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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安珦) 문하의 6군자(六君子)

야촌(1) 2016. 8. 3. 02:05

■ 안향(安珦) 문하의 6군자(六君子)

 

1) 안향(安珦) 학맥의 형성배경

 

충렬왕 15년(1289) 안향[1243(고종 30)∼1306년(충렬왕 32)]이 원(元)에서 성리학[性理學 : 중국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 파]을 수용하고 귀국하자 일차적으로 그의 문하에 이름난 여섯 학자(六君子)였던 이진(李瑱)·권보(權溥)ㆍ 우탁(禹倬)ㆍ 백이정(白頤正)ㆍ 이조년(李兆年)ㆍ 신천(辛蕆) 등에게 이를 전하였다.

 

이들은 안향으로부터 전수 받은 성리학을 몸소 실천 보급하는데 앞장서게 되고 당시 학계에서는 이들을 육군자라 불렀다. 이는 성리학의 본향 송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송조육현(宋朝六賢)이라고 부른 것과 같다.

 

이는 주돈이(周敦頤,1017~1073년),정호(程顥),1032~1085),정이(程頤),1033~1107),장재(張載,1020~1077), 소옹(邵雍),1011~1077), 주희(朱熹/朱子,1130~1200)를 말한다.

 

안향(安珦)은 교관직을 역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는데, 특히 충렬왕 27년(1301) 이후는 교육중흥의 책임을 맡아 성리학의 보급에 전념하였다. 이때 과거에 급제한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그로부터 교육받은 제자이기도 하다.

 

안향의 학문은 최초로 성리학을 전수 받은 육군자를 비롯하여 동년ㆍ동문ㆍ문생 및 그와 교유한 문인들에게 계승되고 이후 이들은 과거의 고시관 또는 대사성을 비롯한 교관직을 역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생 및 문도들에게 자연히 성리학을 전승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후기는 성리학이 정치사회의 기저(基底 : 어떤 사상이나 생각 따위의 기반이 되는 생각)로 정착되어 갔다.

 

2) 안향 문하의 육군자(六君子)

 

안향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이진권보우탁이조년백이정신천 등을 일차적으로 들 수 있다. 이들은 당시 학계에서 소위 육군자로 불리던 사람들로서 안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그로부터 성리학을 전수받고 이를 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하게 된다.

 

이것은 「안자연보」에서 “…(안향은) 육군자로 불려지던 그의 문인 동암 이진ㆍ국재 권보ㆍ역동 우탁ㆍ매운당 이조년ㆍ이재 백이정ㆍ덕재 신천등과 더불어 의리를 강론하고 또 정학을 창도하는데 힘썼다.”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고, 또 「매운당선생기년」에서 “안향은 문인 이진ㆍ권부ㆍ우탁ㆍ백이정ㆍ이조년ㆍ신천 등과 더불어 서부의 대암상(권부의 가택이 있는 반타석)에서 강론하였으니 그때 사람들은 이들을 사원(士園)의 육군자라 하였다.”

 

(1) 이진 李瑱, 1244년(고종 31)~1321년(충숙왕 8)』

 

이진(李瑱)은 안향보다 나이가 한살 아래였는데 두 사람의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그가 과거에 합격하던 충렬왕 6년(1280)에 안향은 국자사업(國子司業=國子監의 從四品 벼슬)으로 있어 정치적 기반이 성숙되고 있었던 시기이다.

 

그는 안향의 벗으로서 그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많은 석학들과 교유를 가졌고, 또 관료에서도 같이 활동하였다.

그가 충렬왕 20년(1294) 경산(慶山)의 태수(太守)로 있을 때, 안향은 동지밀직사사로서 동남도병마사가 되어 합포(마산의 옛 지명)에 출진하고 있었는데, 마침 조정으로부터 지공거의 명을 받고 귀경하게 된다.

 

이에 안향은 귀경길에 경산에 들러 이진을 방문하고는 「자합포부과소도경산」이란 시를 지어주며 정담을 나누었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그는 검교정승을 제수 받고 임해군에 봉해졌다.

