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성씨별관향 95

성씨와 보첩(譜牒)에 대한 변증설.

五洲衍文長箋散稿 / 日得 성씨와 보첩(譜牒)에 대한 변증설. 하늘이 사람을 낸 지 이미 오래다. 만일 사람에게 성(姓)과 씨(氏)가 없다면 그 족(族)을 구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으레 성과 씨를 정하여 그 족을 분별하였으니,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 무릇 성은 오제(五帝 소호(少昊)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요(堯)ㆍ순(舜).《사기(史記)》에는 소호 대신 황제(黃帝)로 되어 있음)에서 생기고 씨는 제후(諸侯)에게서 생겼다. 천자(天子)가 제후의 출생한 지명을 따라서 성을 주고 수봉(受封)된 지명을 따라서 씨를 명하였으니, 성은 그 조상의 근본을 통할하고 씨는 그 자손의 유래를 분별한다. 천자는 성과 씨를 줄 수 있고 제후는 씨는 줄 수 있다. 또한 성을 씨로 호칭할 수 없고 씨를 성으로 호칭할 수 없으며..

경주이씨 연원(慶州李氏 淵源)

■ 慶州李氏 淵源 1.머리말 경주이씨의 시조는 신라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초기 신라의 6촌 중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의 촌장으로 전해지는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新羅史에 의하면, 慶州李氏 始祖 李謁平은 기원전 117년인 漢武帝 元狩 6년 甲子年에 하늘로 부터 辰韓땅 金剛山의 瓢巖峰(지금의 경주시 동천동 산16번지)에 下降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그리고『삼국사기(三國史記) 1권』 ‘신라본기(新羅本紀)’에 儒理王 9년(西紀 32) 六部村長에 各各 賜姓하였는데, 이때 첫째 閼川 楊山村長 謁平에 李氏를 賜姓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536년에는 신라 제23대 法興王으로부터 文宣公이라는 諡號를 받았고, 656년에는 신라 제29대 武烈王으로부터 恩烈王으로 追封되..

영산김씨(永山金氏)/영동김씨(永同金氏)

■ 영산김씨연원(永山金氏淵源) 시조(始祖) 김영이(金令貽)는 신라 신문왕(神武王)의 넷째 아들 익광(益光)의 후손이다. 고려 때 전객시령(典客寺令)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길원(金吉元)이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 토벌에 공을 세워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영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영산은 충청북도 영동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영동김씨(永同金氏)라고도 한다. 김길원의 아들 종경(宗敬)은 고려 정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를 거쳐 도총관을 지냈다. 김종경의 손자 김수온(金守溫)은 세종과 세조때의 명신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는 세종때 ‘치평요람’ 과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에 참여하고 ‘석가보’를 증수했다. 김수온은 문장이 뛰어나 당시 서거정, 강희맹과 어깨를 ..

창녕조씨(昌寧曺氏)

↑창녕조씨 시조 조계룡 묘단(昌寧曺氏始祖曺繼龍 墓壇).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노당 2리 초재마을 ↑시조 태사공 묘단 비(始祖太師公墓壇碑) ■시조 태사공 묘단 비명(始祖太師公墓壇碑銘) 신라 태사 부마도위 창성부원군 조공 휘 계룡 묘단 비명 전서 창녕조씨 시조 신라 태사 부마도위 창성부원군 묘단 비명 병서 보국숭록대부 행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판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풍산 홍량호 근찬 후손 통정대부 행 동래도호부사 봉진 경서 후손 통정대부 행 홍문관 부응교 지제조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세자시상원 사서 석정 경전 하늘과 사람은 엄연히 갈라졌으되 왕왕 하늘의 정기가 변하여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이 있으니, 하늘이 보낸 제비 알을 먹고 태어난 상(商)나라의 시조라든지,..

학성이씨(鶴城李氏)

■ 학성이씨(鶴城李氏) [시조(始祖)] 이예(李藝) [본관연혁] 학성(鶴城)은 경상남도 동해안에 위치한 울산(蔚山)의 옛 이름으로 본래는 진한(辰韓)의 땅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굴아화촌(屈阿火村)으로 파사왕(婆娑王) 때에 지변현(知邊縣: 戒邊城‧神鶴城‧火城郡)을 설치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하곡현(河曲縣)으로 고쳐 임관군(臨關郡)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 태조 때 이 고장 사람인 박윤웅이 태조를 도운 공으로 우풍현(虞風縣)과 동진현(東津縣)을 병합해 흥려부(興麗府)로 승격되었다가, 991년(성종 10)에 공화현(恭化縣)으로 강등되었다. 1018년(현종 9)에 울주군(蔚州郡)이 되어 속현으로 동래현(東萊縣)과 헌양현(陽縣)을 관할하였다가 방어사로 고쳤다. 1397년(태조 6)에 진(鎭)..

