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철종(哲宗)

야촌(1) 2022. 12. 20. 15:12

작성일 : 2020. 10. 09. 22:13

 

▲철종 영정ⓒ 利用者:Eggmoon | CC BY-SA

 

■ 제25대 철종(哲宗)


◈생년 : 1831년(순조 31)
◈졸년 : 1863년(철종 14) 12월 8일
◈본명 : 이변(李昪), 이원범(李元範)
◈본관 : 전주(全州)

[목차]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왕위에 오른 강화도령
◈아저씨가 조카를 잇는다.
◈절정에 달한 삼정의 문란과 민란의 확산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다.
◈철종의 가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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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왕위에 오른 강화도령

철종은 1831년(순조 31)에 전계대원군의 서자로 태어났다.
전계대원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서자다.


전계군의 일가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와 사면을 반복했다. 전계군의 이복형인 상계군(常溪君)은 정조 때 홍국영의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도에 유배된 후 죽었고, 아버지 은언군은 신유박해(순조 1) 당시에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상계군의 부인)와 함께 사사되었다.

전계군 본인도 큰아들 회평군(懷平君)이 역모에 연루되어 옥사하는 바람에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전계군은 세 명의 부인으로부터 각각 아들 한 명씩을 낳았으며,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셋째 아들이 철종이다.

이름은 변(昪),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이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는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철종 세계도

ⓒ : https://blog.naver.com/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종사의 부탁이 시급한데 영묘조(英廟朝)의 핏줄은 금상(今上)과 강화에 사는 이원범뿐이므로 이를 종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광(㼅)의 셋째 아들이다." - 《헌종실록》 권 16, 헌종 15년 6월 6일

 

당시 이원범은 학문과는 거리가 멀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전혀 준비도 되지 않은 채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철종은 헌종이 죽은 지 이틀 만인 6월 8일에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그다음 날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당시 철종의 나이 19세였지만 친정을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순원왕후가 처음부터 철종을 왕위 계승자로 점찍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덕흥대원군의 종손인 이하전(李夏銓)으로 후사를 이을 생각이었다. 항렬상 이하전은 헌종의 조카뻘이었다.

 

그러나 이하전 주위에 벽파 세력이 많은 것을 염려한 안동 김씨 세력이 순원왕후를 설득해 후계자를 바꾸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만한 왕을 앉혀 놓고 풍양 조씨에게 빼앗겼던 권력을 되찾으려고 했다.

철종은 학식도 덕망도 부족한 왕이었다. 덕분에 궁정은 안동 김씨의 손에 좌지우지되었다.

 

철종은 1851년(철종 2)에 순원왕후의 친척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그가 철인왕후(哲仁王后)다.

이로써 안동 김씨는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며 세도정치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철종에게는 이 밖에 7명의 후궁이 있었다.

 

철인왕후와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궁인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가 철종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아저씨가 조카를 잇는다?

 

철종은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항렬로만 따지면 헌종의 아저씨뻘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왕통상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력은 철종을 순조의 아들로 삼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예조에서도 철종이 종묘에 읽을 축문에 순조를 훌륭하신 아버지라는 뜻의 '황고(皇考)'라 칭하고, 철종을 '효자(孝子)'라고 칭하게 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한 헌종의 생부인 익종(효명세자)에 대해서는, 영조가 경종에 대해서 훌륭하신 형님이란 뜻으로 '황형(皇兄)'이라고 하고 영조 자신을 '효사(孝嗣)라 칭한 것에 의거해 쓰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정하고 보니 철종이 헌종과 헌종비에 대한 축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또 생겼다.

이는 전대 왕을 잇는 왕통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어서 이를 둘러싼 논쟁이 펼쳐졌다. 이른바 기유예론(己酉禮論)이다.

 

먼저 풍양 조씨인 영의정부사 조인영(趙寅永)은 순조와 익종에 대해서는 예조의 의견대로 하되 헌종과 헌종비에 대해서는 "계승한 왕 신 아무는 아무에게 아룁니다(嗣王臣某昭告于)."라고 쓰자고 주장했다.

 

반면에 안동 김씨의 편에 있던 홍직필(洪直弼)이라는 학자는 제왕가는 대통을 잇는 것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아저씨가 조카를 잇고 형이 동생을 잇더라도 모두 부자의 도가 있는 것이 만고의 진리라고 하면서도, 친속(親屬)의 호칭에서는 마땅히 형제와 숙질의 호칭을 쓴다고 했다.

 

따라서 철종은 헌종에 대해서 훌륭하신 조카라는 뜻으로 '황질(皇姪)'이라 하고, 헌종비에 대해서는 '황질비(皇姪妃)'라 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인영의 주장은 국가의 왕통을 중시한 것이고, 홍직필의 주장은 가문의 혈통상 서열을 중시한 것이었다.

 

결국 수렴청정 중이던 순원왕후는 두 가지 의견을 절충해 '사왕신(嗣王臣)'의 칭호와 '황질', '황질비'의 칭호를 모두 쓰도록 했다. 그러나 예론 문제는 그리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1851년(철종 2) 6월에 헌종의 삼년상이 끝나갈 때 헌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고 대신 친(親)이 다한 진종의 신주를 영녕전으로 옮겨야 했다. 이때 안동 김씨 측의 좌의정 김흥근(金興根)과 학자 홍직필은 당연히 진종의 신주를 내와야 한다고 했다.