 

충숙왕 원년(1314) 6월에는 찬성사 권보, 삼순사 권한공, 평리 조간, 지밀직 안우기(安于器,1265~1329) 등과 더불어 성균관에 모여 강남에서 새로 구입한 경적 1만 8백여 권을 분류 정리 하였다.

 

이때 성리학에 대한 서적이 대량 입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우기는 안향의 아들이다.

충숙왕 2년(1315) 정월에는 고시관이 되어 윤혁과 더불어 과거를 주관하여 박인간(朴仁幹,미상~1343)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이때의 과거에서 민사평(閔思平)ㆍ조렴(趙廉) 등과 더불어 안목[安牧,1290~1360년(공민왕 9)]도 합격하였는데, 안목은 안향의 손자이고, 그의 아들 제현[齊賢,1287년(충렬왕 14)∼1367년(공민왕 16)]과는 벗이기도 하다. 충숙왕 8년(1321)에 졸하였는데 수(壽) 78세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친구 이진(李瑱)에게 보여준 안향(安珦) 칠언율시

 

甲午秋自鎭邊歸道次京太府示太守李東菴

갑오추자진변귀도차경산부시태수이동암

 

◇갑오년 가을 진변(鎭邊)에서 돌아가는 길에 경산부에 들려서 태수(太守) 이동암(李東菴)에게 보임

 

지은이 : 안향(安珦)

 

첫 여름 바닷가에 진수하러왔다가 / 夏初分鉞海邊來

한창 더위에 치원대를 읊으며 지났네. / 吟過三庚致遠臺

역사들 빗발처럼 달려와 전하는 밀지 / 驛使雷馳傳密旨

현재들 뽑는 과기가 불일간 닥쳐온다고/ 文闈火迫選賢才

성산의 장마 물을 떼 타고 건넌 것은 / 星山暴潦乘槎渡

월궁 서늘바람에 계수 꽃을 재촉 하네 / 月窟涼飆養桂催

 

◇성산(星山=경북 성주(星州)의 옛 이름.

 

이 시는 1294년(충렬왕 20)에 안향(安珦)이 동남도 병마사로 합포(마산)에 갔다가 6월에 지공거가 되어 돌아오면서 지은 칠언율시로 회(灰) 운이다. 경산태수 이 동암은 이진(李瑱,1244~1321)으로 이제현의 아버지이고 그의 친구이다. 나중에 대성전을 세워 공자상을 모시고 이진을 경사(經史) 교수로 추천한 것으로 보아 친밀한 사이였다.

 

수련은 병마사로 합포(마산의 옛지명)에 왔다가 떠나게 된 사실을 읊었다.

초여름에 왔다가 삼복에 월영대를 떠나게 된 아쉬움도 묻어있다.

 

함련은 조정에서 전해온 소식을 직서한 것이다. 그를 지공거로 삼아 다가올 문과 시험을 주관하라는 임금의 명이다. 경련은 성주에서 낙동강을 건너 영천으로 온 노정을 말하고 머지 않아 훌륭한 인재를 뽑을 희망을 계수나무 꽃이라고 은유했다.

 

그는 신 유학을 본격적으로 탐구할 새로운 인재가 필요했고, 양현고(養賢庫)와 섬학전(贍學錢)을 두게 하고 인재양성의 재정적 뒷받침을 하게 했다. 미련에서는 자신이 주관한 과거에서 인재들을 뽑아 급제자의 이름을 임금에 아뢰고 잔치 자리를 마련해 풍악을 울리면서 비단 하사품을 내릴 일을 생각하고 흡족해 하는 것이다. 이 詩로 신 유학을 내세운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東文選 卷14, 1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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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의 도입과 문교진흥

 

고려는 고종 말에 원(元)과 화친을 맺은 이래 대대로 몽고의 간섭을 받아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이 손상되었다.

그러나 종전(終戰)에 따른 평화회복은 학문과 문교(文敎)의 부흥을 가능하게 했다.

