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명 조식 선생 묘갈명(南冥曺植先生墓碣銘)
성운(成運) 찬(撰)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본래 크게 드러난 성씨로 대대로 훌륭한 인물이 많다고 일컬어졌다. 선대에 고려 태조 때 벼슬하여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이 된 휘 서(瑞)라는 이가 있었으니, 덕궁공주(德宮公主)가 그의 어머니이다.
그 후손이 이어져 창성하였고, 휘 은(殷)에 이르러 중랑장(中郞將)이 되었으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은이 휘 안습(安習)을 낳았으니 성균관 생원이다. 생원이 휘 영(永)을 낳았는데 벼슬하지 않았다.
영의 아들은 휘 언형(彦亨)이니 처음에 재예로 이조 정랑에 선발되었는데, 지조가 꼿꼿하여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고 벼슬은 승문원 판교에 그치고 졸하였다. 그의 부인은 이씨(李氏)이니 충무위(忠武衛) 이국(李菊)의 따님으로, 부녀자의 범절이 있어 남편의 뜻을 어김이 없었다.
공은 그 둘째 아들로, 식(植)이 이름이고 건중(楗仲)이 그 자이다. 태어날 때부터 영특하고 용모가 맑고 빼어났으며, 유년 시절부터 마치 어른처럼 거동이 조용하고 침착하여 또래들과 어울려 놀지 않았고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물건도 손에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부친 판교공(判校公)이 애지중지하여 공이 말할 때부터 안아서 무릎에 앉히고 시서(詩書)를 가르쳤는데 말을 하면 곧바로 외워서 잊지 않았다. 나이 8, 9세에 병들어 자리에 누워 있을 때 모부인(母夫人)이 근심하는 기색이 있자 공은 몸을 추스르고 기운을 내어 조금 나았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또 “하늘이 어찌 까닭 없이 사람을 세상에 냈겠습니까. 지금 제가 다행히 남아로 세상에 났으니, 하늘이 저에게 할 일을 맡겨 준 것이 반드시 있을 터입니다. 하늘의 뜻이 과연 여기에 있으니, 제가 어찌 오늘 갑자기 요절할까 근심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조금 성장해서는 두루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는데, 《좌전(左傳)》과 유종원(柳宗元)의 문장을 특히 좋아하였다. 이런 까닭에 글을 지으면 기이하고 엄하여 힘이 있었다. 경치를 시로 읊고 사실을 글로 기록할 때에는 애초에 뜻을 두지 않은 듯해도 문장이 엄격하고 뜻이 정밀하여 엄정하게 법도가 있었다.
나라에서 과거를 열어 선비를 뽑을 때 글을 지어 시관에게 올리자 시관이 그 글을 보고는 크게 놀라 세 번이나 2등, 3등으로 뽑았으니, 고문(古文)을 배우려는 자들이 그 글을 다투어 전송(傳誦)하며 법식으로 삼았다.
가정(嘉靖) 5년(1526, 중종21)에 판교공이 세상을 떠나자 공이 한양에서 상막(喪幕)을 받들어 와 고향 산에 안치하고 모부인을 모셔 와 봉양하였다.
공이 하루는 글을 읽다가 노재(魯齋) 허씨(許氏)의 “이윤의 뜻을 뜻으로 삼고 안연의 학문을 학문으로 삼는다.”라는 말을 얻고, 깜짝 놀라 깨닫고 분발하여 뜻을 가다듬어 육경과 사서 및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 주자(朱子)의 저술을 익히고 외우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력을 다하여 깊이 탐색하고 연구하였다.