 

철종과 헌종이 친속으로는 숙질로 부르고는 있지만 왕통상으로는 철종이 헌종의 대통을 이었기 때문에 부자의 도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철종과 헌종 사이에 부자의 도리를 인정한다면 진종은 4대 제향 범위에서 벗어나므로 신주를 내오는 것이 맞았다. 이러한 의견은 대부분의 대신과 유학자 들의 의견과 일치했다.

 

그런데 영의정 권돈인(權敦仁)만은 의견이 달랐다.

그는 친속으로 볼 때 진종이 철종의 증조부이므로 4대 제향 범위에 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종의 신주를 내가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익종과 헌종을 대통에서 제외시키게 되었다.

안동 김씨 세력은 권돈인의 이러한 주장을 종통을 교란시키는 주장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풍양 조씨 세력 중 한 명이었던 권돈인과 이러한 주장을 뒤에서 조정한 김정희(金正喜)가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철종 대의 왕통과 관련한 예론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또한 이 예론의 승자인 안동 김씨 세력은 조정에 남아 있던 풍양 조씨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마음껏 세도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절정에 달한 삼정의 문란과 민란의 확산

 

철종은 1852년(철종 3)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독자적인 정치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항상 안동 김씨 세력의 눈치를 보면서 크고 작은 정사를 모두 그들의 뜻에 따라 처리했다.

 

일설에 의하면 철종이 점차 학식을 쌓고 정치적인 역량을 키우려고 하자 안동 김씨 세력이 일부러 철종에게 후궁을 계속 들여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철종은 주색에 빠진 채 점점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되었고, 안동 김씨 세력의 학정은 더욱 극에 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가운데 더욱 문란해진 삼정과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 거기에 자연재해로 인해 농사까지 망치게 되면서 백성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철종과 안동 김씨 세력은 선혜청을 통해 기근이 심한 지방에 돈을 풀어 구제를 시도하고 탐관오리들에 대한 징계를 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는 못했다.

 

1862년(철종 13), 마침내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전국적인 규모의 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민란은 2월 18일에 일어난 진주민란이었다.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경상도 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탐학이었다.

백낙신은 부임하자마자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농민들을 수탈했다.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백성들에게 그가 수탈해 간 액수는 약 4~5만 냥에 이르렀다.

 

여기에 진주목에서 그동안 관리들이 불법으로 횡령한 세금을 일시에 거둬들이려고 하자 관리들은 이것을 또다시 농가에 부담시키려고 했다. 이에 농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몰락한 양반인 유계춘(柳繼春) 등이 중심이 되어 거사를 도모하고 한글 격문을 내붙여 민란에 가담할 농민들을 모았다.

 

이들 봉기군은 스스로를 초군(樵軍)이라고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고 향리들을 잡아다 죽였다. 또한 부호를 공격해 재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조정에서는 박규수(朴珪壽)를 진주안핵사로 파견해 민란을 조기에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진주민란은 3개월이 지난 후에나 겨우 진정되었다. 한편 진주민란으로 충격을 받은 철종은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토로했다.

 

내가 이번 진주의 일에 대해 실로 개연(慨然)하고도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대령(大嶺) 이남은 옛날에 이른바 추로(鄒魯)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군현(群賢)들이 배출되었고, 풍속도 순후(淳厚)해 비록 집집마다 봉(封)할 만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탄식과 원망과 수심이 깊어 백성들이 잘 살아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지금의 이 거조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본심(本心)으로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첫째는 내가 부덕(否德)한 탓으로 도솔(導率)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지 못한 것이고,
둘째로는 백성을 다스리고 적을 막는 신하가 조가(朝家)에서 백성을 어린아이 보살피듯 하는 뜻을 잘 대양(對揚)하지 못한 탓이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얼굴이 붉어져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 《철종실록》 권 14, 철종 13년 3월 10일

 

그리고 이 사태를 수습하면서 억울하게 벌을 받는 백성이 없도록 할 것을 특별히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철종의 이러한 마음도 성난 민심을 달래지 못했고, 민란은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계속 번져나갔다.

 

한편 조정에서는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고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 41개조를 제정해 반포했다. 나름의 개혁 정책안이었다. 그러나 임시변통에 불과한 이 정책으로는 썩을 대로 썩은 삼정의 폐단을 시정할 수 없었다.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다.

 

철종에게는 부인이 8명이나 있었지만 후사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안동 김씨 세력은 자신들의 세도를 조금이라도 위협할 만한 종실은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한때 헌종의 후사로 거론되었던 이하전을 끝내 역모로 몰아 사사한 것에서도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이하전은 평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인가? 아니면 김씨의 나라인가?"라고 하며 안동 김씨 세력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그것이 그의 명을 재촉했다. 이렇듯 500년을 이어 온 이씨 왕실의 씨가 말라 가는 가운데 철종은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갑자기 왕위에 올라 결국은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지도 못하고 후사도 잇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어 버린 것이다.

 

이미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니 조선의 국운도 그렇게 서서히 기울어 갔다.

철종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예릉(睿陵)이다.

 

 

철종의 가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