다. 이재는 화양서원과 신항서원의 원장을 함께 지냈는데, 정호에 의해 동서분수로 모셔진 신항서원의 위차를 묘정비의 내용을 근거로 다시 율곡주향의 격판제로 회귀시켰던 인물이다.

 

이재는 의리론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윤봉구·송명흠·김양행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에서는 이간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 등의 심성설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예학에도 밝아 《사례편람(四禮便覽)》 등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이재의 학문적 계통은 송명흠, 임성주, 김원행 등에게 이어진다. 송명흠은 송준길의 현손으로 낙론의 입장에 있었으며 송계간을 거쳐 신항서원의 마지막 원장을 지내는 송래희로 학맥이 이어진다. 송명흠과 이종사촌 관계이기도 한 임성주는 낙론의 인물성동론에서 상이론으로 사상적 전환을 하는데 임정주와 임로에게 학통이 계승된다.

 

하지만 이재의 학문적 적통은 김창집의 손자인 김원행으로 이어지면서 박윤원→홍직필→임헌회→전우를 거쳐 청주지역의 사림들에게까지 이어진다. 낙론의 송명흠과 김원행은 고종사촌간이다.

 

김원행(1702~1772)은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조부 김창집이 노론 4대신으로 사사되고, 생부 김제겸과 친형들이 유배되어 죽임을 당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학문은 송시열을 종장으로 받드는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그 학파 자체 내에서도 인성과 물성의 문제를 두고 호론과 낙론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대립의 발단은 김창협과 권상하의 학설에서 시작된 것으로 권상하의 제자인 이간은 김창협의 학설을 이어 이재와 함께 낙론의 중심이 되었고, 권상하의 제자 한원진은 권상하의 학설을 이어 호론의 중심이 되었다. 김창협의 손자이자 이재의 문인인 김원행은 자연히 낙론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활동하였다.

 

김원행은 대체로 김창협의 학설을 답습하여 주리와 주기의 절충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는 심(心)을 이(理)라고도 하지 않고 기(氣)라고도 하지 않으며, 이와 기의 중간에 처하여 이기를 겸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겼다.

 

이것은 바로 이황의 주리설과 이이의 주기설을 절충한 김창협의 학설을 계승한 것이다. 산림의 지위에 있었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순수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지만 홍대용 같은 실학자도 배출되었다. 그의 학통을 이은 제자로는 아들 김이안과 박윤원·오윤상·홍대용·황윤석 등이 대표적이다.

 

박윤원은 서학(西學)에 비판적이었고 김이안은 화이분별(華夷分別)에 엄격하였다고 하는데 신항서원의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김창협·이재·김원행의 학통을 계승한 적전으로 박윤원(1734∼1799)이 있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실학의 전성기인 영·정조 시기였다. 박윤원은 1792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798년 원자를 위하여 강학청이 설치되자 서연관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집이 가난해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끝내 벼슬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특히 그는 당시 소개되던 서학의 폐해가 도교나 불교보다도 크다고 하여 배척하고 오직 경전의 훈고와 성리학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그의 학통은 문하의 홍직필에게 전수되었고, 다시 신응조·임헌회·조병덕 등에게 이어지며 조선 후기 근기노론의 중요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홍직필(1776~1852)은 정조~세도정치 시기 청주 지역의 사림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17세에 이미 이학(理學)에 밝아 박윤원으로부터 올바른 도를 맡길 만 한 인물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홍직필은 오희상과 가장 오래 교유했는데 당시의 원로 명사인 송환기·임로 등과도 연령을 초월해 교유하였다.

그는 호락논쟁에서 낙론의 입장에 섰으며, 임성주의 주기설을 반대했다. 홍직필은 오희상으로부터 유학자의 으뜸이라고 인정받기도 하였으며 인물성동론을 주장한 이간의 신도비명을 지었다.