학문은 지경(持敬)보다 긴요한 것이 없다고 여겨 주일(主一)에 공력을 쏟아 마음이 늘 깨어 혼미하지 않게 하여 심신을 수렴하였다. 학문은 과욕(寡慾)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여겨 극기(克己)에 힘을 다하여 마음속 사욕(邪慾)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 내어 천리(天理)를 함양하였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때도 경계하며 두려워하고 은미하고 혼자만 아는 곳에서도 반성하며 살폈다. 지식이 이미 정밀해졌는데도 더욱 정밀하게 하고 실행에 이미 힘썼는데도 더욱 힘을 다하여 자신에게 돌이켜 체험하고 실제로 실천하는 데 힘써 반드시 그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24세에 모부인 상을 당하여 부친의 묘소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지혜가 밝고 식견이 높아 나아가고 물러나는 기미를 잘 살폈다. 일찍이 세도가 쇠퇴하여 인심이 타락하고 풍속이 각박하여 대교(大敎)가 무너진 데다가, 어진 인재가 등용되기 어렵고 앙화의 기미가 숨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이때에 세도를 만회하고 세상을 교화할 뜻을 가졌으나 당시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끝내 자신의 학문을 펼쳐 보지 못했다. 이런 까닭에 공은 과거에 나아가 벼슬하려 하지 않고 자취를 거두어 산림에 은거하여 지내면서 정자를 지어 산해정(山海亭)이라 하고, 집을 지어 뇌룡사(雷龍舍)라고 하였다.
마지막에는 두류산(頭流山) 곁 산수가 좋은 골짜기에 들어가 작은 집을 지어 산천재(山天齋)라 이름하고 깊이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몇 년이 흘러 중종 때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 때 또 유일(遺逸)로 전생서 주부와 종부시 주부에 제수되고, 얼마 뒤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단성 현감에 제수되었을 때 상소하기를 “국사가 날로 잘못되고 인심도 이미 흩어졌으니, 전환의 기회는 구구한 정형(政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제수되자 병으로 사직하였다. 또 상서원 판관으로 불려 가 전전(前殿)에서 인대(引對)하였는데,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방도에 대해 묻자 대답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마음이 서로 미더워야 다스려질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학문의 방도를 묻자 대답하기를 “인주의 학문은 정치를 내는 근본이니, 그 학문은 마음으로 자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삼고초려(三顧草廬)한 일에 대해 묻자 대답하기를 “반드시 영웅을 얻어야 한나라 왕실의 부흥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세 번이나 찾아간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 칭찬하였다.
다음 날 향리로 돌아왔다. 융경(隆慶) 1년(1567, 선조 즉위년)에 금상이 즉위하여 소명(召命)을 내렸으나 사양하였고, 이어서 다시 소명을 내렸으나 또 사양하며 상소하기를 “‘구급(救急)’ 두 글자를 바치는 것으로 이 몸을 바치는 것을 대신하겠습니다.”라고 하고, 당시의 폐단 열 가지를 아뢰었다.
융경 2년에 소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또 봉사(封事)를 올려 “다스리는 도는 임금의 명선(明善)과 성신(誠身)에 있으니, 명선과 성신은 반드시 경(敬)을 위주로 합니다.”라고 하고, 아전이 농간을 부려 사리(私利)를 밝히는 일을 극력 진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종친부 전첨에 제수되었으나 또 사양하였다.
신미년(1571)에 큰 기근이 들어 임금이 곡식을 하사하니 글을 올려 사은하고, 인하여 긴 상소를 올려 진언하였는데 말이 시행되지 못하였으니, 소장의 내용이 너무 강직했기 때문이다.
임신년(1572)에 병이 깊어지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어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의원이 도착하기 전인 그해 2월 8일에 생을 마치니, 향년이 72세이다. 산천재 뒷산에 묘지를 정해 4월 6일에 장사 지냈다.