울산이씨와 학성이씨의 시조 이예의 선조

■ 울산 이씨(蔚山李氏)와 학성 이씨(鶴城李氏)의 시조 이예의 선조 경주이씨는 알평공에서 시작되어 2천년의 역사가 존재하며 많은 문무대신을 배출하였다. 다만 알평공에서 중시조인 이전의 기록은 없어 안타까운 현실이다. 다행히 목은선생의 문집에 익재공 선조의 기록이 남아 휘 거명을 중조로 삼아 현재 까지 계대를 이어 오고 있다. 그중에 경주이씨에서 분적한 이씨가 있으니 합천이씨.재령이씨 아산이씨,원주이씨.차성이씨,우계이시, 울산이시 등이 있다. 많은 분적종 중에 울산이씨가 있는데 시조(始祖) 이철(李哲)은 고려(高麗) 고종(高宗)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에 올랐으며, 김취려(金就礪)를 도와 영변(寧邊)에서 글란군(契丹軍)의 침입(侵入)을 격퇴(擊退)한 공(功)으..

존경받는 명문가들의 특별한 내력

■ 존경받는 명문가들의 특별한 내력 글; 조용헌 명문가(名門家)는 왜 필요한가? 오랫동안 나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명문가는 필요하다. 사회가 혼란기에 처했을 때 명문가의 존재가 드러난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경제 위기로 인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 상황이 되었거나, 이념의 갈등으로 사회적 분열이 심화되었을 때 명문가의 존재가 부각된다. 명문가가 명문가인 이유 명문가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집안을 가리킨다. 존경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존경 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만한 역사적 검증을 거쳤기 때문이다. 평소에 존경이 축적되어 있어야만 난세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여론을 통합시키는 힘이 있다. 존경이 없으면 말발이 먹히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사회경제적 위기야말로 사회적 지..

대구서씨와 달성서씨 관계

■ 대구서씨(大丘徐氏)와 달성서씨(達城徐氏) 관계 대구서씨(大丘徐氏)는 고려 중엽 군기 소윤공 휘 한(閈)을 원조로 하고, 달성서씨(達城徐氏)는 고려 중엽 판도판서(版圖判書) 휘 진(晉)을 시조로 한다. 대구서씨 선조는 대구(大丘)와 달성(達城)을 병행하여 사용하였으나 (1975년 사가공 선영 이장시에 발굴된 묘지석에 大丘人으로 되어 있고. 문과 방목에 의하면 성종 때 까지는 大丘, 이후 영조 때 까지는 달성을, 그 이후에는 다시 大丘를 사용한것 같다.) 공숙공 휘 문중祖께서 숙종 28년(1702년) 초간 임오보를 발간하며, 본관을 大丘로 정하여 대구서씨 세보(大邱를 만들었다. 임오보에 의하면 판도공 후손들은 동성동본이며 한 조상의 후손이 분명한 것 같으나 세계상의 연관을 할 수가 없어 별보로 하여 함께..

대구서씨와 달성서씨의 비교

■ 대구서씨와 달성서씨의 비교 구 분 달 성 서 씨 대 구 서 씨 특 기 사 항 원조 또는 시조 판도공 진(晉) 소윤공 한(閈) 두 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문헌상의 고증이 아직 없다. 후손들의 본 달성(達城) 대구(大丘) 또는 달성(達城) 대구서씨의 대구는 대구광역시의 大邱와 다르게 大丘로 쓴다 종파 9개종파(현감공파, 학유공파,판서공파, 감찰공파,진사공파, 생원공파,진사공파, 참판공파,종사랑공파) 12개종파(만사공파,전첨공파,첨추공파,도위공파,봉사공파,사가공파,서흥파,춘헌공파,승사랑공파, 장원공파, 훈련봉사공파,배산파) 대구서씨의 종파는 1852년도 임자보 당시에는 7개 파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이후에 늘어난 5개 파는 상계가 확실치 않아 계미 보에서는 임편에 등재되었다. 가문을빛낸 선조(정부수립 이..

대구지역의 노론가문

대구지역의 노론가문 옥천전씨(沃川全氏) 단양우씨(丹陽禹氏) 능성구씨(綾城具氏) 인천이씨(仁川李氏) 달성하씨(達城夏氏) 순천박씨(順天朴氏) 김녕김씨(金寧金氏) 김해김씨(金海金氏) 달성서씨(達城徐氏) 파평윤씨(坡平尹氏) 중화양씨(中和楊氏) 제가 독서하다가 정리해둔 자료입니다. 대구지역에서 노론의 학맥을 계승하고 노론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던 주요 가문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경상도는 남인가문이 많았는데, 위의 가문들은 노론가문입니다. 글 > 중국 호남성 형양사범대학교 이상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