 

오희상(1763~1833)은 어려서부터 김원행의 문인이었던 형 오윤상에게 수학하였고, 스스로 연구하여 성리학의 깊은 뜻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이·김창협·김창흡·이재·김원행 등의 성리설을 따르고, 한원진·임성주의 학설을 주기에 치우쳤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황과 이이의 양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절충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주리·주기의 양설에 대해서는 주리설을 옹호하였다. 인물성동이론에 있어서는 인(人)과 물(物)은 근본적으로 이(理)가 같을 뿐만 아니라 신(神)도 동일하다고 전제하고, 그 동일하지 않게 나타나는 이유는 형기(形氣) 때문이라 하여 한원진 등이 주장한 호론의 인물성이론에 반대하며 낙론의 인물성동론을 일원분수(一原分殊)로 설명했다. 오희상은 충암 김정의 문집인 《충암집》의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홍직필의 학문을 계승한 임헌회(1811~1876)는 주로 아산·연기·공주·천안 등지에서 학문 활동을 전개하며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19세기 기호학계를 주도하는 유림의 종장이었다. 임헌회는 송치규로부터 학문을 배우기도 하였는데, 1842년(헌종 8) 아버지에 인해 홍직필과 사제관계를 맺게 된다.

 

홍직필은 “지금 후학들 중에는 임헌회가 제일이니 우리의 도학이 그에게 의탁하리라”고 하여 임헌회에게 학문적으로 많은 기대를 걸었다. 또한 임헌회가 38세 되던 해에 홍직필은 “살아서는 천리에 순응하고 죽어서는 편안하니 다시 남은 한이 없다(生順死安, 無復餘憾)”라는 여덟 글자를 주면서 법도로 삼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만동묘의 향사를 철회하라는 정부의 조처에 임헌회는 상소문을 올려 철폐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만동묘 훼철 이후에는 대명유민(大明遺民)으로 자처하며 복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임헌회가 주장한 ‘명덕은 기’라는 입장은 ‘명덕은 이’라고 주장하는 이항로 문하의 김평묵과 대립하면서 논쟁이 벌어지는데 이 논쟁을 심주리주기논쟁 또는 명덕주리주기논쟁이라고 한다. 임헌회의 명덕주기설과 화서학파의 명덕주리설이 대립되어 전개된 논쟁이다.

 

당시 이항로는 서구세력의 침입으로 유교적 가치관이 붕괴되는 것을 우려했고 이들을 막기 위한 정사(正邪)의 구분이 절박했기에 심에 있어 이기를 구별하여 그 존재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논쟁은 임헌회의 문인인 전우에게까지 이어졌다. 이렇듯 임헌회 학파는 율곡의 사상을 이은 기호학파 내에서도 한말 척사를 주장하며 의병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이항로의 화서학파와도 뚜렷이 구별된다.

 

청주지역에서는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통분하여 단식을 하시어 자결하신 조장하(1847∼1910)가 임헌회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다. 김창협의 동생인 김창흡 역시 송시열의 문인인데 그의 학통은 민우수→김양행→이우신을 거쳐 화서 이항로(1792∼1868)로 이어졌다.

 

이항로의 문인으로는 유중교, 김평묵, 최익현, 유인석 등이 있는데 충북지역에서는 주로 제천과 충주지역에서 이항로의 문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청주지역에 이항로 문인의 활동이 미미한 이유는 화서학파 중 후학을 양성한 청주출신의 문인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천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이 유인석의 문인으로 확인되는 정도이다. 임헌회의 명덕주기론 사상을 적통으로 계승한 인물은 전우(1841-1922)이다. 큰 흐름으로 볼 때 전우는 이이와 송시열의 학설을 계승하여 낙론계의 학설을 더욱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의 학문적 성격은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고자 했던 점에서 조선 최후의 유학자로서 추앙받고 있지만 처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즉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고 파리장서에도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여 비판받기도 한다.