공은 천품이 영특하고 의표가 출중하였으며 엄숙하고 방정하며 강의(剛毅)하고 민첩하였다. 조행(操行)이 과감하고 확고하여 매번 법도에 맞았으며 눈으로는 음란한 것을 보지 않고 귀로는 남의 말을 엿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엄숙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안으로 항상 보존하고, 게으르고 태만한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늘 조용한 방에 홀로 거처하며 발이 대문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옆집에 사는 이웃조차 공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하였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새벽에 일어나 관을 쓰고 띠를 두르고서 자리를 바루고 시동(尸童)처럼 앉아 어깨와 허리를 꼿꼿이 하니, 바라보면 마치 그림 속의 형상이나 조각한 소상(塑像) 같았다.
책상을 정돈하고 책을 펴서 마음과 눈을 모두 책에 두어 묵묵히 읽고 깊이 생각하면서 입으로 소리 내어 읽지 않으니, 서재 안이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하였다.
위의(威儀)와 거동이 여유롭고 한아(閑雅)하여 절로 법도에 맞았으며, 비록 급작스럽고 경황이 없는 때라도 평소의 모습을 잃지 않으니 매우 의젓하였다. 공을 찾아온 손님들은 낯빛이 근엄하고 과묵하여 말수가 적은 것을 보고, 반드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무릎을 꿇으며 두려운 듯 공경하여 끝내 아무도 감히 함부로 말하거나 웃고 떠들지 않았다.
공은 집 안에서 장중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여 집안이 모두 엄숙하고 가지런했으니, 가까이서 모시는 집안의 여종들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지 않으면 감히 공 앞에 나아가지 못했고 공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남의 선한 행실을 들으면 마치 자신이 한 일처럼 기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났고, 남의 악한 행실을 들으면 혹시 한 번이라도 그를 마주칠까 염려하여 원수를 피하듯 하였다.
반드시 단정한 사람을 사귀되 그 사람이 벗할 만하면 신분이 낮은 사람일지라도 왕공(王公)같이 예우하고 공경하였으며, 그 사람이 벗할 만하지 않으면 벼슬이 비록 높더라도 하찮게 여겨 함께 앉는 것조차 수치로 여겼다.
이러한 까닭에 교유가 넓지 않았지만 공이 알고 지내는 사람은 학행과 문예가 있어 모두 당대의 명유(名儒)로 꼽을 만한 이들이었다.
공은 사람을 감식하는 안목이 매우 밝아서 남들이 자신을 숨기지 못하였다. 갓 벼슬에 나간 젊은이가 청반에 올라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공이 그를 한번 보고서 다른 사람에게 “그가 재주를 믿고 뽐내어 남을 업신여기는 것을 보니, 훗날 현능한 사람을 해치는 일이 이 사람에게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라고 하였다.
후일에 그 사람이 과연 높은 지위에 올라 흉당의 우두머리와 몰래 결탁하여 국법을 농락하고 위세를 부리며 사류들을 많이 죽였다. 또 글재주가 있지만 아직 급제하지 못한 선비가 있었는데, 그는 몰래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어진 사람을 원수처럼 여기는 자였다.
공이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그를 우연히 보고 물러나서 벗에게 “내가 그의 용모를 유심히 보고 그 사람됨을 알았으니, 모습은 마치 군자처럼 활달해 보이지만 속에는 남을 해치려는 음험한 마음을 숨기고 있다.
그가 만약 높은 자리에 올라 뜻을 펴게 되면 선인(善人)들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고 하니, 그 벗이 공의 밝은 안목에 탄복하였다. 공은 국기(國忌)를 만나면 음악을 듣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루는 두세 명의 높은 벼슬아치가 공에게 절에 모여 술을 마시자고 하니, 공이 천천히 “모 대왕의 기일이 바로 오늘인데 제공이 어찌 우연히 잊으셨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실색하여 사과하고 즉시 음악과 고기를 거두라고 명한 뒤 술만 한두 순배 돌리고 자리를 파하였다.
천성이 매우 효성스럽고 우애로워 부모님 곁에 있을 때는 반드시 화순(和順)한 안색을 띠었고 선(善)으로 봉양하여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으며 부드러운 의복과 맛 좋은 음식을 잘 갖추어 드렸다.