 

충렬왕 때는 이러한 문교부흥의 기운이 소생하기 시작한 시기인데, 특히 원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원나라는 이미 남송(南宋)을 멸하고 명유(名儒)를 초치하여 유학을 장려하던 시기로서 정주학(程朱學)이 북방에서도 행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안향은 이러한 시기에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이를 국내에 들여온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이다. 그는 충렬왕 15년(1289)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를 직접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眞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왔으며, 충렬왕 23년(1297)에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모셨다.

 

또한 충렬왕 29년(1303)에는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신서(朱子新書) 등을 구해오게 했다.

 

아울러 문교진흥을 위해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를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켜 그 이자로 인재양성에 충당하도록 했다.

 

충렬왕 30년(1304)에는 섬학전을 설치하여 박사(博士)를 두고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다. 섬학전은 일종의 육영재단으로 당시 국자감운영의 재정기반이 되었다.

 

●성리학의 학풍 및 육군자의 인명

 

안향이 전한 성리학은 당시 원나라의 학풍을 주도한 허형(許衡)의 학풍으로 우주론적인 이기(理氣) 보다는 심성수양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인의 도는 일용륜상(日用倫常) 속에서의 충(忠)·효(孝)·신(信)·경(敬)·성(誠)이라는 실천덕목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점에서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윤리를 경시하고 의리에서 벗어났다고 배척했다.

 

《회헌실기 晦軒實記》의 "내 일찍 중국에서 주회암(朱晦菴:주자)의 저술을 얻어 보니 성인의 도를 발명하고 선불(禪佛)의 학을 물리친 것으로, 그 공이 족히 중니(仲尼=공자)에 비할 수 있다. 중니를 배우려면 먼저 주회암을 배우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주자가 저술을 통해 불교를 배척한 공이 높으며 공자의 학문은 주자의 학문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주자를 경모하여 주자의 화상을 벽에 걸어두었으며, 자신의 호도 주자의 호인 회암(晦菴)의 '회'자를 따서 회헌이라 했다. 이렇듯 안향으로부터 시작된 성리학은 한국유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고려의 불교세력과 대항하고 나아가 그것을 압도하면서 조선의 건국이념으로까지 성장했다.

 

(1) 이진(李瑱)

 

이진「李瑱,1244년(고종 31)~1321년(충숙왕 8)」은 고려 말의 문신(文臣)으로, 초명은 방연(方衍), 자(字)는 온고(溫古), 호(號)는 동암(東菴), 본관은 경주(慶州),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금서(金書)의 후손으로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내고 상서성좌복야(尙書省左僕射)에 추증된 핵(翮)의 아들이고 익재 제현(齊賢)의 아버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백가에 능통하여 신흥관료사회에서 신망이 두터웠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박통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국재 권부((菊齋 權溥), 역동 우탁(易東 禹倬),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 이재 백이정(彝齋 白頤正), 덕재 신천(德齋 德齋)과 함께, 안향(安珦) 문하의 이름난 육군자(六君子)의 한사람이고. 안향(安珦)의 벗이기도 하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광주사록(廣州司錄)을 거쳐 직 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충렬왕이 시부(詩賦)로써 친히 문신들을 시험하여 9명을 뽑았는데 제2등으로 뽑혔다.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이 되었다가 안동부사로 나가 민폐를 없애고 학교를 일으키는 데 공헌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군부총랑(軍部摠郎)이 되고, 1297년(충렬왕 23)에 우사의대부사림원학사 시우산기상시(右司議大夫詞林院學士試右散騎常侍)를 거쳐 대사성 밀직승지(大司成密直承旨)가 되었으며, 1303년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07년 적폐(積弊)의 일소를 상소한 것이 채택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된 뒤, 상의도첨의사사찬성사(商議都僉議司事贊成事)가 되었다. 1313년에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고, 임해군(臨海君)에 봉작되었다. 1315년에는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진사(進士)를 뽑았다.

 

1320년에는 아들 제현(齊賢)이 과거의 고시관이 되어 새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수(壽)를 칭송하자 전왕인 충선왕(忠宣王)이 은병(銀甁) 200개와 쌀 50석을 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학문과 시주(詩酒)로 소요하였다.

