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성씨별관향

대구서씨와 달성서씨 관계

야촌(1) 2013. 10. 18. 01:30

대구서씨(大丘徐氏)와 달성서씨(達城徐氏) 관계

 

대구서씨(大丘徐氏)는 고려 중엽 군기 소윤공 휘 한(閈)을 원조로 하고,

달성서씨(達城徐氏)는 고려 중엽 판도판서(版圖判書) 휘 진(晉)을 시조로 한다.

 

대구서씨 선조는 대구(大丘)와 달성(達城)을 병행하여 사용하였으나 (1975년 사가공 선영 이장시에 발굴된 묘지석에 大丘人으로 되어 있고. 문과 방목에 의하면 성종 때 까지는 大丘, 이후 영조 때 까지는 달성을, 그 이후에는 다시 大丘를 사용한것 같다.)

 

공숙공 휘 문중祖께서 숙종 28년(1702년) 초간 임오보를 발간하며, 본관을 大丘로 정하여 대구서씨 세보(大邱를 만들었다.

 

임오보에 의하면 판도공 후손들은 동성동본이며 한 조상의 후손이 분명한 것 같으나 세계상의 연관을 할 수가 없어 별보로 하여 함께 수보하였으나, 문헌상 서로간의 연관점을 찾지 못하여 문민공 휘 종옥祖 께서 영조 12년(1736년) 대구서씨 단독으로 2간 병진보를 간행하고, 판도공 후손은 영조 31년(1755년) 본관을 달성으로 하여 별도의 세보를 만들었다.

 

소윤공 이후 5세 실전은 고려 인종이 후 무인이 집권하고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과 몽고의 침략등으로 인하여 사회가 혼란하여 기록이 분실된 것으로 생각되며 그리하여 달성과의 연관이 어렵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일부 달성서씨들이 만성보, 조선씨족통보, 서씨 사적 정해 등을 인용하여, 판도공이 소윤공의 증손이며 판도공파가 큰집이라고 하나 고증할 수 없으며 어떤 근거에서 추정한 것인지 의문이다.

 

이 책들은 1900년대 초기에 발간되었으며 일부 인용서의 경우 여러 타 문중으로부터 잘못된 부분의 항의를 받고 있는 실정으로 구전을 바탕으로 만든 책을 가지고 고증함은 대단히 무리라고 생각된다.

 

사가공 가첩 운운하나 대구서씨 문중에도 없는 가첩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임오보 발간 당시에도 몰랐던 사실을 300년이 지난 지금 사실인양 주장하니 어디에서 근거하였는지 의문이다. 책의 저자는 요즈음 말하는 “--라 하드라” 정보를 적어 놓은 것이 아닐까요?

 

일부 달성 서씨의 주장에 의하면 일찍부터 한양에 올라가 벼슬을 하던 경파는 정계에 진출하여 영달하였고 벼슬과 별로 인연이 없는 향파는 고향을 지키고 살아 왔는데 경파가 출세하여 고향에 있는 일족을 무시하여 벼슬이 없는 향파라 하기에는 너무 큰 집이기에 경파의 문서를 모두 불태웠다고 하니 언제쯤 일인지, 어디에 그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달성서씨 세보에 의하면 1500년대 초반까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대구서씨는 사가공 휘 거정(1420년~1488년) 이후 충숙공 휘 성께서 1576년 문과에 급제할 때까지 큰 벼슬을 하신 분이없었고 공숙공 휘 문중(1634~1709년)께서 1702년 임오보를 발간할 즈음하여 세계상의 연관점이 없었으니 약 50년 사이 일인데 공숙공이 몰랐을리 만무하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판도공이 소윤공의 증손이라면 왜? 판도공 이전 선대의 문서도 같이 불태웠을까?

효와 경을 중시하는 우리 문중에서 일가 친척이 벼슬이 없다고 인연을 끊는 관련 문서를 불태울 정도로 멸시하였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 예로 봉사공 휘 팽려의 후손들은 1496~7년 사가공의 영천 향원으로 내려와 오직 학문과 수양에만 정진하고 큰 벼슬 하신 분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향파라고 할수 있는데 문중의 무시를 당한 적이 없었으니 어찌 된 걸까?

 

대구서씨 세보 무인보(1818년 발간)에 의하면 공주보라고 하는 것은 공주의 김씨 성을 가진 이의 집에 소장하고 있던 만성보인데, 그 속에 서씨의 실전된 5세의 이름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그 기록을 갖다 보니 신(愼), 무질(無疾), 휴(休), 귀남(貴男), 윤복(允復)이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뒤에 사가공집(四佳公集) 월성객사중수기(月城客舍重修記)를 보면 서휴(徐休)가 그 일을 주관하였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이 위록(僞錄) 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주가보라고 하는 것은 초계 주씨의 족보인데 거기에 사위 서귀남이라고 있어 우리 서씨가 그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귀남이란 이름은 이미 김보(金譜)에 보이니 이 기록은 곧 그 위본(僞本)을 습용(襲用)한 것이다(대구서씨 문헌록 상권에서 인용)라고 200년 전에 이미 거짓으로 판명된 기록을 인용하여 사실인양 주장하니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짐작하건데 大丘와 達城은 한 핏줄인 것 같으나 확실한 고증이 없으니 어찌하랴? 후일 확실한 문건이 나타날 때까지 추상적인 이야기로 세인들을 현혹하는 일을 삼가 해주길 바란다.

 

혹시 유전자 검사로 한 핏줄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奉事公 諱 彭呂 十六代孫 潤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