어버이 상을 당해서는 슬퍼하고 사모하여 피눈물을 흘렸으며, 질대(絰帶)를 벗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궤연(几筵)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병에 걸렸어도 여막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물품을 잘 갖추되, 제수를 알맞게 조리하는 것과 제기를 깨끗이 씻는 것을 하인에게만 맡기지 않고 반드시 몸소 살폈다. 조문객이 오면 엎드려 곡하고 답배만 할 뿐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동복에게 분부하여 상(喪)이 끝나기 전에는 자질구레한 집안일로 와서 말하지 말게 하였다.
아우 환(桓)과 우애가 몹시 돈독하여 형제는 한 몸이라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여겨 한 담장 안에 같이 살면서 출입하는 문이 하나였고, 한 상에 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자며 화락하게 지냈다. 가산(家産)을 내어 가난한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남들의 상사(喪事)를 들으면 자기가 당한 것처럼 슬퍼하여 물과 불 속에 빠진 사람을 구해 내듯 서둘러 달려가고, 쭉정이를 버리듯 거리낌 없이 재물과 인력을 내주었다.
산야에 물러나 있으면서도 세상을 잊지 못하고 나라와 백성을 근심하여, 밝은 달이 뜬 맑은 밤이면 홀로 앉아 비가(悲歌)를 부르다가 노래를 마치면 눈물을 흘렸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공은 만년에 학문이 진보하고 조예가 깊어졌다. 사람을 가르칠 때는 그 자질에 맞게 가르쳤고, 질문을 받으면 반드시 그를 위해 의심나는 뜻을 자세히 분석해 주되, 그 말이 털끝만큼 미세한 부분까지 정밀히 분석하여 듣는 사람이 분명하게 다 알게 된 뒤에야 그쳤다.
공은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오늘날 배우는 사람들이 비근한 것은 버리고 고원한 것만 추구하는데, 배움은 애초에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고 어른에게 공손하고 어린이에게 자애로운 데서 벗어나지 않는다.
혹여 여기에 힘쓰지 않고 대뜸 오묘한 성명(性命)의 이치를 탐구하려 한다면, 인사(人事)상에서 천리(天理)를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서 끝내 마음으로 실득(實得)할 수 없으니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옛 성현의 초상화를 그려 자리 곁에 펼쳐 두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엄숙하게 공경심을 일으키기를, 마치 스승의 곁에서 귀로 듣고 얼굴을 마주하고 가르침을 받는 듯이 하였다.
일찍이 “학자는 잠을 많이 자서는 안 되니, 사색하는 공부는 밤에 더욱 전심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항상 금방울을 차고 다니며 ‘성성자(惺惺子)’라고 부르고 때때로 흔들어 정신을 일깨웠다.
글을 읽다가 긴요한 구절을 얻으면 반드시 세 번 되풀이해서 읽고는 붓을 잡아 기록해 두고 “학기(學記)”라고 이름하였다. 손수 〈신명사도(神明舍圖)〉를 그리고 명(銘)을 지었으며, 또 천도(天道), 천명(天命), 이기(理氣), 성정(性情), 도(道)에 나아가고 덕(德)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 그렸는데 학문의 단계를 자세히 배열한 것이다.
또 창과 벽과 문에 경(敬)과 의(義) 두 자를 크게 써서 배우는 자들에게 보이는 한편 자신을 일깨웠다. 그리고 병이 위중해지자 다시 경과 의 두 자를 들어 간절히 문생들에게 거듭 당부하였다.
공이 숨을 거둘 때에는 부녀자들을 물리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고, 죽음을 편안히 여겨 마음이 동요하지 않아 마치 잠들 듯이 평온한 모습으로 운명하였다. 성상이 사제(賜祭)하고 곡식을 부의로 내렸으며 사간원 대사간에 추증하였다. 통곡하며 함께 전송하는 벗과 제자, 종족과 외척 및 인척이 거의 수백 명이었다.