 

충주 도통사(道統祠), 보령의 삼사당(三思堂), 울산의 태화서원(太和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동암집(東庵集)』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2) 백이정(白頤正, 1247, 고종34~1323, 충숙왕 10)

 

백이정은 타고난 품성이 순후하여 공보(公輔)의 기(器)가 있었으며,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많은 학문적 영향을 받게 된다. 그의 아버지 백문절은 안향과 국자감에서 같이 교관으로 재임하였고, 이들의 친분도 각별하였다.

 

또 안향의 아들 우기(于器)는 백이정이 과거에 합격하기 전의 과거에 합격하여 이들 사이에도 서로 교유관계가 있었다. 이와 같이 볼 때 백이정은 비록 안향과는 몇 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그를 스승으로 사숙하였을 것이며, 또 직접 국자감에서 교육도 받았을 것이다.

 

충렬왕 24년(1298)에 충선왕은 즉위한 지 8개월만에 퇴위하고 원에 가게 된다.

이때 그는 충선왕을 호종하여 원에 갔고, 이곳에서 10년 동안 숙위하면서 그 동안에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다.

 

10년 후인 충렬왕 34년(1308)에 왕이 죽자 충선왕이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오르는데, 이때 그도 충선왕을 따라 귀국하게 된다. 그는 귀국하면서 그 동안에 수집한 정주(程朱)의 서를 가지고 왔으며, 이로써 당시 학계는 성리학의 연구에 활기를 띄게 된다.

 

백이정은 충선왕 2년(1310)에 왕의 신임을 받아 녹봉을 받는 검교재신으로 임용되었고, 충숙왕원년(1314)에는 첨의평리가 되어 상의회의도감사를 겸하였으며, 후에 상당군으로 봉작되었다. 충숙왕 10년(1323)에 죽으니, 향년 77세이다. 충숙왕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문헌이란 시호를 내렸다.

 

(3) 신천(辛蕆 ?~1339, 충혜왕 복위 즉위년)

 

경상도 영산인으로 호는 덕재이다. 충렬왕 20년에 안향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숙왕 원년(1314)에 선부직랑이 되었고, 충숙왕 13년(1326)에는 국자감시의 시관이 되어 이달중 등을 선발하였다.  충혜왕 복위 즉위년에 판밀직사사로서 죽었다. 그동안에 총랑을 역임하였다.

 

그는 안향의 문생으로 권부ㆍ백이정ㆍ우탁ㆍ이조년ㆍ이진 등과 교유하여 성리학을 연마하였으며, 당시에 육군자의 한명으로 존경을 받았다. 충숙왕 6년에는 안향을 문묘에 종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것은 『고려사절요』에서 “문성공 안향을 문묘에 종사하게 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향은 비록 국자감에 섬학천을 설치하도록 건의하여 인재를 양육한 공적은 있지만, 어찌 이것으로서 그를 문묘에 종사할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향의 문생 총랑 신천이 극력 주장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다.” 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 보이고 있다.

 

(4) 우탁(禹卓, 1262, 원조3~1342, 충혜왕 복위 3)

 

우탁은 단산인(丹山人)으로 자는 천장 또는 탁부라 하였고, 호는 단암 또는 백운당이라 하였으며, 세칭 역동선생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원종 3년(1262) 단산현품달리 신원(현재 충북 단양군 적성리)에서 문하시중으로 추증된 천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과 지조가 바르고 곧았으며, 천품이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충렬왕 4년(1278) 17세로 향공진사에 선발되고, 충렬왕 16년(1290)에 29세의 나이로 정당문학 정가신ㆍ판비서사 김변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는 권부와 동갑으로서 권부가 성균시에 합격한 2년 후에 향공진사에 합격하여 국자감에서 수학하였던 것 같다.

 

충렬왕 4년에 안향은 국자사업으로 있었는데, 그가 이때 안향으로부터 수학하였다는 것은 『역동선생실기』에서 『동국연원록』의 내용을 인용하여 “선생이 어릴 때 회헌선생 유에게서 처음으로 학문을 배웠다.”라고 하였고, 또『동국문헌록』에서 “회헌의 문하에 경을 끼고 수업받는 사람이 칠관십이도를 비롯하여 수백명에 이르렀다.