 

이런 비판에 대해 전우는 그의 저서 《추담별집》에서 국치에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학문을 이루어 도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했고, 국권을 회복한다고 외세와 손을 잡으면 나라를 회복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이적이 되는 것이라는 논지로 반박하기도 했다.

 

전라도 전주부 출신인 전우는 전라도 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도 지역에서도 많은 강학활동을 하였다. 분석자료에 의하면 1878년 4월부터 1901년 8월까지 23년 동안 충청도를 중심으로 거주지를 15번이나 옮겨가면서 강학활동을 전개하여 26개 고을에서 113명이 문인으로 입문하였다고 한다. 충북지역에서는 진천, 청주, 음성, 청안 지역을 중심으로 강학활동을 전개하였다.

 

1995년에 발행한 《청주향교지》에 기록되어 있는 청주지역의 근·현대 인물 편에는 출생년도가 1868년부터 1921년까지 출생한 인물 38명에 대한 약력이 소개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저서를 남기지 않은 유학자도 있겠지만 문집이나 유고 또는 시집을 남긴 인물들이 청주지역의 확실한 유학자로 파악되는데 모두 22명이다.

 

38명의 인물 중에는 청주지역 서원의 건립자나 배향인물의 후손으로 확실하게 파악되는 인물이 13명이며, 청주향교의 임원이나 신항서원과 직접 관련되는 일을 하였던 인물은 6명으로 파악된다. 이들이 활동한 시기는 한말에서 근·현대 시기로 실질적인 청주지역의 마지막 유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사승관계는 청주지역의 학문적 전통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단서가 된다. 이들 중 사승관계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물은 모두 11명인데 그중 임헌회의 문인이 1명, 전우의 문인이 5명으로 나타나고 있어 청주지역의 마지막 유림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은 근기낙론의 학통을 계승한 전우였음을 알 수 있다. 

 

Ⅵ. 맺음말

 

서적의 간행은 인쇄문화의 발달로 이어지고 인쇄문화의 발달은 곧 학문으로 연결되어 마침내는 교육문화의 발달로 이어진다. 고려 말부터 나타난 청주지역에서의 인쇄문화는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청주를 교육문화의 고장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조선 초 국왕과 연결된 청주향교의 위상은 청주지역의 사림들에게 삼남제일의 고장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사림이 정착하는 16세기 청주지역은 퇴계 이황의 학문적 영향력이 미치는 가운데 재지사족들의 교육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조선후기 기호사림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고 그 중심에 신항서원이 있었다. 

 

조선후기 충청지역은 송시열의 학문적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송시열-권상하의 뒤를 이어 강문8학사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며 충청지역의 호서사림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호서사림의 학맥을 정리해보면 권상하→한원진→송능상→송환기로 이어진 호론학맥과 권상하에서 윤봉구와 그 문인들로 이어지는 호론학맥, 그리고 송시열에서 정호→김위재→김정묵으로 이어지는 낙론학맥이 있었던 것인데 이들 세 호서지역 노론의 학통이 모두 송치규에게 전달되면서 낙론으로 통일된다.

 

그리고 송치규의 낙론학통은 송달수-송병선으로 이어졌다. 이들 호서사림의 계통과는 다르게 김창협→이재→김원행→박윤원→홍직필→임헌회→전우로 이어지는 근기낙론 계열의 흐름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인물성동이 논쟁에서 충청지역은 이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호론의 입장에 동조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강문8학사들 사이에 왕성한 인물성동이논쟁이 전개될 때는 청주지역도 호론의 입장이 강했지만 점차 호론과 낙론의 영향이 혼재해 오다가 결국 낙론학맥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특히 한말에서 근·현대 시기에 해당하는 청주지역의 마지막 사림들은 근기낙론의 학맥을 이은 임헌회와 전우의 영향으로 인해 화서학파와도 구별되는 비교적 온건한 학문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었다.

 

본문 사진 순서 : 직지심체요절, 신항서원,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간재 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