부인 남평 조씨(南平曺氏)는 충순위(忠順衛) 조수(曺琇)의 따님으로, 공보다 먼저 죽었고 아들과 딸 둘을 낳았다. 아들은 요절하였고, 딸은 만호(萬戶) 김행(金行)에게 시집가 딸 둘을 낳았는데, 첫째 사위는 김우옹(金宇顒)으로 지금 승문원 정자이며, 둘째 사위는 곽재우(郭再祐)로 한창 글공부하고 있다.
측실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은 차석(次石), 차마(次磨), 차정(次矴)이고, 딸은 마지막에 낳아 아직 어리다.
아, 공은 배움에 독실하고 실행에 힘써 학문을 닦고 덕을 향상시켜 정밀한 식견과 넓은 견문이 당대에 견줄 만한 사람이 드물었고 옛 현인에 견줄 만하여 후세 학자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그러나 혹자는 이를 모르고 공에 대해 다른 논평을 하니, 어찌 지금 사람들에게 굳이 알아주기를 바라겠는가. 다만 백세 뒤에 알 사람이 알아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나는 외람되게 벗의 반열에 있으면서 가장 오래 종유하여 전후로 공의 덕행을 보았기 때문에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한 점을 알고 있다. 이는 모두 눈으로 본 것이지 귀로 들은 것이 아니니 믿을 만한 기록이다. 사(辭)는 다음과 같다.
하늘이 덕을 부여하시니 / 天與之德。
어질고도 강직했어라 / 旣仁且直。
자신에게 거두어들여 / 斂之在身。
간직한 바가 넉넉하였네 / 自容則足。
남에게 베풀지 못해 / 不施于人。
은택이 두루 미치지 않았으니 / 澤靡普及。
시운인가 천명인가 / 時耶命耶。
백성들 복이 없음을 슬퍼하노라 / 悼民無祿。
[註解]
[주01] 남명(南冥) 선생(先生) : 조식(曺植, 1501~1572)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이다.
[주02] 冥 : 대본에는 ‘溟’으로 되어 있다. 《남명집(南冥集)》 권4 〈보유(補遺) 행장(行狀)〉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이하의 ‘冥’도 동일하다.
[주03] 나라에서 …… 뽑았으니 : 조식은 21세 때인 1521년 동당시(東堂試)에서 세 번 합격하였다. 《无悶堂集 卷5 南冥先生年譜》
[주04] 노재(魯齋) …… 말 : 노재는 원(元)나라 학자 허형(許衡)의 호이다. 조식이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이윤의 뜻을 품고 안연의 학문을 배워, 세상에 나가서는 행함이 있고 물러나 처해서는 지킴이 있어야 한다. 대장부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志伊尹之志, 學顔淵之學, 出則有爲, 處則有守. 丈夫當如此.]”라는 허형의 말에 이르러 망연자실하여 비로소 고인의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東岡集 卷17 南冥先生行狀》
[주05] 일찍이 …… 알았다 :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를 가리킨다.
[주06] 단성 …… 상소하기를 : 조식의 상소는 《명종실록》 10년 11월 19일 기사에 보인다.
[주07] 상서원 …… 하니 : 《명종실록》 21년 10월 7일 기사에 보인다.
[주08] 융경(隆慶) …… 하고 : 1567년 조식과 성운 등을 불러들이라는 전교가 있었다. 조식은 두 번의 소명에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고서 ‘구급(救急)’ 두 글자를 올려 제 몸을 대신 바친다고 하고, 또 완급과 허실을 분간하여 조치를 취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宣祖修正實錄 卽位年 10月 5日》
[주09] 당시의 …… 아뢰었다 : 1568년 시무(時務)에 대해 건의한 〈무진봉사(戊辰封事)〉를 가리킨다. 《宣祖實錄 1年 5月 26日》
[주10] 명선(明善)과 성신(誠身) : 사리를 분명히 아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마음에 거짓이 없고 성실한 상태를 성(誠)이라 한다. 《중용장구》 제20장에 “선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몸을 성실하게 하지 못한다.[不明乎善, 不誠乎身矣.]”라고 하였는데, 이를 명선과 성신으로 요약하여 명선은 지공부(知工夫), 성신은 행공부(行工夫)라고 한다.