 

그 도를 깨닫고 이를 후세에 전하는데, 특히 공을세워 유림에 기록된 사람은 역동을 비롯하여 덕암 신천ㆍ상당 백이정ㆍ국재 권부 4명 뿐이다.” 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 보이고 있다. 충렬왕 16년(1290)은 안향이 왕을 호종하고 원에 갔다가 귀국하던 해이며, 성리학을 최초로 전래하였던 시기이다.

 

우탁은 향공진사로 선발되어 중앙에 선상된 17세 이후 안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과거에 합격하던 해에는 안향으로부터 성리학을 전수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과거에 급제한 후 영해사록을 제수 받아 행한 치적에서도 보인다.

 

이때 행한 그의 치적에 대하여 『고려사』열전에는 “탁은 등과되어 처음 영해사록에 선임되었는데, 군에 요괴한 신사가 있어 이름을 팔영이라 하였다. 이로써 백성들은 귀신들의 장난에 유혹되어 봉사를 심히 번독하게 하였다.

 

탁이 이르자 곧 이를 부숴 바다에 던지니, 마침내 음사가 드디에 끊어졌다.”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충렬왕 원년에 안향이 상주판관으로 부임하였을 때 무녀들의 농간을 퇴친한 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5) 권보(權溥, 1262, 원종3~1346, 충목왕 2)

 

권부는 충렬왕 5년(1279) 찬성사 박항과 전법판서 곽여필의 문하에서 나이 18세로 과거에 등제하였고 다음해에 문신 친시에 합격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는 성품이 충효하고 자혜하여 왕으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아 관로가 순탄하였고, 충숙왕 때에는 첨의정승ㆍ판총부사를 제수 받고 영가부원군에 봉작되었다. 충렬왕 27년(1301)에는 지공거를 맡아 이제현ㆍ박원계ㆍ노승관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이들 중에서 이제현은 고려후기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그도 성리학에 깊은관심을 가져 『주자사서집주』를 간행하여 성리학의 보급에 힘썼다.

 

『고려사』열전에서는 이러한 그의 노력을 크게 평가하여 “부(溥)는 성품이 충효하고 친족과 인척들에게 자혜스러웠고, 또 동료나 친구들에게도 화목하였으며, 독서를 즐겨 늙어서도 쉬지 않았다. 일찍이 주자의 『사서집주』를 널리 펴도록 건의하여 이를 간행하니, 동방의 성리학이 부로부터 시작되었다.

 

『은대집』 20권을 주석하였으며, 또 아들 준과 더불어 역대의 효자 6명을 모아 책을 만들어 사위인 이제현으로 하여금 찬을 짓게 하고 이름을 『효행록』이라 하니 세상에 널리 행하였다.”라고 하여 그를 동방 성리학의 최초 전래자로 부각시키고 있다.

 

(6) 이조년(李兆年, 1269, 원종10~1343, 충혜왕 복위4)

 

이조년은 원종 10년 경산부 용산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원로이다.

증조는 돈문이고, 할아버지는 득희이며, 아버지는 장경인데 모두 부사를 지냈다.

 

『고려사』에서 그의 인품에 대하여 “어려서부터 지절이 있어 학문에 힘썼고, 공검하고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라고 하였고, 이제현은 그의 묘지명에서 “공의 사람됨은 비록 키는 작았지만, 재기가 정한(精悍)하여 뜻이 확실하고 과감히 말하였다.

 

이로써 가는 곳마다 명성을 떨쳤고, 또한 공적이 빼어났다. 특히 그의 대절(大節)은높이 살만하다.” 라고 하였다.

그는 충렬왕 11년(1285)에 향공진사로 선발되니 이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충렬왕 20년(1294)에는 안향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는 17세에 향공진사에 합격한 이후 안향의 문하에 출입하였던 것 같다.

 

“이조년은 17세에 향공진사로서 내과에 등제하여 회헌선생 유를 중경 태묘동으로 찾아가 뵙고 가르침을 청하였다.”49 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안향의 문하에 계속 출입하면서 가르침을 받았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