[주11] 신미년에 …… 진언하였는데 : 조식은 하사해 준 식물(食物)에 대해 사은하고, 같은 날 이어 사직장(辭職狀)을 올리면서 당시의 폐단에 대해 간언하였다. 간언한 글은 《남명집(南冥集)》 권2에 〈사선사식물소(謝宣賜食物疏)〉와 〈신미사직승정원장(辛未辭職承政院狀)〉으로 실려 있다. 《宣祖實錄 4年 5月 15日》
[주12] 선(善)으로 봉양하여 : 녹봉이 아닌 선한 마음으로 어버이를 봉양했다는 뜻이다. 송(宋)나라 윤돈(尹焞)이 진사에 응시하려 할 때, 그의 어머니가 “나는 네가 선으로 봉양할 줄 알았지 녹으로 봉양하려는 줄 몰랐다.[吾知汝以善爲養, 不知汝以祿養.]”라고 하니, 진사에 응시하기를 그만둔 데서 온 말이다. 《宋名臣言行錄 外集 卷9 尹焞》
[주13] 학기(學記) : 조식 사후에 5권 2책으로 발간된 《학기유편(學記類編)》을 가리킨다.
[주14] 명(銘) : 《남명집》 권1의 〈신명사명(神明舍銘)〉을 가리킨다.
[주15] 천도(天道) …… 그렸는데 : 《학기유편》에 실려 있는 〈태극도(太極圖)〉, 〈삼재일태극도(三才一太極圖)〉, 〈이기도(理氣圖)〉, 〈천리기도(天理氣圖)〉, 〈인리기도(人理氣圖)〉, 〈천도도(天道圖)〉, 〈천명도(天命圖)〉 등 24개의 학기도(學記圖)를 가리킨다.
대곡집 > 大谷先生集卷之下 / 碣銘
[原文]
南溟曺植先生墓碣 - 成運
曺故爲著姓。稱世有人。其先有仕高麗太祖時爲刑部員外郞諱瑞者。德宮公主其母也。其後相繼昌顯。至諱殷。爲中郞將。於公爲高祖。是生諱安習。成均生員。生員生諱永。不仕。其嗣曰諱彥亨。始以才藝。選爲吏曹正郞。狷介寡合。官止承文院判校以卒。其配李氏。忠武衛菊之女。有閫範。事君子無違德。公其第二子。植名而楗仲其字也。生而岐嶷。容貌粹然。自爲兒齒。靜重若成人。不逐輩流與戲。游弄之具。亦莫肯近其手。判校公愛之。自能言。抱置膝上授詩書。應口輒成誦不忘。年八九歲。病在席。母夫人憂形於色。公持形立氣。紿以小間。且告之曰。天之生人。豈徒然哉。今我幸。而生得爲男。天必有所與責我做得。天意果在是。吾豈憂今日遽至夭歿乎。聞者異之。稍長。於書無不博通。尤好左柳傳文。以故。爲文奇峭有氣力。詠物記事。初不似經意。而辭嚴義密。森然有律度。因國策士。獻藝有司。有司得對語大驚。擢置第二第三者凡三焉。學古文者爭相傳誦以爲式。嘉靖五年。判校公捐館。公自京師奉裳帷。安措于鄕山。迎歸母夫人侍養焉。公一日讀書。得魯齋許氏之言曰。志伊尹之志。學顏淵之學。惕然覺悟。發憤勵志。講誦六經四書及周程張朱遺籍。旣窮日力。又繼以夜。苦力弊精。硏窮探索。以爲學莫要於持敬。故用工於主一。惺惺不昧。收斂身心。以爲學莫善於寡欲。故致力於克己。滌淨査滓。涵養天理。戒懼乎不覩不聞。省察乎隱微幽獨。知之已精而益求其精。行之已力而益致其力。以反躬體驗脚踏實地爲務。求必蹈夫閫域。二十四年。丁母夫人憂。祔葬于先大夫墓左。公智明識高。審於進退之幾。嘗自見世衰道喪。人心已訛。風漓俗薄。大敎廢弛。又況賢路崎嶇。禍機潛發。當是時。雖有志於挽回陶化。然道不偶時。終未必行吾所學。是故。不就試不求仕。卷懷退居山野。名其所築亭曰山海。舍曰雷龍。最後得頭流山。入水窟雲洞。架得八九椽。扁曰山天齋。深藏自修。年紀積矣。在中廟朝。以薦拜獻陵參奉不起。明廟朝。又以遺逸。再除爲典牲宗簿主簿。尋遷丹城縣監。皆不起。因上章曰。國事日非。人心已離。其轉移之機。非在於區區之政刑。惟在於殿下之一心。其後拜司紙。以疾辭。又以尙瑞判官徵入。引對前殿。上問治亂之道。對曰。君臣情意相孚。可以爲治。問爲學之方。對曰。人主之學。出治之源。而其學貴於心得。又問三顧草廬事。對曰。必得英雄。可以圖復漢室。故至於三顧。上稱善。翌日還山。隆慶元年。今上嗣服。有旨召辭。繼有徵命。又辭。奏疏請獻救急二字。以代獻身。陳時弊十事。二年。被召辭。又上封事。言爲治之道。在人主明善誠身。明善誠身。必以敬爲主。因極陳胥吏姦利事。久之。受宗親府典籤又辭。辛未。大饑。上賜之粟。以書陳謝。因累章獻言。言不施用。辭甚切直。壬申。病甚。上遣醫治疾。未至。以其年二月八日終。享年七十有二。卜宅于山天齋後山。葬用四月六日。公天資英達。器宇高嶷。端嚴直方。剛毅精敏。操履果確。動循繩墨。目無淫視。耳無側聽。莊敬之心。恒存乎中。惰慢之容。不形于外。常潛居幽室。足不躡門墻之外。雖連棟而居者。罕得見其面。聽鷄晨興。冠頂帶腰。正席尸坐。肩背竦直。望之若圖形刻像。拂床開卷。心眼具到。默觀而潛思。口不作吾伊之聲。齋房之內。寂然若無人。威儀容止。舒遲閑雅。自有準則。雖在匆卒驚擾之際。不失常度。甚可觀也。賓侶之就省者。見公神色峻厲。簡默少言。必斂容曲膝。慄然敬畏。終莫敢與之闌語譁笑。其於家。莊以莅衆。閨庭之間。內外肅整。其室婢之備近侍者。不斂髮整髻。不敢進。雖其配偶之尊亦然。聞人之善。喜動於色。若己有之。聞人之惡。恐或一見。避之如仇。取友必端。其人可友。雖在布褐。尊若王公。必加禮敬。不可友。官雖崇貴。視如土梗。恥與之坐。以此交游不廣。然其所與知者。有學行文藝。皆當世名儒之擇也。藻鑑洞燭。人無能廋匿。有新進少年。踐淸班擅盛譽。公一見告人曰。觀其挾才自恃。乘氣加人。異日賊賢害能。未必不由此人。其後果登崇位。陰結凶魁。弄法行威。士類殲焉。又有士子。有文才未第。其人陰猜媢嫉。仇視賢人。公偶見於群會中。退而語友人曰。吾察於眉宇之間。而得其爲人。貌若坦蕩。中藏禍心。如使得位逞志。善人其殆乎。友人服其明。每値國諱。不聆樂啖肉。一日。有二三名宦請公會佛寺張飮。公徐言曰。某大王諱辰。今日是也。諸公豈偶忘之耶。左右失色驚謝。亟命退樂去肉。酒一再行乃罷。天性篤於孝友。居親之側。必有惋容。以善爲養。悅其心志。衣柔膳甘。亦莫不具。其在服。哀慕泣血。不脫絰帶。晨夜。身未嘗不在几筵之側。雖遘疾。亦莫肯退就服舍。祭必備物。烹調之宜。滌拭之潔。不以獨任廚奴。必躬親視之。有弔慰者。必伏哭答拜而已。未嘗坐與之語。戈僮僕。喪未終。勿以家事宂雜者來諗。與弟桓友愛甚篤。以爲支體不可解也。同居一垣之內。出入無二門。合食共被。怡怡如也。捐家藏。分與兄弟之貧乏者。一毫不自取。聞人遭死喪之威。痛若在己。狂奔盡氣。如救水火。輕出貨力。猶棄粃粺。不能忘世。憂國傷民。每値淸宵皓月。獨坐悲歌。歌竟涕下。傍人殊未能知之也。公晩歲。學力益進。造詣精深。其敎人。各因其材而篤焉。有所質問。則必爲之剖析疑義。其言細入秋毫。使聽者洞然暢達而後已。嘗語學者曰。今之學者。捨切近趨高遠。爲學初不出事親敬兄悌長慈幼之間。如或不勉於此。而遽欲窮探性命之奧。是不於人事上求天理。終無實得於心。宜深戒之。畫古聖賢遺像。張在座隅。目存而心思。肅然起敬。如在函丈間耳受面命之誨。嘗曰。學者無多著睡。其思索工夫。於夜尤專。以故常自佩金鈴。號曰惺惺子。時振以喚醒。每讀書。得緊要語言。必三復已。乃取筆書之。名曰學記。手自圖神明舍。因爲之銘。又圖天道,天命,理氣,性情與夫造道入德。堂室糾級者其類非一。又於窓壁門。大書敬義二字。以示學者。且自警焉。病且亟。復擧敬義字。懇懇爲門生申戒。其歿也。斥婦人令不得近。安於死。心不爲動。怡然如就寢。上賜祭賻粟。贈司諫院大司諫。故友諸生宗人外姻號慟會送者幾數百人。夫人南平曺氏。忠順衛琇之女。先公沒。生男女二人。男早夭。女歸于萬戶金行。生二女。其壻之長曰金宇顒。今爲承文院正字。次曰郭再祐。方學文。旁室生三男一女。男曰次石,次磨,次矴。女最後生。幼。嗚呼。公篤學力行。修道進德。精識博聞。鮮與倫比。亦可追配前賢。爲來世學者宗師。而或者之不知其論有異焉。然何必求知於今之人。直百世以俟知者知耳。運忝在交朋之列。從游最久。觀德行於前後。亦有人所不及知者。此皆得於目而非得於耳。可以傳信。其辭曰。
天與之德。旣仁且直。斂之在身。自容則足。不施于人。澤靡普及。時耶命耶。悼民無祿。<끝>
대곡집 > 大谷先生集卷之下 / 碣銘
'■ 보학 > 묘갈명,묘비,묘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율곡 이 선생 묘표(栗谷李先生墓表) (0) | 2022.06.04 |
---|---|
경은 이맹전 묘갈명 병서(耕隱李孟專墓碣銘 幷序) (0) | 2022.06.02 |
일두 정여창 선생 묘표명 병서 (0) | 2022.05.31 |
서산선생문집 제18권 - 묘갈명(墓碣銘) (0) | 2022.05.15 |
진산부원군 강맹경의 비음기/묘비명/유허비명 (0) | 2022.05.03 |